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우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번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역경》에 능통했으며, 손책, 손권 등을 섬기며 회계의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 미방과 우금, 손권에게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손권의 미움을 사 교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학문을 가르치다 사망했다. 우번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며,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진수는 그의 솔직한 성격과 손권의 관용 부족을 평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33년 사망 - 조유 (북해도왕)
    조유는 삼국시대 위나라 명제의 아들로, 양평왕에 봉해졌다가 북해왕으로 전봉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여 그의 죽음으로 양평왕과 북해왕의 봉국은 모두 폐지되었다.
  • 233년 사망 - 조잠
    조잠은 위나라의 인물로, 청룡 원년에 상왕에 봉해졌으나 그 해에 사망하여 시호는 민이며, 아들 조언이 뒤를 이었다.
  • 164년 출생 -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브루티아 크리스피나는 2세기 로마 제국의 황후로, 콤모두스와 결혼하여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으나, 간통 혐의로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 164년 출생 - 갈현
    갈현은 후한 말에서 오나라 시대의 도사로, 유교 경전과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좌자에게 도경을 전수받고 손권의 초빙을 거절한 채 산을 유람하며 수도 생활을 했으며, 북송과 남송 시대에 추존되어 각조종에서 조사로 여겨진다.
  • 회계 우씨 - 우세남
    우세남은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당 태종을 섬기며 홍문관 학사, 비서감 등을 역임했고, 지영에게 서예를 배워 해서에 능했으며, 『공자묘당비』, 『소인사비』, 문집 『우비감집』, 저서 『북당서초』, 『제왕략론』, 『필수론』 등을 남겼다.
  • 회계 우씨 - 우충
    우충은 오나라 손책 휘하 유번의 아들이며, 육기, 위천 등 인재를 등용하고 의도태수를 지내다 서진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용맹하고 절개있는 관리였다.
우번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우번
본명虞翻
중샹
로마자 표기Yu Fan
출생164년경
출생지위요, 저장 성
사망233년
사망지광시
직업수필가, 정치가, 작가
자녀우사
우중
우송
우빙
일곱 명의 다른 아들
관직
기두위기두위 (200년경 ~ 220년대경)
부춘장부춘장
공조공조
소속
초기 소속왕랑 → 손책손권

2. 생애

양주 회계군 여요현(현재의 닝보시 위야오시) 출신으로, 《역경》에 밝은 학자이자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조부 우광 대부터 맹씨역(孟氏易)을 가학으로 다루었다고 전해진다.[72]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처음에는 회계 태수 왕랑을 섬겼다. 손책에게 패한 왕랑을 따라 남쪽으로 도망갔으나, 왕랑의 권유로 회계에 머물렀고, 손책에게 초빙되어 벼슬에 나아갔다.

손책 밑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며 예장 태수 화흠을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등 공을 세웠다. 손책 사후에는 손권을 섬겼으며, 조조의 초빙을 거절하고 공융, 장굉 등과 교류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우번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유비를 배신한 미방관우에게 항복한 우금을 면전에서 비난하였다. 주군인 손권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간언하였는데, 이로 인해 손권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한번은 손권이 오나라 대국왕(吳大國王)이 되어 축하연을 열었을 때 술에 취한 척하고 술을 마시지 않자 손권이 분노하여 우번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기의 중재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후 손권과 장소가 신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고 "죽은 자들이 신선에 대해 논하고 있군요. (불로불사의) 신선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라고 조롱하여 교주로 좌천되었다.

교주에서는 수백 명의 문하생을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했고, 광효사에서 여생을 보냈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42]

2. 1. 초기 생애 및 왕랑 휘하에서의 활동

우번은 양주 회계군 여요현(현재의 닝보시 위야오시) 출신으로, 《역경》에 밝은 학자이자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조부 우광 대부터 맹씨역(孟氏易)을 가학으로 다루었다고 전해진다.[72]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형에게 면회를 요청한 손님이 자신에게는 나타나지 않자, 고사를 인용하여 그 손님의 식견 없음을 비웃는 편지를 보냈다. 이 일로 인해 우번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50]

