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로하 노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로하 노래는 일본 가나 문자를 이루는 47개의 문자를 한 번씩 사용하여 지어진 일본의 고전 시가이다. 1079년에 기록된 금광명최승왕경음의에 처음 등장하며, 불교의 무상함을 주제로 한다. 이 시는 일본어의 기초를 배우는 데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순서를 나타내는 데 활용된다. 또한, 이로하 노래의 각 행의 마지막 글자를 조합하여 숨겨진 의미를 찾는 암호설도 존재한다.

2. 내용

Yoi mo sezu43–47취하지도 않으리.



참고:



아베 류이치(安倍 龍一) 교수[3]의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quotation|

Although its scent still lingers on

the form of a flower has scattered away

For whom will the glory

of this world remain unchanged?

Arriving today at the yonder side

of the deep mountains of evanescent existence

We shall never allow ourselves to drift away

intoxicated, in the world of shallow dreams.

}}

고마쓰 히데오(小松秀雄)는 만요가나 원문의 각 행의 마지막 음절(止加那久天之須일본어)을 합치면 "toka [=toga] nakute shisu"(咎無くて死す일본어)라는 숨겨진 문장이 드러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잘못 없이 죽다"라는 뜻으로, 이것이 쿠카이를 찬양하는 추모시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로하가 쿠카이의 사후에 쓰여졌다는 견해를 더욱 뒷받침한다.[3]

현대에 전해지는 이로하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로하니호헤토 치리누루오

: 와카요타레소 츠네나라무

: 우이노오쿠야마 케후코에테

: 아사키유메미시 에히모세스



: 色は匂へど 散りぬるを

: 我が世誰ぞ 常ならむ

: 有為の奥山 今日越えて

: 浅き夢見し 酔ひもせず

               

7・5조의 가요 형식인 今様으로, 가나를 중복하지 않고 만들어졌지만, 이것이 어떤 내용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후술). 예로부터 "이로하 47자"로 알려져 있지만, 마지막에 "京"자를 더하여 48자로 한 것도 많으며, 현대에는 "ん"을 더하는 경우도 있다. 47자의 마지막에 "京"자를 더하는 것은, 弘安 10년(1287년)에 성립된 료존의 저서 『실담륜략도초(悉曇輪略図抄)』에 "말미에 경의 글자가 있다"라고 적혀 있으며, 이 당시에는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京"자가 추가된 이유에 대해서는, 가나 문자의 直音에 대해 "京"자로 拗音의 발음을 익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5] 이로하 순서에는 "京"자가 포함되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져, 이로하 가루타의 마지막에서도 "'''京'''의 꿈 오사카의 꿈"이 되어 있다.[6]

참고로 "京"자의 문제와는 별도로, 이로하가에는 "え"가 하나 더 있어 원래는 48자였다는 설이 있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걸쳐서는, 아행의 "에"/e/와 야행의 "え"/je/는 발음상의 구별이 있었고, "けふこえて"의 "え"는 야행의 "え"에 해당하지만, 파격적인 "わかよたれそ"에 주목하여, 원래 이 부분에 아행의 "え"가 있었을 가능성(わがよたれそえ つねならむ)이 지적되고 있다.[7]

불교 용어인 우이/有為일본어는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사물(산스카라)을 뜻한다. "有為の奥山"은 무상의 현세를 끝없이 이어지는 깊은 산에 비유한 것이다.[23]

이로하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 왔지만, 대부분은 "향기로운 꽃도 져 버린다. 이 세상에 누가 영원할까. 지금 현세를 초월하여 덧없는 꿈을 꾸거나 술에 취하지 않으리라" 와 같이 불교적인 무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신의진언종의 조사인 각반(1095 - 1144년)은 저서 『밀엄제비석』(密厳諸秘釈)에서 いろは歌는 『대반열반경』에 있는, 다음과 같은 "諸行無常"으로 시작하는 무상게(無常偈)의 의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Quote|

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為楽

제행은 무상이니, 이는 생멸의 법이다.


