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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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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이 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의관으로, 세균전 연구를 주도하고 731 부대를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세균학 연구를 시작했다. 731 부대에서 생체 실험 등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했고,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국과 거래하여 전범 기소를 면했다. 이후 미국에서 생물 무기 관련 강의를 했으며, 한국 전쟁에 미군의 세균전 의혹에 연루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하여 195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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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시로
기본 정보
이름이시이 시로
로마자 표기Ishii Shirō
한자 표기石井 四郎
출생일1892년 6월 25일
사망일1959년 10월 9일
출생지지바현 산부군 시바야마
사망지도쿄도 신주쿠구
육군 군의학교의 방역 연구실에서 (1932년)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21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군의 중장
주요 지휘관동군방역 급수부(만주 제731부대)
주요 참전 전투중일 전쟁
노몬한 사건(야전 방역 임무)
제2차 세계 대전
훈장금치훈장 공4급
전후도쿄에서 병원 개업 (도쿄 재판에서 불기소)
학력
모교교토 제국대학
기타
관련 인물법학자 이시이 시로

2. 생애

### 유년기 및 학창 시절

이시이 시로는 1892년 지바현 산부군 시바야마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역 유지이자 양조업자의 넷째 아들이었다. 유년기부터 수재로 이름을 떨쳤으며, 현립 치바중학교를 졸업하고 가나자와 4고를 거쳐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교토제국대학 의학과 졸업 사진


1920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27] 대학원 시절에 세균학 및 예방의학 연구에 매진했다. 교토 대학 총장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대학원생때 며칠 동안 실험을 거듭하다 세균이 들어있는 플라스크를 실수로 깨뜨려버려서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연구자는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론가나 연구조직자가 되는 길을 택한 듯하다.

1921년, 이시이는 일본제국군에 임관되었다.[27] 1924년에는 세균학과 혈청학, 예방의학, 병리학 연구를 위해 교토 대학원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대학원생으로 교토 대학으로 돌아온 여름, 기면성 뇌염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전국적으로 3천 3백 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교토 대학 의학부는 전 학부 차원에서 연구조사에 몰두하여 병원체가 바이러스인 것을 밝혀냈는데, 전체 학부가 참가하여 연구조사를 할 것을 제안한 인물이 시로였다. 시로는 기면성 뇌염의 조사를 위해 연구팀을 이끌고 현장을 지휘했고, 결국 동물실험에 성공하여 도쿄의 학회에서 전염병의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것을 밝혀냈다.

1927년에 박사논문 ‘그람양성쌍구균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7]

### 군의관 시절 및 세균전 연구

이시이 시로는 1921년(다이쇼 10년) 4월, 육군 이등군의(중위 상당관)로 임관하여 근위보병 제3연대에 배속되었다.[27] 같은 해 8월, 도쿄 제1위성병원에서 근무했다.[27] 1924년(다이쇼 13년) 4월부터 1926년(다이쇼 15년) 3월까지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 파견되었으며,[27] 키요노 켄지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교토대 총장 아라키 토라사부로의 딸인 히로코와 결혼했다.[26] 1924년(다이쇼 13년), 육군 일등군의(대위 상당관)로 진급했다.[27]

1927년(쇼와 2년) 7월,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7] 1928년(쇼와 3년) 4월부터 1930년(쇼와 5년) 4월까지 유럽과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27]

1930년(쇼와 5년) 8월, 육군 삼등군의정(소좌 상당관)으로 진급하고 육군군의학교 교관이 되었다.[27] 그는 세균전 연구 기관 설립을 위한 행동을 시작하여 육군성 간부들을 설득했다.[26] 1932년(쇼와 7년) 8월, 육군병기본부 부속 겸 육군군의학교 부속(방역연구실)이 설치되었다.[27] 1933년(쇼와 8년) 4월, 육군군의학교 부원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방역연구실 주간이 되었다.[27]

