웁살라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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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웁살라 신전은 고대 스웨덴 감라웁살라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북유럽 이교 신전이다. 웁살라 신전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브레멘의 아담이 남겼으며, 그는 세 개의 옥좌에 토르, 오딘, 프레이가 앉아 있고, 매년 희생 의식이 행해졌다고 묘사했다. 이 신전은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헤임스크링글라》에도 언급되어 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신전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전의 정확한 형태와 위치,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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웁살라 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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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레멘의 아담의 기록
브레멘의 아담은 그의 저서 『함부르크 교회사』에서 웁살라에 "웁솔라(Ubsola)라고 불리는 매우 유명한 신전"이 시그투나 근처에 있었다고 기록했다.[15] 이 신전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세 개의 옥좌에 앉아 있는 세 신의 상을 숭배했다.
아담은 중앙 옥좌에는 토르가 앉아 있고, 양쪽에는 워던과 프리코가 앉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 신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프리코는 매우 큰 발기한 음경을 가진 모습으로, 워던은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토르는 쇠망치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고 했다. 특히 토르는 로마 신화의 유피테르와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아담은 이 신들이 한때 인간이었으나 영웅적인 행위로 인해 불멸의 존재로 숭배받는다고 기록했다.[15]
각 신에게는 백성들로부터 희생 제물을 받는 사제가 임명되었다. 기근이나 역병이 발생하면 토르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워던에게, 결혼식이 열리면 프리코에게 희생 제물이 바쳐졌다. 9년마다 스웨덴의 모든 지방에서 공동 축제가 웁살라에서 열렸으며,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다.[15]
아담은 신전에서 행해지는 희생 의식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의 수컷 아홉 마리가 희생 제물로 바쳐지며, 그들의 피가 신들을 달랜다고 설명했다. 아홉 마리의 수컷 시체는 신전 근처 숲에 매달렸고, 이 숲은 매우 신성하게 여겨졌다. 인간 남성의 시체 외에도 개와 말도 숲 속에 걸려 있었으며, 아담은 "어떤 기독교도"가 72구의 시체를 보았다고 전했다. 그는 희생 의식 동안 불리는 노래에 대해 "매우 많고, 기분이 나쁘다. 이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라며 혐오감을 드러냈다.[15]
신전 근처에는 가지를 넓게 뻗은 큰 나무가 있었는데, 여름과 겨울 모두 잎이 무성했다. 나무 옆에는 희생 제물이 바쳐지는 샘이 있었고, 산 사람을 샘에 던져 그가 수면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백성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습이 있었다.[15]
신전은 건물의 박공에서 매달린 금 사슬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신전이 "고대 원형 극장"처럼 언덕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위치해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다.[16] 연회와 공희는 9일 동안 행해졌고, 매일 인간과 두 마리의 동물이 희생되었다. 아담은 이러한 공희가 "춘분 무렵에 행해진다"고 기록했다.[15]
아담은 1070년경에 옛 웁살라의 이 신전을 방문했다[17]고도 하고, 방문 없이 덴마크에서 들은 풍문으로 기록했다[18]고도 한다.