처음에는 회계 태수 왕랑을 섬겨 공조에 임명되었다. 손책이 회계를 공격하려 할 때, 부친상을 치르던 중이었음에도 왕랑에게 면회를 청하고 저항하지 말고 피난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왕랑은 따르지 않고 손책과 싸웠으나 패배하여 해상으로 도망쳤다. 우번은 왕랑을 쫓아가 수행하며 보호했다.[51] 동부 호관의 관청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우번이 사자로 나서 설득하여 입성할 수 있었다. 이후 우번은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한 왕랑의 권유로 회계로 돌아가게 되었다.[52]

『유번별전』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랑이 우번을 예장군 태수 화흠에게 보내 손책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논의하게 했으나, 우번은 손책 군대가 회계군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돌아섰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즉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후관현으로 가서 왕랑을 만났고, 왕랑은 그를 집으로 보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했다.[10]

2. 2. 손책 휘하에서의 활동

우번은 손책이 회계군으로 돌아온 후 공로관으로 복직되었다. 손책은 그를 친구처럼 대했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11] 『강표전』에는 손책이 우번에게 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다. "나는 지금부터 그대와 함께 일하고 싶소. 내가 그대를 하급 군급 관리처럼 대했다고 말하지 마시오."[12]

손책은 사냥 여행을 매우 좋아했다. 우번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무리를 모아 방랑하는 사대부들을 제어하고 그들의 열렬한 충성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한 고조 황제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대가 편안한 옷차림으로 나설 때, 그대를 따르는 관리들은 보통 여행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고, 하인과 병사들은 피곤해 합니다.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지도자는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백룡이 재미로 물고기로 변했다가 어부 예저에게 갇혔고, 백사가 무모하게 행동하다가 유방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부디 더 조심하십시오." 손책은 대답했다. "그대의 말이 맞소. 하지만 때로는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앉아서 생각하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소. 그래서 통찰력과 영감을 얻기 위해 밖으로 나서는 것이오."[13]

『오서』에는 손책이 한 번은 산월에 대한 군사 원정을 이끌고 산월 추장을 죽인 후, 그의 부하들을 보내 남은 산월 세력을 추격하여 파괴하도록 하고 혼자 언덕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우번과 마주쳤고, 우번은 그에게 경호원들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손책이 경호원들에게 나머지 부대와 함께 산월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하자, 우번은 "이건 매우 위험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는 손책에게 말에서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지형은 깊고 위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으니, 걸어가면서 말을 인도하고 활과 화살로 무장해야 합니다. 저는 창을 잘 쓰고 앞장서겠습니다." 평지에 도착한 후, 손책은 다시 말에 올라 우번에게 물었다. "그대는 말이 없는데, 어떻게 할 거요?" 우번은 대답했다. "저는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 300 리를 이동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제 속도를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말을 달리게 하고 제가 걸어서 따라잡도록 해보세요." 그들은 주 도로에서 신호병을 만났다. 손책은 신호병의 나팔을 빼앗아 불었다. 그의 부하들은 나팔 소리를 알아차리고 그곳으로 달려와 그와 합류했다. 그들은 그 지역을 순찰하고 세 군을 안정시켰다.[14]

199년,[15] 손책이 군대를 이끌고 강하군(江夏郡; 현재의 후베이성 우한시 신저우구 일대)을 공격하려 할 때, 도중에 예장군(豫章郡)을 지나가면서 정복하려 했다. 그는 우번을 초청하여 만나 그에게 예장군 태수인 화흠을 설득하여 항복시키도록 부탁했다. 우번은 예장군으로 가서 화흠이 손책에게 대항할 가망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화흠은 다음 날 손책에게 항복했다.[16]

예장군을 점령한 후, 손책은 군대를 이끌고 오군(吳郡; 현재의 장쑤성 쑤저우시 일대)으로 돌아와 자신의 부하들에게 공헌에 대한 보상을 내렸다. 그는 우번에게, 한나라의 수도인 허(許; 현재의 허난성 쉬창시)에서 근무하는 많은 관리들이 강동에는 인재가 없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그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우번을 그곳으로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장굉을 보내는 것도 고려했지만, 여전히 우번을 더 선호했다. 우번은 거절하며 "저는 당신의 소중한 소유물과 같습니다. 당신이 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저를 원하면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손책은 웃으며 "나는 아직 완료해야 할 군사 작전이 있어서 아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너는 나의 소하와 같다. 나는 너를 공로를 세운 관리로 회계(會稽)로 돌려보내 내가 군을 지키는 것을 돕게 할 생각이다."라고 말했고, 우번은 사흘 후 회계군으로 돌아갔다.[17]

