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노카미진구 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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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소노카미진구 신궁은 일본 나라현 덴리시에 위치한 신사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궁 중 하나로 여겨진다. 4세기경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칠지도, 도츠카노츠루기, 십종신보 등 다양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제신은 다케미카즈치이며, 이즈모타케오 신사, 사루타히코 신사 등을 포함한 여러 섭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배전과 이즈모타케오 신사 배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칠지도와 흑칠 연혁 성두발 등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다양한 연중 행사를 개최하며, 특히 백제의 국왕이 야마토 국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를 보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의 관련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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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노카미진구 신궁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소노카미 신궁 |
원어 이름 | ja: 石上神宮 ja: 石上布都御魂神社 (Isonokami-futsu-no-mitama-jinja) ja: 布留大明神 (Furu-ōmyojin) |
로마자 표기 | Isonokami-jingū |
종류 | 신사 |
종교 | 신토 |
주신 | 후쓰노미타마오카미 (布都御魂大神) |
신체 | 후쓰노미타마 검 (布都御魂剣) |
창건자 | 스이진 천황 |
창건 시기 | 기원전 91년 (전설), 2~3세기 추정 |
위치 | 나라현덴리시 후루초 384 |
건축 양식 | 나가레즈쿠리 |
예제 | 10월 15일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비고 | 별표 신사 |
신사 등급 | |
격식 | 시키나이샤 (묘진대) |
22사 | 중칠사 |
옛 등급 | 관폐대사 |
기타 | 신불영장 순례의 길 제19번 (나라 제6번) |
건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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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2. 명칭
이소노카미진구 신궁은 이소노카미에 앉은 후토노 미타마 신사, 이소노카미 후토노 미타마 신사, 이소노카미 후토다이 신사, 이소노카미 신사, 이소노카미 사, 후루 사, 이와가미 다이묘진, 후루 다이묘진 등으로도 불린다.[10] 막부 말기 - 메이지 시대에는 현지에서 "이와가미 씨"라고 불렸다.[11]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궁"은 이세 신궁과 이소노카미 신궁 뿐이며, 그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궁이 된다.
이소노카미진구 신궁(일본어: 石上神宮)은 스진 천황의 치세 7년, 즉 기원전 91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나, 스진 천황의 존재나 정체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전설로 여겨진다.[2] 이소노카미 지역에서 신사로 식별할 수 있는 구조물의 건설은 아마도 2~3세기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많은 제례 물품이 발견되었으며, 4세기 야마토 지도자들이 이소노카미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2]
3. 역사
초기 기록에 따르면 이 신사는 야마토 권력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군사적 성격을 띠었다. 4세기경 야마토 왕과 귀족들이 신사 주변에 점점 더 많은 궁궐과 건물을 건설했다.[2] 야마토 지도자들은 미와 산에서 숭배되는 가미와 동일시했지만, 군사적 의미 때문에 이소노카미로 전환했을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천황의 장남인 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五十瓊敷入彦命일본어는 천 개의 칼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이소노카미의 보물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신사를 후원한 모노노베씨를 창시했다. 실제로 국가의 철제 무기 중 다수가 신사의 창고에 보관되었다.[3] 모노노베씨가 몰락한 후, 이소노카미씨로 재편되었다.
