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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당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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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은거당 터는 조선 숙종 때 학자 허목에게 하사된 집터이다. 허목은 숙종의 배려로 집을 하사받았지만, 여러 번 사양하다가 결국 농번기를 피해 집을 짓고 '수고은거'라는 편액을 걸었다. 은거당은 허목의 청렴함과 숙종의 애민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었으나, 한국 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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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당 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은거당 터 정보
이름은거당 터
은거당 터
은거당 터
국가대한민국
위치경기도 연천군
유형향토문화재
지정 번호14
지정일2012년 4월 20일
주소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798
시대조선
꼬리표연천 강서리

2. 역사적 배경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은 조선 19대 임금 숙종 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그는 평생을 청빈하고 강직하게 살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에도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힘썼으며, 숙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연 속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특히 숙종이 하사한 은거당(恩居堂)은 그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허목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올랐으며, 조선 500년 동안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주자 중심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고학(古學)에 힘썼으며, 독자적인 전서체(篆書體)인 미수체를 창안하여 서예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허목은 숙종 4년(1678)에 숙종으로부터 은거당을 하사받았다. 그는 집을 새로 지어주겠다는 숙종의 어명을 다섯 차례나 거절하며, 중국 춘추시대 재상 안영의 고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결국 숙종의 명을 받아들여 추수가 끝난 후 집을 짓게 되었고,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뜻의 "수고은거(壽考恩居)"를 직접 써서 편액으로 걸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이라 불렀다.

은거당은 10칸 규모의 가옥으로, 허목이 기거하며 저술 활동을 하던 공간이었다. 뒤쪽에는 십청원(十靑園), 앞쪽에는 괴석원(怪石園)이 있었으며, 안채, 별묘, 행랑채 등이 함께 있었다. 은거당은 일제 강점기 이후 38선 이북에 위치했다가 6.25 한국전쟁 중에 남쪽으로 오게 되었으나, 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숙종은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허목이 숙종 4년(1678)에 은거당을 하사받을 당시 재위하고 있었다. 허목은 남인(南人)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평생 청빈하고 곧은 삶을 살았다. 숙종은 허목을 깊이 신뢰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허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를 만류하며 중앙으로 다시 부르려 했다.

숙종 즉위 초,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허목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며,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기로소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숙종은 허목의 학식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국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등 그를 중용했다. 허목이 낡고 허름한 집에서 기거한다는 소식을 들은 숙종은 크게 놀라며 집을 지어줄 것을 명했으나, 허목은 안영의 고사를 인용하며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그러나 숙종은 허목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호한 어명으로 집을 짓게 했다.

결국 허목은 숙종의 뜻을 받아들여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 집을 짓게 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 허목은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뜻의 "수고은거(壽考恩居)"라는 글을 직접 써서 편액으로 걸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렀다.

허목은 숙종의 만류에도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옛 집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이 집은 오래전 화재로 지붕이 내려앉아 허리를 펴기 힘들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이 집을 새로 지을 것을 권했으나, 허목은 "내가 누워서 잠 잘 곳이 있고, 또 내 마음이 편하면 되지 새로이 집은 지어서 무엇하느냐"며 거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의 근시(近侍)가 허목을 다시 부르기 위한 편지나 국정에 대한 자문을 청하는 편지를 들고 허름한 집을 드나들면서 구루암(허리를 펼 수 없는 곳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이 부르던 말)에 대한 이야기가 숙종의 귀에 들어갔다. 숙종은 크게 놀라 허목의 노년을 위해 집을 지어줄 것을 명했다.

하지만 허목은 춘추시대 때 훌륭한 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안영의 고사를 인용하며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려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다. 허목은 상소에서 "신(臣)을 귀히 여기시고 총애하시는 것이 경공이 안영을 대한 것보다 못하지 않으신데, 신이 전하께 보답하는 것은 안영에 미치지 못합니다. 신이 안영보다 못하면서 안영이 헐었던 집을 편안히 여긴다면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라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숙종은 허목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호한 어명으로 집을 짓게 했다. 결국 허목은 숙종에게 집을 짓되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에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에는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수고은거(壽考恩居)"를 미수체로 써서 편액으로 걸었고,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은 신하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 광해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 그리고 우의정을 지낸 허목 세 명뿐이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서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2. 1. 미수 허목의 삶과 사상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은 조선 19대 임금 숙종 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그는 평생을 청빈하고 강직하게 살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에도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힘썼으며, 숙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연 속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특히 숙종이 하사한 은거당(恩居堂)은 그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허목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올랐으며, 조선 500년 동안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주자 중심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고학(古學)에 힘썼으며, 독자적인 전서체(篆書體)인 미수체를 창안하여 서예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허목은 숙종 4년(1678)에 숙종으로부터 은거당을 하사받았다. 그는 집을 새로 지어주겠다는 숙종의 어명을 다섯 차례나 거절하며, 중국 춘추시대 재상 안영(晏嬰)의 고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결국 숙종의 명을 받아들여 추수가 끝난 후 집을 짓게 되었고,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뜻의 "수고은거(壽考恩居)"를 직접 써서 편액으로 걸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이라 불렀다.