배송지(裴松之)는 《강표전》에서 우번이 화흠을 설득하여 항복시킨 이야기가 《오력》의 다른 기록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논평했다. 그는 화흠이 (《강표전》에서 암시하듯이) 왕랑보다 군사적으로 약하지 않았으며, 만약 그가 예장군 대신 회계군을 통제했다면 손책에게 저항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18]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다. 어느 날, 형에게 면회를 요청한 손님이 우번에게는 나타나지 않자, 우번은 편지를 보내 고사를 인용하여 그 손님의 식견 없음을 비웃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비범했기에 그 손님은 매우 감탄했다. 이 일로 인해 우번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50]

처음에는 회계의 왕랑을 섬겨 공조에 임명되었다. 왕랑이 손책과 적대하게 되어 회계에 손책군이 닥치자, 부친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왕랑에게 면회를 청하고 저항하지 말고 피난하도록 권했다. 왕랑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손책과 싸웠으나 패배하여 배를 타고 해상으로 도망쳤다. 우번은 왕랑을 쫓아가 수행하며 보호했다.[51] 동부 호관의 관청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장관으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우번이 사자로 나서 설득했기에 입성할 수 있었다. 우번은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한 왕랑의 권유로 회계로 돌아가게 되었다.[52]

손책에게 초빙되어 벼슬에 응했고[53], 계속해서 회계군의 사무를 담당했다. 손책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으나, 우번은 암살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간했다.[54]

우번은 손책의 원정에 종군하여 세 개의 군을 제압했다고 한다. 손책은 강하황조를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장화흠을 복종시키려 했지만, 병사를 잃지 않고 항복을 받기 위해 사자로서 우번을 파견했다. 우번은 앞서 패배한 왕랑과 화흠의 상황을 분석하고, 화흠 쪽이 불리하다는 것을 논한 다음, 화흠이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마지막 대면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화흠은 우번이 떠난 다음 날 손책에게 항복의 사자를 보냈다.[55] 손책은 예장을 정복하고 오군으로 귀환했다. 손책은 이미 장굉을 사자로 후한 조정에 파견했지만, 이전 수춘에서의 경험으로 중앙의 사람들이 동방의 사람을 경멸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변설에 능한 우번을 중앙에 파견하려 했지만, 우번이 그대로 손책을 보좌하며 남을 것을 자청했다.

2. 3. 손권 휘하에서의 활동

회계군 출신의 우번은 학식과 지모가 뛰어난 인물로, 처음에는 왕랑을 섬겼으나 손책에게 귀순하여 그의 밑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했다. 손책 사후에는 손권을 섬기며 조조의 초빙을 거절하고 공융, 장굉 등과 교류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우번은 손책의 사촌인 손호(孫暠)가 회계군을 공격하려 할 때, 그를 설득하여 물러나게 했다.[20][21]

손권은 우번을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했지만, 우번은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인해 손권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일탈적인 행동을 보여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단양군(丹楊郡; 현재의 중안현, 저장성) 경현(涇縣)에 감금되기도 했다.[26]

2. 3. 1. 형주 공방전 참여

199년[15], 손책강하군(江夏郡; 현재의 후베이성 우한시 신저우구 일대)을 공격하려 할 때, 도중에 예장군을 지나가면서 정복하려 했다. 그는 우번을 초청하여 화흠을 설득해 항복시키도록 부탁했다. 우번은 예장군으로 가서 화흠이 손책에게 대항할 가망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화흠은 다음 날 손책에게 항복했다.[16]

손책은 오군으로 귀환하기 전 우번을 후한의 수도 허(許; 현재의 허난성 쉬창시)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우번은 이를 거절하고 회계군으로 돌아갔다.[17]

이후 우번은 손책의 원정에 종군하여 세 개의 군을 제압했다. 손책은 강하황조를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장의 화흠을 복종시키려 했지만, 병사를 잃지 않고 항복을 받기 위해 사자로 우번을 파견했다. 우번은 앞서 패배한 왕랑과 화흠의 상황을 분석하고, 화흠 쪽이 불리하다는 것을 논한 다음, 화흠이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마지막 대면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화흠은 우번이 떠난 다음 날 손책에게 항복했다.[55]