생멸(에 대한 집착을) 멸하고 끝났으니, 적멸을 가지고 락으로 한다.

| }}

즉,

:諸行無常→색은 향기로워도 져 버리는구나

:是生滅法→내 세상에 누가 영원하리오

:生滅滅已→유위의 깊은 산 오늘 넘어

:寂滅為楽→얕은 꿈 꾸고 취하지도 않으리라

와 같이 이 네 구절의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구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전술한 『실담륜략도초(悉曇輪略図抄)』에서는 "いろは"는 "色は"가 아니라 "色葉"이며, 봄의 벚꽃과 가을의 단풍을 가리킨다고 한다. 또 청음인지 탁음인지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다르지만, 『실담륜략도초(悉曇輪略図抄)』는 "あさきゆめみし"의 "し"는 "じ"로 탁음으로 읽고, 즉 "夢見じ"(꿈꾸지 않으리라)라는 부정의 의미로 한다. 반면 『밀엄제비석』은 이 "し"를 청음으로 하므로, 이는 조동사 "き"의 연체형 "し"에 해당한다. 17세기의 승려 관응(觀應) 저서 『보망기』(補忘記)에서는 마지막 "ず"를 제외하고 모두 청음으로 한다든지, 이 송문은 고문헌에서도 청탁의 표기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꿈"이나 "취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으며, 결국 내용이나 문맥에 대한 확정된 설명은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마쓰 히데오(小松英雄)는 이 무상게와 いろは歌를 연결하는 해석에 대해 "꽤 억지스럽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부정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하지만, 이러한 연결을 전제로 하여, 그 위에 더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삼가는 편이 좋다"라고 말하고 있다.[24]

2. 1. 현대어 번역

이로하 노래는 일본 고어와 시어, 불교 용어들이 섞여 있어서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인용 상자|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져버리거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누군들 영원하리

덧없는 인생의 깊은 산을 오늘도 넘어가노니

헛된 꿈 꾸지 않으리 취하지도 않을 테오.

|정렬=right}}

일본 옛 사람들은 시에서 꽃이 화사하게 핀 것을 이로가 니오우/色が匂ふ일본어 (색에서 향기가 난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즉, 이 시 구절은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었다는 시적인 표현이다. 유위(우이/有為일본어)는 불교 용어로 무위에 반대되는 개념에서 인과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현상, 사물들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실제 모습도 결국 유위라고 보고 있다. 즉 여기서는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한 인생을 유위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유위의 깊은 산"은 즉 덧없는 인생의 험난함을 깊은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하는 표현이다. 아사키 유메/浅き夢일본어은 얕은 꿈이라는 뜻이고 이는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헛된 욕망을 암시한다. 지/~じ일본어는 "~하고 싶지 않다"는 부정의 희망 표현이다.

2. 2. 원문

만요가나(万葉仮名)를 이용하여 표기한 金光明最勝王経音義에 쓰어진 원문은 다음과 같다.

:以呂波耳本へ止

:千利奴流乎和加

:餘多連曽津祢那

:良牟有為能於久

:耶万計不己衣天

:阿佐伎喩女美之

:恵比毛勢須

오늘날에도 이로하 노래를 만요가나인 '伊呂波 노래'로 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히라가나로 적힌 시의 본문(고어체인 ゐ(wi)와 ゑ(we)를 사용)은 다음과 같다.

고어체현대체순서 (사용법 참조)번역
히라가나음역한자히라가나발음숫자
いろはにほへと일본어Iro fa nifofeto色は匂えど [いろはにおえど]일본어Iro wa nioedo1–7피어나는 꽃조차 [색깔은 향기롭지만]
ちりぬるを일본어Tirinuru wo散りぬるを일본어Chirinuru o8–12결국에는 흩어지고
わかよたれそ일본어Wa ka yo tare so我が世誰ぞ [わがよだれぞ]일본어Wa ga yo dare zo13–18이 세상 누가
つねならむ일본어Tune naramu常ならん [つねならん]일본어Tsune naran19–23영원할까? (= つねなろう)
うゐのおくやま일본어Uwi no okuyama有為の奥山 [ういのおくやま]일본어Ui no okuyama24–30무상의 깊은 산
けふこえて일본어Kefu koyete今日越えて [きょうこえて]일본어Kyō koete31–35오늘 넘어
あさきゆめみし일본어Asaki yume misi浅き夢見じ [あさきゆめみじ]일본어Asaki yume miji36–42얕은 꿈은 꾸지 않으리
ゑひもせす일본어Wefi mo sesu酔いもせず [えいもせず]일본어Ei mo sezu¹
Yoi mo sezu
43–47취하지도 않으리.



