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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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차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이 용문산 일대의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제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전력 보강과 사기 회복을 위해 용문산 일대에 배치되었으며,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제6사단은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고, 이후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크게 격파하는 등 전선의 분단과 수도권의 위협을 막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국군의 용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댐을 파로호로 명명하여 승리를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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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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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용문산 전투 (파로호 전투) |
전역 | 6.25 전쟁 |
시기 | 1951년 5월 17일 |
장소 | 한반도 경기도 양평군, 파로호 |
결과 | 국련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국련군 |
지휘관 | |
지휘관 1 | 장도영 준장 |
지휘관 2 | 傳崇碧 (전숭벽)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 | 제6사단 |
병력 규모 2 | 제63군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규모 1 |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 |
사상자 규모 2 | 약 6만 명 |
관련 정보 | |
관련 전투 | 파로호 전투 발발 |
영향 | 중공군 춘계 공세 지연 |
2. 배경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사창리 전투 패배 후 용문산 일대에 배치되어, 사기 회복과 전력 보강, 명예 회복을 위해 정신 무장과 훈련에 전념했다.[1]
중공군 제63군은 1951년 2월 압록강을 건너 임진강 북쪽으로 이동, 4월 공세 때 설마리 전투에 참가 후 가평에서 제6사단과 대치했다.
1951년 5월 9일, 중·조 연합사령부는 5월 공세 계획을 확정, 제19병단에 중서부 전선 유엔군 견제 임무를 부여했다. 제63군은 용문산- 청계산 간 노네임선을 돌파, 광주-이천시 선 진출 명령을 받았다.
제6사단 주 저항선은 가일리 866고지로 북한강에서 약 12km~17km 거리였으며, 중공군이 북한강 도하 시 제6사단, 제2사단, 제7사단이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다.
2. 1. 전략적 요충지, 용문산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미 제9군단 중앙사단이었으며, 중공군의 4월 공세 당시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선 조정에 따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과 단월면, 가평군 설악면과 청평면 일대에 있는 해발 1157m의 용문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제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 떨어진 사기를 회복하고, 약화된 전력을 보강하는 한편, 명예 회복을 위해 정신 무장과 훈련에 전념했다[1]。제6사단이 배치된 주변은 용문산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827고지, 중미산, 통방산 등이 이어져 있고, 북동쪽에는 봉미산, 나산, 장락산, 559고지가 산맥을 이루어 홍천강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지형은 산악 기동을 주특기로 하는 중공군에게 유리했지만, 한국군은 관측과 사계가 제한되어 불리했다. 그러나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용문산을 점령하고 있어 중공군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경계 부대의 전투 전초선인 율업산과 미사리(용문산 북쪽 약 15km), 엄소리의 353고지(용문산 북쪽 약 10km), 왕방리의 427고지(용문산 북쪽 약 7km) 등은 토질이 비교적 양호하여 진지 구축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제6사단 정면의 중공군은 제19병단 제63군이었다. 제63군은 1951년 2월 압록강을 건너 임진강 북쪽으로 이동한 후, 4월 공세 당시 설마리 전투에 참가했고, 이후 가평으로 이동하여 제6사단과 대치했다.
1951년 5월 9일, 중·조 연합사령부는 5월 공세의 최종 계획을 확정하고, 제19병단은 중동부 전선의 주공 부대에 호응하여 중서부 전선의 유엔군을 묶어두고 견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63군은 용문산 일대의 제6사단을 공격하여 용문산-청계산 간의 노네임선을 돌파한 후, 광주-이천시 선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6사단의 주 저항선은 가일리 866고지로 북한강에서 약 12km~17km 떨어져 있었다. 중공군이 북한강을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할 경우, 제6사단뿐만 아니라 인접한 제2사단과 제7사단도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제6사단은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배치하고, 주 저항선인 용문산 북서쪽에 제19연대, 북동쪽에 제7연대를 배치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중공군의 공세가 임박하자 좌측 배후의 제2사단과 우측 배후의 제7사단은 주 저항선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제2연대가 돌출된 형태가 되었다。
제2연대는 비장한 각오로 방어를 준비했고, 제2대대는 북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율업산에, 제1대대는 홍천강을 조망할 수 있는 559고지에, 제3대대는 율업산 남쪽의 353고지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2. 2. 국군 6사단의 배치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미 제9군단 중앙사단이었으며, 중공군의 4월 공세 당시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한 후, 전선 조정에 따라 용문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사창리 전투에서 저하된 사기를 회복하고, 약화된 전력을 보강하는 한편, 명예 회복을 위해 정신 무장과 훈련에 전념했다。제6사단이 배치된 주변은,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면과 단월면, 가평군의 설악면과 청평면 일대에 해발 1,157m의 용문산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827고지, 중미산, 통방산 등이 연이어 있고, 북동쪽에는 봉미산, 나산, 장락산, 559고지가 산맥을 이루어 홍천강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지형은 산악 기동을 주특기로 하는 중공군에게 유리한 반면, 한국군에게는 관측과 사계가 제한되어 불리하게 작용했지만,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용문산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공군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경계 부대의 전투 전초선인 율업산과 미사리(용문산 북쪽 약 15km), 엄소리(엄소리)의 353고지(용문산 북쪽 약 10km), 왕방리의 427고지(용문산 북쪽 약 7km) 등은 토질이 비교적 양호하여 진지 구축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제6사단 정면의 중공군은 제19병단 제63군이었다. 제63군은 1951년 2월 압록강을 건너 임진강 북쪽으로 이동한 후, 4월 공세 당시 설마리 전투에 참가했고, 이후 가평으로 이동하여 제6사단과 대치했다.
