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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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락은 1907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만주에서 정의부, 국민부, 조선혁명군 등 항일 무장 단체에서 활동했다. 1929년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조선혁명군 제9대장을 역임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조직했으나, 1931년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일본의 귀순 공작에 가담하여 김일성에게 귀순을 권유하다가 처형되었다. 타도제국주의동맹과의 관련성을 두고 논란이 있으며, 김일성의 항일 투쟁 시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에 가입하였고, 정의부가 운영하던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7]에서 1년간 군사교육을 받으며 중국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다.[8] 1926년 6월 17일부터는 안석붕(安石朋)과 함께 정의부의 교통사무를 담당하기도 했다.[9] 화성의숙은 훗날 북한의 김일성도 잠시 다녔던 곳으로, 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8]
이종락은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정의부가 운영하던 화성의숙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7][8] 이후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제9대장으로 활동했으나,[6] 1930년 9월 국민부 내 공산주의 성향 청년들과 함께 탈퇴하여 12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조직하고 총지휘를 맡았다.[17] 이 조직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으며, 당시 김일성도 말단 대원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7][30]
2. 정의부, 국민부, 조선혁명군에서의 활동
1929년에는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제9대장 안붕(安鵬)의 부관으로 활동하다가 그의 후임으로 제9대장이 되었다.[6] 제9대장으로서 이종락은 1929년부터 이통현(伊通縣) 고유수(孤楡樹)와 장춘현(長春縣) 카륜(卡倫)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세력을 떨쳤으며, 자금 조달을 위해 만철(滿鐵) 연선의 조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11]
1930년 6월, 조선 공산당 재건설 만주부 위원회 산하 적군군사위원회 군사위원이 되는 등[12] 공산주의 계열 활동에 참여하면서 국민부 지도부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같은 해 6월 28일 조선혁명군 제9대장에서 파면되었고,[13][14] 8월 19일 국민부를 공식 탈퇴하였다.[16] 이후 별도의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31년 1월 28일, 김광렬(金光烈), 박운석(朴雲碩) 등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5][24][6][25][26][27] 체포 당시 그의 주소는 랴오닝성 통화현(通化縣) 쾌대무자(快大茂子)였다.[5] 1931년 4월 8일 신의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28][34][35] 1933년 8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에서 징역 6년형이 확정되었다.[41]
1936년 7월 4일, 신의주 형무소에서 약 5년 6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가출옥하였다.[41][42][1][2] 출옥 후에는 김창영의 권고로 변절하여 만주국 협화회에 가입하고, 일제의 항일 무장 세력 귀순 공작에 협력하였다.[1][2] 소학교 동창이었던 계기화(桂基華)는 회고록에서 이종락이 출옥 직후부터 옛 동지들에게 일제 협력을 권유했으며, 특히 조선혁명군의 하산(귀순) 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술회했다. 계기화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던 이종락이 공산주의에 물들고 감옥 생활을 거치면서 변절하여 남은 삶을 망쳤다고 평가했다.