고어체, 폐어, 그리고 역사적 히라가나는 현재는 고유 명사와 특정 오키나와 표기법에서만 사용되는 ゐ일본어(역사적 일본어 ''wi'', 현대어 ''i'')와 ゑ일본어(역사적 일본어 ''we'', 현대어 ''e'')를 사용한다.

모라 에(え일본어 & 衣일본어)와 예는 10세기에 로 합쳐졌으며,[2] 이는 이 시가 1079년에 기록되기 약간 전의 일이다.

고마쓰 히데오(小松秀雄)는 만요가나 원문의 각 행의 마지막 음절(止加那久天之須일본어)을 합치면 "toka [=toga] nakute shisu"(咎無くて死す일본어)라는 숨겨진 문장이 드러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잘못 없이 죽다"라는 뜻으로, 이것이 쿠카이를 찬양하는 추모시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로하가 쿠카이의 사후에 쓰여졌다는 견해를 더욱 뒷받침한다.[3]

3. 역사

문헌상 최초의 것은 1079년에 완성한 《금광명최승왕경음의( こんこうみょうさいしょうおうぎょうおんぎ/金光明最勝王経音義일본어)》에 있는 대위이 노래이다. 970년에 완성한 원위헌 언어 유희[口遊]에는 같은 종류의 연습 노래로서의 천지의 노래를 언급하기는 했어도, 이로하 노래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천록(天禄) 원년(970년)에 성립된 『구유(口遊)』(원위헌(源為憲) 저)에는, 가나를 중복하지 않는 송문인 아메츠치노우타(あめつちの詞)와 다이제니노우타(大為爾の歌)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이로하 노래에는 언급이 없다. 또한 이로하 노래를 기록한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금광명최승왕경음의(金光明最勝王経音義)』는 조랴쿠(承暦) 3년(1079년)에 성립된 것으로 보아, 이로하 노래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중엽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하 노래의 문헌상 가장 오래된 예는 『금광명최승왕경음의(金光明最勝王経音義)』(대동급기념문고 소장)이다. 저자는 불명이며, “承暦三年己未四月十六日抄了”라는 발문을 가지고 있다. “음의(音義)”란 경전에 기록된 한자의 자의(字義)와 발음에 대해 설명한 책으로, 이것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에 있는 어구에 관한 것이다. 이로하 노래는 “先可知所付借字(먼저 붙이는 바의 빌린 글자를 알아야 한다)”라는 단서를 처음에 두고, 아래와 같이 가나가 아닌 빌린 글자(借字)로 적혀 있으며, 음훈(音訓)의 읽기로 사용되는 글자의 목록이 되어 있다. 일곱 글자씩 구분하여 크게 적힌 각 글자 아래에, 작게 적힌 동음의 빌린 글자(〈 〉 안의 글자) 하나 또는 두 개가 덧붙여진다(단, “於”(お)의 빌린 글자에는 작은 글자가 없다).

