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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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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1929년 경성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의 사회 운동을 지도했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항일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반제국주의동맹, 경성콤그룹 등에서 핵심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을 맡았으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한국 전쟁 중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2015년 대법원은 그의 처형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했고, 유족의 국가배상 청구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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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관술(1929)
한글이관술
한자李觀述
가타카나イ・グヮンスル
히라가나り かんじゅつ
인물 정보
이름이관술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시절 이관술
출생일1900년 4월 26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
사망일1950년 7월 3일
사망지골령골
국적대한제국
직업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자

2. 생애

서울의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사범학교 지리학과를 1929년에 졸업하였다. 동학계가 설립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역사 교사로 부임하여, 광주학생항일운동 연합휴교로 체포된 학생들을 계기로 한국 독립운동에 참여, 마르크스주의 독서회를 주최하였다. 1932년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회를 조직하여 국제적인 반제국주의·반전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월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가석방되어 이재유조선공산당 경성 재건 그룹 결성에 참여, 학생운동 지도를 담당하였다. 1935년 체포를 피해 경성 근교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지하출판과 노동운동 조직화에 힘썼다. 1939년, 사회주의 세력의 한국 독립운동 집대성인 京城コムグループ|경성콤그룹한국어을 결성하였다.

일본의 패전 후 남조선노동당의 총무부장·재정부장을 맡았으나, 1946년 미군정의 공산주의자 탄압으로 "精版社偽造紙幣事件|정판사 위조지폐 사건한국어"에 연루, 증거불충분 상태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다른 정치범들과 한국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2015년, 한국 대법원은 불법적인 처형임을 인정하고, 유족의 국가배상 청구를 인정하였다.[3]

2. 1. 생애 초반 (1902년 ~ 1939년)

울산에서 성장 후, 일본에 유학하여,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2] 아버지 이종락(李宗洛)은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장자였다.[2] 서울의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사범학교 지리학과에 유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다.[3]

192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2] 동학계가 설립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역사 교사가 되었다.[3]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 체벌을 하지 않은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인기교사가 되었다.[2] 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것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하였다.[2] 제자들의 독서회 모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그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2] 제자로는 1930년대부터 40년대에 걸쳐 독립운동에서 활약한 박진홍, 이경선 등이 있었다.[3]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순금도 1930년 3월에 동덕에 편입한 뒤 이효정, 박진홍과 함께 어울렸고 독서회에 참여했다. 이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에 맞춰 펼친 백지동맹을 주도했다.[2] 이순금은 후에 유명한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가 된다.[2]

그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항일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2] 반제국주의동맹-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에서 핵심 지도자로 일하게 된 그는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이자 혁명가였다.[2] 1932년에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회를 조직하여 국제적인 반제국주의·반전주의의 일익을 담당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3] 1920년대 숱하게 명멸한 조선공산당의 오류를 답습하지 않고 이재유와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진행해나갔다.[2] 정책적 대안 마련을 위해 '노동조건조사표'를 작성해 공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기도 했다.[2] 그는 수배 중에 구두닦이, 고물장수, 솥땜장이로 위장해 일제경찰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2]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거물급 노동운동가로서 경성부를 거점으로 활동했다.[2] 1935년에 엠엘파의 이재유와 함께 《적기》를 출간하는 등 반제동맹을 재건하려 했으나, 곧 이재유가 검거되었다.[2] 이듬해 1월에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가석방되어 이재유와 함께 조선공산당 경성 재건 그룹의 결성에 참여하여 학생운동 지도를 담당하였다.[3] 이에 신분을 위장하고 지방을 전전하면서 은거하기도 하였으며, 1937년에는 상경하여 영등포에서 노동 운동을 벌였다.[2] 1935년에는 체포를 피해 경성 근교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지하출판과 노동운동 조직화에 힘썼다.[3]

1939년에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고 전향하지도 않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김삼룡, 장순명, 권오직, 이현상, 김단야, 이순금 등으로 구성된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2] 京城コムグループ|경성콤그룹한국어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한 한국 독립운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3]

2. 2. 경성콤그룹 활동과 투옥 (1939년 ~ 1945년)

1939년 김삼룡, 장순명, 권오직, 이현상, 김단야, 이순금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관술의 벗 이재유1944년 10월 26일 청주형무소에서 옥사했지만, 이관술은 해방을 대전 고물상에서 맞이했다.

2. 3. 해방 이후 활동과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45년 ~ 1950년)

해방 직후 잡지 <선구>의 최초 정치여론조사(1945.12)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5위에 선정될 만큼 현대사 속 중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박헌영은 남로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당수였고, 이관술은 조선공산당 총무이자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0~40년대에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에 전향하거나 순응해 별다른 독립운동을 하지 못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이다.