은거당은 10칸 규모의 가옥으로, 허목이 기거하며 저술 활동을 하던 공간이었다. 뒤쪽에는 십청원(十靑園), 앞쪽에는 괴석원(怪石園)이 있었으며, 안채, 별묘, 행랑채 등이 함께 있었다. 은거당은 일제 강점기 이후 38선 이북에 위치했다가 6.25 한국전쟁 중에 남쪽으로 오게 되었으나, 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2. 2. 숙종 대의 정치 상황

숙종(肅宗)은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허목이 숙종 4년(1678)에 은거당을 하사받을 당시 재위하고 있었다. 허목은 남인(南人)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평생 청빈하고 곧은 삶을 살았다. 숙종은 허목을 깊이 신뢰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허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를 만류하며 중앙으로 다시 부르려 했다.

숙종 즉위 초,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허목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며,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숙종은 허목의 학식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국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등 그를 중용했다. 허목이 낡고 허름한 집에서 기거한다는 소식을 들은 숙종은 크게 놀라며 집을 지어줄 것을 명했으나, 허목은 안영의 고사를 인용하며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그러나 숙종은 허목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호한 어명으로 집을 짓게 했다.

결국 허목은 숙종의 뜻을 받아들여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 집을 짓게 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 허목은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뜻의 "수고은거(壽考恩居)"라는 글을 직접 써서 편액으로 걸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렀다.

2. 3. 은거당 하사의 배경

허목은 숙종의 만류에도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옛 집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이 집은 오래전 화재로 지붕이 내려앉아 허리를 펴기 힘들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이 집을 새로 지을 것을 권했으나, 허목은 "내가 누워서 잠 잘 곳이 있고, 또 내 마음이 편하면 되지 새로이 집은 지어서 무엇하느냐"며 거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의 근시(近侍)가 허목을 다시 부르기 위한 편지나 국정에 대한 자문을 청하는 편지를 들고 허름한 집을 드나들면서 구루암(허리를 펼 수 없는 곳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이 부르던 말)에 대한 이야기가 숙종의 귀에 들어갔다. 숙종은 크게 놀라 허목의 노년을 위해 집을 지어줄 것을 명했다.

하지만 허목은 춘추시대 때 훌륭한 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안영의 고사를 인용하며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려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다. 허목은 상소에서 "신(臣)을 귀히 여기시고 총애하시는 것이 경공이 안영을 대한 것보다 못하지 않으신데, 신이 전하께 보답하는 것은 안영에 미치지 못합니다. 신이 안영보다 못하면서 안영이 헐었던 집을 편안히 여긴다면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라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숙종은 허목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호한 어명으로 집을 짓게 했다. 결국 허목은 숙종에게 집을 짓되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에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에는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수고은거(壽考恩居)"를 미수체로 써서 편액으로 걸었고,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은 신하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 광해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 그리고 우의정을 지낸 허목 세 명뿐이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서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3. 은거당의 건축과 구조

3. 1. 건축 양식과 특징

3. 2. 공간 구성과 의미

3. 3. 은거당의 가치와 의미

4. 은거당과 관련된 일화

허목(許穆)은 숙종(肅宗)의 명으로 집을 하사받았으나,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다. 허목은 중국 춘추시대의 명재상 안영(晏嬰)의 고사를 인용하며 숙종의 어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다. 안영(晏嬰)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 경공이 그의 집을 새로 지어주자, 돌아와 복명(復命)한 후 그 집을 허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허목은 자신이 안영(晏嬰)보다 못하다며, 안영(晏嬰)이 헐었던 집을 편안히 여길 수 없다고 호소했다.

허목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어명을 거두지 않고 집을 지어주었다. 허목은 숙종에게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에 집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 허목은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는 "수고은거(壽考恩居)"를 미수체(眉叟體)로 써서 편액으로 걸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렀다.

