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죽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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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음악이 죽은 날은 1959년 2월 3일, 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로큰롤 가수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빅 바퍼가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잦은 버스 고장과 열악한 투어 환경으로 인해 비행기를 전세 내어 이동하려 했고, 악천후와 조종사의 실수로 인해 비행기가 추락했다. 사고 이후,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고 매년 추모 콘서트가 열리고 있으며, 돈 맥클린의 노래 "American Pie"를 통해 "음악이 죽은 날"로 묘사되며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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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죽은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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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개요 | |
사고 유형 | 항공 사고 |
발생 날짜 | 1959년 2월 3일 |
요약 | 야간 악천후 속에서 통제력 상실 후 추락 |
발생 위치 | 아이오와주세로고도군그랜트 타운십 |
항공기 종류 | 비치크래프트 보난자 |
운영 주체 | Dwyer Flying Service, 아이오와주메이슨 시티 |
등록 번호 | N3794N |
출발지 | 아이오와주메이슨 시티 시립 공항 |
목적지 | 노스다코타주헥터 공항 |
탑승 인원 | 4명 |
승객 | 3명 |
승무원 | 1명 |
사망자 | 4명 |
생존자 | 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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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2. 사고 전 상황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빅 바퍼" J.P. 리처드슨 등은 1959년 1월부터 "윈터 댄스 파티"라는 이름으로 미국 중서부 지역을 순회하는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투어는 무리한 일정과 개최지 간의 먼 거리, 혹한의 날씨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동에 사용된 버스는 난방 장치가 고장 나는 등 상태가 매우 열악했으며, 이로 인해 홀리의 밴드 드러머였던 칼 번치가 심한 동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61][45]
1959년 2월 2일, 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의 서프 볼룸 공연 이후, 계속되는 버스 문제와 누적된 피로에 지친 홀리는 다음 공연 장소인 미네소타주 무어헤드까지 이동하기 위해 경비행기를 전세 내기로 결정했다.[62][46]
비행기에는 조종사 외 3명만 탑승할 수 있었기에, 홀리와 함께 리처드슨과 밸런스가 탑승하게 되었다. 리처드슨은 투어 중 얻은 감기로 인해 홀리의 밴드 멤버 웨일런 제닝스에게 자리를 양보받았고,[63][47] 밸런스는 또 다른 밴드 멤버 토미 올섭과의 동전 던지기에서 이겨 탑승 기회를 얻었다.[64][42] 디온 앤 더 벨몬츠의 디온 디무치는 1인당 36USD라는 비싼 요금 때문에 탑승을 거절했다.[66][50]
2. 1. "윈터 댄스 파티" 투어
1958년 11월, 버디 홀리는 더 크리켓츠와 관계를 정리했다. 폴 앵카에 따르면, 홀리는 매니저 노먼 페티가 자신의 돈을 가로챘다고 생각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임신한 아내 마리아 엘레나 홀리와 뉴욕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시 투어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3] 그는 제너럴 아티스트 코퍼레이션(GAC)과 계약을 맺었다.[4]
"윈터 댄스 파티" 투어는 1959년 1월 23일부터 2월 15일까지 3주간 미국 중서부 24개 도시를 순회하는 일정으로 기획되었다. 홀리는 투어를 위해 웨일런 제닝스(베이스), 토미 올섭(기타), 칼 번치(드럼)로 구성된 밴드를 새로 꾸렸고, 프랭키 사르도가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또한 당시 떠오르던 스타 리치 밸런스, "빅 바퍼" J.P. 리처드슨, 그리고 보컬 그룹 디온 앤 더 벨몬츠가 투어에 합류했다.[5]