해방과 함께 박헌영의 재건파에 합류해 남로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을 맡았고,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건국 활동에 앞장섰다. 1946년 7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판사 위폐사건'이란, 조선공산당 간부 및 조선정판사 직원들이 공모하여 조선정판사 인쇄시설을 이용해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까지 총 6회에 걸쳐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유가족과 일부 학자들은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미군정이 주도해 조작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이관술은 만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대전 산내에서 '위조 지폐범'이라는 오명을 쓴 채 복역하고 있던 대전형무소 인근 골령골(현.대전시 낭월동)에서 즉결처형되었다. 이관술이 죽던 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5년 3월 31일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6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2]

산내학살사건의 주범은 심용현이었다. 심용현 중위는 산내 학살현장에서 모든 사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역할을 했다.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 학살과 1950년 7월 초 형무소 재소자 1800여 명 학살이 그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54년 12월 중령으로 예편한 후 성신학원 이사장을 4차례 역임했고, 1986년 4월 사망했다.[3]

이관술이 감옥에 있을 때인 1947년 울산군 언양면 반곡리에 초등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벌어졌다. 4인의 독지가가 땅을 기부했는데, 총 5715평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4인 중에 이관술이 포함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범서면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한 것으로 나온다. 무기징역에 처해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그가 가세가 기울어 가족의 생계도 걱정되었을 텐데, 그 와중에 500평의 땅을 반곡초등학교를 세우는 데 선뜻 기부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4]

2. 4. 한국 전쟁 중 처형과 사후 재평가 (1950년 ~ 현재)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이관술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대전 산내 골령골(현.대전시 낭월동)에서 '위조 지폐범'이라는 오명을 쓴 채 즉결처형되었다.[2] 이관술이 죽던 날 이후 며칠간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는데, 이를 산내학살사건이라 부른다.[2] 2015년 3월 31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 학살에 대해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 배상 판결을 내렸다.[2]

산내학살사건의 주범은 심용현이었다. 심용현 중위는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 학살과 7월 초 형무소재소자 1800여 명 학살을 주도했다.[3] 그는 1954년 12월 중령으로 예편 후 성신학원 이사장을 4차례 역임했고, 1986년 4월 사망했다.[3]

이관술은 1947년, 울산군 언양면 반곡리에 초등학교를 세우는 운동에 참여하여 542평의 땅을 기부하기도 했다.[4]

이관술의 큰사위 박동철과 이복동생 이학술도 한국전쟁 중 학살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울산군 태화초등학교에서 희생자들의 합동위령제가 열렸고 백양사 아래에 합동묘가 만들어졌으나,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묘는 파헤쳐지고 유해는 화장되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는 이관술 생가가 있으나, 안내판은 없고 비석은 땅속에 묻혀 있다. 2019년 4월 24일, '이관술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관술의 유족으로는 막내딸 이경환이 있으며, 2012년 국가 상대 소송에서 승소하여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았다.[6] 현재 시민단체 등과 함께 이관술 재조명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6]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는 이관술이 일제강점기에 두 차례에 걸쳐 4년 6개월 감옥살이와 8년여의 수배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한 공적이 외면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7] 이관술은 북한 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원봉, 이극로, 이화림과 달리 훈장 추서 가능성이 높다.

3. 가족 관계 및 개인사

이관술은 1934년 무렵 동덕고녀 제자였던 함흥 출신 박선숙(朴善淑, 1909~?)과 혼인하였다.[5]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4명의 딸을, 두 번째 부인과는 1명의 딸을 두었다. 하지만 장녀의 남편은 장인이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전쟁 때 보도연맹에 가입해 처형당했다. 둘째 딸과 둘째 부인 및 그 딸은 한국 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현재 유일한 유족은 막내딸 이경환으로, 2012년 국가 상대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서 명예를 되찾았다. 현재 시민단체 등과 함께 아버지 이관술 재조명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6]

이관술의 큰사위 박동철과 이복동생 이학술도 한국 전쟁 중 희생되었다. 박동철은 이관술의 딸 이경환과 같이 소송에 참여한 박경희의 부친이다. 1950년 8월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됐다.

4. 평가 및 유산

이관술은 일제강점기에 두 차례에 걸쳐 4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8년여 동안 수배 생활을 겪으며 모진 고문과 폭력을 이겨냈다. 그는 개인 재산까지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7]

1950년 8월, 이관술의 큰사위 박동철과 이복동생 이학술은 경남 울산군에서 총살당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울산 태화초등학교에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모여 이들을 위한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백양사 아래에 합동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박정희 군사 쿠데타로 인해 묘가 파헤쳐졌다. 경찰은 유해를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는 이관술 생가가 있다. 생가에는 안내판이 없고, 현재 소유주는 집을 매각하려 한다. 생가 옆 텃밭에는 이관술 비석이 땅속에 묻혀 있다. 2019년 4월 24일, '이관술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7]

이관술은 김원봉, 이극로, 이화림과 달리 북한 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훈장 추서 가능성이 높다. 그는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인물인데,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관술의 유족으로는 막내딸 이경환이 있으며, 2012년 국가 상대 소송에서 승소하여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했다. 현재 시민단체 등과 함께 이관술 재조명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6]

참조

[1] 기타
[2] 저널 "전쟁 발발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 부당" https://news.v.daum.[...] 오마이뉴스 2015-04-02
[3] 저널 "[박만순의 기억전쟁] 주저하는 부하 다리에 사격... 3200명 학살하고 승승장구한 군인"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6-04
[4] 저널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4-27
[5] 저널 "[현대사 아리랑]‘끝없는 도주’ 일생 이관술" https://news.naver.c[...] 주간경향 2008-12-04
[6] 저널 "독립운동했는데 '빨갱이' 낙인... \"재조명해 유공자로\""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5-22
[7] 저널 "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https://news.naver.c[...] 파이낸셜뉴스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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