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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브루스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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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안 브루스 퍼거슨은 뉴질랜드 출신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1917년 웰링턴에서 태어나 다양한 학교를 거쳐 기자로 일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호주 육군에 입대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에서는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를 지휘했으며, 가평 전투에서의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에는 여러 군 직책을 거쳐 1967년 대령으로 퇴역했으며, 1988년 캔버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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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브루스 퍼거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퍼거슨 (오른쪽) 한국 전쟁 중 미국 육군 장교 2명과 함께, 1950년
퍼거슨 (오른쪽) 한국 전쟁 중 미국 육군 장교 2명과 함께
이름이안 브루스 퍼거슨
별칭별칭 없음 (영문 문서에 별칭 정보 없음)
출생일1917년 4월 13일
출생지뉴질랜드 웰링턴
사망일1988년 12월 21일
사망지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안장지정보 없음
군 복무
소속오스트레일리아 육군
복무 기간1939년–1967년
최종 계급대령
군번정보 없음
부대정보 없음
지휘제13 국방군 훈련 대대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제1대대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제3대대
주요 참전 전투/전쟁제2차 세계 대전
북아프리카 전역
바르디아 전투
남서태평양 전역
코코다 트랙 전역
6.25 전쟁
정주 전투
가평 전투
서훈특무훈장
Military Cross (군사 십자훈장)
Mentioned in Despatches (전시 공훈 언급)
기타 관계정보 없음
이후 활동정보 없음

2. 유년기

이안 브루스 퍼거슨은 1917년 4월 13일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이혼했고, 퍼거슨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후 어머니는 로이터 통신사의 시드니 렌과 재혼했다.[6][1] 퍼거슨은 어머니와 양아버지를 따라 웰링턴, 멜버른, 런던, 파리, 더니딘 등 여러 도시의 학교를 다녔다. 교육을 마친 후에는 웰링턴에서 생도 기자로 일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시드니 선"이라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다.[6][1]

2. 1. 가족 관계

이안 브루스 퍼거슨은 1917년 4월 13일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다아시 스튜어트 퍼거슨과 에thel May (결혼 전 성은 래트레이)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로이터 통신사에서 근무하던 시드니 렌과 재혼했다.[6][1]

2. 2. 초기 교육

퍼거슨은 1917년 4월 13일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다아시 스튜어트 퍼거슨과 에thel May(결혼 전 성은 래트레이)의 외동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나중에 로이터 통신사에서 근무하는 시드니 렌과 재혼했다.[1] 그는 어머니와 새아버지와 함께 여행하며 웰링턴, 멜버른, 런던, 파리, 더니든의 학교에 다니면서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1][6]

2. 3. 초기 경력

퍼거슨은 1917년 4월 13일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퍼거슨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후 퍼거슨의 어머니는 리우터에서 일하던 시드니 렌과 재혼했다.[6] 퍼거슨은 어머니 및 양아버지와 함께 여행하며 웰링턴, 멜버른, 런던, 파리, 더니딘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교육을 마친 후 퍼거슨은 웰링턴에서 생도 기자로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퍼거슨은 "시드니 선"이라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다.[6]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퍼거슨은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에 입대하여 제2/1대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제16여단 본부 정보부서로 이동, 중동에서 복무하며 바르디아 전투와 컴패스 작전 등에 참전했다. 코코다 트랙 전역에서는 찰스 허큘리스 그린의 뒤를 이어 B 중대를 지휘하며 오웬 스탠리 산맥을 넘어 사나난다까지 진격하는 전투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리더십으로 1942년 10월 20일 템플턴 건널목 전투에서 십자장을 받았다.[6][7]

이후 퍼거슨은 제6사단 연락장교를 거쳐 제7사단에서 모로타이 전투와 발릭파판 전투의 상륙 작전 계획을 지원했다.[8]

3. 1.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입대

1939년 11월 3일, 제2차 호주 제국군에 입대한 퍼거슨은 제2/1 대대에 배속되었다. 상관은 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제16 여단 사령부의 정보 부서로 전출시켰다.[6] 1940년 중동에 도착한 그는 하사로 진급했고, 6월 27일에는 견습 중위가 되었다. 여단 정보 장교로서, 퍼거슨은 1941년 1월 바르디아 전투와 컴패스 작전에 참전했다. 그 후 5월에 제2/2 대대에 배정받았고, 이집트시리아에서 복무했다.[6]

3. 2. 지중해 및 중동 전구

1939년 11월 3일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에 입대한 퍼거슨은 오스트레일리아 제2/1대대에 배정되었다. 잠재력을 인정받아 제16여단 본부의 정보부로 전환되었다.[6] 1940년 중동에 도착한 퍼거슨은 하사로 진급했고, 6월 27일에는 견습 중위가 되었다. 여단 정보부 장교로서 1941년 1월 바르디아 전투와 컴패스 작전에 참전했다. 5월에 오스트레일리아 제2/2대대로 배정되었고, 이집트시리아에서 복무했다.[6]

3. 3. 코코다 트랙 전역

호주 정부가 오스트레일리아 방어를 위해 군을 소환한 뒤, 퍼거슨은 대위로 진급하여 찰스 허큘리스 그린의 뒤를 이어 제2/2대대 B중대를 맡게 되었다. 대대는 1942년 8월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해 휴식을 가진 뒤, 9월에 포트모르즈비에 도착했다. 대대는 오웬 스탠리 산맥을 따라 코코다 트랙으로 파견되었으며, 코코다 트랙 전역에서 사나난다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6]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사나난다에 도착한 이후 제2/2대대는 예비군으로 배치된 550명 중 88명만 소집할 수 있었다. 퍼거슨은 대대가 말라리아뎅기열에 감염되어 9달 동안 활동할 수 없었다. 그는 1942년 10월 20일 템플턴 건널목에서 보여준 리더십으로 십자장을 받았다.[6][7]