1935년(쇼와 10년) 8월, 육군 이등군의정(중좌 상당관)으로 진급했다.[27] 1936년 8월, 육군병기본부 부속(피앙 관동군 방역부장)이 되었다.[27] 1937년(쇼와 12년) 2월, 육군 무관관등표 개정에 따라 육군군의 중좌가 되었다.[29] 1938년(쇼와 13년) 3월, 육군군의 대좌로 진급했다.[27] 1939년(쇼와 14년) 4월, 겸 참모본부 부속이 되었다.[27] 같은 달부터 1941년(쇼와 16년) 1월까지, 겸 중지나 파견군 방역급수부장을 역임했다.[27]

당시로서는 드문 180센티미터 정도의 당당한 체격으로, 그 장신으로 자신감에 차 있는 말투로 이야기하면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개발한 정수기에 대해 상대방의 눈앞에서 스스로 낸 소변을 여과하여 마시는 시범을 즐겨 실시하여 그 성능을 어필했다고 한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정수기를 검사하는 이시이 시로


1940년 이시이 시로


1940년(쇼와 15년) 8월, 관동군 방역급수부장 겸 육군군의학교 교관이 되었다.[27] 1941년(쇼와 16년) 3월, 육군군의소장으로 진급하고,[27] 같은 해 4월,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에 “만주 제731부대”의 통칭호가 배정되었다.

1942년(쇼와 17년) 8월, 제1군 군의부장을 역임했고,[27] 1943년(쇼와 18년) 8월, 육군군의학교 부속이 되었다.[27] 1945년(쇼와 20년) 3월, 육군군의중장으로 진급하고 관동군 방역급수부장에 재임했다.[27]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이시이 시로는 1892년 지바현 산부군 시바야마정에서 부유한 지주이자 사케 제조업자인 이시이 가쓰야(石井勝彌)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2] 이시이 가문은 지역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주였으며, 마을과 주변 마을을 지배하는 봉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3] 유년기부터 수재로 이름을 떨친 그는 현립 치바중학교를 졸업하고 가나자와 4고를 거쳐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4] 같은 해에 교토대학 총장인 도라사부로 아카리(虎三郎明)의 딸과 결혼했다.[5] 대학원 시절, 세균학 및 예방의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교토 대학 총장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대학원생때 며칠 동안 실험을 거듭하다 세균이 들어있는 플라스크를 실수로 깨뜨려버려서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6] 그래서 그는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연구자는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론가나 연구조직자가 되는 길을 택한 듯하다.

1921년, 이시이는 육군 군의(군의관)으로서 육군 군의 1등(중위)의 계급으로 일본제국군에 임관되었다.[2] 1924년에는 세균학과 혈청학, 예방의학, 병리학 연구를 위해 교토 대학원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대학원생으로 교토 대학으로 돌아온 여름에 기묘한 수면병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그 해 9월까지 전국적으로 3천 3백 명이 사망하였다. 연구 결과 이 병은 유행성 뇌염의 일종인 기면성 뇌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교토 대학 의학부는 전 학부 차원에서 연구조사에 몰두하여 병원체가 바이러스인 것을 밝혀냈는데, 전체 학부가 참가하여 연구조사를 할 것을 제안한 인물이 시로였다. 시로는 기면성 뇌염의 조사를 위해 연구팀을 이끌고 현장을 지휘했고, 결국 동물실험에 성공하여 도쿄의 학회에서 전염병의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것을 밝혀냈다.

1927년에 박사논문 ‘그람양성쌍구균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7]

2. 2. 군의관 시절 및 세균전 연구

이시이 시로는 1921년(다이쇼 10년) 4월, 육군 이등군의(중위 상당관)로 임관하여 근위보병 제3연대에 배속되었다.[27] 같은 해 8월, 도쿄 제1위성병원에서 근무했다.[27] 1924년(다이쇼 13년) 4월부터 1926년(다이쇼 15년) 3월까지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 파견되었으며,[27] 이 시기 키요노 켄지의 지도를 받았다. 대학원 시절 미생물학 교실 맞은편에 있던 교토대 총장 아라키 토라사부로의 관사를 매일 방문하여 그의 딸인 히로코와 결혼했다.[26] 1924년(다이쇼 13년), 육군 일등군의(대위 상당관)로 진급했다.[27]

