요제이 천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제이 천황은 869년에 태어나 876년 일본 천황으로 즉위했으며, 세이와 천황의 아들이다. 8세의 나이로 정식 즉위했으나, 17세에 퇴위했다. 퇴위 후 와카에 재능을 보였으며, 《고센와카슈》에 작품이 수록되었다. 궁중 살인 사건과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와의 갈등으로 인해 퇴위했으며, 폭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능묘는 교토에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69년 출생 - 궁예
궁예는 신라 왕족의 서자로 추정되며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인물이며, 말년에 폭정을 일삼다 신하들에게 축출되어 사망했다. - 949년 사망 - 왕식렴
왕식렴은 고려 태조의 사촌 동생이자 개국공신으로 서경 지역을 다스렸고, 왕규의 난을 진압하여 정종 즉위에 기여한 후 광국익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서경 천도를 추진하다 사망하여 위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949년 사망 - 미로슬라브
미로슬라브는 945년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왕위 계승 분쟁으로 내전이 발생하고 달마티아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949년 암살당해 혼란을 야기했다.
요제이 천황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요제이 천황 |
로마자 표기 | Yōzei-tennō |
휘 | 사다아키라 (貞明) |
다른 이름 | 지묘인도노 (持明院殿) |
출생일 | 869년 1월 2일 |
출생지 | 소메도노 인 (染殿第), 헤이안쿄 (平安京) |
사망일 | 949년 10월 23일 |
사망지 | 헤이안쿄 (平安京), 레이젠인 (冷然院) |
능묘 | 가구라오카노 히가시노 미사사기 (神楽岡東陵) |
매장지 | 가구라오카노 히가시노 미사사기 (神楽岡東陵) |
시대 | 헤이안 시대 |
연호 | 조간, 간교 |
수도 | 교토 |
황거 | 헤이안 궁 |
재위 기간 | 876년 12월 18일 – 884년 3월 4일 |
일본 재위 기간 (음력) | 조간 18년 11월 29일 - 겐교 8년 2월 4일 |
즉위 | 877년 1월 20일 |
즉위 (일본 음력) | 겐교 원년 1월 3일 |
대례 | 877년 12월 26일 |
대례 (일본 음력) | 겐교 원년 11월 18일 |
원복 | 882년 1월 24일 |
원복 (일본 음력) | 겐교 6년 1월 2일 |
추호 | 요제이 천황 (陽成天皇) |
계보 | |
아버지 | 세이와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다카이코 |
배우자 | 스이시 내친왕, 교시 여왕 |
자녀 | 미나모토노 기요카게 모토요시 친왕 모토나가 친왕 모토토시 친왕 조시 내친왕 겐시 내친왕 모토히라 친왕 미나모토노 기요토 미나모토노 기요미 |
통치 | |
이전 군주 | 세이와 천황 |
다음 군주 | 고코 천황 |
기타 | |
![]() |
2. 계보
세이와 천황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나가라(藤原長良)의 딸인 뇨고(女御) 후지와라노 다카코(藤原高子)이다. 세이와 천황 양위 후에는 니조 황후라 불리기도 하였다. 요제이 천황의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누나로, 젊은 천황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6][7]
요제이는 양위한 뒤 아홉 명의 황자를 얻었는데, 유명한 아들로는 가인(歌人)으로 이름을 날렸던 모토요시 친왕과 모토히라(元平) 친왕 등이 있다.[8] 모토히라 친왕은 요제이 겐지(陽成源氏)의 선조이다. 훗날 일본 무가의 동량이 되는 세이와 겐지는 실제로는 이 모토히라 친왕을 선조로 하는 요제이 겐지의 후손에 해당하지만, 후대에 '폭군'이라 불린 요제이 천황 대신 그의 1세대 전 사람인 세이와 천황에게 계보를 연결한 것이라는 설이 근년에 제시되고 있다.
고대 일본에는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라 불리는 네 개의 귀족 가문이 있었다. 그중 미나모토(源氏) 씨족은 겐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요제이 겐지(陽成源氏)는 57대 천황인 요제이 천황으로부터 계승되었다.
