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흡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흡은 신나라 말기부터 후한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경시제 정권 시기에는 원씨왕에 봉해졌으며, 경시제가 멸망한 후에는 유종과 함께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건무 2년(26년)에는 사수왕에 봉해졌으나, 후한서 기록에는 반 신 군사 활동에서 별다른 공적이 기록되지 않았다. 건무 10년(34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유찬이 당계후에 봉해져 제사를 받들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34년 사망 - 사도 마태오
사도 마태오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으로,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여겨지며 세리 출신으로 예수를 따랐고,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숭배받으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실천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 34년 사망 - 풍이 (사람)
후한의 장군 풍이는 왕망 정권의 관리에서 광무제를 도와 후한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대수장군이라 불리며 신망을 받았다. - 후한의 종실 - 후한 명제
후한 명제는 광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한의 제2대 황제로, 부패 척결, 유교 장려, 서역 경영 재개 등을 통해 후한의 안정적인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반초를 등용하여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고 불교가 중국에 정식으로 전래된 시기의 황제이다. - 후한의 종실 - 유영 (초왕)
유영(초왕)은 후한의 초왕으로, 광무제 사후 명제의 총애를 받아 불교를 숭상했으나 반란 모의 혐의로 유배를 가 자결하고 장제 때 초여후로 추증되었다. - 후한의 제후왕 - 조조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 후한의 제후왕 - 조비
조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조조 사후 위왕과 승상 자리를 이어받아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는 등 내정을 정비했으나 오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요절했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장경국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유흡 |
---|
2. 생애
유흡은 신나라 말기의 인물로, 경시제를 따라 관중에 들어가 원씨왕(元氏王)에 봉해졌다. 경시제가 패망한 후 아들 유종과 함께 낙양으로 달아나 광무제에게 항복했고, 건무 2년(26년)에 사수왕에 봉해졌다. 후한서에는 유흡의 반 신(新) 군사 활동에 대한 별다른 공적은 기록되지 않았고, 오히려 아들 유종이 유수(광무제)와 친밀한 관계여서 아버지보다 더 활약했다.
건무 10년(34년)에 사망하여 봉국은 폐지되었고, 막내아들 유천(劉燀)을 당계후(堂谿侯)에 봉하여 유흡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유종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여 28일을 곡하며 지내다가 자신도 죽었다.
항목 | 내용 |
---|---|
성명 | 유흡 |
시대 | 신대 |
생몰년 | 생년 미상 - 34년 (건무 10년) |
자·별호 | 경손(經孫, 자) |
본관·출신지 | 형주남양군채양현 |
작위·호 | 원씨왕(경시)→사수왕(후한) |
가족·일족 | 자: 유종, 유찬 종형제: 유무, 유광 |
2. 1. 경시제 정권 시기
경시제를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원씨왕(元氏王)에 봉해졌다. 경시제가 패망한 후 유종과 함께 낙양으로 달아나, 건무 2년(26년)에 사수왕에 봉해졌다.경시 2년 (24년) 2월,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하자, 유흡도 이를 따라갔다. 그러나 경시 3년 (25년)에 경시 정권이 멸망하자, 유흡은 유종과 함께 낙양으로 도망쳐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건무 2년 (26년), 유흡은 사수왕에 봉해졌다.
2. 2. 후한 건국 이후
경시제가 패망한 후, 유흡은 유종과 함께 낙양으로 도망쳐 광무제에게 항복했고, 건무 2년(26년)에 사수왕에 봉해졌다.건무 10년(34년) 유흡이 죽자 봉국은 폐지되었고, 막내아들 유천을 당계후에 봉하여 유흡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유종은 아버지의 죽음을 너무도 비통해하여, 28일을 곡하며 지내다가 자신도 죽었다.
3. 가계
유흡은 신 말기부터 후한 초기까지 활동한 인물로, 자는 경손(經孫)이며 형주 남양군 채양현 출신이다. 아들로는 유종과 유천이 있었고, 종형제로는 유무와 유광이 있었다.
3. 1. 유종 (치천왕)
유흡의 아들로, 아버지보다 광무제와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활약했다. 경시 정권이 멸망한 후, 25년에 아버지와 함께 낙양으로 도망쳐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26년, 유흡이 사수왕에 봉해질 때 유종은 재천왕에 봉해졌다.34년, 유흡이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다가 병이 들어 죽었다. 장남 유주는 기후로 전봉되었고, 아들 유봉은 곡양후에 봉해졌다.
3. 2. 유천 (당계후)
유흡의 막내아들 유천(劉燀)은 당계후(堂谿侯)에 봉해졌다.4. 평가
劉歙|유흡중국어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에 있지만, 유흡 본인이 신나라에 대항하는 군사 활동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웠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아들 유종이 광무제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아버지보다 더 활약했다.
경시 2년(24년) 2월,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하자 유흡도 이를 따라 원씨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경시 3년(25년)에 경시 정권이 멸망하자, 유흡은 유종과 함께 낙양으로 도망쳐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건무 2년(26년), 유흡은 사수왕에 봉해졌고, 유종은 재천왕에 봉해졌다.
건무 10년(34년), 유흡은 사망했고, 아들 유찬이 뒤를 이었지만 당계후로 전봉되었다. 재천왕 유종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여 병을 얻어 사망했고, 장남 유주가 뒤를 이었지만 기후로 전봉되었다. 유종의 아들 유봉은 곡양후에 봉해졌다.
5. 출전
범엽의 《후한서》 권14 종실사왕삼후열전에 유흡에 관한 기록이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