2. 1. 신전의 묘사
브레멘의 아담은 ''함마부르크 교회 주교사''에서 웁살라 신전에 대해 "웁솔라라고 불리는 매우 유명한 신전"이 시그투나 근처 마을에 존재하며,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그곳 사람들은 세 명의 특정 신들의 조각상을 숭배했다.[1]아담은 또한 9년마다 스웨덴의 모든 지방에서 웁살라에서 공동 축제가 열렸으며,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다고 기록한다.[1]
2. 1. 1. 세 신의 특징
브레멘의 아담은 자신의 저서 함마부르크 교회 주교사에서 웁살라 신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세 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신 | 특징 |
---|---|
프리코 | 거대한 발기된 성기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
보탄 |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는 로마 신화의 마르스와 유사하다. 전쟁과 지혜의 신으로 여겨진다. |
토르 | 쇠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는 로마 신화의 유피테르와 비슷하다.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강력한 신으로 숭배되었다. |
아담은 또한 이들이 한때 인간이었으나 영웅적인 행위로 인해 불멸의 존재로 숭배받는다고 덧붙였다.[1] 각 신에게는 백성들로부터 희생 제물을 받는 제사장이 임명되었다. 기근이나 전염병이 발생하면 토르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보탄에게, 결혼식이 열리면 프리코에게 희생 제물이 바쳐졌다.[1]
2. 1. 2. 희생 의식
브레멘의 아담은 그의 저서 ''함마부르크 교회 주교사''에서 웁살라 신전의 희생 의식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의 수컷 아홉 명이 희생 제물로 바쳐지며, 그들의 피가 신들을 달랜다는 전통이 있다고 설명한다. 아홉 남자의 시신은 신전 옆 숲에 매달리는데, 이 숲은 이교도들에게 매우 신성하게 여겨져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과 썩어가는 시신 때문에 각 나무가 "신성하다"고 여겨진다. 숲에는 개와 말도 남자들의 시신과 함께 매달려 있었다. 아담은 "어떤 기독교인"이 숲에 매달린 72구의 다양한 종의 시신을 보았다고 전했다. 그는 희생 의식 동안 불리는 노래들이 "너무 많고 역겹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묘사하며 혐오감을 드러냈다.[1]신전 근처에는 가지가 넓게 뻗은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여름과 겨울 모두 잎이 무성하다. 나무 옆에는 희생 제물이 바쳐지는 샘이 있었으며, 산 사람을 샘에 던져 그가 수면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백성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습이 있었다.[1]
신전은 건물의 박공에서 매달린 금 사슬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신전이 "원형 극장과 같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위치해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다. 축제와 희생은 총 9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매일 한 명의 남자와 두 마리의 동물이 희생되었다. 따라서 총 9일 동안 27번의 희생이 "춘분 즈음에" 발생했다.[1]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그의 저서 『덴마크인의 사적』에서 신전에서 인간을 희생으로 바치는 풍습을 시작한 것은 프레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북유럽의 사가, 브레멘의 아담, 그리고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웁살라에서의 희생제를 스웨덴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인기 있는 축제로 설명하며, 이러한 기술의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의 신들에게 인간이 제물로 바쳐졌음을 전하고 있다.
2. 2. 기록의 신빙성 문제
브레멘의 아담은 그의 저서 『함부르크 교회사』에서 신전에 대해 기술하면서, "웁솔라(Ubsola)라고 불리는 매우 유명한 신전"이 시그투나 근처의 도시에 있었다고 한다.[15] 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여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루돌프 시멕은 웁살라 사원에 대한 아담의 기록 출처의 신뢰성이 다양하지만, 웁살라에 사원이 존재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2] 그는 이 사원이 이교도 사원이었는지, 아니면 기독교 사원이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아담의 기록이 구약 성경의 솔로몬 성전 묘사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2]
헨리크 얀손은 아담이 서임권 투쟁 초기의 갈등 구도를 보여주기 위해 웁살라의 사례를 사용했으며, 웁살라 사원은 교황청과 헨리 4세의 적들 주변에 모인 신성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기독교 교회였다고 결론 내렸다.[3][4]
신전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드물지만, 고대 북유럽의 사가와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인의 사적』에 언급되어 있다. 삭소는 신전에서 인간을 희생으로 바치는 풍습을 시작한 것은 프레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북유럽의 사가, 브레멘의 아담,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웁살라에서의 희생제를 인기 있는 축제로 설명하며, 이 기술들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의 신들에게 인간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전한다.