투어는 1959년 1월 23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투어 일정은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개최지 간의 거리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아, 밴드는 매일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휴식일도 없었다. 어떤 날은 약 643.74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주간 고속도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좁은 시골길을 이용해야 했고, 이동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투어를 기획한 GAC는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음악 역사학자 빌 그리그스는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마치 지도에 다트를 던지는 것 같았죠... 지옥에서 온 투어—그들이 붙인 이름인데, 나쁜 이름은 아니죠."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6]

이동에 사용된 버스 또한 문제투성이였다. 투어 시작 직후 위스콘신주 애플턴에서 버스의 난방 장치가 고장 났고, 혹독한 겨울 날씨는 기온이 약 -6.7°C에서 약 -37.8°C까지 떨어지고, 일부 지역에서는 눈이 허리 높이까지 쌓일 정도였다. 밴드 멤버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버스는 자주 고장 나 투어 11일 동안 5번이나 교체되었으며, 교체된 버스마저도 "학생들에게도 좋지 않은 개조된 스쿨 버스"였다.[6] 멤버들은 로드 크루의 도움 없이 직접 장비를 싣고 내려야 했다. 결국 드러머 칼 번치는 미시간주 아이언우드 근처에서 버스가 고장 났을 때 심한 동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61] 번치가 빠진 동안에는 홀리, 밸런스, 디온 디무치 등이 번갈아 가며 드럼을 연주했다.[7] 리처드슨과 밸런스 역시 투어 도중 독감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2월 2일, 투어단은 위스콘신주 그린 베이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약 563.27km를 달려 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에 도착했다. 클리어레이크는 원래 투어 일정에 없었지만, 비어있는 날짜를 채우려던 투어 기획자가 지역 공연장인 '서프 볼룸'의 매니저 캐롤 앤더슨에게 연락하여 공연이 성사되었다.
서프 볼룸에 도착했을 때, 홀리는 계속되는 버스 문제로 인해 크게 좌절했다. 또한,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세탁할 시간이 없어 깨끗한 옷이 부족하다는 점에도 불만을 느꼈다. 클리어레이크에서 세탁을 하려 했지만, 그날 세탁소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62] 홀리는 밴드 멤버들에게 다음 공연 장소인 미네소타주 무어헤드까지 비행기를 빌려 이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힘든 버스 이동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무어헤드에서 예정된 라디오 방송 출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무어헤드 다음 일정은 다시 남쪽으로 약 523.04km 떨어진 아이오와주 수시티였다.
공연이 끝난 후, 비행기 조종은 아이오와주 메이슨 시티의 드와이어 플라잉 서비스 소속 21세 파일럿 로저 피터슨이 맡기로 했다. 그는 1인당 36USD의 요금을 받고 홀리 일행을 소형 단발기 보난자(1947년식 모델 35)에 태우기로 했다. 비행기에는 조종사 외에 3명의 승객만 탈 수 있었다.
원래 비행기 좌석은 홀리와 그의 밴드 멤버인 웨일런 제닝스, 토미 올섭에게 배정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투어 중 감기가 심해진 빅 바퍼 리처드슨이 제닝스에게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했고, 제닝스는 이를 수락했다.[63] 홀리는 비행기에 타지 않게 된 제닝스에게 "자네의 낡은 버스가 얼어붙기를 바라네!"라고 농담을 건넸고, 제닝스는 "그럼, 나는 자네의 낡은 비행기가 추락하기를 바라지!"라고 응수했다. 이 농담은 훗날 제닝스를 평생 괴롭히게 되었다.[64][65]
리치 밸런스는 그때까지 작은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싶어 토미 올섭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올섭은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동전 던지기는 공항에서 이륙 직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홀리가 던진 것도 아니었다. 공연장의 DJ 밥 헤일이 뮤지션들 앞에서 동전을 던졌고, 밸런스가 이겨 마지막 좌석을 차지했다.[64]
