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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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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치환은 호가 청마이며, 1908년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나 1967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시인, 교육자이다. 1931년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하여,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출간했다. 그는 교육계에 투신하여 교사, 교장으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서울특별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깃발〉, 〈생명의 서〉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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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0년의 유치환
1930년의 유치환
이름유치환
한자柳致環
로마자 표기Yu Chihwan
아호청마(靑馬)
출생일1908년 7월 14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남도 거제군
사망일1967년 2월 13일
사망지대한민국 부산직할시
국적대한민국
직업시인
교육자
배우자권재순(1915-2000)
본관진주(晋州)
부모유준수(부)
자녀슬하 3녀
친척유치진(형)
심재순(형수)
유지영(할아버지)
유계원(증조할아버지)
권수봉(장인)
유인형(조카딸)
유덕형(조카)
창작 활동
장르
언어한국어
기타 정보
학교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웹사이트한국문학번역원 작가 데이터베이스

2. 생애

호는 청마(靑馬)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초등학교 입학 전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읍 본가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그는 극작가 유치진의 아우이기도 하다.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9년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를 발표하였다.

교육계에 투신하였던 그는 시작과 교사 일을 병행하였으며, 부산남여상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도중 1967년 2월 13일 수정동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생을 마감하였다.

유 치환(兪致環)은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집 열 권 이상을 출간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 행위를 했다.~~ 2005년,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그의 묘소에는 그의 흉상과 그가 지은 시가 새겨진 다섯 개의 비석이 있는 광장이 조성되었다.

유 치환은 일본에서 도요야마 중학교에 4년 동안 다녔고, 한국으로 돌아와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1937년에는 동인지 《생리(生理)》를 발행했다. 1940년 4월 만주로 이주했다가 1946년 6월 한국으로 돌아와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여러 단체에 가입했다. 1952년에는 대구의 시와 시론 동인에 가입했고, 1955년에는 경상남도 작가들의 동인지 《청맥(靑麥)》 발간을 주관했다. 1957년에는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다.

그의 수상 경력으로는 서울특별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 부산광역시 문화상 등이 있다. 그는 1967년 2월 13일에 사망했다.[1]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 유씨 유환수(柳煖秀), 어머니는 밀양 박씨 박우수(朴又守)였다. 8남매 중 차남이었다. 아버지 유환수는 거제 둔덕면 방하리의 유학자였고, 어머니의 친정은 부유한 밀양 박씨 집안이었기에 유치환은 어릴 적부터 사숙에서 한학을 배울 수 있었다. 1918년, 유치환이 10세 때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후에 아내가 될 권재순과 친해졌다.

유치환의 아버지는 유학자였지만 신학문에도 이해가 있었고, 아들 셋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 유치환도 1922년, 14세 때 도쿄의 풍산중학교(현 일본대학 풍산중고등학교)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1926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학비가 어려워져 풍산중학교를 4년 만에 중퇴하고 귀국해야 했다. 귀국한 유치환은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다음 해에 졸업했다. 졸업 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연희전문학교 동기들이 대부분 기독교인 자녀들이라 유치환이 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1년 만에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28년 10월, 어린 시절 친구인 권재순과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특별히 학교에 다니지는 않고 사진 기술을 배우고 귀국했다.

귀국 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들의 작품과 정지용의 시에 감명받은 것이 계기였다. 고향 통영에서 형 유치진과 함께 '청소부'라는 회람 잡지를 만들어 시를 발표했다. 유치환은 중학교 시절부터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했던 것으로 보이나,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한 것은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실린 "정적"부터이다. 그리고 1939년 12월에 출간한 시집 『청마시초』(청색지사)가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청마시초』 출간에는 김소운의 도움이 있었다. 유치환은 김소운의 소개로 화가 구본웅을 알게 되었다. 구본웅은 장문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고, 『청마시초』는 거기서 청색지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청마시초』라는 제목도 김소운과 상의하여 정한 것이다. 『청마시초』에 수록된 "기(기빨)"는 유치환 초기의 대표작이며, 유치환의 철학 세계와 시 세계가 조화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시인으로 성공하기 전에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거나 부산에서 화신백화점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청마시초』를 출간한 후, 1940년 봄,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했다. 하얼빈연수현으로 이주하여 농장을 경영하며 생활했다.

1945년 6월 말, 귀국하여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8월 15일 광복을 고향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유치환은 통영에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하고 각 학교에 설립된 한글 강습회에 교사로 참여하며 바쁜 활동을 했다. 1945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아내 재순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인계받은 문화유치원을 경영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육군 제3사단에 종군했다.

유치환은 광복 후 많은 시집, 수필집을 출간하는 한편,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경주고등학교, 경주여자중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경주고등학교 교장 시절에는 자유당 정권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엣가시가 되기도 했지만, 전근 갈 때마다 재임을 원하는 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날 정도로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장이었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9시 30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1003번지 자택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려던 중 다른 버스에 치여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사망했다. 향년 60세였다. 유해는 17일,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 산록에 안장되었다. 후에 불국사부산남여상에 시비가 건립되었고, 경주고등학교에는 교훈비가 세워졌다.