오차드(1997)는 아담의 묘사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불분명하지만, 그의 기록에는 "상당한 양의 유용한 정보(그리고 상당한 추측)가 포함되어 있다"고 언급한다.[1]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가 11세기 초 덴마크 레이레에서 열린 희생에 대한 유사한 기록을 남겼지만,[1] 티트마르의 기록은 10세기 초 덴마크의 종교 상황에 관한 것이며, 그는 이교 의식이 930년대에 사라졌다고 언급한다.[5]
2. 2. 1. 기독교적 관점의 영향
루돌프 시멕은 브레멘의 아담의 웁살라 신전 기록에 대해, 아담이 제공한 정보의 출처는 신뢰도가 다양하지만 웁살라에 사원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 사원이 이교도 사원이었는지 아니면 기독교 사원이었는지는 논쟁거리이다. 시멕은 아담의 기록 내용이 구약 성경의 솔로몬 성전 묘사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2]고고학자 하랄드 비덴과 올라프 올센이 이전에 제기한 비판을 바탕으로, 헨리크 얀손은 아담이 서임권 투쟁 초기의 갈등 구도를 보여주기 위해 웁살라의 사례를 이용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 갈등은 스칸디나비아 깊숙이까지 이어졌다.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은 유럽 북부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제국은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를 통해 스칸디나비아 왕국을 제국 교회에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북부의 일부 정치 세력, 특히 교황청의 지원을 받는 '갈리카나 에클레시아'(Gallicana ecclesia)가 있던 스웨덴 왕국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 교회는 멜라렌 호수 지역과 웁살라와 연결될 수 있다.[3]
얀손은 웁살라 사원이 서임권 투쟁 초기에 교황청과 하인리히 4세의 적들을 중심으로 모인, 신성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기독교 교회였다고 결론 내렸다.[3][4] 그는 웁살라 지역에서 발견된 1,000개 이상의 기독교 룬 문자가 새겨진 돌들을 근거로, 아담이 글을 쓸 당시 이미 기독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주장한다.[3]
오차드(1997)는 아담의 묘사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불분명하다고 언급하면서도, 아담의 기록에는 "상당한 양의 유용한 정보(그리고 상당한 추측)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담의 사원 묘사가 "여러 수준에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고 지적한다.[1]
2. 2. 2. 솔로몬 성전과의 유사성
루돌프 시멕은 웁살라 신전에 대한 브레멘의 아담의 기록과 관련하여 "이 정보에 대한 아담의 출처는 신뢰성이 매우 다양하지만, 웁살라에 사원이 존재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사원이 이교도 사원이었는지 기독교 사원이었는지 하는 것이다. 시멕은 아담의 기록의 세부 사항이 구약 성경의 솔로몬 성전 묘사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시멕은 아담이 묘사한 것과 유사한 사슬이 8~9세기 유럽 교회에서도 나타나지만, 사원 사슬이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묘사는 과장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2]아담은 신전을 둘러싼 금 사슬이 건물의 박공에서 내려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전이 "고대 원형 극장"처럼 언덕으로 둘러싸인 평야 지형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이 사슬은 매우 잘 보인다.[16]
2. 2. 3. 서임권 투쟁과의 연관성
헨리크 얀손은 서임권 투쟁이 시작될 때,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이 유럽 북부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특히 스웨덴 왕국에서 강력한 저항이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3] 이러한 갈등의 연장선에서, 브레멘의 아담은 웁살라의 사례를 사용하여 몇 가지 두드러진 갈등 노선을 보여주려 했다.[3]얀손은 아담이 글을 쓸 당시 웁살라 지역에 1,000개 이상의 기독교 룬 문자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점을 들어, 웁살라 신전은 서임권 투쟁 시기에 교황청과 헨리 4세의 적들 주변에 모인 신성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기독교 교회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3][4] 당시에는 상대방이 완벽한 기독교인이었음에도 이교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핵심 개념은 충실함(''fides'')과 순종(''obedientia'')이었다.[3]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도좌에 순종하는 것을 경멸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교도주의의 죄에 빠진다"고 명시했다.[3]