요제이 천황의 가계도 |
---|
세이와 천황의 장남. 어머니는 후지와라 노 요시나가의 딸, 황태후 후지와라 노 타카코(니조황후). |
자식: 다이고 천황부터 무라카미 천황 시대에 걸쳐 공경으로 봉해진 미나모토노 키요카게와 가인으로 알려진 모토요시 친왕. |
세이와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나가라(藤原長良)의 딸인 뇨고(女御) 후지와라노 다카코(藤原高子)이다. 세이와 천황 양위 후에는 니조 황후라 불리기도 하였다. 요제이 천황의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의 누나로, 젊은 천황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7]
3. 약력
869년에 태어나 3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태자로 책봉되었고, 876년 아버지 세이와 천황의 양위로 9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를 이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 세이와 상황과 어머니 다카코, 외삼촌이자 셋쇼(攝政)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협력하여 정무를 보았으나, 880년 세이와 상황이 사망한 후 모토쓰네와의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883년 8월부터 모토쓰네는 출사를 거부하게 된다.
퇴위 후, 요제이는 아홉 명의 황자를 얻었는데, 그중에는 가인(歌人)으로 유명했던 모토요시 친왕과 모토히라(元平) 친왕 등이 있다. 모토히라 친왕은 요제이 겐지(陽成源氏)의 선조로, 훗날 일본 무가의 동량이 되는 세이와 겐지는 실제로는 모토히라 친왕을 선조로 하는 요제이 겐지의 후손에 해당하지만, 후대에 '폭군'이라 불린 요제이 천황 대신 그의 1세대 전 사람인 세이와 천황에게 계보를 연결한 것이라는 설이 최근 제시되고 있다.
요제이는 만년에 와카(和歌)에 집중했다. 그의 유명한 와카는 강물의 흐름을 이미지로 겹쳐 그의 커져가는 사랑을 표현했다.[9]
3. 1. 즉위 과정
요제이 천황은 미숙한 어린 소년일 때 천황이 되었다. 태어난 지 3개월도 안 되었을 때 태자로 세워졌다가, 876년 11월 29일, 세이와 천황의 양위로 9세에 즉위했다.[11] 재위 초에는 아버지 세이와 상황과 어머니 다카코(高子), 셋쇼(攝政)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 천황의 백부)가 협력해 정무를 보았다.
883년 8월, 모토쓰네는 출근을 거부하는데, 최근 학설에 따르면 세이와 천황에게 두 딸을 입궁시킨 모토쓰네가 요제이의 원복(元服)에 즈음하여 또다시 딸을 입궁시키려던 계획을 태후 다카코가 거부했기 때문에 천황과 알력이 생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세이와 천황이 양위시 내렸던 조(詔)에서는 모토쓰네의 섭정을 요제이가 친정을 하게 될 때까지로 못박아 두었던 점을 볼 때, 882년의 천황 원복을 기회로 천황 친정으로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셋쇼에서 일단 물러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천황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880년 12월 세이와 상황이 임종할 때 태정대신 인선에 모토쓰네는 다섯 번이나 상표(上表)를 반복하였다. 이때는 아직 셋쇼로서의 지위가 그대로 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토쓰네는 이후 이듬해 2월까지 사저에 틀어박혀 일절 정무를 맡지 않고 정국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일본삼대실록》 간교 5년 2월 9일조) 또한 이 기간 중에 천황은 세이와 상황의 유지를 참작해 모토쓰네를 종1위로 승진시키기도 했다.(《일본삼대실록》 간교 5년 1월 15일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본질은 셋쇼 모토쓰네와 천황의 대립이 아니라 '셋쇼' 모토쓰네와 '국모(國母)'인 다카코(모토쓰네의 누이동생) 남매간의 권력 싸움이며, 다카코에 의한 아리와라노 후미코(在原文子,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조카딸이자 세이와 천황의 후궁)의 중용을 포함한 그녀의 모토쓰네를 경시하는 여러 행동의 결과, 모토쓰네가 자신의 직임까지 내버려가면서까지 다카코와 요제이 두 모자를 배제하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883년 11월, 궁중에서 천황의 유모였던 기노 마타코(紀全子)의 아들 미나모토노 스스무(源益)가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일본삼대실록》 간교 7년 11월 10일조). 궁중에서의 살인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마침내 모토쓰네에 의해 퇴위를 재촉당한 요제이는 이듬해 2월에 퇴위하기에 이른다(다만 표면상으로는 병에 의한 자발적 퇴위였다).