219년[27], 손권의 장군 여몽유비의 장군 관우가 지키고 있던 남부 형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여몽은 병에 걸린 척하며 관우의 경계를 풀기 위해 건업(建業; 현재의 난징, 장쑤)으로 돌아갔다. 또한 손권을 설득하여 감금되어 있던 우번을 풀어주고 동행하게 했는데, 우번이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어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8]

형주 침공 당시, 여몽은 남군(南郡; 현재의 장링 현, 후베이성) 태수 미방의 항복을 받은 후, 즉시 군대에 도시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해변에서 축하 행사를 열었다. 우번은 여몽에게 "지금까지는 미방 장군만이 우리에게 항복했습니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항복할 의사가 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빨리 도시를 장악하지 않고 여기서 축하를 하고 있습니까?"라고 충고했다. 여몽은 우번의 충고를 따랐다. 사실 도시에는 매복 계획이 있었지만 여몽이 우번의 경고에 제때 귀를 기울여 성공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29]

관우가 패배한 후, 손권은 우번에게 점을 쳐서 결과를 예측하게 했고, 우번은 "그는 이틀 안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우번의 예측은 적중했다. 손권은 "당신은 복희만큼 훌륭하지는 않지만, 동방삭과 비슷하다."라고 말했다.[30]

강릉에는, 먼저 관우에게 패배하여 항복했던 조조군의 우금이 포로로 수감되어 있었다. 손권은 우금을 정중히 대우하고, 함께 말을 타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우번은 우금이 충의에 어긋나는 항복자라는 이유로 비난했다. 후에 손권이 우금을 술자리에 초대했을 때,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우금의 모습을 보고, 또 욕설을 퍼부었다. 손권은 이 일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60]

우번은 항복자인 미방에게도 엄하게 대했고, 배로 스쳐 지나갈 때나 군영 앞을 지나갈 때, 그 무정견함에 욕설을 퍼부었다. 미방은 부끄러워할 뿐이었다고 한다.[61]

2. 3. 2. 우금과 미방에 대한 태도

미방우금관우에게 항복한 후 손권의 보호를 받았다. 우번은 이들을 면전에서 비난하였다.[31][60]

우번은 강을 따라 항해하다가 미방을 만났는데, 미방의 배에 탄 선원들이 우번의 배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요청하자 "충성과 의리를 버렸으면서 어떻게 주군을 섬길 수 있겠는가? 이전 주군의 요새 두 곳을 잃고도 아직 '장군'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가?"라고 비난했다.[35] 또 다른 일화에서 우번은 수레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 있는 미방의 주둔지를 지나갔는데, 미방의 부하들이 문을 닫아 우번이 통과할 수 없게 하자 "문을 열어야 할 때는 닫고, 닫아야 할 때는 여는구나.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라고 격노했다. 미방은 우번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36][61]

번성 전투에서 조조의 장수 우금은 관우에게 사로잡혀 강릉에 포로로 수감되어 있었다. 손권이 남군을 장악한 후 우금을 석방하고 존경심으로 대했는데, 어느 날 손권이 말을 타고 여행을 할 때 우금에게 옆에 타라고 했다. 우번은 그것을 보고 "당신은 항복한 포로입니다. 감히 내 주군 옆에 타다니!"라고 소리치며 말 채찍으로 우금을 때리려 했다. 손권은 그를 말렸다.[31] 나중에 우금이 배를 타고 손권과 신하들과 함께 잔치에 참석했을 때,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자, 우번은 "불쌍한 척하는 거요?"라고 조롱했다. 손권은 우번에게 매우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31][60]

220년, 손권은 조비와 화해하고 우금을 위나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우번은 반대하며 우금을 처형하라고 촉구했다. 손권은 우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우금이 떠나는 날, 우번은 우금에게 "오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단지 내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나라에 머무는 동안 우번에게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금은 위나라로 돌아가서 우번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33]