1951년 5월 9일, 중·조 연합사령부는 5월 공세의 최종 계획을 확정하고, 제19병단은 중동부 전선의 주공 부대에 호응하여 중서부 전선의 유엔군을 묶어두고 견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제63군은 용문산 일대의 제6사단을 공격하여 용문산-청계산 간의 노네임선을 돌파한 후, 광주-이천시 선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6사단의 주 저항선은 가일리 866고지로 북한강에서 약 12~17km 떨어져 있었으며, 중공군이 북한강을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할 경우, 제6사단뿐만 아니라, 인접한 제2사단과 제7사단도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제6사단은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배치하고, 주 저항선인 용문산 북서쪽에 제19연대, 북동쪽에 제7연대를 배치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중공군의 공세가 임박하자 좌측 배후의 제2사단과 우측 배후의 제7사단은 주 저항선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제2연대가 돌출된 형태가 되었다。
제2연대는 비장한 각오로 방어를 준비했고, 제2대대는 북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율업산에, 제1대대는 홍천강을 조망할 수 있는 559고지에, 제3대대는 율업산 남쪽의 353고지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2. 3. 중공군 63군의 공격 계획
1951년 5월 9일, 중·조 연합사령부는 5월 공세의 최종 계획을 확정했고, 제19병단은 중동부 전선의 주공 부대에 호응하여 중서부 전선의 유엔군을 묶어두고 견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제63군은 용문산 일대의 제6사단을 공격하여 용문산-청계산 간의 노네임선을 돌파한 후, 광주-이천시 선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 전투 경과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의 뱃길이 연결되고 홍천-인제,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는 6사단 예하 2연대는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했다. 1대대와 3대대가 중공군의 물량 공세에 밀려 후퇴했지만, 2대대와 합류한 후 2연대는 후퇴하지 않고 진지를 지키며 항전했다. 중공군은 후퇴할 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자 당황했고, 2연대를 주력 부대로 오인하여 2개 사단에 예비 사단까지 투입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에도 2연대는 계속 저항했다. 고립된 2연대는 미군의 항공 폭격 지원을 받으며 힘겹게 진지를 사수했다. 5월 19일, 중공군은 2연대 1대대를 포위했지만, 1대대는 3시간의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나산으로 철수했다. 중공군은 2연대 2대대가 방어하는 울업산을 공격했고, 2대대는 427고지로 철수했다. 2연대의 방어선은 353고지-나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되었다. 2연대는 나산 부근 전초 진지를 지켰지만, 부상자가 속출하고 식량과 탄약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중공군은 오후 8시부터 총공격을 시작했다.
2연대는 1대대가 나산, 3대대가 353고지, 2대대가 427고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방어 진지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되었지만, 5월 20일까지 진지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1]
미군 제8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중공군의 공세가 둔화되자, 5월 19일 밤, 제1군단 및 제9군단에게 문산 - 포천 - 춘천을 잇는 토페카 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1] 제9군단으로부터 공격 명령을 받은 제6사단은 5월 20일 오전 5시를 기해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투입했다.[1]
제2연대를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은 예상치 못했던 2개 연대의 공격을 받자 홍천강 방면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제7연대와 제19연대는 제2연대와 합류하여 계속 중공군을 추격했고, 홍천강 남안까지 진출했다.