以〈伊〉呂〈路〉波〈八〉耳〈尓〉本〈保〉へ〈反〉止〈都〉
千〈知〉利〈理〉奴〈沼〉流〈留〉乎〈遠〉和〈王〉加〈可〉
餘〈与〉多〈太〉連〈礼〉曽〈租〉津〈ツ〉祢〈年〉那〈奈〉
良〈羅〉牟〈无〉有〈宇〉為〈謂〉能〈乃〉久〈九〉
耶〈也〉万〈末/麻〉計〈介/気〉不〈布/符〉己〈古〉衣〈延〉天〈弖〉
阿〈安〉佐〈作〉伎〈畿〉喩〈由〉女〈馬/面〉美〈弥〉之〈志/士〉
恵〈會/廻〉比〈皮/非〉毛〈文/裳〉勢〈世〉須〈寸〉



각 글자에는 성점이 붉은색으로 적혀 있으며, 각 글자의 악센트를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고마쓰 히데오는 각 글자의 악센트의 높낮이 배치를 분석하여, 이 이로하 노래가 한어의 성조 훈련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4] 참고로 성점이 찍힌 이로하 노래는 진언종이나 성명과 관련된 고문헌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 『금광명최승왕경음의(金光明最勝王経音義)』의 것과는 악센트의 높낮이가 각각 다르다.

미에현메이와정의 사이궁 유적에서 2010년히라가나로 이로하 노래(いろは歌)가 쓰여진 4개의 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헤이안 시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전반의 접시 모양의 토사기이며, 출토된 히라가나로 쓰인 이로하 노래로서는 국내 최고(最古)의 것이다. 4개의 파편을 이어 붙이면 세로 6.7cm, 가로 4.3cm 정도가 되며, 안쪽에는 「누루오와카(ぬるをわか)」, 바깥쪽에는 「츠네나라(つねなら)」라고 먹으로 쓰여 있다. 섬세한 필체와 토기 양면에 쓰여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사이궁역사박물관에서는 사이왕의 여관이 글씨 공부를 위해 쓴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8] 이로하 노래를 적은 토기는 사가현고시시의 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12세기 중엽의 것으로 여겨진다.[9] 또한 목간에 적힌 것도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10]

가나를 모두 담은 이로하 노래는 11세기 무렵부터 가나의 손글씨 연습을 위한 모범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는 가나의 손글씨 연습용으로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3,065개의 서당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로하 노래를 손글씨 연습에 사용한 곳은 2,347곳에 달하며, 그 다음으로 많은 "마을 이름"(인근 지명을 열거한 것)보다 850곳이나 많았다.[11]

메이지 시대 이전의 히라가나는 하나의 가나에 여러 가지 다른 글자체(변체가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로하 노래가 손글씨 연습에 사용될 때의 글자체는 그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12] 그 글자체는 대부분 현대 히라가나와 일치하며 "え", "お", "そ"만 다르다. 이를 통해 야마다 타카오는 현대 히라가나의 성립에 이 이로하 노래의 글자체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3]

3. 1. 기원

이로하 노래의 저작권은 전통적으로 헤이안 시대 일본 불교 승려이자 학자 쿠카이(空海)(774~835)에게 있다.[4] 그러나 쿠카이 시대에는 가나 표의 '아' 열과 '야' 열에 별개의 '에' 음이 있었다고 여겨지므로, '에'는 '예'로 발음되어 판구절이 불완전해지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4]

이로하 노래는 화엄경의 다음 구절이 변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為楽



이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quote|

모든 행위는 무상하다.

그것이 생멸의 법칙이다.

생멸이 다 사라지면

그 궁극적인 고요함(열반)이 곧 참된 행복이다.

}}

위 일본어는 다음과 같이 읽힌다.



''쇼교 무죠''

''제쇼 멧포''

''쇼메쓰 메쓰이''

''쟈쿠메쓰 이라쿠''



이로하 노래의 문헌상 가장 오래된 예는 『금광명최승왕경음의』(대동급기념문고 소장)이다. 저자는 불명이며, “承暦三年己未四月十六日抄了”라는 발문을 가지고 있다. “음의(音義)”란 경전에 기록된 한자의 자의(字義)와 발음에 대해 설명한 책으로, 이것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에 있는 어구에 관한 것이다. 이로하 노래는 “先可知所付借字(먼저 붙이는 바의 빌린 글자를 알아야 한다)”라는 단서를 처음에 두고, 가나가 아닌 빌린 글자(借字)로 적혀 있으며, 음훈(音訓)의 읽기로 사용되는 글자의 목록이 되어 있다.

