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타 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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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코타 기사부로는 일본의 법학자이자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했다. 아이치현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 조교수와 교수를 거쳐 국제법 학자로서 활동했다. 런던 해군 군축 회담 수행원으로 참여하고, 만주사변을 비판하는 등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참여하고, 도쿄 대학 법학부장, 일본 학사원 회원을 역임했다. 1949년 저서 『천황제』를 통해 천황제 부정론을 주장했으나, 최고재판소 장관 취임 후에는 이를 은폐하려 했다. 최고재판소 장관으로 재직하며 재판의 신속한 처리를 강조하고, 제3자 소유물 몰수 사건에서 위헌 판결을 내렸다. 말년에는 문화훈장을 수훈하고, 국제과학기술재단 회장을 역임했으며, 199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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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기사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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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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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요코타 기사부로 |
원어명 | 横田 喜三郎 (Yokota Kisaburō) |
출생일 | 1896년 8월 6일 |
출생지 | 아이치현 |
사망일 | 1993년 2월 17일 |
사망지 | 도쿄도 |
국적 | 일본 |
학력 |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
연구 분야 | 국제법 |
연구 기관 | 도쿄대학 |
지도 교수 | 다치사쿠타로 |
학위 | 법학 박사 |
작위 및 훈장 | 종2위, 훈1등 |
주요 저서 | 『천황제』 |
수상 | 훈1등 욱일대수장 (1966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1977년) 문화훈장 (1981년) |
경력 | |
직책 | 최고재판소 장관 |
임기 | 1960년 ~ 1966년 |
이전 | 다나카 고타로 |
이후 | 요코타 마사토시 |
2. 생애
1896년 아이치현에서 태어난 요코타 기사부로는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국제법을 연구하며 교수가 되었다.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 참여했고, 마르크스주의 독서회 활동, 만주사변 비판 등 진보적인 학자로서 활동했다.[3] 1945년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관여했다. 일본 학사원 회원, 유엔 국제법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일본 국제법 학계를 이끌었다.[3] 1949년에는 『천황제』를 저술하여 천황제 부정론을 주장했다.[3]
1960년 최고재판소 장관이 되어 재판의 신속한 처리에 힘썼으며, 제3자 소유물 몰수 사건에서 위헌 판결을 내렸다.[4] 말년에는 자신의 과거 천황제 부정론을 은폐하려 한 일화가 있다.[4] 1993년 사망했으며, 사후 종2위에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96년 아이치현에서 기모노(일본 옷) 장사를 하며 농사를 짓는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고등 소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일을 도우면서 독학으로 공부했고, 나고야 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1] 이후 제8고등학교를 거쳐 1922년 3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1] 졸업 후에는 모교에서 조수로 일하며 다치 사쿠타로에게서 국제법을 배웠다.[2]2. 2. 학문 활동 및 국제 활동
1924년 도쿄제국대학 조교수, 1930년 교수로 임용되었다.[3] 런던 해군 군축 회담 일본 정부 대표단 수행원으로 참가하여 와카쓰키 레이지로를 보좌했다.마르크스주의 독서회인 베를린 사회과학연구회에 참여했다.[3] 1931년 만주사변을 자위권 범주를 일탈한 것이라 비판하여 군부의 미움을 샀다.[3] 1930년~1931년 『국가학회 잡지』에서 한스 켈젠의 순수법학을 옹호하며 미노베 다쓰키치와 논쟁을 벌였다.[4]
1945년 9월 「국제재판의 본질」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번역 책임자로 참여, 재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948년 12월 13일 도쿄 대학 법학부장이 되었고, 1949년 10월 일본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1949년 『천황제』를 통해 천황제 부정론을 적극 제창했다.
1957년 3월 도쿄 대학 교수에서 퇴직, 1961년까지 유엔 국제법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5월 도쿄 대학 명예 교수 칭호를 받았다.
1958년 8월 1일 일본 유네스코국내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59년 10월 1일 부위원장이 되어 1961년까지 재직했다.