디온 앤 더 벨몬츠의 리더 디온 디무치 역시 비행기 탑승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비행 요금 36USD는 당시 디무치가 부모님께 월세 명목으로 매달 받던 용돈과 같은 액수였기에, 그는 그만한 사치를 부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66]
2. 2. 비행기 전세 결정
'윈터 댄스 파티' 투어는 3주 동안 미국 중서부 24개 도시를 순회하는 강행군이었다. 투어 일정은 이동 거리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짜였으며, 공연 장소 간의 거리가 멀어 이동 시간이 매우 길었다.[61] 설상가상으로 투어에 사용된 버스는 추운 날씨에 적합하지 않았고, 투어가 시작되자마자 난방 장치가 고장 났다. 이로 인해 크리케츠의 드러머 칼 번치는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그가 요양하는 동안 버디 홀리와 리치 밸런스가 번갈아 드럼을 쳤다.[61][45]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의 서프 볼룸은 원래 투어 일정에 없었으나, 빈 일정을 채우려던 프로모터의 제안을 지배인 캐롤 앤더슨이 수락하면서 2월 2일 월요일 공연이 성사되었다. 이날 오후 서프 볼룸에 도착한 버디 홀리는 열악한 투어 버스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밴드 멤버들에게 공연이 끝나면 비행기를 빌려 다음 공연 장소인 미네소타주 무어헤드로 이동하고 싶다고 말했다.[62][46] 또한, 빡빡한 일정 탓에 며칠 동안 옷을 세탁하지 못해 깨끗한 속옷이나 셔츠가 떨어진 상태였고, 클리어레이크의 세탁소마저 문을 닫아 세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도 홀리가 비행기를 이용하려는 이유 중 하나였다.
홀리는 무어헤드에서 가장 가까운 헥터 공항으로 가기 위해 아이오와주 메이슨시티에 있는 드와이어 플라잉 서비스에 비행기를 전세 냈다. 조종은 21세의 젊은 파일럿 로저 피터슨(Roger Peterson)이 맡았다.[12] 비행기는 1947년식 단발 엔진 비치크래프트 35 보난자 기종(등록번호 N3794N)으로, 조종사 외에 3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다. 1인당 요금은 36USD였다. 이 비행기가 돈 맥클린의 노래 제목처럼 '아메리칸 파이'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이름이 없었다.[8]

비행기 좌석은 조종사를 제외하고 세 자리뿐이었기 때문에 누가 탈지를 정해야 했다. "빅 바퍼" J.P. 리처드슨은 투어 도중 독감에 걸려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홀리의 밴드 멤버였던 웨일런 제닝스에게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했다. 제닝스는 이를 수락했다.[63][9] 홀리는 제닝스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럼, 나는 자네의 낡은 버스가 꽁꽁 얼어붙기를 바라겠네!"라고 농담을 건넸고, 제닝스는 "그럼, 나는 자네의 낡은 비행기가 추락하기를 바라겠네!"라고 농담으로 응수했다. 이 대화는 훗날 제닝스에게 평생의 상처로 남게 되었다.[64][65]
리치 밸런스는 그때까지 작은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지만, 홀리의 또 다른 밴드 멤버였던 토미 올섭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올섭은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동전 던지기는 비행 직전 공항이 아닌, 공연이 끝난 서프 볼룸의 무대 뒤편에서 사회자를 맡았던 KRIB-AM 라디오 DJ 밥 헤일(Bob Hale)이 진행했다. 밸런스가 동전 던지기에서 이겨 마지막 남은 좌석을 차지하게 되었고, "내 생애 처음으로 무언가에 당첨됐다"고 기뻐했다고 전해진다.[64][10]
투어에 함께 참여했던 디온 앤 더 벨몬츠의 디온 디무치 역시 홀리로부터 비행기 탑승 제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36USD라는 요금이 당시 부모님께 월세로 받던 금액과 같았기 때문에, 그는 비싼 요금을 부담스러워하며 제안을 거절했다.[66][11] 디온은 홀리가 자신과 밸런스, 리처드슨에게만 제안했으며, 제닝스나 올섭은 초대받지 못했다고 다르게 증언하기도 했다.[11]
3. 사고 발생
중부표준시 기준 1959년 2월 3일 오전 0시 55분경, 아이오와주 메이슨 시티 시립 공항에서 비치크래프트 보난자 경비행기가 이륙했다. 이륙 직후인 오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비행기 소유주인 허버트 드와이어는 관제탑에서 비행기의 꼬리등이 점차 하강하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67]
조종사 로저 피터슨은 이륙 후 항공 관제 센터와 비행 계획을 논의하겠다고 드와이어에게 말했으나, 실제로는 관제사를 호출하지 않았다. 드와이어가 관제사에게 피터슨과의 교신을 요청했지만 여러 차례 시도에도 응답이 없었다.[51][67]
오전 3시 30분까지 목적지인 노스다코타주 파고의 헥터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지 않자, 드와이어는 당국에 비행기 실종을 보고했다.