허목은 남인(南人)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조선 500년 동안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허목은 숙종의 어명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집을 짓되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에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 허목은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의미의 "수고은거(壽考恩居)"를 직접 미수체로 써서 편액으로 걸었다. 사람들은 이후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렀다. 이는 숙종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자 했던 허목의 마음을 보여준다.

4. 1. 숙종의 어명과 허목의 사양

허목(許穆)은 숙종(肅宗)의 명으로 집을 하사받았으나,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다. 허목은 중국 춘추시대의 명재상 안영(晏嬰)의 고사를 인용하며 숙종의 어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다. 안영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 경공이 그의 집을 새로 지어주자, 돌아와 복명(復命)한 후 그 집을 허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허목은 자신이 안영보다 못하다며, 안영이 헐었던 집을 편안히 여길 수 없다고 호소했다.

허목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어명을 거두지 않고 집을 지어주었다. 허목은 숙종에게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에 집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 허목은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는 "수고은거(壽考恩居)"를 미수체(眉叟體)로 써서 편액으로 걸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렀다.

허목은 남인(南人)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조선 500년 동안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4. 2. 수고은거(壽考恩居) 편액

허목은 숙종의 어명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집을 짓되 농번기를 피해 추수가 끝난 후에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집이 완성된 후, 허목은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의미의 "수고은거(壽考恩居)"를 직접 미수체로 써서 편액으로 걸었다. 사람들은 이후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렀다. 이는 숙종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자 했던 허목의 마음을 보여준다.

4. 3. 은거당과 관련된 기타 일화

5. 은거당의 소실과 현재

숙종 4년(1678) 허목이 하사받은 은거당(恩居堂)은 한국 전쟁 중 소실되었다. 은거당은 10칸 규모의 가옥으로, 허목이 기거하며 저술 활동을 하던 공간이었다. 은거당에는 신라 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거문고를 비롯하여 수많은 서책과 서화, 각종 의복과 장신구 등 역사적으로 진귀한 물품들이 가득했었다. 38선으로 인해 은거당이 북쪽에 위치했을 때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유물들이 북한의 박물관으로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전쟁 중에는 영국군의 야전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터만 남아있다.

5. 1. 일제 강점기와 38선

5. 2. 6.25 전쟁과 소실

은거당은 6.25 전쟁 중에 그 규모가 크고 방이 많아 영국군의 야전본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은거당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은 소실되었고,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신라 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거문고를 비롯하여 수많은 서책, 서화, 의복, 장신구 등 역사적으로 진귀한 물품들이 은거당에 가득했으나, 38선으로 인해 북쪽에 위치하게 되면서 많은 유물들이 북한의 박물관으로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3. 현재의 은거당 터

은거당은 조선 숙종 때 허목이 하사받은 집으로, 한국 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은거당 터는 일제 강점기 이후 38선 이북에 위치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치며 남쪽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전쟁 중에는 영국군의 야전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은거당과 함께 십청원, 괴석원등 모든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신라 시대 거문고를 비롯한 많은 서책, 서화, 의복, 장신구 등 역사적으로 진귀한 물품들도 소실되거나 북한으로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은거당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

은거당은 조선 숙종 대왕이 미수 허목에게 하사한 집으로,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허목의 삶과 숙종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담겨있다. 허목은 숙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힘썼다. 숙종은 허목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집을 지어주려 했으나, 허목은 안영의 고사를 인용하며 여러 차례 사양했다. 하지만 숙종의 뜻이 워낙 강경하여 결국 농번기를 피해 집을 짓도록 허락을 받아 은거당이 완성되었다.

허목은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라는 뜻의 "수고은거(壽考恩居)"를 직접 미수체로 써서 편액을 걸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집을 은거당이라 불렀다. 은거당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임금과 신하 간의 깊은 신뢰와 백성을 향한 애민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은거당은 일제 강점기 이후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38선 이북에 위치했다가, 한국전쟁 중에 다시 남쪽으로 오게 되었으나, 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영국군의 야전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던 은거당에는 신라 시대 거문고를 비롯한 수많은 서책과 서화, 귀중품들이 있었으나, 분단으로 인해 북한으로 이전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은거당은 비록 소실되었지만, 그 안에 담긴 허목의 청렴한 삶과 숙종의 애민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특히, 허목이 안영의 고사를 인용하며 숙종에게 올린 상소는 공직자의 청렴함과 백성을 위한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며,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6. 1. 조선 시대 사대부의 삶과 정신

6. 2. 군신의 도와 현대 사회의 리더십

6. 3.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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