1927년(쇼와 2년) 7월,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7] 박사 논문은 ‘그람 양성 쌍구균에 관하여’였다.[27] 1928년(쇼와 3년) 4월부터 1930년(쇼와 5년) 4월까지 유럽과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27] 이 시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생물전화학전 발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는 일본 육군대신인 아라키 사다오의 후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30년(쇼와 5년) 8월, 육군 삼등군의정(소좌 상당관)으로 진급하고 육군군의학교 교관이 되었다.[27] 그는 세균전 연구 기관 설립을 위한 행동을 시작하여 육군성 간부들을 설득했다.[26] 1932년(쇼와 7년) 8월, 육군병기본부 부속 겸 육군군의학교 부속(방역연구실)이 설치되었다.[27] 1933년(쇼와 8년) 4월, 육군군의학교 부원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방역연구실 주간이 되었다.[27]

1935년(쇼와 10년) 8월, 육군 이등군의정(중좌 상당관)으로 진급했다.[27] 1936년 8월 1일, 이시이는 731 부대와 그 연구 시설에 대한 공식적인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그는 731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생체 해부, 생물 무기 실험 등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다.

1939년(쇼와 14년) 5월 11일, 노몬한 사건이 발발하자 관동군 방역부장으로 출동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이시이식 여과기 등을 장비한 방역급수대를 현지에 파견했고, 7월 8일부터 10일간 하이라얼·장군묘 방면에서 방역급수부대를 지휘했다.[30] 10월 1일, 노몬한 사건에서의 방역급수에 대한 공헌이 평가되어 이시이가 장을 맡고 있는 관동군 방역부는 제6군 사령관 오기스 릿페이 중장으로부터 부대 감사장을 수여받았다.[31]

1940년(쇼와 15년) 8월, 관동군 방역급수부장 겸 육군군의학교 교관이 되었다.[27][32]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일본 육군의 관례에 따라 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이시이 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941년(쇼와 16년) 3월, 육군군의소장으로 진급하고,[27] 같은 해 4월, 육군의 모든 부대에 통칭호가 도입됨에 따라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에 “만주 제731부대”의 통칭호가 배정되었다.

1942년(쇼와 17년) 8월, 제1군 군의부장을 역임했고,[27] 1943년(쇼와 18년) 8월, 육군군의학교 부속이 되었다.[27] 1945년(쇼와 20년) 3월, 육군군의중장으로 진급하고 관동군 방역급수부장에 재임했다.[27]

3. 731부대

1936년 8월 1일, 이시이는 731 부대와 그 연구 시설에 대한 공식적인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9] 731부대의 전직 대원의 회고에 따르면, 도쿄에서 처음 만난 이시이는 군복에 음식 얼룩과 담배 재가 묻어 있었고, 장교 검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9] 그러나 만주에서 이시이는 다른 인물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군복을 입고 검을 제대로 착용한 깔끔한 차림이었다.[9]

731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이시이는 생체 해부,[10] 중국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생물 무기 실험,[11] 독극물과 가스에 의한 중독,[12][13] 수감자들에게 매독을 서로 감염시키도록 강요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다.[14] 이시이는 토죠 히데키에게 수년 동안 실험 영상을 보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토죠는 이를 "불쾌하다"고 생각하고 결국 시청을 중단했다.[15]

1940년(쇼와 15년) 8월, 관동군 방역급수부장 겸 육군군의학교 교관이 되었다.[27][32]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일본 육군의 관례에 따라 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이시이 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941년(쇼와 16년) 3월, 육군군의소장으로 진급했다.[27] 같은 해 4월, 육군의 모든 부대에 통칭호가 도입됨에 따라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에 “만주 제731부대”의 통칭호가 배정되었다. 같은 해 11월, 육군 기술 유공장을 수상했다.[27] 1942년(쇼와 17년) 8월, 제1군 군의부장이 되었다.[27] 1943년(쇼와 18년) 8월, 육군군의학교 부속이 되었다.[27] 1945년(쇼와 20년) 3월, 육군군의중장으로 진급하고,[27] 관동군 방역급수부장에 재임했다.[27] 같은 해 5월, 만주 제731부대는 “만주 제25202부대”로 개칭되었다.