1939년부터는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을 귀순시키기 위한 공작에 박차석과 함께 중재인으로 나섰다.[46] 김일성은 귀순 자체에는 관심을 보였으나 안전 보장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협상은 지지부진했다.[46] 1940년 1월 중순, 이종락은 협상을 위해 김일성 부대를 찾아갔다가 김일성의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 杨靖宇|양정우zho에게 발각되었다. 양정우는 부하들을 이끌고 급습하여 이종락을 체포했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다.[46] 양정우 역시 약 한 달 뒤인 1940년 2월 23일 전사했다.[47]
2. 1. 남만한인청년총동맹 활동
1929년 11월 2일, 국민부 산하 단체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수습대회에서 중앙 간부로 선출되었다.[10]
2. 2.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결성
1930년 6월 28일 국민부 수뇌부와의 의견 차이로 조선혁명군 제9대장에서 파면되었고,[13][14] 같은 해 8월 19일 국민부를 공식적으로 탈퇴하였다.[16]
1930년 9월 10일, 이종락은 동아혁명군(東亞革命軍)의 김광렬(金光烈)과 제휴하여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를 조직하고 총지휘를 맡았다.[17] 이 조직에는 김일성도 말단 대원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7] 길강지휘부는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으며, 중국 국민당(國民黨) 정부 타도와 국민부 세력 제거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다. 부수적으로는 만주 지역의 공산주의 혁명 확산(적화)을 목표로 하였다.[17] 구성원은 조선인들로 이루어졌으나, 당시 기록상 조직의 목표로 조선의 독립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17] 이종락은 같은 해 9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18][19][20]
1930년 11월 25일,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조선혁명군 사령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21] 1930년 12월 초에는 이종락의 부하가 중동선(中東線) 카륜(卞倫)역 부근에서 정신(鄭信)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2] 1931년 1월에는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주의 항일 단체들이 추진하던 통합 운동에 이종락 세력도 참여하였다.[23]
그러나 1931년 1월 28일, 이종락, 김광렬, 박운석(朴雲碩) 등 사령부의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다.[5][24][6][25][26][27] 이후 남은 세력은 세화군(世火軍),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을 이어가려 했으나, 내부 분열 등으로 인해 1931년 11월 간부 최창걸(崔昌傑)이 피살된 후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29] 김일성(당시 金成柱)은 이후 세화군의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9] 김일성(당시 기사에는 金一成으로 표기) 역시 이종락 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1931년 3월 체포되기도 하였다.[31][32][33]
3. 체포와 투옥, 그리고 변절
그러나 길강지휘부 활동 중이던 1931년 1월 28일, 이종락은 김광렬(金光烈), 박운석(朴雲碩) 등 주요 간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5][24][6][25][26][27] 이로 인해 그가 이끌던 조직은 와해 위기에 처했고, 남은 인원들은 '세화군(世火軍)'이라는 이름으로 부대를 재편하기도 했다.[29] 당시 김일성 역시 이종락의 부하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동아일보 기사 등을 통해 확인된다.[31][32][33]
체포된 이종락은 1931년 4월 신의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28][34][35] 재판을 거쳐 1933년 8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형이 확정되었다.[41]
약 5년 6개월간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한 이종락은 1936년 7월 4일 가출옥했다.[41][42][1][2] 출옥 후 그는 김창영의 권고를 받아들여 과거의 항일 노선을 버리고 변절했으며, 일제의 항일 운동가 귀순 공작에 협력하기 시작했다.[46]
3. 1. 출옥과 만주국 협화회 활동
1936년 7월 4일, 이종락은 신의주 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약 5년 6개월을 복역한 뒤였다.[41][42][1][2]
출옥 직후 그는 만주국 협화회에 가입하여 과거 자신이 속했던 항일 운동 진영, 특히 공산주의 계열 세력의 귀순을 유도하는 공작에 참여했다.[1][2] 그의 소학교 동창이자 조선혁명군 대원이었던 계기화(桂基華, 1910~2002)[60]는 회고록에서 이종락이 출옥 후 자신을 찾아와 "지금 동양에서 일본을 누를 자는 없으니 협력하여 편히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귀순 공작 참여 사실을 밝혔다고 기록했다. 이종락은 일본 측이 귀순 조건으로 연해주에 조선인 국가 건설까지 약속했다고 전하며 동참을 권유했지만, 계기화는 이를 거절했다. 계기화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던 이종락이 공산주의에 물들었다가 출옥 후에는 일제의 앞잡이(백색주구)들과 협력하며 변절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계기화, 자료(資料) Ⅰ : 삼부(三府)ㆍ국민부(國民府)ㆍ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독립운동(獨立運動) 회고(回顧)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1호 부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pp.433~435)
조선혁명군의 마지막 총사령 김활석과 문무경(文武卿) 등 주요 간부들과 약 400명의 대원들은 1937년 4월 일제에 귀순했는데, 이는 이종락 등이 참여한 귀순 공작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1938년 8월에는 잠시 북경으로 건너가 거주하기도 했으나, 당시 일본 측 기록에는 그가 여전히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남아있다.[1][2]