다음 날 오전 9시 15분경, 드와이어는 직접 다른 소형 비행기를 타고 피터슨의 예정 항로를 따라 수색하던 중, 공항에서 북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옥수수밭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했다.
비행기는 약 270km/h의 속도로 우측으로 기울어진 채 지면에 충돌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체는 얼어붙은 지면 위를 170m가량 미끄러져 나간 뒤 농장의 울타리에 부딪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손되었다.
버디 홀리와 리치 밸런스의 시신은 비행기 잔해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J. P. 리처드슨의 시신은 울타리 너머 이웃 옥수수밭에서 발견되었다. 조종사 로저 피터슨의 시신은 기체 잔해 속에 갇혀 있었다.[42] 현장에 도착한 군의 검시관 랄프 스마일리는 네 명 모두 뇌에 가해진 심각한 충격으로 인해 즉사했다고 밝혔다.
초기 조사 결과, 사고는 악천후와 조종사의 실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피터슨은 계기 비행 훈련을 받고 있었지만, 악천후 속에서 계기에만 의존하여 비행할 충분한 경험이나 자격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민간 항공 위원회(CAB)는 피터슨이 비행기에 장착된 특이한 방식의 자이로콤퍼스 계기를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과 항로상의 악천후에 대한 주의 부족을 지적하며, 자신의 능력을 인지했다면 비행을 연기했을 것이라고 보았다.[42]
3. 1. 사고 경위
공연이 끝난 후, 밥 앤더슨은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J. P. 리처드슨을 근처 메이슨 시티 시립 공항으로 데려갔다. 당시 공항의 고도는 해발 약 370.03m였다. 이륙 당시 날씨는 약한 눈이 내리고 있었으며,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운고는 해발 약 914.40m였고, 시정은 약 9.66km였으며, 바람은 시속 20mph에서 30mph로 불었다고 보고되었다. 예정된 비행 경로를 따라 날씨가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조종사 로저 피터슨이 받은 기상 정보 브리핑에서는 이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비행기는 1959년 2월 3일 화요일 오전 0시 55분(CST)에 활주로 17번(현재 활주로 18번)에서 정상적으로 이륙했다. 비행기 소유주인 허버트 제리 드와이어는 관제탑 밖 플랫폼에서 남쪽으로 이륙하는 비행기를 지켜보았다. 그는 비행기의 꼬리등을 비행 초반 동안 볼 수 있었는데, 비행기는 공항 동쪽으로 지나가기 위해 180도 좌회전을 시작했고 약 약 243.84m AGL까지 상승했다. 북서쪽 방향으로 추가 좌회전을 한 후, 꼬리등이 점차 하강하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관찰되었다. 드와이어는 이 모습을 오전 1시경 목격했다.[12]
피터슨은 이륙 후 항공 관제 센터와 무선으로 비행 계획을 계속 진행하겠다고 드와이어에게 말했으나, 실제로는 관제사를 호출하지 않았다. 드와이어는 관제사에게 피터슨과 교신을 시도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여러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었다.[67]
오전 3시 30분이 되어도 노스다코타주 파고의 헥터 국제공항에 피터슨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드와이어는 당국에 비행기 실종을 보고했다.