요제이 천황의 폭군설에 대해서는 퇴위 당시 연령이 17세(만 15세)였고,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의문점도 많아, 천황을 폐위하고 자신의 의향대로 조종하기 쉬운 고코·우다를 옹립한 모토쓰네의 죄를 덮기 위한 작위적인 서술이라는 견해도 있다.
3. 2.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와의 갈등
요제이 천황은 어렸을 때 즉위하여, 초기에는 아버지 세이와 상황, 어머니 다카코(高子), 외삼촌이자 섭정(攝政)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가 협력하여 정무를 보았다. 그러나 元服|간푸쿠|원복일본어을 치른 이듬해인 883년 8월부터 모토쓰네는 출근을 거부했다.
최근 학설에 따르면, 세이와 천황에게 두 딸을 입궁시킨 모토쓰네가 요제이 천황의 원복을 계기로 딸 가요시코(佳美子) 또는 아쓰코(溫子)를 입궁시키려 했으나, 태후 다카코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천황과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20] 그러나 세이와 천황이 양위할 때 내린 조(詔)에서 모토쓰네의 섭정 기간을 요제이 천황이 친정할 때까지로 명시했기 때문에, 882년 천황의 원복을 계기로 모토쓰네가 섭정에서 물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관계 악화로 단정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21]
하지만, 880년 12월 세이와 상황이 임종할 때 태정대신(太政大臣) 인선 과정에서 모토쓰네는 단순한 관례를 넘어 다섯 번이나 상표(上表)를 반복했다.[22] 이때는 섭정 지위가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2월까지 사저에 틀어박혀 정무를 보지 않아(《일본삼대실록》 간교 5년 2월 9일조) 정국을 혼란시켰다.[23] 이 기간 중 천황은 세이와 상황의 유지를 고려하여 모토쓰네를 종1위로 승진시키기도 했다(《일본삼대실록》 간교 5년 1월 15일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섭정 모토쓰네와 천황의 대립이 아니라, '섭정' 모토쓰네와 '국모(國母)'인 다카코(모토쓰네의 누이동생) 남매간의 권력 다툼이며, 다카코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의 조카딸이자 세이와 천황의 후궁인 아리와라노 후미코(在原文子)를 중용하는 등 모토쓰네를 경시하는 행동을 하자, 모토쓰네가 자신의 직임까지 버리면서까지 다카코와 요제이 천황 모자를 배제하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24]
그러나 산기(參議) 아리와라노 유키히라(在原行平)의 딸 후미코를 후궁으로 들여 두 황자녀를 둔 것은 세이와 천황이었다. 모토쓰네는 세이와 천황이 성씨를 가리지 않고 많은 여성을 입궁시켜 황자를 얻는 와중에, 친누이동생 다카코가 이미 세이와 천황과의 사이에서 사다아키라 친왕(요제이 천황), 사다야스 친왕(貞明親王), 아쓰코 내친왕(敦子内親王) 세 자녀를 두었음에도, 외가 쪽 신분이 낮은 딸 요리코를 입궁시켰다가 요리코가 황자를 낳지 못하자 다시 외가 쪽 신분이 낮은 가즈코(佳珠子)를 입궁시키면서 사다아키라 친왕과 다카코를 경시했다. 또한 요제이 천황 재위 중에는 단 한 명의 정식 왕비도 입궁하지 않았다.
