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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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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인향교는 조선 정종 2년(1400)경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향교이다. 처음에는 "(구)구성면 마북리 구교동"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낡아 철거되었고, 현재 위치로 대성전이 이전되었다. 한국 전쟁 중 삼문이 소실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매년 8월 석전제를 봉행한다. 역사적 중요성과 유교 건축의 특징을 인정받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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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향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용인향교
용인향교
명칭용인향교 (龍仁鄕校)
종류향교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용인향교로 12-6
문화재 지정정보
지정 번호 (경기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88호
지정 일자2018년 9월 10일
지정 번호 (용인시)용인시 향토문화재 제1호 (해제)
지정 일자 (용인시)1986년 5월 31일
해제 일자2018년 9월 10일
소유 및 관리
소유자경기도향교재단
관리자용인향교
시대
시대조선 시대
기타 정보
웹사이트용인시 문화관광 - 용인향교
참고 자료문화재청

2. 역사

조선 정종 2년(1400년)경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용인향교는 본래 현재의 위치가 아닌 '(舊)구성면 마북리 구교동(舊敎洞)'에 있었다.[4] 당시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등을 갖춘 상당한 규모였으나, 고종 31년(1894년) 과거제도 폐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다.[4]

이후 지방 유림들의 뜻에 따라 대성전만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문묘 향사만 이어오다가,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삼문(三門)이 소실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4] 전쟁 이후 1960년대 명륜당 개축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보수와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2000년에는 충효교육관이 건립되었다.[4] 현재 용인향교는 교육 공간이 앞에, 제사 공간이 뒤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다.[4]

2. 1. 건립과 이전

용인향교(龍仁鄕校)의 건립 연대는 조선 정종 2년(1400년)경으로 추정된다.[4] 처음 세워진 위치는 현재의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해당하는 '(舊)구성면 마북리 구교동(舊敎洞)'이었다고 전해지며, '구교동'이라는 지명은 향교가 있었던 옛 터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4]

용인읍지에 기록된 당시 향교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4]

건물규모
대성전정면 3칸, 측면 3칸, 툇간 있음
신문(神門)3칸
전사청(典祀廳)3칸
제기고(祭器庫)3칸
명륜당정면 3칸, 좌우 및 전면에 퇴(退) 있음
동재·서재각 4칸
외삼문(外三門)3칸
홍살문1칸 (삼문 앞 위치)



고종 31년(1894년) 말 과거제도 폐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낡고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다.[4] 그러나 지방 유림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문묘(대성전)만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향사만 지내게 되었다.[4] 1911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대한제국 학부 소관으로 편입되면서 일부 전답(田結)이 정리되는 등 쇠락의 길을 걸었다.[4]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삼문(三門)이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4] 이후 명륜당은 1960년대에 개축되었고, 1971년에는 대성전의 기와 보수 및 좌우 박공판 교체가 이루어졌다.[4] 1986년 유림들의 성금으로 앞 계단 신설과 명륜당 지붕 기와 교체를 시작으로, 2003년까지 토담, 외삼문, 대성전 단청, 홍살문 등 여러 차례 보수가 진행되었다.[4] 2000년에는 충효교육관이 건립되었고, 2층은 유도회 사무실 및 관리사택으로 사용된다.[4]

현재 향교 건물은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앞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8월에 석전제를 봉행한다.[4]

2. 2. 시련과 복원

조선 정종 2년(1400)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용인향교는 본래 현재의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당시 (구)구성면 마북리 구교동(舊敎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교동'이라는 지명 자체가 향교가 있던 옛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용인읍지』에 따르면 당시 향교는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툇간이 있었고, 신문(神門) 3칸, 전사청(典祀廳) 3칸, 제기고(祭器庫) 3칸이 있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은 정면 3칸에 좌우와 전면에 퇴(退)가 있었으며, 동재와 서재는 각각 4칸, 외삼문은 3칸, 홍살문은 1칸 규모로 삼문 앞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4]