2. 3. 최고재판소 장관 시절
1960년 최고재판소 장관에 임명되었다. 취임식에서 법정의 질서 유지와 재판의 촉진을 강조했다.[3] 전임 장관인 다나카 고타로 시절 부상했던 최고재판소 기구 개혁안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요코타는 "애초에 개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사건 처리가 늦어지기 때문이다. 빨리 처리하면 문제는 자연 소멸한다"라며 최고재판소 재판관에게는 빠른 재판을, 조사관들에게는 빠른 준비 조사를 요구했다.[4] 이러한 노력은 효과를 보아, 요코타가 장관에서 퇴임할 무렵에는 대법정과 소법정에 계류된 사건이 60%나 감소했다.[4] 또한 최고재판소 재판관 인사에 관여하여, 내각이 인사에 관한 최고재판소의 의향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4]1962년 11월 28일 대법정 재판장으로서 제3자 소유물 몰수 사건에 판결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피의자 이외의 제3자의 소유물에 대해 고지·청문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해당 물건을 몰수하도록 규정한 「관세법」은 「일본국 헌법」 제29조 및 제31조에 위반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2. 4. 말년
최고재판소 장관 취임 후, 요코타 기사부로는 과거 자신이 천황제 부정론을 펼쳤던 것을 은폐하려 했다. 특히 자신의 저서 『천황제』를 도쿄도 내 고서점에서 모조리 수집하는 일화는 유명하다.[4]1966년 8월 최고재판소 장관에서 정년 퇴임했고, 같은 해 11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1975년 11월에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으며, 1977년 4월에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 1981년에는 문화훈장을, 1983년 12월에는 감수포장을 수훈했다. 1990년 10월에는 국제과학기술재단 회장이 되었다.
1993년 2월 사망했으며, 사후 종2위에 추서되었다.
3. 사상 및 평가
요코타 기사부로는 한때 마르크스주의 독서회(베를린 사회과학 연구회)에 참가하는 등 친사회주의적인 법학자로 알려져 군부에 미움을 받기도 했다. 1931년 만주 사변에 즈음하여, 자위권 범위를 벗어났다고 군부를 비판했다.[3]
3. 1. 순수법학 옹호 및 미노베 다쓰키치와의 논쟁
한스 켈젠의 순수법학을 옹호하며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에 반대하는 법실증주의적 입장을 취해, 미노베 다쓰키치와 논쟁을 벌였다.[4]3. 2. 국제법 연구 및 전시법 연구 배제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의 법적인 미비점을 인정하면서도, 재판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국제법의 혁명"이라고 논문에서 언급했다.[3] 도쿄 재판에서 재판의 번역 책임자를 맡았다. 그 후, 도쿄 대학 법학부 학장, 일본 학사원 회원 등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본의 국제법 학계를 이끌었으며, 일본의 국제법 연구에서 전시법 연구를 배제했다.3. 3. 천황제 부정론과 그 이후
1949년 저서 《천황제》에서 적극적으로 천황제 부정론을 주장했다.[3]1960년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하면서 "법정의 질서 유지와 재판의 촉진"을 강조했다. 최고재판소 기구 개혁 법안에는 부정적이었으며, 사건 처리가 늦어지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조기 처리에 힘썼다. 최고재판소 재판관과 조사관에게도 조사를 촉진시켜 사건 처리를 앞당기도록 했으며, 평의에서도 논의 정리나 중복 발언에 주의를 촉구했다. 그 결과, 요코타 퇴관 시에는 대법정 계속 사건은 60%, 소법정 계속 사건도 60% 감소했다. 또한 최고재판소 재판관 인사에 배려하여, 최고재판소의 의향을 존중하도록 내각에 요구하기도 했다. 1962년 11월 28일 제3자 소유물 몰수 사건 대법정 재판장으로서, 피의자 이외의 제3자 소유물에 대해 고지・청문의 기회를 주지 않고 해당 물건을 몰수할 수 있는 관세법 규정이 헌법 제29조 및 제31조에 위반된다는 위헌 판결을 내렸다.