『고사기』・『일본서기』에는 이소노카미 신궁・이소노카미 후루 신궁이라는 기술이 있으며, 신궁호를 기록상으로는 이세 신궁과 함께 가장 오래되었다고 칭하고 있다. 고대 군사 씨족인 모노노베 씨가 제사를 지냈으며, 야마토 정권의 무기고로서의 역할도 해왔다.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야마타노오로치를 벤 십권검이 이소노카미 후토타마 신사 (현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에서 당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스이닌 천황 39년에는 검 1천 자루와 신보가 납입되었고, 덴무 천황 3년 (674년)에는 오사카베 황자(교부 친왕)를 파견하여 신보를 갈게 했다. 니혼후기 권 12 간무 천황 엔랴쿠 23년 (804년) 2월 경술 조에 의하면, 역대 천황이 무기를 납입해 온 신궁의 병장을 야마시로국 가도노군으로 이동했을 때, 인원 연인 15만 7천여 명을 요했고, 이동 후, 창고가 저절로 무너졌으며, 다음에는 효고 료에 납입했지만, 간무 천황도 병이 나고, 괴이한 일이 잇따라 일어나, 사자를 이소노카미 신궁에 파견하여, 여무에게 명하여, 어째서인지 후토노미타마가 아닌, 후루노미타마를 진혼하기 위해 불러낸 결과, 여무가 밤새도록 격노했기 때문에, 천황의 나이와 같은 수의 69명의 승려를 모아 독경하게 하고, 신보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신계는 가쇼 3년 (850년)에 정삼위, 조간 원년 (859년)에 종일위, 조간 9년 (868년)에 정일위가 되었다. 『엔기시키 진묘초』에는 "야마토 국 야마베 군 이소노카미에 앉은 후루노미타마 신사"라고 기재되어, 묘신대사에 열거되어, 겟차츠・아이나메・니이나메의 폐백에 참여하고, 린지사이도 거행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황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4]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 가미에게 보고하기 위해 황실 사자를 파견하도록 명령했다. 이 ''헤이하쿠''는 처음에는 이소노카미 신궁을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봉납되었다.[5]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이소노카미 신궁은 공식적으로 중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 등급에 속한다는 의미이다.[6]
중세 이후에는 후루고의 친수가 되었으며, 당사의 진구지인 우치야마 에이큐지 (덴리시 소노우치초에 있던 사원)와 함께 번성했다. 그러나, 고후쿠지와 여러 번 항쟁을 반복하여 후루고 일규가 빈발했으며,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에 밀려, 많은 신령도 몰수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서쪽의 닛코]"라고 불린 우치야마 에이큐지가
3. 1. 고대
이소노카미진구 신궁(일본어: 石上神宮)은 스진 천황의 치세 7년, 즉 기원전 91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나, 스진 천황의 존재나 정체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전설로 여겨진다.[2] 이소노카미 지역에서 신사로 식별할 수 있는 구조물의 건설은 아마도 2~3세기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많은 제례 물품이 발견되었으며, 4세기 야마토 지도자들이 이소노카미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2]
초기 기록에 따르면 이 신사는 야마토 권력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군사적 성격을 띠었다. 4세기경 야마토 왕과 귀족들이 신사 주변에 점점 더 많은 궁궐과 건물을 건설했다.[2] 야마토 지도자들은 미와 산에서 숭배되는 가미와 동일시했지만, 군사적 의미 때문에 이소노카미로 전환했을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천황의 장남인 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五十瓊敷入彦命일본어는 천 개의 칼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이소노카미의 보물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신사를 후원한 모노노베씨를 창시했다. 실제로 국가의 철제 무기 중 다수가 신사의 창고에 보관되었다.[3] 모노노베씨가 몰락한 후, 이소노카미씨로 재편되었다.