以〈伊〉呂〈路〉波〈八〉耳〈尓〉本〈保〉へ〈反〉止〈都〉
千〈知〉利〈理〉奴〈沼〉流〈留〉乎〈遠〉和〈王〉加〈可〉
餘〈与〉多〈太〉連〈礼〉曽〈租〉津〈ツ〉祢〈年〉那〈奈〉
良〈羅〉牟〈无〉有〈宇〉為〈謂〉能〈乃〉久〈九〉
耶〈也〉万〈末/麻〉計〈介/気〉不〈布/符〉己〈古〉衣〈延〉天〈弖〉
阿〈安〉佐〈作〉伎〈畿〉喩〈由〉女〈馬/面〉美〈弥〉之〈志/士〉
恵〈會/廻〉比〈皮/非〉毛〈文/裳〉勢〈世〉須〈寸〉



각 글자에는 성점이 붉은색으로 적혀 있으며, 각 글자의 악센트를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고마쓰 히데오는 각 글자의 악센트의 높낮이 배치를 분석하여, 이 이로하 노래가 한어의 성조 훈련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성점이 찍힌 이로하 노래는 진언종이나 성명과 관련된 고문헌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 『금광명최승왕경음의』의 것과는 악센트의 높낮이가 각각 다르다.

3. 2. 저자

이로하 노래의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이 없어 불명이다.

『하해초(河海抄)』에는 "강담운(江談云)", 즉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1041-1111)의 말로서, 이로하 노래는 홍법대사(弘法大師) 쿠카이(空海)(774-835)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대녀어(大女御)"가 가나 문자로 법화경(法華経)을 사경하여 공양할 때, 승도 겐신(源信)이 법화경 강의를 하는 가운데, 홍법대사가 범자(梵字)를 전한 뒤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이로하 노래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강담(江談)"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마사후사의 언설을 정리한 『강담초(江談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근세에는 반 노부토모(伴信友)가 그의 저서 『가자본말(仮字本末)』 상권에서 『능운집(凌雲集)』에 수록된 나카오 왕(仲雄王)의 시에 "자모홍삼승 진언연사구(字母弘三乗 真言演四句)"라고 있는 것이 쿠카이가 이로하 노래를 만든 증거라고 하고 있다.[14] 그 외에도 이로하 노래가 쿠카이의 작품이라고 하는 문헌이 몇 가지 있으며[15], 메이지 시대에도 쿠카이 작품이라는 언설을 볼 수 있다.[16]

그러나 에도 시대에는 무라타 하루미(村田春海)나 구로카와 하루무라(黒川春村)로부터 쿠카이 작품임을 부정하는 의견이 나왔으며[17], 메이지 시대의 학자 오야 도루(大矢透)는 그의 저서 『음도 및 수습사가고(音図及手習詞歌考)』에서 이로하 노래는 쿠카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그 이유는 쿠카이가 활약하던 시대에는 75조의 4구로 구성된 이마요(今様) 형식의 운문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쿠카이 시대에는 상대 특수 가나 표기법(上代特殊仮名遣)에서 'こ'의 갑을 구별이 아직 존재했다고 생각되는데, 이로하 노래에는 그 'こ'의 갑을 구별이 없고, 아행의 'え'/e/와 야행의 'え'/je/의 구별도 되어 있지 않고 '야행의 え'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덴로쿠 원년(970년)에 성립된 『구전(口遊)』은 아메쓰치노우타(あめつちの詞)와 다이니노우타(大為爾の歌)에 대해서는 기록했지만, 이로하 노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이로하 노래는 그들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18] 상기 『능운집』의 나카오 왕의 시에 대해서도, 오야 도루는 "자모라고 하면 보통은 범자를 말하고, 4구라고 하면 열반경의 제행무상 게송에 한정된 것도 아니므로"라고 하여, 이 시가 이로하 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고 한다.[19]