2. 3. 3. 좌천과 유배

우번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주장을 관철하는 인물로, 유비를 배신한 미방관우에게 항복한 후 손권의 보호를 받은 우금을 면전에서 비난하였다. 주군 손권에 대해서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반드시 말했다. 손권이 오나라 대국왕(吳大國王)이 되어 축하연을 열었을 때, 술을 좋아한 손권은 자진하여 술잔을 돌렸는데, 우번은 취하여 쓰러진 척하며 마시지 않았다. 손권이 지나가자 우번은 태연히 일어났고, 이에 분노한 손권은 우번을 죽이려 하였다.[60]

이때 유기의 중재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60] 얼마 후 신선에 대하여 손권과 장소가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고는 '''"죽은 자들이 신선에 대하여 논하고 있군요. (불로불사의) 신선은 있을 리가 없을텐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조롱하였다.[37] 이러한 일이 거듭되자 손권은 우번을 교주로 쫓아내었다.[37] 우번은 교주에서 수백 명의 문하생들을 상대로 광효사에서 학문을 가르쳤다.[65] 그 후 다시는 중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42]

2. 4. 유배 생활과 죽음

우번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주장을 관철하는 인물로, 유비를 배신한 미방관우에게 항복한 후 손권의 보호를 받은 우금을 면전에서 비난하였다. 주군 손권에 대해서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반드시 말하였다.[72] 손권이 오나라 대국왕(吳大國王)이 되어 축하연이 벌어졌을 때, 술을 좋아한 손권은 자진하여 술잔을 돌렸는데, 우번은 취하여 쓰러진 척하여 마시지 않았다. 손권이 지나가자 우번은 태연히 일어났고, 이에 분노한 손권은 우번을 죽이려 하였다.

이때 유기의 중재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얼마 후 손권과 장소가 신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언뜻 듣고는 '''"죽은 자들이 신선에 대하여 논하고 있군요. (불로불사의) 신선은 있을 리가 없을텐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조롱하였다.[72] 이러한 일이 거듭되자 손권은 우번을 교주로 쫓아내었다. 우번은 교주에서 수백 명의 문하생들을 상대로 광효사에서 학문을 가르쳤다.[72] 그 후 다시는 중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72]

우번은 매우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으며, 술에 취해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37] 한번은 손권과 장소가 불사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번은 장소를 가리키며 "모두 죽은 사람들인데, 불사신이라고 부르다니. 이 세상에 어떻게 불사신이 있을 수 있겠소?"라고 외쳤다.[37] 이 시점에서 손권은 더 이상 우번을 용납할 수 없었고, 그를 교주로 유배시켰다.[37] 유배 생활 동안 우번은 강연을 열었고 수백 명의 제자를 두었다.[37] 그는 또한 ''도덕경'', ''논어'', ''국어''와 같은 고전에 주석을 달았다.[38] 정람, 서릉과 친하게 지냈다.[39]

''유번별전''에 따르면, 229년[40] 손권이 황제를 칭하고 동오를 건국한 후, 우번은 그를 축하하는 조서를 썼다.[41] 그는 또한 자신의 과거 실수에 대한 후회를 표명하고, 손권이 그를 건업 (현재의 난징, 장쑤성)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해주기를 희망한다는 점을 암시했다.[41]

우번은 10년 넘게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70세(만 나이로)에 사망했다.[42] 손권은 우번의 가족이 그의 유해를 유요현으로 가져가 매장하도록 허락했다. 그는 또한 그들을 유배에서 풀어주었다.[43]

우번은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국가의 일에 대해 매우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그는 손권이 군대를 바다 건너 요동 (중국 북동부)의 군벌 공손연을 공격하려는 생각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손권에게 직접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대에게 손권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부탁했지만, 여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44] 손권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우번이 자신의 결정을 반대하는 것에 분노하여 우번을 현재의 광시성에 위치한 맹령현(猛陵縣), 창오군(蒼梧郡)으로 더 멀리 유배시켰다.[44] 손권은 함대를 보내 공손연을 공격했지만, 폭풍으로 함대가 큰 피해를 입고 손실을 입자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는 우번을 기억하고 즉시 교주에 사자를 보내 우번을 건업으로 데려오도록 했지만, 유번은 이미 그 당시 사망했다.[45]

3. 학문적 업적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다. 어느 날, 형에게 면회를 요청한 손님이 우번에게는 나타나지 않자, 우번은 편지를 보내 고사를 인용하여 그 손님의 식견 없음을 비웃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비범했기에 그 손님은 매우 감탄했다. 이 일로 인해 우번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50]

역경을 연구하여 자신의 주석서를 도시에 있는 공융에게 보냈다. 공융 또한 우번의 업적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손권에게 귀환해 있던 장굉도 공융에게 편지를 보내 우번의 재능을 칭찬했다. 또한 오군의 육씨 일족이었던 육적이 아직 어렸지만, 우번은 그와 친하게 지냈다[58]

우번은 『역』에 주석을 달아, 이를 손권에게 상주했다. 또한 『노자』, 『논어』, 『국어』에 주석을 달아, 각각 널리 세상에 행해졌다.