그날 아침 일찍, 드와이어는 피터슨의 예정된 항로를 따라 다른 소형 비행기로 수색을 시작했고, 오전 9시 35분경 공항에서 북서쪽으로 약 약 9.66km 떨어진 옥수수밭에서 산산조각 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12]
보난자 비행기는 약 시속 170mph의 고속으로 지면에 충돌했으며, 충돌 당시 90° 우측으로 기울어진 채 기수가 아래로 향한 상태였다. 오른쪽 날개 끝이 먼저 지면에 부딪히면서 깊이 약 0.61m, 길이 약 3.66m의 흠집을 남기고 부러졌다. 그 후 동체는 오른쪽 면이 아래로 향한 채 지면에 부딪혀 몇 피트 공중으로 튀어 올랐고, 남은 왼쪽 날개에서 발생한 양력으로 인해 공중에서 뒤집혔다. 비행기는 마지막으로 뒤집힌 상태에서 기수가 아래를 향한 채 다시 지면에 충돌했고, 무거운 엔진의 관성으로 인해 동체와 왼쪽 날개는 약 164.59m 동안 얼어붙은 들판 위를 미끄러져 철사 울타리에 부딪힌 후에야 멈췄다.[12]
홀리와 밸런스의 시신은 비행기 잔해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리처드슨의 시신은 울타리를 넘어 이웃한 옥수수밭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조종사 피터슨의 시신은 잔해 속에 얽혀 있어, 토치 램프를 사용하여 조종석 부분을 절단한 후에야 수습할 수 있었다.[12][13] 일행을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이륙을 지켜보았던 앤더슨이 시신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카운티 검시관 랄프 스마일리는 네 명의 희생자 모두 뇌에 가해진 심각한 둔기 외상으로 인해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홀리의 시신에서는 추락의 충격을 명확히 보여주는 여러 부상이 확인되었다.
> 찰스 H. 홀리의 시신은 인조 가죽의 노란색 재킷을 입고 있었으나, 등 부분의 솔기가 거의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두개골은 이마 중앙 부근에서 정수리까지 찢어져 뇌 조직의 절반 정도가 손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쪽 귀에서 출혈이 있었고, 얼굴에는 여러 개의 열상이 있었다. 추락으로 인해 골격에 심한 충격이 가해져 가슴 부위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 두 다리는 복합 골절 상태였다.[68]
민간 항공 위원회(CAB) 조사관들은 이 추락 사고가 악천후와 조종사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피터슨은 당시 계기 비행 자격은 있었지만, 완전한 계기 비행 능력을 갖추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었으며, 악천후 속에서 비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계기에만 의존하여 비행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CAB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피터슨은 비행기에 장착된 수평 자세 지시계(Attitude Indicator)에 대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해당 보난자 비행기에 설치된 스페리 자이로콤퍼스 방식의 자세 지시계는 일반적인 것과 표시 방식(기수가 올라가면 계기 상의 비행기 그림이 내려가는 방식)이 반대였다. 위원회는 피터슨이 계기를 잘못 해석하여 실제로는 기체가 하강하고 있음에도 상승하고 있다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피터슨이 비행 경로상의 악천후 예보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만약 자신의 한계를 인지했다면 비행을 연기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3. 2. 사고 원인
민간 항공 위원회(CAB, NTSB의 전신)는 공식 조사를 통해 사고 원인을 악천후와 조종사 로저 피터슨의 과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결론지었다.피터슨은 4년 이상의 비행 경력과 총 711시간의 비행 시간을 보유했으며, 이 중 128시간은 사고 기종인 비치크래프트 보난자 운항 경험이었다. 그는 또한 52시간의 계기 비행 훈련을 이수했지만, 필기시험만 통과했을 뿐 실제 악천후 속에서 계기에만 의존하여 비행할 자격은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12] 피터슨과 그가 소속된 드와이어 비행 서비스는 시계 비행 규칙(VFR) 하에서만 운항하도록 허가받았는데, 이는 조종사가 비행 경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고 당시 밤에는 낮은 구름이 끼고 가시적인 수평선이 없었으며,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라 지상 조명도 부족하여 시계 비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이었다.[12]