3. 《헤임스크링글라》의 기록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헤임스크링글라》는 유헤메리즘적인 관점에서 북유럽 신들과 그 후손인 통치자들의 기원을 제시한다. 5장에서 스노리는 아스 신족이 현재 스웨덴에 정착하여 여러 신전을 지었다고 주장한다.[6]
스노리는 오딘이 멜라렌 호수에 있는 옛 시그툰에 정착하여 아사란드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제물을 바치는 대규모 농장 신사(호프)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는 그 지역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시그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사 영(호프고두눔)에게 거주지를 주었다. 뇨르는 노아툰에, 프레이는 웁살라에, 헤임달은 히민베르그에, 토르는 스루드방에, 발더는 브레이다블리크에 거주하도록 하였다.[6]
10장에서 뇨르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프레이가 권력을 잡았고, "스웨덴의 왕"이라고 불리며 조공을 받았다. 프레이는 백성들에게 매우 사랑받았으며, "그의 아버지처럼 좋은 계절의 축복을 받았다." 프레이는 웁살라에 훌륭한 신사를 세우고 그곳을 자신의 주요 거주지로 삼아 모든 조공, 토지와 동산을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웁살라 왕실 재산의 기원이었다.[7]
3. 1. 신들의 정착과 신전 건설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헤임스크링글라』에 수록된 『잉글링가 사가』는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들과 그들에게서 시작된 통치자들의 에우헤메리즘화된 혈통을 보여준다. 5장에서 스노리는 아스가 현재 스웨덴에 정착하여 각자 신전을 세웠다고 전한다.[19]
스노리는 오딘이 멜라렌 호수 부근, 옛 포르스시그투나라고 불리던 곳에 정착하여 아스의 관습에 따라 큰 신전을 건설하고 희생을 치렀다고 적었다. 그는 그 장소를 시그투나라고 불렀고, 고디에게 거주지를 주었다. 뇨르드는 노아툰에, 프레이는 웁살라에, 헤임달은 힘민비요르그에, 토르는 스루드방가르에, 발더는 브레이다블리크에 살았으며, 오딘은 누구에게나 훌륭한 거주지를 주었다.[19]
10장에서 뇨르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프레이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스웨덴인의 왕"이라고 불렸고 조세를 받았다. 프레이는 풍요로운 계절로 인해 백성들에게 사랑받았다. 사가에 따르면, 프레이는 "웁살라에 큰 신전을 건설하여 그의 주요 거처로 삼았다. 그에게 지불된 모든 조세, 부동산과 동산을 모두 그것에 충당했다. 이것이 웁살라 왕실 재산의 기원이며, 이로부터 계속 유지되었다."[20]
3. 2. 웁살라 왕실 재산의 기원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헤임스크링글라》에 수록된 《잉글링가 사가》에서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들과 그들에게서 시작된 통치자들의 에우헤메리즘화된 혈통을 보여준다. 5장에서 아스가 현재 스웨덴에 정착하여 각자 신전을 세웠다고 전한다. 오딘은 멜라렌 호수 부근, 옛날 포르시그투나라고 불리던 곳에 정착하여 아스의 관습에 따라 큰 신전을 건설하고 희생을 치렀다고 기록했다. 그는 그 장소를 시그투나라고 부르며 소유했다. 그는 신사 영(호프고두눔)에게 거주지를 주었는데, 뇨르드는 노아툰에, 프레이는 웁살라에, 헤임달은 히민베르그에, 토르는 스루드방에, 발더는 브레이다블리크에 살게 했다. 오딘은 그들 모두에게 훌륭한 거주지를 주었다.[6][19]
10장에서 뇨르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프레이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스웨덴의 왕"이라고 불렸고, 백성들에게 조세를 받았다. 프레이의 백성들은 그를 매우 사랑했고, 그는 "풍요로운 계절로 인해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프레이는 "웁살라에 큰 신전을 건설하여 그의 주요 거처로 삼았다. 그에게 지불된 모든 조세, 부동산과 동산을 모두 그것에 충당했다. 이것이 웁살라 왕실 재산의 기원이며, 이로부터 계속 유지되었다."[7][20]
4.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기록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인의 사적』에서도 웁살라 신전이 언급된다.[21] 삭소는 신전에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시작한 것은 프레이라고 주장한다. 브레멘의 아담과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웁살라에서의 희생제를 인기있는 축제로 묘사하며, 이 행사에는 스웨덴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22] 이러한 기술의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신들을 위해 인간이 제물로 바쳐졌음을 전하고 있다.