만년에는 최고재판소 장관 등 정부 고관에 취임하자, 과거의 천황제 부정론을 자신의 지위에 불리한 것으로 여겨 은폐하려 했다. 특히 도쿄 시내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저서 《천황제》를 사 모아 자신의 과거 천황 부정론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4.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비고 |
---|---|---|---|
1932-1933 | 『국제법 강의』 제1-2권 | 유비각(有斐閣) | |
1933 | 『국제 판례 연구 제1』 | 유비각 | |
1933 | 『국제법』 | 이와나미 전서(岩波全書) | |
1933 | 『국제법』 | 유비각 | |
1941 | 『국제 재판의 본질』 |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 | |
1944 | 『국제법의 법적 성질』 | 이와나미 서점 | 국제법 논문총서 |
1944 | 『해양의 자유』 | 이와나미 서점 | 국제법학총서 |
1946 | 『국제 연합 연구와 해설』 | 정치교육협회 | 국민대학문고 |
1947 | 『전쟁의 포기』 | 국립서원 | 신헌법대계 |
1947 | 『국제 연합의 연구』 | 긴자 출판사 | |
1948 | 『세계 국가의 문제』 | 동우사 | |
1949 | 『세계 평화로의 길』 | 산세이도(三省堂) 출판 | 사회과 문고 |
1949 | 『전쟁 범죄론』 | 유비각 | 법학선서 |
1949 | 『천황제』 | 노동문화사 | 복각·뮤지엄 도서 (1997) |
1949 | 『세계의 진로』 | 실업교과서 | 사회과학신서 |
1949 | 『국제법의 기초 이론』 | 유비각 | |
1949 | 『안전 보장의 문제』 | 게이소 서방(勁草書房) | 법학총서 |
1950 | 『일본의 강화 문제』 | 게이소 서방 | |
1950 | 『조선 문제와 일본의 장래』 | 게이소 서방 | |
1950 | 『국제 연합』 | 유비각 | |
1951 | 『민주주의의 폭넓은 이해를 위해』 | 가와데 서방 | 시민문고 |
1951 | 『자위권』 | 유비각 | |
1952 | 『파리의 기적』 | 게이소 서방 | 수필 선집 |
1953 | 『국제법』 | 게이소 서방 | 「법학」총서 |
1955 | 『국제법학』 | 유비각 | |
1956 | 『세계 평화로의 길』 | 산세이도 출판 | 산세이도 백과 시리즈 |
1957 | 『순수 법학』 | 게이소 서방 | 법학선집 |
1963 | 『외교 관계의 국제』 | 유비각 | |
1967 | 『재판 이야기』 | 고단샤 현대신서(講談社現代新書) | |
1968 | 『위헌 심사』 | 유비각 | |
1970 | 『국제 판례 연구 제2』 | 유비각 | |
1974 | 『영사 관계의 국제법』 | 유비각 | |
1976-1977 | 『순수 법학 논집』 1-2 | 유비각 | |
1976-1978 | 『국제법 논집』 1-2 | 유비각 | |
1976 | 『국경 없는 여행』 | 요미우리 신문사(読売新聞社) | |
1976 | 『나의 일생』 | 도쿄 신문(東京新聞) | |
1979 | 『쓰여진 법률과 살아있는 법률 법률과 함께 60년』 | 도쿄 서적(東京書籍) | |
1979 | 『조합의 자유 그 국제적 규준과 일본』 | 유비각 | |
1981 | 『국제 판례 연구 3』 | 유비각 | |
1981 | 『법률은 약자를 위해』 | 쇼가쿠칸(小学館) | |
1984 | 『법률 산책』 | 쇼가쿠칸 | |
1987 | 『여생의 여생』 | 유비각 | |
1991 | 『세계와 함께 걷다』 | 요미우리 신문사(読売新聞社) | |
1994 | 『일본 평화론 대계 11 요코타 기사부로』 | 일본 도서 센터(日本図書センター) | |
1937 | 『이와나미 법률학 소사전』 |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 와가쓰마 사카에, 미야자와 도시요시 공편 |
1942 | 『국제 조약집』 |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 진가와 히코마쓰 공편 |
1947 | 『연합국의 일본 관리 그 기구와 정책』 | 다이가도 | |
1950 | 『법학』 | 킨소 서방 | 미야자와 도시요시 공편 |
1956 | 『국제 연합과 일본』 | 유히카쿠 | 오타카 아사오 공저 |
1959 | 『바다의 국제법』 | 유히카쿠 | 오다 시게루 공저 |
1957-1959 | 『국제법』 | 유히카쿠 | 다바타 시게지로, 타오카 료이치 공저 |
1960 | 『국제법』 | 세이린 서원 | 신 법률학 연습 강좌 |
1950-1992 | 『국제 조약집』 | 유히카쿠 | 고노 유이치 공편, 매년 신판 |
5. 번역
- 한스 켈젠, 『순수 법학』 (1935)[1]
참조
[1]
웹사이트
Kisaburo Yokota
https://www.findagra[...]
[2]
서적
皇室の本義
PHP研究所
[3]
뉴스
満州事変と国際連盟-寧ろ当然の干渉
帝国大学新聞
1931-10-05
[4]
간행물
国家学会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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