우번은, 당시 불우했던 정람이나 서릉 같은 인물들을 인정하여, 그들이 출세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동진의 원굉의 「삼국명신서찬」(『문선』수록)에서는 위나라의 9명, 촉나라의 4명, 오나라의 7명이 명신으로 칭찬되었는데, 그 안에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66][67]

우번(虞翻)은 가전으로 전한 금문경학의 맹씨역(孟氏易)을 연구했으며, 팔괘와 십간, 오행, 방위를 조합한 상수역(象數易)을 전했다. 그의 저서 『역주(易注)』는 산일되었으나, 단편이 의 이정좌(李鼎祚)의 『주역집해(周易集解)』에 수록되었다. 또한 의 황석(黄奭)의 『한학당총서(漢學堂叢書)』, 손당(孫堂)의 『한위이십일가역주(漢魏二十一家易注)』에도 수집되었다. 청의 혜동과 장혜언(張惠言) 등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전한 금문역 복원의 발판이 되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우번

우번은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로, 후한 말과 삼국 시대의 역사를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 우번은 부사인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제43회에서 우번은 손권조조에 맞서 유비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한 것을 두고 제갈량과 논쟁을 벌인 오나라의 학자 중 한 명이었다.[48] 제75회에서 여몽이 형주를 침공했을 때, 우번은 관우의 부하 부사인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49]

소설에서 우번은 엄백호와 동맹하여 손책에게 저항하려는 왕랑에게 손책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여 노여움을 사 왕랑의 곁을 떠난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이때 재산은 모두 두고 갔지만 기르던 작은 새만은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좋은 곳으로 가거라"라며 하늘로 날려 보낸다. 또한 동습, 화타와 더불어 부사인의 친구로 묘사된다. 적벽 대전에서는 항복파 신하 중 한 명으로 제갈량과 논쟁을 벌이다 패한다.

5. 친족 관계

우번은 11명의 아들을 두었다.[46] 그 중 주목할 만한 아들로는 우사, 우중, 우송과 우빙이 있다. 그의 다른 아들들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우번의 가계도
이름비고
우사
우중
우송
우빙


6. 평가

우번은 곧은 성품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우번의 이러한 면모를 기록하며, 손권이 우번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한 것은 그의 너그럽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47]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정진한 우번은 형을 방문한 손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식견 없음을 비판했는데, 이 편지가 비범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50]

손책에게 초빙되어 벼슬을 시작한 우번은 역경 연구에 몰두하여 주석서를 공융에게 보냈다. 공융은 우번의 업적을 칭찬했고, 장굉 또한 공융에게 편지를 보내 우번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58]

그러나 우번은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으로 손권의 눈 밖에 나 단양군 경현으로 좌천되었다. 여몽은 우번의 재능을 아껴 형주관우 정벌에 그를 종군시키려 했고, 우번은 공안의 사임과 남군 태수 미방을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공을 세웠다.[59] 관우가 패주하자 손권은 우번에게 그의 운명을 점치게 했는데, 우번의 예언대로 관우는 이틀 안에 목이 베였다. 손권은 우번을 동방삭에 비견할 만하다고 칭찬했다.[60]

강릉에 포로로 잡혀 있던 우금에게 손권은 관대했지만, 우번은 우금을 충의에 어긋난 항복자라 비난하며 가혹하게 대했다. 손권은 이를 불쾌하게 여겼다.[60]

손권이 오왕이 된 후 축하 연회에서 우번은 취한 척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는 무례한 행동을 했다. 손권은 크게 분노하여 칼을 들고 우번을 위협했지만, 유기의 만류로 용서받았다.