그러나 고종 31년(1894) 말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이어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향교는 시련을 맞게 된다. 낡고 퇴락한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지방 유림들의 뜻을 존중하여 대성전만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문묘 향사(享祀)만 받들어 오다가 1911년에는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구 대한제국 학부 소관으로 넘어가면서 일부 토지가 정리되는 등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4]

6.25 전쟁 중에는 폭격으로 삼문(三門)이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4]

전쟁 이후 향교 복원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명륜당은 1960년대에 개축되었고, 1971년에는 대성전의 기와를 보수하고 좌우 박공판을 교체했다. 1986년에는 유림들의 성금으로 앞에 계단을 새로 만들고 명륜당 지붕을 기와로 다시 잇는 등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2003년까지 토담, 외삼문, 대성전 단청, 홍살문 등 여러 차례 보수가 진행되었다. 2000년에는 충효교육관을 건립하여 현재 2층은 유도회 사무실 및 관리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향교 건물은 교육 공간이 앞에, 제사 공간이 뒤에 오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매년 8월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다.[4]

2. 3. 현대의 용인향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고 건물이 노후화되자, 대성전만이 현재 위치로 이전되어 문묘 향사만 이어왔다.[4] 6.25 전쟁 중에는 폭격으로 삼문(三門)이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4]

전쟁 이후, 향교 복원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명륜당은 1960년대에 개축되었고, 1971년에는 대성전의 기와를 보수하고 좌우 박공판을 교체하였다.[4] 1986년에는 유림들의 성금으로 대성전 앞 계단을 새로 만들고 명륜당 지붕 기와를 교체하였다.[4] 이후 2003년까지 토담, 외삼문, 대성전 단청, 홍살문 등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다.[4]

2000년에는 충효 교육관이 건립되었으며, 2층은 유도회 사무실 및 관리 사택으로 사용되고 있다.[4] 현재 용인향교의 건물은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8월에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다.[4]

3. 경기도 문화재자료 지정

용인향교는 조선 시대 1읍 1교 원칙에 따라 세워진 지방교육시설로서, 정몽주, 조광조 등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비중을 고려할 때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정된다. 역사적 중요성 외에도 전형적인 유교건축의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세 차례의 이건을 거친 후에도 현재의 위치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주요 유구의 배치와 대성전의 양호한 보존 상태 등을 고려할 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2]

4. 건축적 특징

용인향교의 건물 배치는 배움의 공간이 앞에 있고 제사 공간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따른다.[4]

조선 정종 2년(1400)경 처음 세워질 당시의 건물 규모는 '용인읍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4]

'''용인읍지'''에 기록된 초기 용인향교 건물 규모[4]
건물규모
대성전정면 3칸, 측면 3칸 (툇간 포함)
신문(神門)3칸
전사청(典祀廳)3칸
제기고(祭器庫)3칸
명륜당정면 3칸 (좌우, 전면 퇴(退) 포함)
동재(東齋)·서재(西齋)각 4칸
외삼문(外三門)3칸
홍살문1칸 (외삼문 앞에 위치)



고종 31년(1894)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낡은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문묘(대성전)만은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향사를 이어왔다. 이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일부 재산이 정리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4] 6.25 전쟁 중에는 폭격으로 삼문(三門)이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기도 했다.[4]

명륜당은 1960년대에 다시 지어졌으며, 1971년에는 대성전의 기와를 보수하고 좌우 박공판을 교체했다. 1986년에는 유림들의 성금으로 앞에 계단을 새로 만들고 명륜당 지붕을 새로 잇는 등 보수가 이루어졌고, 이후 2003년까지 토담, 외삼문, 대성전 단청, 홍살문 등이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2000년에는 충효교육관이 새로 건립되어 2층은 유도회 사무실 및 관리사택으로 사용되고 있다.[4] 현재 용인향교에서는 매년 8월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다.[4]

참조

[1] 간행물 경기도 문화재(유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 예고 공고 경기도 2018-04-30
[2] 간행물 경기도 문화재 지정 고시 경기도 2018-09-10
[3] 간행물 경기도 문화재 지정 정정 고시 경기도 2018-09-13
[4]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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