3. 4. 기타 작전 참여

퍼거슨은 제7사단에 배속되어 모로타이 전투와 바리크파판 전투의 수륙 양용 상륙 작전을 계획하는 데 기여했다.[8]

4. 전후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퍼거슨은 일본 영연방 점령군에 자원했다. 그는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로 재편된 제67대대의 개편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에 파병되는 제27보병여단에 제3대대가 합류하기 전까지 재장비와 조직 관리를 담당했다.[6]

4. 1. 영연방 점령군 복무

1945년 8월 종전 후, 퍼거슨은 일본 영연방 점령군에 자원하여 히로시마현 가이타정에타지마에서 제67대대 중대를 지휘했다.[6] 1947년 제67대대 부대대장이 되었고, 1948년에는 영연방 점령군 본부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6월 26일, 주일본 캐나다 대사관 직원 앨리스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6]

퍼거슨은 제67대대가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로 재편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에 파병되는 제27보병여단에 제3대대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자, 찰스 그린이 대대장이 될 때까지 제3대대의 재장비와 조직 관리를 맡았다.[6]

4. 2.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재편

퍼거슨은 제67대대가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3RAR)로 재편성될 때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1][6] 1950년 3RAR이 6.25 전쟁유엔군의 일환으로 영국 연방 제27여단에 합류하기 위해 대한민국으로 파병되었을 때, 그는 찰스 그린 중령이 지휘관이 될 때까지 장비 재정비와 편성을 담당했다.[1][6]

5. 한국 전쟁

찰스 그린 중령이 청천강 전투 직후 사망하자, 퍼거슨은 1950년 11월 8일 임시 중령으로 진급하여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3RAR)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제3대대를 이끌고 북한에서 서울 이남으로 철수하며 혹독한 겨울을 견뎠고, 38선에서의 진격과 공격, 1951년 4월 가평 전투에 참전했다. 가평 전투의 공로로 퍼거슨은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부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후 한강으로 철수하여 임진강까지 진격했다.[4]

5. 1.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지휘

1950년 11월 7일 북한 박천시 인근에서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의 지휘를 맡기 직전의 퍼거슨.


찰스 그린 중령이 정주 전투 직후 텐트에서 쉬고 있을 때 적의 파편에 심각한 부상을 입자, 퍼거슨은 1950년 11월 8일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3RAR)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임시 중령으로 진급했다.[6] 제3대대는 북한에서 서울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 했다. 이후 그는 1951년 4월 가평 전투와 38선 인근의 작전에 참여했고, 가평 전투에서의 공로로 퍼거슨은 특무훈장을 받았고, 제3대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9] 퍼거슨은 8달 동안의 지휘를 마치고 1951년 7월 5일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의 지휘권을 내려놓았다.[10]

5. 2. 주요 전투

찰스 그린 중령이 정주 전투 직후 텐트에서 쉬고 있을 때 적의 파편에 심각한 부상을 입자, 퍼거슨은 1950년 11월 8일 임시 중령으로 진급하여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3RAR)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6] 제3대대는 북한에서 서울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51년 4월 가평 전투와 38선 인근 작전에 참여했고, 가평 전투에서의 공로로 퍼거슨은 특무훈장을 받았고, 제3대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9] 1951년 7월 5일, 퍼거슨은 8개월 동안의 지휘를 마치고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의 지휘권을 내려놓았다.[10]

5. 3. 지휘권 이양

퍼거슨은 8개월간 지휘를 한 후 1951년 7월 5일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의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다.[10][5]

6. 이후 삶

한국 전쟁 이후 퍼거슨은 군 생활을 이어나갔다. 군 퇴역 후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시드니의 유니온 클럽에서 비서로 일했다.[1] 1988년 12월 21일 캔버라에서 사망했으며, 부인과 세 아들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자서전 사전"에 따르면, 그는 "영국 성공회 식으로 화장되었다".[6]

6. 1. 군 경력

퍼거슨은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제1대대를 지휘했고,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제13국민복무훈련대대를 지휘했다. 1957년 10월, 임시로 받았던 중령 직위가 정식 직위가 되었다.[6]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캔버라에 있던 왕립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는 방콕에 위치한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에 배속되었다. 1967년 4월 14일 육군에서 퇴역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6]

6. 2.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 파견

퍼거슨은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방콕에 있는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에 파견되었다.[6]

6. 3. 퇴역 및 사망

한국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퍼거슨은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제1대대를 지휘했고,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제13국민복무훈련대대를 지휘했다. 1957년 10월에는 임시로 맡았던 중령 직위가 정식 직위가 되었다.[6]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캔버라에 있던 왕립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는 방콕에 있는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에 배속되었다. 1967년 4월 14일 육군에서 퇴역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6] 군에서 퇴역한 후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시드니의 유니온 클럽의 비서로 일했다.[1]

퍼거슨은 1988년 12월 21일 캔버라에서 사망했고, 부인과 세 아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자서전 사전"에 따르면, 그는 "영국 성공회 식으로 화장되었다".[6]

참조

[1] 간행물 Argent, pp. 382–383
[2] 간행물 London Gazette 1943-07-22
[3] 간행물 London Gazette 1947-03-06
[4] 간행물 London Gazette 1951-05-22
[5] 서적 Horner 2008, p. 440
[6] 간행물 Argent, pp. 382–383
[7] 간행물 London Gazette 1943-07-22
[8] 간행물 London Gazette 1947-03-06
[9] 간행물 London Gazette 1951-05-22
[10] 서적 Horner 2008, p.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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