3. 1. 설립 배경 및 목적

1928년부터 2년 간 해외를 시찰하고 귀국한 이시이 시로는 생물무기화학전 발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 세균전 부대 창설을 제안하였다.[7] 1932년에는 ‘이시이식 세균배양캔’을 개발하여 특허를 받았고, 4월에 육군군의학교 방역연구실을 설립하여 ‘이시이식 여수기’를 완성하였다. 8월에 만주로 출장을 가서 하얼빈 교외에 세균병기 방위연구소 설립을 시작하였고 기밀 유지를 위해 도고 부대라는 암호명을 사용하였다.

1936년, 이시이는 천황의 인가를 받아 관동군 방역급수부를 창설하고 부대장에 취임했다. 731부대는 표면적으로는 전염병 예방과 식수 정화를 위한 부대인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생체실험과 세균전 연구를 위한 비밀 시설이었다. 이시이 시로는 중국인을 대상으로 각종 잔혹한 생체실험을 자행했으며, 세균 무기 개발 및 실전 사용을 추진했다.

1931년 봉천(현재의 심양) 근교에서 만주사변의 시작을 알리는 유조호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발단으로 관동군 방역부가 정식 발족되었다. 또한 말이나 동물에 대한 생물전을 연구하는 부대인 관동군 군마공역창(100부대)도 현재의 장춘 시에 설치되었다. 731부대 발족 후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북경, 남경, 광동(현 광저우), 싱가포르에 731부대의 자매부대 격인 방역급수가 만들어졌다. 이들 부대의 대원수는 각각 5백 명에서 1천 5백 명 규모였고, 시로의 부하가 부대장이 되어 하얼빈 부대와 서로 연계하여 활동했다.

1940년부터 1942년에 걸쳐 중국 중부지역에 가해진 생물병기 공격은 731부대와 남경부대의 공동작전이었다. 이 다섯 개의 부대를 통괄하여 지휘한 인물이 시로였고, 육군 내에서는 1940년경부터 그가 주관하는 육군군의학교 방역연구실까지 합쳐 이시이 기관이라고 불렀다. 이시이 기관의 인원은 전부 합쳐 1만 명을 넘었고, 생체실험도 731부대뿐 아니라 남경에 있는 부대에서도 일상적으로 실행됐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3. 2. 만행

731부대는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등 다양한 국적의 포로들을 대상으로 동상 실험, 페스트균 주입, 생체 해부 등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27] 이들은 '마루타'라는 은어로 불리며 실험 대상으로 취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27] 731부대는 중국 중부 지역에 대한 세균 공격을 감행하여 페스트, 콜레라 등 전염병을 확산시키기도 했다.[28]

3. 3. 패전 이후

1945년 일본 패전 후,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부대를 철저히 소각하고 부대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28][34] 그는 전범으로 기소될 것을 우려하여 위장 장례식까지 치르며 은신했다.[33] 그러나 731부대의 연구 자료를 미국에 제공하는 대가로 면책을 받고 전범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18][19]

미국은 소련이 1947년 이시이 기관의 인체실험 사실을 통보하자, 실험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 주력했다. 731부대원이었던 이시가와 다치오마루가 비밀리에 가져온 표본이 미국의 생물전 연구소 캠프 데트릭(현재의 포드 데트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한편, 소련 국경 근처에 있던 일부 731부대원들은 소련에 포로로 잡혔고, 1949년 하바로프스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947년 5월 6일 워싱턴에 "이시이로부터 추가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시이의 면책 거래는 1948년에 종결되었다. 면책 후, 이시이는 미국 정부에 고용되어 포트 데트릭에서 생물 무기에 대해 강의했다.[20] 한국 전쟁 중에는 한국에 가서 미 육군의 생물전 활동 의혹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1952년 2월 22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이시이가 세균전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22]

일본으로 돌아온 이시이는 진료소를 열고 무료 진료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고,[35] 신주쿠구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무료로 진료를 했다는 딸의 증언이 있다.[36] 제국은행 사건 발생 후 경시청 수사본부에 불려가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1958년에는 731부대 동창회에서 "국가를 구하는 연구 기관에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십시오."라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전 731부대 부하였던 나이토 료이치가 설립한 미도리쥬지에 고용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40][41]

말년에는 선문답에 열중하고, 기독교에 입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2][43] 하타 이쿠히코는 이시이가 죽기 직전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44] 니시자토 후유코는 이시이의 장녀로부터 그러한 증언을 얻었다.[28] 1959년 10월 9일, 후두암으로 사망했으며, 장례위원장은 기타노 마사지가 맡았다.