고마쓰 히데오(小松英雄)도 이로하 노래가 쿠카이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는 속신(俗信)에 지나지 않으며, "오야 도루에 의해 부정된 이후, 적어도 국어사 연구 영역에서는 그 속신이 문제시되는 일은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왜 쿠카이가 작자로 여겨졌는지에 대해서는,

와 같은 이유를 들며, 이로하 노래의 작자는 진언종 계통의 학승으로 추정하고 있다.[20] 그 외에 쿠카이보다 더 오래된 시대의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를 작자로 하거나[21], 참언으로 다자이후(大宰府)로 좌천된 미나모토노 다카아키라(源高明)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22], 어쨌든 특정 인물의 이름을 들어 작자라고 하는 것에 현재 확실한 설은 없다.

전통적으로 헤이안 시대 일본 불교 승려이자 학자인 쿠카이(774~835)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는 가나 표의 '아' 열과 '야' 열에 별개의 '에' 음이 있었다고 여겨지므로 이는 가능성이 낮다. 위의 え일본어('에')는 '예'로 발음되었을 것이므로, 판구절이 불완전해진다.[4]

화엄경(華厳経)의 다음 구절이 '이로하'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모든 행위는 무상하다.

그것이 생멸의 법칙이다.

생멸이 다 사라지면

그 궁극적인 고요함(열반(涅槃))이 곧 참된 행복이다.



위 일본어는 다음과 같이 읽힌다.



''쇼교 무죠''

''제쇼 멧포''

''쇼메쓰 메쓰이''

''쟈쿠메쓰 이라쿠''


3. 3. 서예 연습

메이지 시대에 3,065개의 서당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로하 노래를 손글씨 연습에 사용한 곳은 2,347곳에 달하며, 그 다음으로 많은 "마을 이름"(인근 지명을 열거한 것)보다 850곳이나 많았다.[11]

메이지 시대 이전의 히라가나는 하나의 가나에 여러 가지 다른 글자체(변체가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로하 노래가 손글씨 연습에 사용될 때의 글자체는 그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12] 그 글자체는 대부분 현대 히라가나와 일치하며 "え", "お", "そ"만 다르다. 이를 통해 야마다 타카오는 현대 히라가나의 성립에 이 이로하 노래의 글자체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3]

4. 암호설

이로하 노래는 옛 문헌에서 7·5조 대신 한 행에 7자씩 쓰는 방식으로 기록되기도 한다.[22] 이 경우 각 행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읽으면 "咎無くて死す"(とがなくてしす,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문장이 된다.[30]なくてす}}는 "죄 없이(무죄로) 나는 죽는 것이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인용 상자|

いろはにほへ'''と''' いろはに'''ほ'''へと일본어

ちりぬるをわ'''か''' ちりぬる'''を'''わか일본어

よたれそつね'''な''' よたれそ'''つ'''ねな일본어

らむうゐのお'''く''' らむうゐ'''の'''おく일본어

やまけふこえ'''て''' やまけふ'''こ'''えて일본어

あさきゆめみ'''し''' あさきゆ'''め'''みし일본어

ゑひもせ'''す'''   ゑひもせす일본어

|す}} の}}}}

같은 방법으로 5번째 글자(마지막 행 제외)를 순서대로 읽으면 ‘책을 나루터의 소녀(の}})’라는 문장이 된다. 이를 조합하면 “나는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다. 이 책을 나루터에 있는 나의 아내에게 보내라.” 정도의 뜻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

일본 인형극 인형정류리(人形浄瑠璃일본어)의 하나인 가나데혼추신구라(仮名手本忠臣蔵일본어)는 이로하(가타카나) 47자가 아코 로시(赤穂浪士일본어) 47사(士)와 겹칠 수 있어 '추신구라(忠臣蔵일본어)'라고도 불린다.