이 전투에서 제6사단은 중부 전선에 형성될 가능성이 있었던 중공군의 대규모 돌파구를 막음으로써, 전선의 분단을 막고 수도권에 미칠 위험성을 제거했다.[1] 특히 제2연대는 전면 방어 태세로 3일간 버티며, 중공군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주 저항선을 오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1. 5월 17일 ~ 18일: 중공군의 초기 공세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있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중요한 뱃길이었고, 홍천-인제,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중공군이 이곳을 점령하려 했다.5월 18일,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장도영 준장 휘하 6사단 2연대의 1, 2, 3대대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1대대와 3대대가 중공군의 물량 공세에 밀려 후퇴하여 전초부대였던 2대대와 합류했다. 2연대는 후퇴하지 않고 진지를 지키며 싸웠다.
국군이 후퇴하지 않고 저항하자 중공군은 당황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2연대를 주력부대로 오인한 중공군은 2개 사단에 예비사단까지 투입해 2연대를 총공격했다.
중공군 3개 사단이 2연대에 총공격을 가했지만, 2연대는 계속 몰려오는 중공군을 막아냈다. 고립된 2연대는 미군의 항공폭격 지원을 받으며 힘겹게 진지를 지켰다.
같은 날, 제63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2연대 정찰대는 중공군의 예상 도하 지점인 서천리와 강촌리 일대를 수색하던 중, 방하리 계곡에 집결하고 있는 중공군을 발견하고 격퇴했다. 해가 지자 중공군의 도하 공격이 본격화되었고, 다음날 18일에는 가정리, 각지에서 공격이 계속되었다.
제2연대는 제6사단과 제9군단의 5개 포병 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백병전을 벌여 공격을 격퇴했다.[1]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력 지원을 받으며 저항했고, 진지를 굳게 지켰기 때문에, 제63군은 한국군의 전초 진지를 주 저항선으로 오인하여 19일부터 제187, 188사단의 주력을 투입하여 돌파를 시도했다.[1]
3. 2. 5월 18일 ~ 20일: 2연대의 용전분투
1951년 5월 18일, 중공군은 1차 춘계 대공세 실패 후 동부전선의 용문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용문산은 국군 6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의 뱃길이 연결되고 홍천-인제,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는 6사단 예하 2연대는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했다. 1대대와 3대대가 중공군의 물량 공세에 밀려 후퇴했지만, 2대대와 합류한 후 2연대는 후퇴하지 않고 진지를 지키며 항전했다.
중공군은 후퇴할 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자 당황했고, 2연대를 주력 부대로 오인하여 2개 사단에 예비 사단까지 투입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에도 2연대는 계속 저항했다. 고립된 2연대는 미군의 항공 폭격 지원을 받으며 힘겹게 진지를 사수했다.[1]
5월 19일, 중공군은 2연대 1대대를 포위했지만, 1대대는 3시간의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나산으로 철수했다. 중공군은 2연대 2대대가 방어하는 울업산을 공격했고, 2대대는 427고지로 철수했다. 2연대의 방어선은 353고지-나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되었다. 2연대는 나산 부근 전초 진지를 지켰지만, 부상자가 속출하고 식량과 탄약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중공군은 오후 8시부터 총공격을 시작했다.
2연대는 1대대가 나산, 3대대가 353고지, 2대대가 427고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방어 진지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되었지만, 5월 20일까지 진지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1]
3. 3. 5월 20일 이후: 국군의 반격과 중공군 격퇴
1951년 5월 19일, 미군 제8군은 제1군단 및 제9군단에게 문산 - 포천 - 춘천을 잇는 토페카 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제9군단으로부터 공격 명령을 받은 육군 제6보병사단은 5월 20일 오전 5시를 기해 제7보병연대와 제19보병연대를 투입했다.제2보병연대를 포위하고 있던 중국군은 예상치 못했던 2개 연대의 공격을 받자 홍천강 방면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제7보병연대와 제19보병연대는 제2보병연대와 합류하여 중국군을 추격했고, 홍천강 남안까지 진출했다.
이 전투에서 육군 제6보병사단은 중부 전선에 형성될 가능성이 있었던 중국군의 대규모 돌파구를 막음으로써, 전선의 분단을 막고 수도권에 미칠 위험성을 제거했다. 특히 제2보병연대는 전면 방어 태세로 3일간 버티며, 중국군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주 저항선을 오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파로호 전투
장도영이 이끈 육군 제6사단은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크게 격파하여 2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2,617명의 포로를 냈다。 이 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댐을 야만적인 외적을 크게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로 파로호라고 부르기로 하고, 직접 휘호한 "파로호" 기념비가 현재도 남아있다.