4. 전범 면책과 이후 행적

이시이 시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점령 기간 중 미국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면책을 협상하여 1946년 도쿄 재판에서의 일본 전쟁범죄 기소를 피하게 되었다.[18][19] 소련 당국은 기소를 원했지만, 미국은 이시이의 연구 정보가 "절대적으로 귀중"하며 "상당히 저렴한 비용으로 정보를 얻었다"고 판단하여 반대했다.

1947년 5월 6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워싱턴에 이시이로부터 추가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시이의 면책 거래는 1948년에 종결되었고, 그는 전쟁 범죄나 반인륜 범죄로 기소되지 않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전범 혐의를 받았으나, 상세한 연구 자료를 제공했기에 GHQ의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과 찰스 윌로비 소장의 협의를 거쳐 기소를 면했다는 설이 있다.[33]

당초 미군은 이시이의 인체 실험에 대해 몰랐고, 일본의 세균 무기 연구 수준과 내용을 알고자 했다. 그러나 도쿄 재판 중 이시이의 부하들을 체포하여 인체 실험 사실을 알게 된 소련 측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34] 미국 측은 정보 독점을 위해 비밀리에 공동 조사를 제안했고, 이시이와 제공할 정보에 대한 사전 협의를 했다. 이시이는 자신이 가진 정보의 가치를 깨닫고 미국 측과 거래하여 면책을 얻었다고 여겨진다.[28]

면책을 받은 후, 이시이는 미국 정부에 고용되어 포트 데트릭에서 미군 장교들에게 생물 무기 사용과 731 부대의 연구 결과에 대해 강의했다.[20] 한국 전쟁 중 이시이는 한국으로 가서 미 육군의 생물전 활동 의혹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1952년 2월 22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이시이가 "일본 세균전 범죄자들"과 함께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주장했다.[22] 그러나 미 육군이 실제로 생물 무기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고,[35], 딸에 따르면 신주쿠구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무료로 진료를 했다고 한다.[36] 한편, 댄스홀을 경영했다는 증언[28], 와카마츠소라는 여관을 경영했다는 보도[37] 등 병원 개업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1948년 제국은행 사건 발생 후 경시청 수사본부에 불려가 의견을 밝혔다. 그 후 1948년(1949년 말이라는 설도 있다)부터 1957년까지 행방불명되었다.[28] 중국의 인민일보에는 미군의 세균전에 협력했다는 기사가 실렸지만,[28] 이 시기의 실제 활동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이시이 시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 혐의를 받았으나, 연구 자료를 제공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과 찰스 윌로비 소장의 협의를 거쳐 기소를 면했다는 설이 있다.[33] 이시이는 연합군의 추궁을 피하고자 가짜 장례식까지 치렀다.[28][34] 미국은 이시이의 인체 실험 사실을 소련 측으로부터 전해 듣고, 정보 독점을 위해 이시이와 비밀 거래를 통해 면책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28][34]

공직 추방 대상이었던[35] 이시이는 신주쿠구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무료 진료를 했다는 딸의 증언이 있다.[36] 그러나 댄스홀이나 여관을 경영했다는 증언도 있어[28][37] 병원 개업 여부는 불확실하다. 1948년 제국은행 사건 발생 후 경시청에 불려가 독극물과 범인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이시이는 행방불명되었는데,[28] 이 기간 동안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세균전에 협력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39][28] 1958년 다시 나타난 이시이는 731 부대 소년 군속들의 동창회에서 국가를 위한 연구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40][41]

이시이는 선문답에 열중하고, 말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했다고 전해진다.[42][43] 하타 이쿠히코는 이시이가 구면인 허먼 호이벌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44] 니시자토 후유코는 이시이의 장녀에게서 같은 증언을 얻었다.[28] 하지만 공식 기록이 없어 정식 세례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3]

1959년 10월 9일, 이시이는 후두암으로 국립도쿄제1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기타노 마사지가 주관했다. 2003년에는 이시이가 1945년에 쓴 “종전 메모”가 발견되었다.