고야산의 了翁道覚료가쿠 도진이 아코 로시의 요시다, 하라, 오노데라 세 사람에게 원수 갚는 일에 대한 점괘로 써준 사구는, 이로하 노래를 7자씩 끊어 읽었을 때 각 행의 마지막 글자가 'とがなくてしす'가 된다는 점을 이용한 암시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31]료가쿠의 저서나 아코 로시의 기록 등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5. 새로운 이로하 노래

메이지 34년(1901년), 만초호(万朝報)라는 신문에서 새로운 이로하 노래(국음의 노래)를 모집하였다. 통상의 이로하에 응(ん일본어)을 포함하는 48자를 모두 중복 없이 사용하는 조건을 붙였다. 메이지 36년(1903년) 2월 11일, 신문 만조보(萬朝報)는 "국음의 노래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게재하고, 1만 편의 작품을 응모받았다. 같은 해 7월 15일, 심사 결과 1등 작품으로 사이타마현 코다마군(児玉郡) 아오야기무라(青柳村)(사이타마현) 거주자 사카모토 햐쿠지로(坂本 百次郎일본어)의 노래가 채택되었다고 발표하였다.[33] 사카모토 햐쿠지로의 작품은 전쟁 전까지 새로운 순서로서 이로하 순서와 함께 널리 사용되었다.

{{인용 상자|

くす ませ|토리나쿠코에스 유메사마세}}

새가 우는 소리에 단꿈을 깨어,

よける を|미요아케와타루 힌카시오}}

환하게 밝아오는 동쪽을 보라.

えて つに|소라이로하에테 오키쓰헤니}}

머나먼 바다에 하늘의 빛깔이 우러나는데,

れゐぬ の|호후네무레-누 모야노우치}}

안개가 짙으니 범선의 무리는 뵈지 않누나.

}}

6. 용도

이로하(いろは일본어)는 일본어에서 "기초"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한국어의 "가나다"나 영어의 "ABC"와 유사하다. 일본어의 오십음도는 메이지 유신 후 만들어진 것이고, 이전에는 처음 일본 가나를 배울 때 이 노래를 배웠다.

일본어로 음이름을 이로하 순으로 부른다.

계이름LaSiDoReMiFaSol
영어ABCDEFG
한국어
일본어



1890년경, 『와쿤노 시오리』(和訓栞일본어)와 『겐카이』(言海일본어) 사전이 출판되면서 산스크리트어를 기반으로 하는 '고주온'(五十音일본어, 50음) 순서 시스템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교육과 사전에서 고주온이 널리 사용된 후에도, 이로하 순서는 영어의 'a', 'b', 'c'...와 마찬가지로 순서를 나타내는 시스템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 잠수함은 배수량에 따라 이로하 순서로 시작하는 공식 명칭을 가졌다. 또한, 일본 전차는 '치하'('ha'는 세 번째 모델을 의미)와 같이 이로하 순서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하 순서는 오늘날에도 오랜 전통을 가진 많은 분야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법률 및 규정에서는 하위 조항의 순서를 매기는 데 공식적으로 이로하를 사용한다.

음악에서는 옥타브의 음표 이름을 가타카나로 이로하니호헤토(イロハニホヘト일본어)라고 한다.

'''음표'''
영어ABCDEFG
일본어일본어 (i)일본어 (ro)일본어 (ha)일본어 (ni)일본어 (ho)일본어 (he)일본어 (to)



일본국유철도(현재 JR으로 알려짐)의 기존 열차 객차 등급을 매기는 데에도 이로하가 사용된다. '이'(i)는 1등석(현재는 사용되지 않음), '로'(ro)는 2등석(현재는 "그린 객차"), '하'(ha)는 3등석(일반 객차)을 의미한다.

'이로하'(イロハ일본어, 보통 가타카나로 표기)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어로 "기본"을 의미하며, 영어의 "ABC"와 비슷하다. '이로하의 이'(イロハのイ일본어)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의미하며, '이의 일번'(いの一番일본어, "'이'의 1번")은 "맨 처음"을 의미한다.

이로하 가루타는 전통적인 카드 게임으로, 교육용 장난감으로 판매되고 있다.