『고사기』・『일본서기』에는 이소노카미 신궁・이소노카미 후루 신궁이라는 기술이 있으며, 신궁호를 기록상으로는 이세 신궁과 함께 가장 오래되었다고 칭하고 있다. 고대 군사 씨족인 모노노베 씨가 제사를 지냈으며, 야마토 정권의 무기고로서의 역할도 해왔다.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야마타노오로치를 벤 십권검이 이소노카미 후토타마 신사 (현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에서 당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스이닌 천황 39년에는 검 1천 자루와 신보가 납입되었고, 덴무 천황 3년 (674년)에는 오사카베 황자(교부 친왕)를 파견하여 신보를 갈게 했다. 니혼후기 권 12 간무 천황 엔랴쿠 23년 (804년) 2월 경술 조에 의하면, 역대 천황이 무기를 납입해 온 신궁의 병장을 야마시로국 가도노군으로 이동했을 때, 인원 연인 15만 7천여 명을 요했고, 이동 후, 창고가 저절로 무너졌으며, 다음에는 효고 료에 납입했지만, 간무 천황도 병이 나고, 괴이한 일이 잇따라 일어나, 사자를 이소노카미 신궁에 파견하여, 여무에게 명하여, 어째서인지 후토노미타마가 아닌, 후루노미타마를 진혼하기 위해 불러낸 결과, 여무가 밤새도록 격노했기 때문에, 천황의 나이와 같은 수의 69명의 승려를 모아 독경하게 하고, 신보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신계는 가쇼 3년 (850년)에 정삼위, 조간 원년 (859년)에 종일위, 조간 9년 (868년)에 정일위가 되었다. 『엔기시키 진묘초』에는 "야마토 국 야마베 군 이소노카미에 앉은 후루노미타마 신사"라고 기재되어, 묘신대사에 열거되어, 겟차츠・아이나메・니이나메의 폐백에 참여하고, 린지사이도 거행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황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4]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 가미에게 보고하기 위해 황실 사자를 파견하도록 명령했다. 이 ''헤이하쿠''는 처음에는 이소노카미 신궁을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봉납되었다.[5]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이소노카미 신궁은 공식적으로 중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 등급에 속한다는 의미이다.[6]
3. 2. 중세 및 근세
이소노카미진구 신궁은 야마토 시대 권력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군사적 성격을 띠었다.[2]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4세기경 야마토 왕과 귀족들이 신사 주변에 점점 더 많은 궁궐과 건물을 건설했다.[2]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천황의 장남인 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일본어는 천 개의 칼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이소노카미의 보물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신사를 후원한 모노노베씨를 창시했다.[3] 실제로 국가의 철제 무기 중 다수가 신사의 창고에 보관되었다.[3] 모노노베씨가 몰락한 후, 이소노카미씨로 재편되었다.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황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4]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 가미에게 보고하기 위해 황실 사자를 파견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헤이하쿠''는 처음에는 이소노카미 신궁을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봉납되었다.[5]
신계는 가쇼 3년 (850년)에 정삼위, 조간 원년 (859년)에 종일위, 조간 9년 (868년)에 정일위가 되었다. 『엔기시키 진묘초』에는 "야마토 국 야마베 군 이소노카미에 앉은 후루노미타마 신사"라고 기재되어, 묘신대사에 열거되어, 겟차츠・아이나메・니이나메의 폐백에 참여하고, 린지사이도 거행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세 이후에는 후루고의 친수가 되었으며, 당사의 진구지인 우치야마 에이큐지 (덴리시 소노우치초에 있던 사원)와 함께 번성했다. 그러나, 고후쿠지와 여러 번 항쟁을 반복하여 후루고 일규가 빈발했으며,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에 밀려, 많은 신령도 몰수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서쪽의 닛코]"라고 불린 우치야마 에이큐지가
3. 3. 근대 이후
이소노카미 신궁이 처음 어떤 가미를 숭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스진 천황의 치세 7년, 즉 기원전 91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지지만, 스진 천황의 존재나 정체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므로 전설로 여겨진다. 이소노카미 지역에서 신사로 식별할 수 있는 구조물의 건설은 2~3세기 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많은 제례 물품이 발견되었으며, 4세기 야마토 지도자들이 이소노카미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는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초기 기록에 따르면 이 신사는 야마토 권력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군사적 성격을 띠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4세기경 야마토 왕과 귀족들이 신사 주변에 점점 더 많은 궁궐과 건물을 건설했다.[2]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천황의 장남인 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五十瓊敷入彦命일본어는 천 개의 칼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이소노카미의 보물을 관리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신사를 후원한 모노노베씨를 창시했다.[3] 실제로 국가의 철제 무기 중 다수가 신사의 창고에 보관되었다.[3] 모노노베씨가 몰락한 후, 이소노카미씨로 재편되었다.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황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4]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 가미에게 보고하기 위해 황실 사자를 파견하도록 명령했다.[5] 이 ''헤이하쿠''는 처음에는 이소노카미 신궁을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봉납되었다.[5]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이소노카미 신궁은 공식적으로 간페이타이샤/官幣大社일본어 중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 등급에 속한다는 의미이다.[6] 메이지 4년(1871년)에는 관폐대사에, 1883년(메이지 16년)에는 신궁호를 다시 칭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1913년 (다이쇼 2년)에는 본전이 완성되었다. 원래 본전은 존재하지 않고, 배전 뒤편의 성지(금족지)를 "후루타카니와", "어본지" 등으로 칭하여 모셨으며, 또한 그곳에는 2개의 신보가 매장되어 있다고 전해졌다. 1874년 (메이지 7년)의 발굴을 계기로, 출토된 칼 (후토노미타마노츠루기)이나 곡옥 등의 신보를 봉사하기 위해 본전을 건조하였다.