전후 이시이 시로


전후 731부대원들의 모임에서 이시이 시로

4. 1. 미국의 비호와 면책

이시이 시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점령 기간 중 미국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면책을 협상하여 1946년 도쿄 재판에서의 일본 전쟁범죄 기소를 피하게 되었다.[18][19] 소련 당국은 기소를 원했지만, 미국은 이시이의 연구 정보가 "절대적으로 귀중"하며 "상당히 저렴한 비용으로 정보를 얻었다"고 판단하여 반대했다.

1947년 5월 6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워싱턴에 이시이로부터 추가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시이의 면책 거래는 1948년에 종결되었고, 그는 전쟁 범죄나 반인륜 범죄로 기소되지 않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전범 혐의를 받았으나, 상세한 연구 자료를 제공했기에 GHQ의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과 찰스 윌로비 소장의 협의를 거쳐 기소를 면했다는 설이 있다.[33]

당초 미군은 이시이의 인체 실험에 대해 몰랐고, 일본의 세균 무기 연구 수준과 내용을 알고자 했다. 그러나 도쿄재판 중 이시이의 부하들을 체포하여 인체 실험 사실을 알게 된 소련 측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34] 미국 측은 정보 독점을 위해 비밀리에 공동 조사를 제안했고, 이시이와 제공할 정보에 대한 사전 협의를 했다. 이시이는 자신이 가진 정보의 가치를 깨닫고 미국 측과 거래하여 면책을 얻었다고 여겨진다.[28]

면책을 받은 후, 이시이는 미국 정부에 고용되어 포트 데트릭에서 미군 장교들에게 생물 무기 사용과 731 부대의 연구 결과에 대해 강의했다.[20] 한국 전쟁 중 이시이는 한국으로 가서 미 육군의 생물전 활동 의혹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1952년 2월 22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이시이가 "일본 세균전 범죄자들"과 함께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주장했다.[22] 그러나 미 육군이 실제로 생물 무기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고,[35], 딸에 따르면 신주쿠구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무료로 진료를 했다고 한다.[36] 한편, 댄스홀을 경영했다는 증언[28], 와카마츠소라는 여관을 경영했다는 보도[37] 등 병원 개업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1948년 제국은행 사건 발생 후 경시청 수사본부에 불려가 의견을 밝혔다. 그 후 1948년(1949년 말이라는 설도 있다)부터 1957년까지 행방불명되었다.[28] 중국의 인민일보에는 미군의 세균전에 협력했다는 기사가 실렸지만,[28] 이 시기의 실제 활동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4. 2. 면책 이후의 삶

이시이 시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 혐의를 받았으나, 연구 자료를 제공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과 찰스 윌로비 소장의 협의를 거쳐 기소를 면했다는 설이 있다.[33] 이시이는 연합군의 추궁을 피하고자 가짜 장례식까지 치렀다.[28][34] 미국은 이시이의 인체 실험 사실을 소련 측으로부터 전해 듣고, 정보 독점을 위해 이시이와 비밀 거래를 통해 면책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28][34]

공직 추방 대상이었던[35] 이시이는 신주쿠구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무료 진료를 했다는 딸의 증언이 있다.[36] 그러나 댄스홀이나 여관을 경영했다는 증언도 있어[28][37] 병원 개업 여부는 불확실하다. 1948년 제국은행 사건 발생 후 경시청에 불려가 독극물과 범인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이시이는 행방불명되었는데,[28] 이 기간 동안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세균전에 협력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39][28] 1958년 다시 나타난 이시이는 731부대 소년 군속들의 동창회에서 국가를 위한 연구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40][41]

이시이는 선문답에 열중하고, 말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했다고 전해진다.[42][43] 딸의 증언에 따르면, 이시이는 사망 직전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이시이가 구면인 허먼 호이벌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44] 니시자토 후유코는 이시이의 장녀에게서 같은 증언을 얻었다.[28] 하지만 공식 기록이 없어 정식 세례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3]

1959년 10월 9일, 이시이는 후두암으로 국립도쿄제1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기타노 마사지가 주관했다. 2003년에는 이시이가 1945년에 쓴 “종전 메모”가 발견되었다.