5. 고고학적 증거
웁살라 신전의 위치와 그 존재 여부는 고고학계에서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1926년 스네 린드크비스트의 발굴을 통해 신전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이후 지표 투과 레이더 탐사 등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2013년에 발견된 거대한 나무 기둥 열은 웁살라 지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로 여겨지지만, 아담 폰 브레멘이 웁살라 신전을 묘사했을 때는 이미 수세기 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5. 1. 초기 발굴과 논쟁
스네 린드크비스트는 1926년 감라웁살라에서 고고학 조사를 실시하여 감라웁살라 교회 아래에서 기둥 구멍들을 발견했다. 이 기둥 구멍들은 동심원 직사각형 형태로 정렬되어 있을 수 있으며, 이 발견을 토대로 신전에 대한 다양한 재구성이 시도되었다.[8] 그러나 프라이스와 알카르프(2005)는 1926년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며, 기둥 구멍들이 여러 다른 건설 단계에 속한다는 것을 층위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9]지표 투과 레이더 등 지구물리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프라이스와 알카르프는 중세 대성당의 북쪽 익랑 바로 아래에서 나무 구조물 유적과 두 개의 다른 건물, 즉 청동기 시대 건물과 바이킹 시대의 연회장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견했다.[9] 오차드(1997)는 이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신전에 대해 제안된 규모의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언급했지만, 그 위치의 세 개의 매장 고분이 그 지역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1]
2013년에는 두 줄의 커다란 나무 기둥 유적이 발견되었다.[10] 한 줄은 약 1킬로미터 길이로 14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줄은 5~6미터 간격으로 떨어진 기둥으로 이루어진 0.5킬로미터 길이이다. 이 줄은 아마도 더 이어질 것이지만, 자금 부족으로 발굴되지 않았다. 더 짧은 줄은 첫 번째 줄과 수직을 이루며, 남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옐링 덴마크의 것과 같이 울타리를 표시한다면, 울타리 안의 면적은 거대하며, 당시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구조물일 것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기둥은 매우 넓었으며, 최소 7미터 길이로 추정된다.[12][13] 그러나 이 구조물은 5세기 중반에 속한다. 따라서 아담 폰 브레멘이 웁살라 신전을 묘사했을 때는 이미 수세기 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연구자들은 신전의 위치와 건물의 존재 여부에 대해 주로 논쟁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신전이 스웨덴 국왕의 주거와 혼동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교회가 이교 의식 활동 장소였던 신전이나 다른 유적 위에 건설되는 경우가 많았다.
12세기에 현재 있는 석조 감라 웁살라 교회가 세워졌지만, 그 이전, 11세기에는 목조 교회가, 10세기에는 어떤 건축물이 있었다.[23]1926년, 수네 린드크비스트[24]가 현재 있는 교회의 바닥 밑을 조사한 결과, 우선 목조 교회의 터를 발견했다. 게다가 그 아래의 바이킹 시대 지층에서 기둥 구멍(en)의 열을 발견하고, 추정할 수 있는 건조물 터의 독특한 형상에서, 이 구멍의 열이 웁살라 신전의 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1967년, 셸 쿰리엔[25]이 과거에 화재로 소실된 사료를 단편적인 정보로부터 복원한 결과, 12세기 전반부터 13세기 후반에 걸친, 현재의 교회와 그 이전에 있었던 목조 교회, 그리고 웁살라 신전의 위치 관계가 판명되었다. 그 사료에 따르면, 현재의 교회는 웁살라 신전의 터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때문에 린드크비스트는 자신이 발견한 구멍의 열이 다른 신전의 터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그러나, 쿰리엔이 근거로 삼은 사료도 린드크비스트의 조사 결과도, 연구자로부터 그 신뢰성을 의심받는 경우가 있다.[26]
2003년과 2004년에, 지중 레이더 탐사 장치를 사용한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현재 세워져 있는 교회의 바로 밑에, 11세기에 있었던 3개의 목조 페이스팅 홀(en)의 적어도 1개의 잔해를 발견했다.[27]
5. 2. 지표 투과 레이더 탐사