1914년 (다이쇼 3년)에는 구 우치야마 에이큐지의 부지에 남아 있던 스미요시 신사의 배전을 이전하여, 섭사・이즈모 타케오 신사의 배전으로 하고 있다.
1948년 (쇼와 23년)에 진자 본청의 별표 신사에 가열되어 있다.
4. 제신
주된 제신은 전설적인 검 '후쓰노미타마노쓰루기'(후쓰노미타마/布都御魂일본어)의 신인 다케미카즈치가 구마노에서 하사하여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이 사용했다.[7] 그러나 검 자체는 이소노카미 신궁에 숨겨져 있으며, 두 번째 검은 가시마 신궁(이바라키현)에서 볼 수 있다.[8]
주 제신은 다음과 같다.
- '''후쓰노미타마노오오카미'''(布都御魂大神) - 신체인 후쓰노미타마노츠루기(布都御魂剣)에 깃든 신령.
배신은 다음과 같다.
5. 경내
이소노카미 신궁은 삼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만요슈의 시가집에 실린 와카 시는 성스러운 삼나무로 둘러싸인 이소노카미 신궁을 언급하고 있다.
현재 이소노카미 신궁의 부지는 이전 종교 건축물인 이즈모 대사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본전 근처, 더 높은 지대에 있는 이즈모타케오를 모시는 작은 신사로 인해 추정된다. 작은 신사는 본전보다 높은 곳에 지어지지 않으므로, 일부에서는 이것이 현재 신궁보다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결론지었다.
혼덴(본전)은 나가레즈쿠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 본전 - 1913년(다이쇼 2년) 건립.
- 배전 (국보) - 입모양, 노송나무 껍질 지붕. 시라카와 천황이 신상제를 행하는 황거의 신가전을 배전으로 기증했다는 전승이 있지만, 실제 건립 연대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로 보인다. 불당풍의 외관을 갖추고, 관(기둥을 관통하는 수평재)을 다용하는 등, 대불양의 요소가 보인다.
- 회랑
- 누문 (중요 문화재) - 가마쿠라 시대 후기, 분보 2년 (1318년)에 건립. 정면에 걸린 현판 "만고유신"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필체.
- 장생전
- 신고
- 거울 연못
- 신찬소
- 사 무소
- 참집전
- 의식전
- 닭 - 72후에 맞춰 도텐코 닭 · 오골계 등 약 30마리가 경내에 방목되어 있다.[12][13][14]
6. 섭말사
- 이즈모타케오 신사
- * 제신: 이즈모타케오노미코토 (쿠사나기의 검의 아라미타마, 유래에 따르면 "나는 오와리 씨족의 여성이 모시는 신이다"라고 하며 미야즈히메를 가리킨다고 한다). 시키나이샤. 사전은 기와지붕, 휜키누키. 배전(국보)은 우치야마 에이큐지의 진수사 스미요시 신사의 배전을 1914년(다이쇼 3년)에 이전한 것이다. 쇼안 2년 (1300년)에 건립되었다. 桁行5칸 건물 중앙 1칸을 흙바닥 통로로 한 "할배전"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배전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15]
- 사루타히코 신사
- * 제신: 사루타히코노오카미, 스미요시노오카미, 타카오카미. 스미요시노오카미는 원래 우치야마 에이큐지의 진수사인 스미요시 신사에서 모셔졌던 것이다.