4. 1. 화천댐 탈환 작전
한국군 제6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화천 진격에 참가하여 북한강 서쪽의 닭갈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하게 되었다[1]. 5월 25일 오전, 제6사단은 제2, 제7연대가 중공군의 방어 거점인 닭갈산-북배산의 고지군을 공격하는 동안 제19연대를 북배산 후방으로 우회시켜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제9군단은 제10군 작전 지역에서 벗어난 1만~1만 2000여 명의 부대와 다수의 차량, 야포가 장사진을 이루며 화천댐(파로호) 남쪽을 지나 화천으로 향하고 있다는 항공 정찰 보고를 받자, 제19연대는 지암리를 서쪽에서 공격하게 하고 제6사단 주력은 제7사단과 화천댐을 공격하기 위해 춘천에 집결시켰다.5월 27일, 제6사단 주력은 공격을 시작하여 중공군의 경미한 저항을 격퇴하고 구만리 발전소-병풍산을 잇는 캔자스 라인에 진출했다. 장도영이 이끈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중공군을 크게 격파하여 중공군에게 2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2,617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대한민국 측은 중공군 병사의 시신을 댐 호수에 수장하여 호수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상황을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동안 길가에 웅크리고 있는 중공군 병사를 쓰레기를 줍듯이 트럭에 태웠는데, 아군 소대 규모의 부대가 적 대대 규모의 부대를 포로로 잡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증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의 승리를 칭찬하기 위해 화천댐을 야만적인 외적을 크게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로 파로호라고 부르기로 했다. 현재도 직접 휘호한 "파로호" 기념비가 남아 있다.
5월 28일, 제6사단은 화천댐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주력의 후퇴를 확인했다. 목표인 화천 점령이 대폭 늦어져 중공군을 완전히 포위할 수 없었다.
4. 2. 중공군 대패와 파로호 명명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화천 진격에 참가하여 북한강 서쪽의 닭갈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했다[1]。5월 25일 오전, 제6사단은 제2, 제7연대가 중공군의 방어 거점인 닭갈산-북배산의 고지군을 공격하는 동안 제19연대를 북배산 후방으로 우회시켜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제9군단은 제10군 작전 지역에서 벗어난 1만~1만 2000여 명의 부대와 다수의 차량, 야포가 장사진을 이루며 화천댐(파로호) 남쪽을 지나 화천으로 향하고 있다는 항공 정찰 보고를 받자 제19연대는 지암리를 서쪽에서 공격하게 하고, 제6사단 주력은 제7사단과 화천댐을 공격하기 위해 춘천에 집결시켰다。5월 27일, 제6사단 주력은 공격을 시작하여 중공군의 경미한 저항을 격퇴하고 구만리 발전소-병풍산을 잇는 캔자스 라인에 진출했다。장도영이 이끈 제6사단은 중공군을 크게 격파하여 중공군에게 2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2,617명의 포로가 발생했다。대한민국 측은 중공군 병사의 시신을 댐 호수에 수장하여 호수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상황을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동안 길가에 웅크리고 있는 중공군 병사를 쓰레기를 줍듯이 트럭에 태웠는데, 아군 소대 규모의 부대가 적 대대 규모의 부대를 포로로 잡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증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의 승리를 칭찬하기 위해 화천댐을 야만적인 외적을 크게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로 파로호라고 부르기로 했다. 현재도 직접 휘호한 "파로호" 기념비가 남아 있다。
5월 28일, 제6사단은 화천댐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주력의 후퇴를 확인했다。 목표인 화천 점령이 대폭 늦어져 중공군을 완전히 포위할 수 없었다。
5. 결과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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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편제
{국군 및 UN군 | 중공군 |
---|---|
| |
5. 1. 1. 국군 및 UN군
연대장 대리: 송대후 중령 (5월 25일자로 연대장 취임과 동시에 대령으로 승진[1])
- ** 제7연대
연대장: 양종호 대령
- ** 제19연대
연대장: 임익순 대령
5. 1. 2. 중공군
傅崇碧|푸충비중국어- 제63군
- ** 제187사
- ** 제188사
- ** 제189사
6. 평가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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