닛코의 일방통행 구불구불한 산길인 '이로하자카'(いろ하坂일본어)는 48개의 굽이 때문에 이 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가나를 모두 담은 이로하가는 11세기 무렵부터 가나의 손글씨 연습을 위한 모범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는 가나의 손글씨 연습용으로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11] 메이지 시대의 조사에 따르면 이로하가를 손글씨 연습에 사용한 서당은 2,347곳에 달했다.[11]

메이지 시대 이전의 히라가나는 하나의 가나에 여러 가지 다른 글자체(변체가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로하가가 손글씨 연습에 사용될 때의 글자체는 그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12] 야마다 타카오는 현대 히라가나의 성립에 이 이로하가의 글자체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3]

대야 토오루(大矢透)는 이로하가(いろは歌)의 제작 이유에 대해 “어떤 승도”가 “자기 종지를 보급하려고” “자녀의 서예의 수본에 적합하게 한”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해석을 제시했다.[25] 그러나 이로하가의 현존 최고의 예인 『금광명최승왕경음의(金光明最勝王経音義)』는 “자녀의 서예의 수본에 적합하게 한” 용례라고는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25]

고마쓰 히데오(小松英雄)는 이로하가는 서예의 수본이 아니라, 원래는 한자음의 억양을 습득하기 위한 송문(誦文)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26] 즉, 이로하가를 읊는 것으로 음의 고저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어의 억양의 고저를 익히게 하는 것이다.[26]

행정 지명에 '이로하'를 부호로 채택한 지역이 있다. 이로하 순 문서를 참조.

7. 기타


:よのうきめ みえぬやまぢへ いらむには おもふひとこそ ほだしなりけれ(物部良名 巻第十八・雑歌下)

이 와카는 가나를 중복시키지 않고 지은 것이다. 작자 물부 요시나(物部良名)에 대해서는 생몰년, 경력 모두 불명이지만[28], 『고금와가집』은 10세기 초두에 성립되었으므로, 이 무렵 이미 가나를 중복시키지 않는 운문을 만들어내는 발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이지(大為爾)의 노래나 이로하가(いろは歌)에 앞서는 것이다.

참조

[1] harvp
[2] 서적 A Case Study in Diachronic Phonology: The Japanese Onbin Sound Changes Aarhus University Press
[3] harvp
[4] harvp
[5] 서적 音図及手習詞歌考 大日本図書
[6] 문서 京の夢とは朝廷で官位を極める「出世」、大坂の夢とは商売で財を築く「富貴」の夢。夢物語をする前に唱える諺。
[7] 간행물 いろはうた 大修館書店
[8] 웹사이트 日本最古のひらがな「いろは歌」墨書土器について https://www.bunka.pr[...]
[9] 웹사이트 社遺跡出土いろは歌墨書土器 https://bunka.nii.ac[...]
[10] 웹사이트 木簡庫 http://mokkanko.nabu[...]
[11] 서적 日本庶民教育史 臨川書店
[12] 간행물 いろは歌書写の平仮名字体
[13] 서적 国語史 文字篇 刀江書院
[14] 서적 国語学大系 厚生閣
[15] 서적 碩鼠漫筆
[16] 서적 奈良朝史 早稲田大学出版部
[17] 서적 碩鼠漫筆
[18] 서적 音図及手習詞歌考 大日本図書
[19] 서적 音図及手習詞歌考 大日本図書
[20] 서적 いろはうた 中公新書
[21] 서적 柿本人麻呂いろは歌の謎 三笠書房
[22] 서적 音図及手習詞歌考 大日本図書
[23] 웹사이트 小学館 デジタル大辞泉 - コトバンク
[24] 서적 いろはうた 中公新書
[25] 서적 音図及手習詞歌考 大日本図書
[26] 서적 いろはうた 中公新書
[27] 서적 いろはうた 中公新書
[28] 서적 平安時代史事典 下 角川書店
[29] 서적 忠臣蔵―その成立と展開 岩波新書
[30] 서적 碩鼠漫筆
[31] 서적 黒甜瑣語
[32] 서적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前編二 鹿児島県
[33] 서적 萬朝報 萬朝報刊行会
[34]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