- 덴진 신사
- * 제신: 타카미무스비노카미, 카미무스비노카미
- 나나자 신사
- * 제신: 이쿠타마노미코토, 아시타마노미코토, 타마노메노미코토, 오오미야노메노카미, 미케츠노카미, 코토시로누시노카미, 오오나오비노카미
- 간다 신사
- * 제신: 다카쿠라시타노 미코토
- 하라에토 신사 (성역이므로 신직자 외에는 참배 불가)
- * 제신: 하라에도노 오오카미
- 에비스 신사 - 경외 말사
- * 제신: 코토시로누시노 카미
6. 1. 섭사
- 이즈모타케오 신사
- * 제신: 이즈모타케오노미코토 (쿠사나기의 검의 아라미타마, 유래에 따르면 "나는 오와리 씨족의 여성이 모시는 신이다"라고 하며 미야즈히메를 가리킨다고 한다). 시키나이샤. 사전은 기와지붕, 휜키누키. 배전(국보)은 우치야마 에이큐지의 진수사 스미요시 신사의 배전을 1914년(다이쇼 3년)에 이전한 것이다. 쇼안 2년 (1300년)에 건립되었다. 桁行5칸 건물 중앙 1칸을 흙바닥 통로로 한 "할배전"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배전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15]
- 사루타히코 신사
- * 제신: 사루타히코노오카미, 스미요시노오카미, 타카오카미. 스미요시노오카미는 원래 우치야마 에이큐지의 진수사인 스미요시 신사에서 모셔졌던 것이다.
- 덴진 신사
- * 제신: 타카미무스비노카미, 카미무스비노카미
- 나나자 신사
- * 제신: 이쿠타마노미코토, 아시타마노미코토, 타마노메노미코토, 오오미야노메노카미, 미케츠노카미, 코토시로누시노카미, 오오나오비노카미
6. 2. 말사
- 간다 신사
- * 제신: 다카쿠라시타노 미코토
- 하라에토 신사 (성역이므로 신직자 외에는 참배 불가)
- * 제신: 하라에도노 오오카미
- 에비스 신사 - 경외 말사
- * 제신: 코토시로누시노 카미
7. 문화재
칠지도는 백제의 태자가 야마토 국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4세기경부터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왔다.[18] 1873년에 재발견된 금상감 명문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9] 현재 이 검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는 칠지도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설의 검인 도츠카노츠루기 또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고지키에 따르면, 이 검은 신 스사노오가 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다. 신궁의 사제들은 누구에게도 이 검을 보거나 검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가 한국에서 가져온 10가지 보물(도쿠사노 간다카라/십종신보일본어)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0가지 보물은 다음과 같다.
- 오키츠카가미 (거울)
- 헤츠카가미 (거울)
- 야츠카노츠루기 (검)
- 이쿠타마 (보석)
- 마카루카에시타마 (보석)
- 타루타마 (보석)
- 치카에시노타마 (보석)
- 오로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 하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 쿠사구사노모노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가마쿠라 시대 전기에 지어진 배전은 입모야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물로, 1954년 3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16] 쇼안 2년 (1300년)에 지어진 섭사 이즈모타케오 신사 배전 역시 1954년 3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17]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백제의 태자가 야마토 국왕에게 하사한 칠지도가 보관되어 있으며, 4세기경부터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왔다. 1873년에 재발견된 칠지도의 금상감 명문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전설의 검인 도츠카노츠루기 또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고지키에 따르면, 이 검은 신 스사노오가 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다. 신궁의 사제들은 이 검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10가지 보물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는 한국 출신의 왕자로 일본에 정착했으며, 그가 가져온 10가지 보물은 도쿠사노 간다카라/십종신보일본어로 불린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유물들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여러 빛깔의 끈으로 엮은 복부 가리개 투구・호수의 소매 부착(공예품): 1901년 지정.[20]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봉납한 것으로 추정되나,[21] 실제로는 각 부품의 제작 연대가 달라 근대 수리 과정에서 한 벌로 조합되었다.[22]