우번은 항복한 미방에게도 엄격하게 대하며 욕설을 퍼부었고, 미방은 부끄러워했다.[61]

결국 우번은 지나치게 강직한 성격과 잦은 실수로 인해 교주로 좌천되었다.[62]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우번을 사면했지만, 우번은 남방에 머무르며 점술 연구에 몰두했다.[64]

우번은 광효사 (광둥성광저우시)에서 수백 명의 문하생을 가르쳤다. 손권은 나중에 우번을 떠올리고 소식을 물었지만, 우번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손권은 그의 자녀들을 등용하고 고향에 장사 지내도록 했다.[65]

우번은 정람, 서릉 등 불우한 인물들을 인정하여 그들이 출세하도록 도왔다.

동진의 원굉은 《삼국명신서찬》에서 위, 촉, 오의 명신들을 칭찬하며 우번의 이름을 언급했다.[66][67]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Jin Shu
[3] 서적 Sanguozhi
[4] 서적 Wu Shu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Sanguozhi
[7] 서적 Wu Shu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Yu Fan Biezhuan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Jiang Biao Zhuan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Wu Shu
[15] 서적 Zizhi Tongjian
[16] 서적 Jiang Biao Zhuan
[17] 서적 Jiang Biao Zhuan
[18] 서적 Sanguozhi
[19] 서적 Sanguozhi
[20] 서적 Wu Shu
[21] 서적 Kuaiji Dianlu
[22] 서적 Sanguozhi
[23] 서적 Sanguozhi
[24] 서적 Wu Shu
[25] 서적 Sanguozhi
[26] 서적 Sanguozhi
[27] 서적 Zizhi Tongjian
[28] 서적 Sanguozhi
[29] 서적 Sanguozhi
[30] 서적 Sanguozhi
[31] 서적 Sanguozhi
[32] 서적 Zizhi Tongjian
[33] 서적 Wu Shu
[34] 서적 Sanguozhi
[35] 서적 Sanguozhi
[36] 서적 Sanguozhi vol. 57
[37] 서적 Sanguozhi vol. 57
[38] 서적 Sanguozhi vol. 57
[39] 서적 Sanguozhi vol. 57
[40] 서적 Zizhi Tongjian vol. 71
[41] 서적 Yu Fan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7
[42] 서적 Sanguozhi vol. 57
[43] 서적 Sanguozhi vol. 57
[44]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7
[45]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7
[46] 서적 Sanguozhi vol. 57
[47] 서적 Sanguozhi vol. 57
[48] 서적 Sanguo Yanyi ch. 43
[49] 서적 Sanguo Yanyi ch. 75
[50] 서적 呉書
[51] 서적 呉書
[52] 서적 虞翻別伝
[53] 서적 江表伝
[54] 서적 呉書
[55] 서적 江表伝と呉歴
[56] 문서 張紘が使者として派遣されていたが、元々孫策は虞翻を派遣するつもりであったとある。
[57] 서적 呉書・会稽典録
[58] 서적 三国志呉志「陸績伝」
[59] 서적 三国志呉志「呂蒙伝」・「虞翻伝」、蜀志「関羽伝」
[60] 서적 呉書
[61] 서적 三国志呉志「虞翻伝」
[62] 서적 三国志呉志「虞翻伝」『続後漢書』『集解』
[63] 서적 三国志呉志「諸葛恪伝」
[64] 서적 三国志呉書「虞翻伝」に引く「虞翻別伝」
[65] 서적 江表伝
[66] 문서 名臣20選には、荀彧、荀攸、袁渙、崔琰、徐邈、陳羣、夏侯玄、王経、陳泰(以上魏 (三国)|魏)、諸葛亮、龐統、蔣琬、黄権(以上蜀漢|蜀)、周瑜、張昭、魯粛、諸葛瑾、陸遜、顧雍、虞翻(以上呉 (三国)|呉)を選出している
[67] 문서 虞翻は「仲翔高亮 性不和物 好是不群 折而不屈 屢摧逆麟 直道受黜 嘆過孫陽 放同賈屈」と謳われている
[68] 서적 晋書巻76
[69] 서적 晋書巻76
[70] 서적 三国志巻57裴注の引く会稽典録
[71] 서적 晋書
[72] 서적 삼국지 권57 우육장낙육오주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