조사관들은 피터슨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비행을 시도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직 계기 비행 훈련을 이수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특히 야간 악천후 속에서 계기만을 의존해야 하는 비행에는 경험과 자격이 부족했다. 게다가 피터슨에게 제공된 야간 기상 브리핑은 "심각하게 부적절"했으며, 비행에 불리한 조건들을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12] 만약 피터슨이 자신의 역량과 당시 기상 조건을 정확히 인지했다면 비행을 연기했을 것이라고 CAB는 지적했다.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사고기에 장착된 계기판의 문제였다. 피터슨은 일반적인 인공 수평선(Artificial Horizon) 계기가 장착된 항공기에서 계기 훈련을 받았다. 이 계기는 통상 위쪽이 하늘, 아래쪽이 지면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고기인 보난자에는 구형 스페리 F3 자세 자이로스코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계기는 반대로 위쪽이 지면, 아래쪽이 하늘을 표시하는 방식이었다.[12] CAB는 피터슨이 이륙 후 익숙하지 않은 스페리 자이로스코프를 보면서, 실제로는 기체가 하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승하고 있다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불과 9개월 전에 계기 실기 시험에서 불합격했던 점과도 연관 지어졌다.[12]
결론적으로 CAB는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을 피터슨이 자신의 계기 비행 능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악천후 속 야간 비행을 강행한 "조종사의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라고 명시했다.[12]
4. 사고 이후
홀리의 아내 마리아 엘레나 홀리는 텔레비전 뉴스 보도를 통해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을 잃은 그녀는 이 충격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으로 유산을 겪었다.[5] 홀리의 어머니 역시 텍사스주 러벅의 자택에서 라디오로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쓰러졌다.[5] 이 사건 이후, 유족에게 비보를 먼저 알리기 전까지 언론에 사망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정책이 시행되었다.[26]
비극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윈터 댄스 파티" 투어는 계속되었다. 다음 공연지였던 미네소타주 무어헤드에서는 당시 15세였던 바비 비(Bobby Vee)가 홀리의 빈자리를 채웠는데, 그가 홀리의 "모든 노래 가사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16] 제닝스와 올섭은 2주 동안 투어를 더 진행했으며, 제닝스가 홀리를 대신해 리드 싱어로 활동했다. 투어의 남은 기간에는 지미 클랜턴(Jimmy Clanton), 파비안(Fabian), 프랭키 아발론(Frankie Avalon) 등이 추가로 합류하여 공연을 이어갔다.[17] 이후 사고 원인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4. 1. 희생자들의 장례식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치러졌다. 홀리와 리처드슨(빅 바퍼)은 텍사스에, 발렌스는 캘리포니아에, 로저 피터슨은 아이오와에 묻혔다. 홀리의 미망인 마리아 엘레나 홀리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18]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면에서는 제 자신을 탓해요. 그가 떠날 때 몸이 좋지 않았어요. 임신 2주차였고, 버디가 저와 함께 있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 투어를 계획했죠. 제가 그와 함께하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었어요. 만약 제가 함께 갔더라면 버디는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자신을 탓합니다."[19]4. 2. 사고 조사 및 재조사
민간 항공 위원회(CAB, NTSB의 전신)가 공식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조종사 로저 피터슨은 4년 이상의 비행 경력(총 711시간, 보난자 기종 128시간)과 52시간의 계기 비행 훈련 경력이 있었지만, 계기 비행 자격 시험은 필기만 통과한 상태였다. 따라서 악천후 속에서 계기에만 의존해 비행할 자격은 없었다.[12] 피터슨과 드와이어 비행 서비스는 시계 비행 규칙(VFR)에 따라 운항하도록 허가받았는데, 이는 조종사가 비행 경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고 당시 밤에는 낮은 구름과 희미한 지상 조명 때문에 시계 비행이 거의 불가능한 조건이었다.[12]