3. 3. 궁중 살인 사건과 퇴위
元慶|간교일본어 7년(883년) 11월, 궁중에서 천황의 유모였던 기노 마타코(紀全子)의 아들 미나모토노 스스무(源益)가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25] 궁중에서의 살인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범인은 불명으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요제이 천황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고의든 사고든 요제이 천황 자신이 일으켰거나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까지 대다수 역사가들의 견해이다. 결국 모토쓰네에 의해 퇴위를 재촉당한 요제이는 이듬해 2월에 퇴위하게 된다.[25] (다만 표면상으로는 병에 의한 자발적 퇴위였다).[26]
요제이 천황의 폭군설에 대해서는 퇴위 당시의 연령이 17세(만 15세)였고 또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의문점도 많아, 천황을 폐위하고 자신의 의향대로 조종하기 쉬운 고코·우다를 옹립한 모토쓰네의 죄를 덮기 위한 작위적인 서술이라는 견해도 있다.[26] 또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그 범인을 요제이 천황으로 보는 것은 퇴위 후 행동이나 후세의 사료에 영향을 받은 추측에 불과하다는 비판과 함께, 사건 3일 후에 그동안 출사하지 않았던 모토쓰네가 궁중에 들어와 요제이 천황 측근인 하급 관료들을 숙청하려 했다는 점에 주목한 지적도 있다.[27]
다음은 요제이 천황의 퇴위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날짜 | 사건 | 내용 |
---|---|---|
元慶|간교일본어 7년 (883년) 11월 | 궁중 살인 사건 | 천황의 유모 기노 마타코(紀全子)의 아들 미나모토노 스스무(源益)가 궁중에서 맞아 죽음. 범인은 불명이나, 요제이 천황의 관여 의혹이 있음. |
元慶|간교일본어 8년 (884년) 2월 | 요제이 천황 퇴위 | 궁중 살인 사건의 여파로 모토쓰네의 압력을 받아 퇴위. 표면상으로는 병으로 인한 자발적 퇴위. |
3. 4. 퇴위 이후
요제이 천황은 간교 8년(884년) 2월, 표면적으로는 병을 이유로 자진 퇴위했으나, 실제로는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퇴위 당시 요제이 천황의 나이는 17세(만 15세)였다. 요제이 천황의 폭군설에는 의문점이 많으며, 모토쓰네가 자신의 의도대로 고코 천황과 우다 천황을 옹립하기 위해 조작한 서술이라는 견해도 있다.[14] 퇴위 후에도 고코, 우다, 다이고 천황 등은 요제이 천황을 경계했으며, 《일본삼대실록》과 《신국사》 편찬은 요제이 천황에 맞서 자신들의 황통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29]요제이 천황은 퇴위 후 와카에 재능을 보였으며, 여러 차례 노래 시합을 열기도 했다. 《고센와카슈》에 수록된 그의 노래는 훗날 《오구라 백인일수》에도 꼽혔다.
:"쓰쿠바네의 봉우리에서 떨어지는 미나노가와(みなの川)여 사랑이 쌓여서 연못을 이루는구나"(《오구라 백인일수》에서는 "淵となりぬる")
이 노래는 우다 천황의 여동생이자 요제이 천황의 비였던 스이시 내친왕에게 보낸 것이다.
요제이 상황은 퇴위 후 65년을 더 살았는데, 이는 레이제이 천황의 42년보다 훨씬 긴 기간이다. 《오오카가미》에는 신적강하했다가 아버지 고코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우다 천황을 가리켜 "저 자는 전에 나를 시중들던 자가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요제이 상황은 자신의 재종형제이자 황태자였던 아쓰히토 친왕(다이고 천황)보다 오래 살았으며, 스자쿠 천황, 무라카미 천황 등 고코계 황통의 계승을 모두 지켜보았다.