- 철 방패 2점(고고 자료): 고분 시대 작품으로, 겐로쿠 12년(1699년) 『이소노카미 대명신 연기 곤』에는 방패가 3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4] 큰 쪽[24]은 신궁에, 작은 쪽[25]은 도쿄 국립 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26] 1949년 지정.[28]
- 이소노카미 신궁 금족지 출토품(고고 자료): 나라 국립 박물관 위탁 보관. 1897년 "곡옥류 11개"로 지정,[29] 1958년 추가 지정.[30]
- 경옥 곡옥 11개
- 벽옥 관옥 일괄
- 경옥 대추옥 등 10개
- 벽옥 금슬형 석제품 1개
- 금동 환 3개
- 금동 수식품 1개
- 환두 대도 자루 머리 1개
- 동촉 2개
- (부 지정) 금동 구형 제품 1개
- (부 지정) 동경 2면
- (부 지정) 거울형 동제품 2면
- 고분 시대의 철제 방패 2개
- 여러 개의 흉갑 갑옷
- 여러 개의 출토 유물(''마가타마'', 목걸이, 환두대도)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칠지도가 보관되어 있다. 칠지도는 백제의 태자가 야마토 국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4세기경 백제로부터 받은 이래 고대부터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왔다. 1873년에 재발견되었으며, 금상감된 명문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입증되었다. 현재 이 검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에 있는 칠지도 복제품은 다음과 같다.
전설의 검인 도츠카노츠루기 또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고지키에 따르면, 이 검은 신 스사노오가 머리 8개와 꼬리 8개를 가진 거대한 뱀인 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다. 신궁의 사제들은 누구에게도 이 검을 보거나 검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10가지 보물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는 한국 출신의 왕자로 일본에 정착했다. 그가 가져온 10가지 보물은 Tokusa-no-Kandakara/십종신보일본어로 알려져 있으며, 오키츠카가미 (거울), 헤츠카가미 (거울), 야츠카노츠루기 (검), 이쿠타마 (보석), 마카루카에시타마 (보석), 타루타마 (보석), 치카에시노타마 (보석), 오로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하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쿠사구사노모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이다.
화려한 붉은색 '''오요로이'''와 검은 옻칠 '''가부토''' , 다양한 투구, 고키츠네마루/小狐丸일본어(가 제작한 '''오다치''')도 보관되어 있다.

태도 "메이 요시노리"(공예품)는 "코기츠네마루"라는 호칭이 있으며, 1953년 3월 23일 지정되었다.[31]
채색 각고동・흑칠 고동(공예품), 수에 대옹(고고 자료)은 1959년 7월 23일 지정되었다.[31] 이소노카미 신궁 거울 연못 서식 버들치는 1953년 3월 23일 지정되었고,[31] 이소노카미 신궁 사소는 1995년 3월 22일, 이소노카미 신궁 제례 도어 그림 말 2쌍은 1988년 3월 22일 지정되었다.[31]


주찰 홍사 소현위 철복권, 흑칠 연혁 성두발은 가마쿠라 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두발의 소재는 원칙적으로 철이었지만,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본품은 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이다.[32] 2장 이상의 소가죽을 아교물에 담근 후 두들겨 굳힌 "연혁"을 반구형으로 성형하고, 또한 표면에 철선이나 철못을 부착하여 흑칠을 칠하여 8장 철제 성두발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32] 머리 정점에 4cm의 구멍이 뚫린 것은 에보시를 씌운 상투를 빼내 착용하는 수법 때문이며, 이 점과 장식 쇠붙이를 설치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가마쿠라 시대 전기의 하급 무사의 물건으로 추측된다.[32] 16간 쇠사슬 두발도 있다.