5. 회고와 평가

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 대학 때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이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45]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든 겁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난 것입니다."[45]

이를 통해 정리해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만행에 대한 반성이 없는 전범의 뻔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5. 1. 긍정적 평가

이시이 시로는 뛰어난 의학적 지식과 연구 능력을 인정받아 공사급 금치훈장과 육군기술유공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이시이식 여수기'를 개발하고 전염병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5. 2. 부정적 평가

6. 작품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이시이 시로 중장은 키가 180cm나 되는 거인이었으며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전체수석을 할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또한 시골에서 농사짓던 형제들을 불러다 자신의 부대의 고등관으로 복무시켰으며 조카 이시이 나가데에게는 대위 계급으로 판임관 신분을 부여하고 마루타를 공급하는 부서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시이 나가데는 싸움을 상당히 잘했으며 특히 검도 실력이 관동군 전체 최강이라 묘사되었다.

왕강이 연기한 "흑색태양 731" 시리즈에서 이시이 시로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는 『흑색태양 731: 전율! 이시이 시로 세균부대의 전모(1988), 『흑색태양 731 II: 악마의 생태 실험실(1992), 그리고 『흑색태양 731 III: 이시이 세균부대의 최후(1993)로 구성되어 있다.

무라카미 모토카의 만화 용-RON-에 등장한다.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민지환이 이시이 시로 역을 연기했다. 1988년 영화 《태양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Men Behind The Sun)에서는 강왕이 이시이 시로를 연기했다.

6. 1. 소설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이시이 시로 중장은 키가 180cm나 되는 거인이었으며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전체수석을 할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또한 시골에서 농사짓던 형제들을 불러다 자신의 부대의 고등관으로 복무시켰으며 조카 이시이 나가데에게는 대위 계급으로 판임관 신분을 부여하고 마루타를 공급하는 부서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시이 나가데는 싸움을 상당히 잘했으며 특히 검도 실력이 관동군 전체 최강이라 묘사되었다.

6. 2. 영화

왕강이 연기한 "흑색태양 731" 시리즈에서 이시이 시로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는 『흑색태양 731: 전율! 이시이 시로 세균부대의 전모(1988), 『흑색태양 731 II: 악마의 생태 실험실(1992), 그리고 『흑색태양 731 III: 이시이 세균부대의 최후(1993)로 구성되어 있다.

6. 3. 만화

무라카미 모토카의 만화 용-RON-에 등장한다.

6. 4. 드라마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민지환이 이시이 시로 역을 연기했다. 1988년 영화 《태양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Men Behind The Sun)에서는 강왕이 이시이 시로를 연기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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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Factories Of Death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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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Factories Of Death 2002
[7] 서적 Factories of Death: Japanese Biological Warfare, 1932-45, And the American Cover-up. Routledge
[8] 서적 Factories of Death: Japanese Biological Warfare, 1932-45, And the American Cover-up. Routledge
[9] 서적 Factories Of Death 2002
[10] 뉴스 Unmasking Horror: A special report. Japan Confronting Gruesome War Atrocity https://query.nytime[...] 199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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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Asahi Shimbun 1951-12-09
[22] 서적 Bioterrorism and Biological Warfare: Disease as a Weapon of War Pen and Sword 2023
[23] 서적 Japan's Wartime Medical Atrocities: Comparative Inquiries in Science, History, and Ethics Routledge 2013-07-03
[24] 웹사이트 Interview with Harumi Ishii https://vimeo.com/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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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뉴스 731部隊関係者、米から現金、実験データ提供の見返り 200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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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뉴스 石井氏は行方不明 1950-02-04
[38] 뉴스 石井元中将姿消す 1949-12-31
[39] 뉴스 石井元中将ら渡鮮説 1951-12-09
[40] 서적 七三一部隊 生物兵器犯罪の真実 講談社 1995-07
[41] 서적 731―石井四郎と細菌戦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42] 뉴스 朝日新聞 2007-06-12
[43] 간행물 特集(2)講演録 731部隊の戦後と医の倫理 https://healthnet.jp[...] 京都府保険医協会
[44]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藝春秋 1999-12-10
[45] 서적 고 기요노 겐지 선생 기념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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