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왕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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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림은 전한 시대 말기, 후한 시대 초기의 인물로, 평간나라 왕족의 후손이며 왕랑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가담했다. 아버지의 살인죄로 평간나라가 폐지된 후 유협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점술가 왕랑과 친분을 맺었다. 왕랑이 전한 성제의 아들 유자여를 사칭하자 이를 믿고 조의 호족들과 함께 왕랑을 황제로 추대했다. 경시 원년(23년), 유수(후의 광무제)에게 적미군을 수공으로 섬멸할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왕랑을 황제로 즉위시키고 승상이 되었으나, 이듬해 한단이 함락되면서 왕랑 정권이 멸망한 후 유림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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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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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적
유림은 술책을 좋아하고, 조(趙)·위(魏) 사이에서 임협으로 알려져 많은 호걸, 악당과 교류했다. 이 때문에 당시 점술가였던 왕랑과도 친분을 맺었다. 어느 날 왕랑은 유림에게 자신이 성제의 아들인 유자여이며, 어린 시절 촉 땅에 숨어 있었지만 천기가 있어 연(燕)·조(趙)에 왔다고 말했다. 유림은 이를 믿고 조의 호족인 이육, 장참과 함께 왕랑을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해 12월, 유림 등은 수백 대의 수레와 기병을 이끌고 한단에 입성하여, 옛 조왕의 궁전에서 왕랑을 천자로 즉위시켰다. 유림은 승상, 이육은 대사마, 장참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북쪽 각 군국에 격문을 보내 군대를 파견하여 조국 이북, 요동 이서가 왕랑의 지배 영역이 되었다.
2. 1. 초기 활동과 왕랑과의 만남
아버지 유원[1]의 살인죄로 인해 평간나라는 폐지되었다. 유림은 조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임협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점술가 왕랑과 친했다.신나라를 멸한 현한의 경시제 원년(23년) 10월, 경시제가 하북을 진무하러 보낸 유수와 한단에서 만났다. 이때 유림은 하동에 있는 적미를 수공으로 쓸어버리자고 제안했으나, 유수는 답하지 않고 진정으로 떠났다.[2]
왕랑이 스스로 성제의 아들 유자여를 사칭하자, 유림은 이에 동조하여 왕랑을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 유림은 대중들을 선동해 왕랑이 유자여가 아닌가 의심하도록 하고, 조국의 호족 이육과 장참을 포섭했다. 또한, 적미가 황하를 건널 것이니 이에 대비해 유자여를 황제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 2. 유수와의 만남과 수공 제안
경시 원년(23년) 10월, 신나라를 멸한 현한의 경시제가 하북을 진무하러 보낸 유수와 한단에서 만났다. 유림은 유수에게 당시 하동에 있는 적미를 수공으로 쓸어버리자고 제안했으나, 유수는 답하지 않고 진정으로 떠났다.[2]2. 3. 왕랑 옹립과 최후
경시 원년(23년), 신나라를 멸한 현한의 경시제가 하북을 진무하러 온 유수와 한단에서 만났다. 이때 유림은 하동에 있는 적미를 수공으로 쓸어버리자고 제안했으나, 유수는 답하지 않고 진정으로 떠났다.[2]이후 유림은 왕랑이 성제의 아들 유자여를 사칭하자, 이에 동조하여 왕랑을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 이들은 백성들을 선동해 왕랑이 유자여가 아닌가 의심하도록 하고, 조국의 호족 이육과 장참을 포섭했다. 또 적미가 황하를 건널 것이니 이에 대비해 유자여를 황제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2]
12월, 유림 등은 전차와 기병 수백 기를 거느리고 한단성에 새벽에 들어와, 옛 조나라 궁궐에서 왕랑을 황제로 추대하고, 유림 자신은 승상이 되었다.[1] 그러나 경시 2년(24년) 5월, 한단이 유수에게 함락되면서 왕랑 정권은 멸망했고, 유림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참조
[1]
서적
後漢書 李賢注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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