7. 1. 국보
칠지도는 백제의 태자가 야마토 국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4세기경부터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왔다.[18] 1873년에 재발견된 금상감 명문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9] 현재 이 검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는 칠지도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전설의 검인 도츠카노츠루기 또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고지키에 따르면, 이 검은 신 스사노오가 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다. 신궁의 사제들은 누구에게도 이 검을 보거나 검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가 한국에서 가져온 10가지 보물(도쿠사노 간다카라/십종신보일본어)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0가지 보물은 다음과 같다.
- 오키츠카가미 (거울)
- 헤츠카가미 (거울)
- 야츠카노츠루기 (검)
- 이쿠타마 (보석)
- 마카루카에시타마 (보석)
- 타루타마 (보석)
- 치카에시노타마 (보석)
- 오로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 하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 쿠사구사노모노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가마쿠라 시대 전기에 지어진 배전은 입모야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물로, 1954년 3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16] 쇼안 2년 (1300년)에 지어진 섭사 이즈모타케오 신사 배전 역시 1954년 3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17]
7. 2. 중요문화재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백제의 태자가 야마토 국왕에게 하사한 칠지도가 보관되어 있으며, 4세기경부터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왔다. 1873년에 재발견된 칠지도의 금상감 명문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전설의 검인 도츠카노츠루기 또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고지키에 따르면, 이 검은 신 스사노오가 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다. 신궁의 사제들은 이 검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10가지 보물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는 한국 출신의 왕자로 일본에 정착했으며, 그가 가져온 10가지 보물은 ''도쿠사노 간다카라/십종신보일본어''로 불린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유물들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여러 빛깔의 끈으로 엮은 복부 가리개 투구・호수의 소매 부착(공예품): 1901년 지정.[20]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봉납한 것으로 추정되나,[21] 실제로는 각 부품의 제작 연대가 달라 근대 수리 과정에서 한 벌로 조합되었다.[22]
- 철 방패 2점(고고 자료): 고분 시대 작품으로, 겐로쿠 12년(1699년) 『이소노카미 대명신 연기 곤』에는 방패가 3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4] 큰 쪽[24]은 신궁에, 작은 쪽[25]은 도쿄 국립 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26] 1949년 지정.[28]
- 이소노카미 신궁 금족지 출토품(고고 자료): 나라 국립 박물관 위탁 보관. 1897년 "곡옥류 11개"로 지정,[29] 1958년 추가 지정.[30]
- 경옥 곡옥 11개
- 벽옥 관옥 일괄
- 경옥 대추옥 등 10개
- 벽옥 금슬형 석제품 1개
- 금동 환 3개
- 금동 수식품 1개
- 환두 대도 자루 머리 1개
- 동촉 2개
- (부 지정) 금동 구형 제품 1개
- (부 지정) 동경 2면
- (부 지정) 거울형 동제품 2면
- 고분 시대의 철제 방패 2개
- 여러 개의 흉갑 갑옷
- 여러 개의 출토 유물(''마가타마'', 목걸이, 환두대도)
7. 3. 기타 문화재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칠지도가 보관되어 있다. 칠지도는 백제의 태자가 야마토 국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4세기경 백제로부터 받은 이래 고대부터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왔다. 1873년에 재발견되었으며, 금상감된 명문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입증되었다. 현재 이 검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대한민국에 있는 칠지도 복제품은 다음과 같다.
전설의 검인 도츠카노츠루기 또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고지키에 따르면, 이 검은 신 스사노오가 머리 8개와 꼬리 8개를 가진 거대한 뱀인 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다. 신궁의 사제들은 누구에게도 이 검을 보거나 검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10가지 보물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는 한국 출신의 왕자로 일본에 정착했다. 그가 가져온 10가지 보물은 Tokusa-no-Kandakara/십종신보일본어로 알려져 있으며, 오키츠카가미 (거울), 헤츠카가미 (거울), 야츠카노츠루기 (검), 이쿠타마 (보석), 마카루카에시타마 (보석), 타루타마 (보석), 치카에시노타마 (보석), 오로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하치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 쿠사구사노모노히레 (여성이 착용하는 긴 스카프의 일종)이다.