- '''889년''' (간표 1년 10월): 전 천황 요제이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았다. 궁궐에 들어와 신하들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악기 현으로 여자들을 교살한 뒤 시체를 호수에 던지거나, 말을 타고 사람들을 짓밟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다. 산으로 사라져 산돼지와 꽃사슴을 쫓기도 했는데, 신도에서 꽃사슴은 신의 사자로 여겨졌다.[15]
요제이 천황의 묘는 교토에 있는 기념 신사(''미사사기'')에서 숭배되며, 궁내청은 이 장소를 요제이 천황의 능묘로 지정하고 ''가구라가오카노 히가시노 미사사기''라고 공식 명칭을 부여했다.[16]
4. 연호
당시에는 길조를 이유로 연호를 짓던 전통이 바뀌어 좋지 않은 일의 영향을 제한하기 위해 연호를 선택하는 경우가 생겼다.[18]
5.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
비(妃) : 고코 천황의 황녀 야스코(綏子) 내친왕(?-925)[6][8] | |
비(妃) : 고코 천황의 황손녀이자 고레타다 친왕의 딸 고코(姣子) 여왕(女王)[6] | |
궁인(宮人) : 후지와라노 토오나가(藤原遠長)의 딸[6] | |
궁인(宮人) : 기노 기미(紀君)[6] | 제1황자 : 미나모토노 기요카게(源 淸蔭) (884-950) - 정3위 대납언(大納言). 요제이 겐지(陽成源氏)의 시조[6] |
궁인(宮人) : 도모씨(伴氏) - 도모노 야스히라(伴保平)의 딸[6] | 제6황자 : 미나모토노 기요미(源 淸鑒) (?-936) - 종3위 형부경(刑部卿)[6] |
궁인(宮人) : 사에키(佐伯)씨[6] | 제7황자 : 미나모토노 기요토오(源 淸遠) (?-996) - 형부경[6] |
6. 평가 및 영향
요제이 천황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버지 세이와 천황, 어머니 후지와라노 다카코(藤原高子), 외삼촌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모토쓰네와 갈등을 겪었고, 궁중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인해 퇴위하게 된다.[29]
퇴위와 관련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내용 |
---|---|
883년 (간교 7년 1월) | 10대 초반의 요제이 천황은 살아있는 개구리를 뱀에게 먹이로 주거나, 개와 원숭이를 싸움붙이는 것을 즐겼다. 또한 직접 범죄자들을 처형하기도 했으며, 화가 나면 칼을 사용하려 했다.[12] 관백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는 요제이 천황을 교정하려 노력했지만, 천황은 그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12] |
884년 (간교 8년 1월) | 천황은 사람들을 나무 위에 올라가게 한 뒤 창으로 찔러 죽게 하는 잔혹한 행동을 보였다.[13] |
884년 3월 4일 (간교 8년 2월 4일) | 모토쓰네는 말 경주를 구실로 천황을 궁궐 밖으로 유인한 뒤, 그의 광적인 행동을 이유로 폐위를 선언했다.[13] |
요제이 천황의 퇴위는 모토쓰네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고코 천황, 우다 천황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황통을 옹립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였다는 견해가 있다.[29] 퇴위 후에도 요제이 천황에 대한 경계는 계속되었으며, 이는 《일본삼대실록》, 《신국사》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29]이 있다.
요제이 천황은 와카에 재능을 보였으며, 《고센와카슈》, 《오구라 백인일수》에 그의 작품이 남아있다. 그의 와카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쓰쿠바네의 봉우리에서 떨어지는 미나노가와(みなの川)여 사랑이 쌓여서 연못을 이루는구나''」(百人一首에서는「''淵となりぬる''」)
이 와카는 우다 천황의 여동생이자 요제이 천황의 비였던 스이시 내친왕에게 보낸 노래이다.[31]
요제이 상황은 퇴위 후 65년을 더 살았는데, 이는 레이제이 천황의 재위 기간(42년)보다 훨씬 긴 것이다. 《오오카가미》에는, 한때 자신의 신하였던 우다 천황을 가리켜 "저 자는 전에 나를 시중들던 자가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8]
6. 1. 부정적 평가
요제이 천황은 미성숙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궁중에서 자신의 신하를 살해한 사건은 헤이안 시대 궁궐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14] 헤이안 시대에는 죽음이 가장 심각한 오염 행위로 여겨졌고, 천황은 신과 연결된 신성한 존재였기에 이러한 행위는 더욱 용납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14세기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기록에 따르면, 요제이 천황은 "폭력적인 성향"을 지녀 통치자로서 부적합하다고 묘사되었다.[14] 결국,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는 요제이 천황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당시 궁중 귀족들 사이에서도 필요하고 정확한 결정이라는 공감대를 얻었다.[14]
《일본삼대실록》에는 요제이 천황의 폭력적인 행동들이 기록되어 있다.