결정적으로, 피터슨은 일반적인 인공 수평선으로 계기 훈련을 받았으나, 사고 항공기(비치크래프트 보난자)에는 구형 스페리 F3 자세 자이로스코프가 장착되어 있었다. 이 두 계기는 항공기의 고도 정보를 그래픽으로 정반대 방식으로 표시한다. 일반적인 인공 수평선은 위쪽이 하늘, 아래쪽이 지상을 나타내지만, 스페리 F3는 위쪽이 지상, 아래쪽이 하늘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조사관들은 피터슨이 실제로는 하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기를 보고 상승하고 있다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12]
또한 피터슨에게 제공된 야간 기상 정보는 "심각하게 부적절"했으며, "강조했어야 할 불리한 비행 조건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12] CAB는 사고의 주요 원인을 그가 갖추지 못한 기술을 요구하는 악천후 속 야간 비행을 시도한 "조종사의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라고 결론 내렸다.[12][42]
2007년 3월 6일, 빅 바퍼의 아들 제이 페리 리처드슨의 요청으로 아버지의 시신이 텍사스주 보몬트의 포리스트 론 묘지에서 발굴되어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묘지 내 더 적합한 장소로 이장하면서 진행된 것이다.[20] 재조사는 사고 현장에서 홀리의 22구경 권총이 발견된 점[69]과 리처드슨의 시신이 다른 희생자들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점[70] 때문에 수십 년간 제기된 의문, 즉 비행 중 총기 오발 사고 가능성과 리처드슨이 추락 후 생존하여 기체 밖으로 기어 나왔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69][70] 법인류학자 윌리엄 M. 배스가 엑스레이 촬영 등 정밀 조사를 수행한 결과, 리처드슨의 시신에서는 총알에서 나온 납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총상의 흔적도 없었다. 또한 온몸의 뼈가 매우 심하게 골절된 상태여서 추락 즉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써 총기 오발설과 추락 후 생존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1959년 검시관 랄프 스마일리의 보고서가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20][21][53][54]
2015년 3월, 뉴잉글랜드 출신의 은퇴한 조종사 L. J. 쿤이 미국 연방 교통 안전 위원회(NTSB)에 사고 재조사를 요청했다.[22] 쿤은 1959년 조사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른쪽 러더베이터 고장, 연료 계통 문제, 부적절한 무게 배분 등 기체 결함 가능성을 주장했다. 또한 피터슨이 악조건 속에서도 비행기를 착륙시키려 노력했을 수 있으며, 그의 노력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3][24] 그러나 NTSB는 2015년 4월, 쿤이 제시한 증거가 기존 결론을 재고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재조사 요청을 기각했다.[25][31]
5. 추모 및 기념
홀리, 발렌스, 리처드슨의 팬들은 1979년부터 아이오와주 클리어 레이크의 서프 볼룸에서 매년 기념 콘서트를 열고 있다.[28]
사고 50주년이 되는 2009년 2월 2일에는 특별 기념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에는 델버트 맥클린턴, 조 엘리, 완다 잭슨, 로스 로보스, 크리스 몬테즈, 바비 비, 그레이엄 내쉬, 피터 앤 고든, 토미 올섭 등이 참여했으며, 척 리벨, 제임스 "허치" 허친슨, 바비 키스, 케니 애로노프로 구성된 하우스 밴드가 공연을 뒷받침했다. 빅 바퍼의 아들인 제이 페리 리처드슨도 참여했으며, 1959년 당시 콘서트 사회를 맡았던 밥 헤일이 다시 사회를 보았다.[29][30]
5. 1. 기념비 건립
1988년 6월, 아이오와주 클리어 레이크의 서프 볼룸 밖에 높이 약 1.22m의 화강암 기념물이 세워졌다. 이 기념비에는 조종사 로저 피터슨과 세 연주자(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빅 바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막식에는 피터슨의 미망인, 부모, 누이가 참석했으며, 이는 홀리, 리처드슨(빅 바퍼), 밸런스, 피터슨의 가족들이 처음으로 함께 모인 자리였다.1989년(일부 자료에서는 1988년[55]), 1950년대 음악 팬이었던 위스콘신 출신의 켄 파켓(Ken Paquette)은 사고로 사망한 세 연주자를 기리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로 또 다른 기념비를 제작했다.[71] 이 기념비는 기타와 세 연주자의 이름이 새겨진 세 개의 음반 모양을 하고 있다. 기념비는 클리어 레이크에서 북쪽으로 약 8.05km 떨어진 315번가와 걸 애비뉴(Gull Avenue)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약 약 0.40km 지점의 사유지에 위치해 있다. 이 교차로에는 버디 홀리가 착용했던 것과 비슷한 웨이페어러 스타일의 대형 플라즈마 컷 강철 안경 조형물이 설치되어 사고 현장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31] 실제 사고 지점은 이 안경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울타리 선을 따라 약 563.88m 더 들어가야 한다.