화려한 붉은색 '''오요로이'''와 검은 옻칠 '''가부토''' , 다양한 투구, 고키츠네마루/小狐丸일본어(가 제작한 '''오다치''')도 보관되어 있다.
태도 "메이 요시노리"(공예품)는 "코기츠네마루"라는 호칭이 있으며, 1953년 3월 23일 지정되었다.[31]
채색 각고동・흑칠 고동(공예품), 수에 대옹(고고 자료)은 1959년 7월 23일 지정되었다.[31] 이소노카미 신궁 거울 연못 서식 버들치는 1953년 3월 23일 지정되었고,[31] 이소노카미 신궁 사소는 1995년 3월 22일, 이소노카미 신궁 제례 도어 그림 말 2쌍은 1988년 3월 22일 지정되었다.[31]
주찰 홍사 소현위 철복권, 흑칠 연혁 성두발은 가마쿠라 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두발의 소재는 원칙적으로 철이었지만,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본품은 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이다.[32] 2장 이상의 소가죽을 아교물에 담근 후 두들겨 굳힌 "연혁"을 반구형으로 성형하고, 또한 표면에 철선이나 철못을 부착하여 흑칠을 칠하여 8장 철제 성두발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32] 머리 정점에 4cm의 구멍이 뚫린 것은 에보시를 씌운 상투를 빼내 착용하는 수법 때문이며, 이 점과 장식 쇠붙이를 설치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가마쿠라 시대 전기의 하급 무사의 물건으로 추측된다.[32] 16간 쇠사슬 두발도 있다.
8. 연중 행사
이소노카미진구 신궁에서는 다양한 연중 행사가 열린다.
- 일본 설날 (1월 1일)
- 겐지사이 (1월 3일)
- 후루후다타키아게사이 (1월 15일)
- 타마노오사이 (세츠분 전날 밤)
- 세츠분
- 기넨사이 (2월 19일)
- 겐토코코샤 오마츠리 (매월 첫째 일요일)
- 슌키 오마츠리 (4월 15일)
- 쵸주코샤 슌키 오마츠리 (5월 3일)
- 덴덴 축제 (6월 30일)
- 오하라에시키 (6월 30일 및 12월 31일)
- 스케이카이 오마츠리 (매월 첫째 일요일)
- 보우지사라에 신지 (10월 1일)
- 후루마츠리 (10월 15일)
- 쵸주코샤 슈키 오마츠리 (11월 3일)
- 친콘사이/鎮魂祭일본어 (11월 22일)
- 니이나메노마츠리 (11월 23일)
- 오히타키사이 (12월 8일)
- 천황 탄생일 (12월 23일)
- 호쿠라 마츠리 (12월 31일)
- 섣달 그믐날 (12월 31일)
- 츠키나미노마츠리/月次祭일본어 (매월 1일 및 15일)
이 외에도 세단사이(1월 1일), 고신부 소납제(1월 15일), 절분제 (절분 당일), 신검 도어서(6월 30일), 레이사이(10월 15일), 신고제(12월 31일), 제야제(12월 31일) 등 다양한 제사가 거행된다.
9. 한국과의 관계
칠지도를 보관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Visiting Famous Shrines in Japan
1964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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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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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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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j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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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Visiting Famous Shrines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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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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鶏始乳の意味
http://www.narayado.[...]
[13]
웹사이트
ニワトリ
http://www.isonokami[...]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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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理市のパワースポット石上神宮~武具と鶏に彩られた不思議な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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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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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上神宮拝殿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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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上神宮摂社出雲建雄神社拝殿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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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支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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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上神宮楼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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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々威腹巻〈兜、壺袖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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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甲冑100選
秋田書店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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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鍵手文の盾 ―文様から見た石上神宮鉄盾の出現背景―
2006-10-30
[27]
논문
石上神宮鉄盾観察記 ―適切な展示で判ったこと―
2005-10-30
[28]
데이터베이스
鉄盾
[29]
서적
国宝(宝物類)目録
文部省宗教局保存課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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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理市文化財・遺跡分布地図 天理市内の指定文化財
天理市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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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田書店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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