스네 린드크비스트는 1926년 감라웁살라에서 고고학 조사를 실시하여 감라웁살라 교회 아래에서 기둥 구멍들을 발견했다. 이 기둥 구멍들은 동심원 직사각형 형태로 정렬되어 있을 수 있으며, 이 발견을 토대로 신전에 대한 다양한 재구성이 시도되었다.[8] 그러나 1967년 셸 쿰리엔은 과거 화재로 소실된 사료를 복원하여 12세기 전반부터 13세기 후반에 걸친 현재의 교회와 그 이전에 있었던 목조 교회, 그리고 웁살라 신전의 위치 관계가 판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료에 따르면 현재 교회는 웁살라 신전 터 위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고, 린드크비스트는 자신이 발견한 구멍의 열이 다른 신전 터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하지만 쿰리엔의 사료와 린드크비스트의 조사 결과는 연구자들로부터 신뢰성을 의심받기도 한다.[26]프라이스와 알카르프(2005)는 1926년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며, 기둥 구멍들이 여러 다른 건설 단계에 속한다는 것을 층위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9] 지표 투과 레이더와 다른 지구물리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프라이스와 알카르프는 중세 대성당의 북쪽 익랑 바로 아래에 위치한 나무 구조물로 해석되는 유적과 두 개의 다른 건물, 즉 청동기 시대 건물과 바이킹 시대의 연회장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견했다.[9]
2003년과 2004년에는 지중 레이더 탐사 장치를 사용한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현재 세워져 있는 교회의 바로 밑에서 11세기에 있었던 3개의 목조 페이스팅 홀(en)의 적어도 1개의 잔해를 발견했다.[27]
2013년에는 두 줄의 커다란 나무 기둥 유적이 발견되었다.[10] 한 줄은 약 1킬로미터 길이로 14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줄은 5~6미터 간격으로 떨어진 기둥으로 이루어진 0.5킬로미터 길이이다. 이 줄은 아마도 더 이어질 것이지만, 자금 부족으로 발굴되지 않았다. 더 짧은 줄은 첫 번째 줄과 수직을 이루며, 남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옐링 덴마크의 것과 같이 울타리를 표시한다면, 울타리 안의 면적은 거대하며, 당시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구조물일 것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기둥은 매우 넓었으며, 최소 7미터 길이로 추정된다.[12][13] 그러나 이 구조물은 5세기 중반에 속한다. 따라서 아담 폰 브레멘이 웁살라 신전을 묘사했을 때는 이미 수세기 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5. 3. 나무 기둥 열 발견 (2013년)
2013년에 두 줄의 커다란 나무 기둥 유적이 발견되었다.[10] 한 줄은 약 1km 길이로 14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줄은 5~6미터 간격으로 떨어진 기둥으로 이루어진 0.5km 길이이다. 더 짧은 줄은 첫 번째 줄과 수직을 이루며, 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기둥 배열은 옐링의 유적과 같이 울타리를 표시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울타리 안의 면적은 매우 넓어 당시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구조물이었을 것이다. 기둥은 매우 넓었으며, 최소 7m 길이로 추정된다.[12][13] 그러나 이 구조물은 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아담 폰 브레멘이 웁살라 신전을 묘사했을 때는 이미 수세기 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이 기둥들과 아담의 신전 사이의 연관성을 시사하는 것은 없지만, 그들이 유발한 해석은 웁살라 주변의 모든 것이 여전히 그의 묘사의 암시적인 그림자 속에서 해석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증적 증거이다.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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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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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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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ument discovered at Old Upps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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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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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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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Stort fornfynd i Gamla Uppsala
http://www.svd.se/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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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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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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ヴァイキング時代前夜のメーラル地域 -7~9世紀のガムラ・ウップサーラ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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