2. 1. 출생과 성장

유치환은 1908년 7월 14일 경상남도 거제군(현 거제시)에서 진주 유씨 유지영(柳池英)의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유학자였지만 신학문에도 이해가 있어 아들 셋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1] 유치환은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918년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1] 1922년 졸업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도요야마 중학교에서 4년간 수학했으나,[1]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중퇴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1]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1]

2. 2. 문단 활동과 작품 세계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했다.[2]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출간한 이후, 《생명의 서》, 《울릉도》, 《청령일기》 등 10여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2] 그의 시는 생명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허무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담고 있으며, 숭고한 시적 주제를 남성적인 어조로 노래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 대표작으로는 〈깃발〉, 〈생명의 서〉 등이 있다.

유치환은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하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2]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표하였는데, 이 시집 출간에는 김소운의 도움이 있었다. 유치환은 김소운의 소개로 화가 구본웅을 알게 되었고, 구본웅은 장문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청마시초』는 거기서 청색지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청마시초』라는 제목도 김소운과 상의하여 정한 것이다. 『청마시초』에 수록된 "기(깃빨)"는 유치환 초기의 대표작이며, 유치환의 철학 세계와 시 세계가 조화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2]

그는 시 쓰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거나 부산에서 화신백화점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1937년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협성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40년 봄,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하여 하얼빈의 연수현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생활하기도 했다.

1945년 6월 말, 귀국하여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8월 15일 광복을 고향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유치환은 통영에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하고 각 학교에 설립된 한글 강습회에 교사로 참여하며 바쁜 활동을 했다. 1945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아내 재순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인계받은 문화유치원을 경영했다.[2]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육군 제3사단에 종군했다.

유치환 시인의 작품에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운명인 죽음과 허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스며 있다. 일제 말기 극한 상황이라는 역사적 차원 속에서 마조히즘적인 분노와 야만적인 의지가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예정된 죽음 속에서 존재에 대한 연민과 비애를 발견한다. 생명력과 비애의 이러한 평행적인 초상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시 중 하나인 「깃발」에서 적절히 드러난다. 깃발은 인류에 대한 연민과 푸른 바다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을 동시에 마주하면서도 결국 그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하는 감정적인 마음이다.[2] 강한 의지로 허무의 본질을 극복하려는 이러한 격렬한 생명력에 대한 노력 때문에 유치환은 '생명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시가 숭고한 시적 주제를 부드럽게 읊조리는 방식 때문에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한국 현대시에서 보기 드문 남성적인 시 세계를 발견한다.[2]

2. 3. 교육 활동

유치환은 문단 활동 외에도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1945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한국전쟁 이후에는 1954년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경주고등학교,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등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특히 경주고등학교 교장 시절에는 자유당 정권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2. 4. 만주 이주와 광복 이후

1940년 봄, 유치환은 가족과 함께 만주 하얼빈 연수현으로 이주하여 농장을 경영하며 생활했다. 1945년 6월 말 귀국하여 고향 통영시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귀국 후 유치환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각급 학교에 설립된 한글 강습회 교사로 참여하는 등 지역 사회 발전에 힘썼다. 1945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고, 아내 권재순은 문화유치원을 경영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육군 제3사단에 종군작가로 참전했다.

2. 5. 사망

1967년 2월 13일 저녁 9시 30분, 유치환은 부산시 동구 좌천동 1003번지 자택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던 중 다른 버스에 치였다.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사망했으며, 향년 60세였다. 유해는 2월 17일 부산시 서구 하단동 산록에 안장되었다. 사후 불국사부산남여상에 시비가 건립되었고, 경주고등학교에는 교훈비가 세워졌다.

3. 친일 행적 논란

유치환은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2007년 이전에도 시 〈수〉가 일제에 의해 효시된 독립운동가를 묘사하며 일제의 논리를 옹호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어 논란이 있었다.[4][5] 1942년 만선일보에 기고한 산문이 2007년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친일 논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4. 작품 목록

'''시집'''


  • 1939년 청마시초
  • 생명의 서 (The Chapter of Life)
  • 울릉도 (The Isle of Ulung)
  • 청년일기 (Journey of a Dragonfly)


'''기타'''

  •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사후에 출판된 이 시집은 그가 시조 시인 이영도에게 쓴 200여 통의 연애 편지를 모은 것이다.

4. 1. 시집


  • 1939년 청마시초
  • 생명의 서 (The Chapter of Life)
  • 울릉도 (The Isle of Ulung)
  • 청년일기 (Journey of a Dragonfly)
  •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사후에 출판된 이 시집은 그가 시조 시인 이영도에게 쓴 200여 통의 연애 편지를 모은 것이다.

4. 2. 기타

사후에 출판된 시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쓴 200여 통의 연애 편지를 모은 것이다.

5. 수상


  • 서울특별시 문화상
  • 예술원 공로상
  • 부산시 문화상

6. 가족 관계

유치환은 진주류씨 대사성공파 26세손이다.[6] 증조부는 유계원(柳啓元), 조부는 유지영(柳池英), 부친은 유준수(柳焌秀)이다.[6] 형은 서울예술대학교 설립자인 유치진이다.[6] 배우자는 안동 권씨 권재순(權在順)으로 권수봉(權守奉)의 딸이다.[6]

7.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Yoo Chi-hwan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klti.or.kr/ke[...] 2013-12-14
[2] 웹아카이브 https://web.archive.[...] 2013-09-21
[3] 뉴스 링크 https://n.news.naver[...]
[4] 간행물 발견된 친일 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중략)..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 한겨레
[5] 웹인용 친일작품 쓴 유치환·이원수 맨얼굴 봐야 http://news.kbs.co.k[...]
[6] 웹사이트 진주 유씨 대종회 http://www.jinjuryu.[...] 진주류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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