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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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진원은 1925년 1월 12일 태어나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HID 방첩대에서 근무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에 참여, 실미도 특수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해외공작 업무를 담당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을 지휘했으나, 김대중을 살려 보낸 일로 인해 장성 진급에 실패하고 퇴직했다. 이후 박정희의 지시로 관리관에 재임용되었으나 1980년 퇴직 후 은거하다가 2018년 사망했다. 그는 대북 공작 전문가로 평가받았으며,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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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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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 | 1868년 11월 12일 |
사망 | 1936년 11월 29일 (향년 68세) |
본관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호 | 둔옹(遯翁)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숙부인 안동 김씨 |
자녀 | 윤정선, 윤명선, 윤경선, 윤광선, 윤왕선 |
친척 | 윤치호 (사촌) 윤치영 (조카) 윤보선 (조카) 윤일선 (조카) |
학력 | |
수학 | 박문국, 한성 영어학교 |
주요 경력 | |
직위 |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평안남도 재무감독 경기도 재무감독 내부 회계국장 탁지부 재무관 |
소속 | 독립협회 평의원 대한자강회 평의원 흥사단 단우 |
기타 | |
묘소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
2. 생애
윤진원은 1925년 1월 12일 경상남도 함안군 용산리에서 태어났다.[2] 1943년 2월 부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2] 1950년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그해 12월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2] 임관 후 HID 방첩대에서 근무하였으며, 한국 전쟁 당시 HID 소속으로 특수임무 활동을 하였다.[2]
1961년 5월 중앙정보부 창설 당시 육군 소령으로 참여하였다.[2] 1968년 1.21 사태 이후에는 실미도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최초로 이 부대의 훈련을 지휘하였다.[2] 1970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해외공작국 해외공작단장을 역임하고,[2] 1971년에는 해외공작국 해외공작1단장을 맡았다.[2] 중앙정보부 잠수정 용금호의 관리인이기도 했다.[2]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 공작을 직접 지휘해 金씨를 중앙정보부 공작선인 용금호에 인계한 뒤 혼자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2]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3]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3]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 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3]
1973년 준장 진급에 실패하고, 1975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2][3] 김대중을 살려 보낸 것이 장성 진급 실패의 원인이 되었으며, 1975년 말 용금호 선원들의 밀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퇴직되었다.[3] 당시 중정측은 윤씨에게 강원지부장을 제의했으나 그는 “국내정치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고 공작단 업무를 계속하였다.[1]
1977년 8월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관리관에 재임용되었다.[3] 국내 정치 담당을 제의했으나 거절하고 자신은 대북만 담당하였다고 한다.[1] 1980년 퇴직하였다.[2]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따른 부담으로 인해 장군 진급에 실패하고 중앙정보부에서 강제 은퇴하다시피 해 20여년 동안 공개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직업도 갖지 않은채 은거해 왔다.[2]
1993년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그해 5월 실존 인물로 확인되었다.[2] 2018년 8월 2일 서울특별시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매장되었다.[2]
2. 1. 초기 생애
2. 2. 군 복무 및 중앙정보부 활동
윤진원은 1925년 1월 12일 경상남도 함안군 용산리에서 태어났다.[2] 1943년 2월 부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그해 12월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2] 임관 후 HID 방첩대에서 근무하였으며, 한국 전쟁 당시 HID 소속으로 특수임무 활동을 수행하였다.[2]1961년 5월 중앙정보부 창설 당시 육군 소령으로 참여하였다.[2] 1968년 1.21 사태 이후에는 실미도 특수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최초로 훈련을 지휘하였다.[2] 1970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해외공작국 해외공작단장, 1971년 해외공작국 해외공작1단장을 역임하였다.[2] 또한 중앙정보부의 잠수정 용금호의 관리인이었다.[2]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직접 지휘,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공작선인 용금호에 인계한 뒤 혼자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2]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3]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3]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 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3] 당시 중정측은 윤씨에게 강원지부장을 제의했으나 그는 “국내정치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고 공작단 업무를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1]
1973년 준장 진급에 실패하고, 1975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3] 김대중을 살려 보낸 것이 장성 진급 실패의 원인이 되었으며, 1975년 말 용금호 선원들의 밀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퇴직되었다.[3] 1977년 8월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관리관에 재임용되었으나,[3] 1980년 퇴직하였다.[2]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따른 부담으로 인해 장군 진급에 실패하고 중앙정보부에서 강제 은퇴하다시피 해 20여년 동안 공개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직업도 갖지 않은채 은거해 왔다.[2] 1993년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그해 5월 실존 인물로 확인되었다.[2]
2. 3. 김대중 납치 사건
윤진원은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 공작을 직접 지휘해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공작선인 용금호에 인계한 뒤 혼자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2]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 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3]김대중을 살려 보낸 이유로 장성 진급에 실패한 윤진원은 1975년 말 용금호 선원들의 밀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퇴직되었다.[3] 당시 중정측은 윤씨에게 강원지부장을 제의했으나 그는 “국내정치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고 공작단 업무를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1] 1977년 8월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관리관에 재임용되었다.[3] 1980년 퇴직하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따른 부담으로 인해 장군 진급에 실패하고 중앙정보부에서 강제 은퇴하다시피 해 20여년 동안 공개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직업도 갖지 않은채 은거해 왔다.[2]
2. 4.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윤진원은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 공작을 직접 지휘해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공작선인 용금호에 인계한 뒤 혼자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2]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 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3]1973년 준장 진급에 실패하고, 1975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김대중을 살려 보낸 것이 장성 진급 실패의 원인이 되었으며, 1975년 말 용금호 선원들의 밀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퇴직되었다.[3] 당시 중정측은 윤진원에게 강원지부장을 제의했으나 그는 “국내정치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고 공작단 업무를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1]
1977년 8월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관리관에 재임용되었다.[3] 국내 정치 담당을 제의했으나 거절하였고, 자신은 대북만 담당하였다고 한다. 1980년 퇴직하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따른 부담으로 인해 장군 진급에 실패하고 중앙정보부에서 강제 은퇴하다시피 해 20여년 동안 공개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직업도 갖지 않은채 은거해 왔다.[2]
1993년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그해 5월 실존 인물로 확인되었다.[2]
3. 평가
대북 공작의 베테랑으로 다부졌다는 평가를 얻는다. 목숨 걸고 사선 넘기도 했다. 군 복무 30년간 오직 국가를 위해서만이라는 신조로 살았다 하며, 애국자 칭호를 받았다.
4. 기타
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 이철희 등 납치 사건 책임자가 윤진원에게 "도로 갖다 놓을 수 없느냐"고 묻자, 윤진원은 권총을 빼 들고 "너 죽고 나 죽자"고 대들었다고 한다.[3] 특수공작부대(HID·육군첩보부대) 출신의 현역 육군 대령으로 당시 대북 공작에서 맹활약했던 윤진원은 결국 장성 진급에 실패했고, 그가 이끌던 해외공작단도 해체되었으며 그 역시 중앙정보부에서 물러나야 했다.[3]
참조
[1]
웹사이트
당시 중앙정보부 이철희차장보,현장지휘 윤진원
http://www.reltih.co[...]
2005-04-26
[2]
뉴스
金大中씨 납치지휘 尹鎭遠은 실존인물
http://news.naver.co[...]
[3]
뉴스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자기 손엔 피를…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2-06-15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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