켄 파켓은 세 연주자가 마지막 공연을 했던 위스콘신주 그린 베이의 리버사이드 볼룸(Riverside Ballroom) 외부에도 이들을 위한 스테인리스 스틸 기념비를 만들어 2003년 7월 17일에 공개했다.[72][32][56] 2009년 2월에는 사고 현장에 조종사 로저 피터슨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가 켄 파켓에 의해 추가로 설치되었다.[73][33][57]
5. 2.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이 비극적인 사고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 영감을 주거나 소재로 사용되었다.- 1978년에 개봉한 전기 영화 ''버디 홀리 스토리''는 클리어 레이크 콘서트 장면 이후, 정지 화면과 함께 "…그리고 나머지는 로큰롤이다."라는 자막을 통해 주인공들의 죽음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 리치 발렌스의 삶을 다룬 1987년작 ''라 밤바''에서는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음)과 사고 이후 발렌스의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반응을 보여준다.
- 가수 토미 디는 사고 직후인 1959년, 희생된 세 음악가를 기리는 노래 "Three Stars"를 발표했다.[35]
- 마이크 베리는 1961년 사고 당일 밤을 그린 "Tribute to Buddy Holly"를 녹음했다.[36] 이 노래는 영국 싱글 차트에서 24위를 기록했지만,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이유로 BBC에서 방송이 금지되기도 했다.[37][38]
- 돈 맥클린은 버디 홀리의 팬으로, 1971년 발표한 그의 대표곡 "American Pie"에서 이 사고를 "음악이 죽은 날"이라고 언급하며 추모했다. 맥클린에게 이 사건은 초기 로큰롤 시대가 가졌던 순수함이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39]
- 웨일론 제닝스는 1978년 발표한 앨범 ''I've Always Been Crazy''의 수록곡 "A Long Time Ago"에서 당시의 기억을 잠시 언급했다. 그는 노래 가사를 통해 "그 비행기에서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했는지 묻지 마세요,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라며 비행기에 타지 않았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 가수 디온은 "Hug My Radiator"라는 곡에서 혹독했던 투어 버스의 추위와 고장 등을 노래했다. 비록 사망한 세 명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디온은 인터뷰를 통해 이 노래가 당시 투어에 대한 기억이며, 자신도 비행기를 탈 뻔했지만 요금이 비싸 타지 않았다고 밝혔다.[40]
- 독일의 펑크 록 밴드 Die Ärzte는 1985년 발표한 앨범 ''Im Schatten der Ärzte''에 "Buddy Holly's Brille"(버디 홀리의 안경)라는 곡을 수록했다. 이들은 특유의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버디 홀리의 안경 행방을 묻는 가사를 통해 사고를 다루었다.
- 하워드 월드롭의 단편 소설 "Save a Place in the Lifeboat for Me" (''하워드 후?'' 수록)는 치코 마르크스와 하포 마르크스, 애보트와 코스텔로, 로렐과 하디 등 유명 코미디언들이 사고를 막으려 한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다룬다.[41]
- T.J. 클룬의 2020년 판타지 소설 "세룰리언 바다의 집"에서는 고아 소년 루시가 홀리, 빅 바퍼, 발렌스의 음반을 모으고, 주인공 라이너스와 함께 비행기 추락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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