- '''883년''' (''간교 7년 1월''): 10대 초반의 요제이 천황은 살아있는 개구리를 뱀에게 먹이로 주거나, 개와 원숭이를 싸움붙이는 것을 즐겼다. 또한 직접 범죄자들을 처형하기도 했으며, 화가 나면 칼을 사용하려 했다.[12] 관백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는 요제이 천황을 교정하려 노력했지만, 천황은 그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12]
- '''884년''' (''간교 8년 1월''): 천황은 사람들을 나무 위에 올라가게 한 뒤 창으로 찔러 죽게 하는 잔혹한 행동을 보였다.[13]
- '''889년''' (''간표 1년 10월''): 퇴위 후에도 정신 질환이 재발하여 궁궐 신하들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악기 줄로 여자들을 교살하여 호수에 던지는 등의 행동을 했다. 또한 말을 타고 사람들을 짓밟거나, 산으로 들어가 산돼지와 꽃사슴을 사냥하기도 했다.[15] 신도에서 꽃사슴은 신의 사자로 여겨졌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토쓰네가 요제이를 폐위하고 고코, 우다를 옹립한 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6. 2. 영향
요제이 천황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버지 세이와 상황, 어머니 다카코(高子), 외척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모토쓰네와 갈등을 겪었고, 궁중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인해 퇴위하게 된다.[29]요제이 천황의 퇴위는 모토쓰네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고코, 우다 천황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황통을 옹립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였다는 견해가 있다.[29] 퇴위 후에도 요제이 천황에 대한 경계는 계속되었으며, 이는 《일본삼대실록》, 《신국사》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29]
요제이 천황은 와카에 재능을 보였으며, 《고센와카슈》, 《오구라 백인일수》에 그의 작품이 남아있다.
「''쓰쿠바네의 봉우리에서 떨어지는 미나노가와(みなの川)여 사랑이 쌓여서 연못을 이루는구나''」(百人一首에서는「''淵となりぬる''」)
이 와카는 우다 천황의 여동생이자 요제이 천황의 비였던 스이시 내친왕에게 보낸 노래이다.
요제이 상황은 퇴위 후 65년을 더 살았는데, 이는 레이제이 천황의 재위 기간(42년)보다 훨씬 긴 것이다. 《오오카가미》에는, 한때 자신의 신하였던 우다 천황을 가리켜 "저 자는 전에 나를 시중들던 자가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7. 능묘
능(미사사기)은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조토지 신뇨마치에 있는 '''가구라오카 동릉'''(가구라가오카노히가시노미사사기)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 상의 형식은 팔각구릉이다.
또한, 황궁의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황족들과 함께 천황의 령이 봉안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陽成天皇 (57)
http://www.kunaicho.[...]
[2]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4]
서적
Gukanshō
[5]
서적
Jinō Shōtōki
[6]
서적
Jinō Shōtōki
[7]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8]
서적
[9]
웹사이트
小倉百人一首の全首を見る
https://www.samac.jp[...]
[10]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1]
서적
[1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4]
서적
Jinō Shōtōki
[15]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6]
서적
[17]
웹사이트
Kugyō of Yozei-tennō
http://www.furugosho[...]
[18]
서적
Eccentric Spaces, Hidden Histories: Narrative, Ritual, and Royal Authority
https://books.google[...]
[19]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20]
서적
王朝の映像-平安時代史の研究
東京堂出版
[21]
서적
古代政治史における天皇制の論理
吉川弘文館
[22]
문서
河内説による上表回数の解釈
[23]
서적
日本三代実録
[24]
서적
平安京とその時代
思文閣出版
[25]
서적
日本三代実録
[26]
서적
[27]
서적
日本古代王権と貴族社会
八木書店
[28]
문서
帝紀,五十九代 宇多天皇
[29]
문서
遠藤慶太・細井浩志説
[30]
서적
平安朝歌合大成
同朋舎出版
[31]
문서
後撰,777番 百人一首,13番
[32]
문서
清和源氏 参照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