1939년부터 1940년 1월 사이, 이종락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박차석과 함께 과거 자신의 부대원이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귀순 공작에 나섰다. 박차석은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의 동료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귀순 자체에는 관심을 보였으나, 귀순 후의 신변 안전 보장 등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하며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결국 1940년 1월 중순, 이종락은 협상을 위해 김일성의 부대를 찾아갔다가 김일성의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에게 발각되었다. 양정우는 부하들을 이끌고 와 이종락을 체포했고, 이종락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46] 이종락의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1939년 가을이라는 만선일보의 보도[45]도 있으나, 귀순 공작을 주도했던 김창영이 1949년 반민특위 법정에서 1940년 1월이라고 증언한 내용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46] 공교롭게도 이종락을 사살한 양정우 역시 약 한 달 뒤인 1940년 2월 23일에 전사했다.[47]
4. 김일성 귀순 공작과 최후
1936년 7월 4일 신의주 형무소에서 가출옥한[41][42][1][2] 이종락은 김창영의 권고로 변절하여 만주국 협화회에 가입하고, 일제의 항일 빨치산 귀순 공작에 협력하게 된다.[1][2][46]
1939년부터 그는 박차석과 함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귀순 공작에 중재인으로 나섰다.[46] 김창영이 1949년 반민특위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종락과 박차석은 서신과 사진을 살포하여 김일성과의 연락을 시도했고, 약 2개월 후 김일성 측으로부터 답신을 받았다. 1940년 1월 중순, 박차석이 직접 김일성 부대를 찾아가 귀순 조건을 논의했으며, 김일성은 귀순 의사를 밝히며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46]
그러나 김일성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김창영의 지시에 따라, 이종락은 재협상을 위해 다시 김일성 부대로 들어갔다.[46] 입산 다음 날, 김일성의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가 약 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나타나 이종락을 발견했다. 양정우는 이종락이 귀순 공작원과 접촉한 사실을 문책하고 그를 변절자로 간주하여 즉시 총살했다.[46] 이종락의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만선일보가 1939년 가을로 보도했으나[45], 귀순 공작을 주도했던 김창영의 증언에 따라 1940년 1월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46] 양정우 역시 이 사건 발생 약 한 달 뒤인 1940년 2월 23일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했다.[47]
한편, 이종락의 변절 이후 활동은 1937년 4월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활석(金活石)과 문무경(文武卿) 등 주요 간부 및 대원 400여 명이 일제에 집단 귀순하는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종락의 소학교 동창이었던 계기화(桂基華)는 회고록에서 출옥한 이종락이 조선혁명군 측 인사들과 접촉하며 귀순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4. 1. 김일성과의 관계
김일성은 정의부에서 운영하던 화성의숙[7]을 일시적으로 다닌 적이 있는데, 이종락 역시 화성의숙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으므로 이것이 김일성이 이종락의 부하가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이종락은 1930년 9월 국민부를 탈퇴하여 12월에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조직하고 총지휘를 맡았다.[17] 이때 김일성도 말단 대원으로 참가하였다.[17] 1931년 1월 이종락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6], 길강지휘부의 잔류 인원은 '세화군(世火軍)'이라는 이름으로 부대를 재편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당시 이름 김성주)도 세화군의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이었다.[29]
김일성이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및 조선혁명군 사령부 소속원이었음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31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는 '조선○○군(朝鮮○○軍) 남녀 삼명 피착(被捉)'이라는 제목으로 김일성(金一成), 최득영(崔得永), 류봉화(女子)의 체포 소식을 전했으며,[31][32] 5월 4일자 기사에서는 이들을 '이종락 부하(李鐘洛 部下)'로 명시하고 길림성 정부로 호송되었다고 보도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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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감옥에서 나온 이종락은 김창영의 권고로 변절하여 일제의 항일 빨치산 귀순 공작에 협력하게 된다.[46] 그는 왕년의 부하였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귀순을 설득하기 위해 중재인으로 나섰다.[46] 김일성은 귀순에 관심을 보였으나 안전 보장을 위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협상이 지연되었다.[46] 1940년 1월 중순, 이종락은 협상을 위해 김일성 부대를 찾아갔다가[46], 김일성의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에게 발각되어 부하들과 함께 온 양정우에 의해 사살되었다.[46] 이종락의 사망 시기는 만선일보 기사에는 1939년 가을로 나오지만[45], 귀순 공작을 주도한 김창영의 1949년 반민특위 법정 증언에 따르면 1940년 1월이다.[46] 김창영의 법정 증언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46] 양정우 본인도 한 달여 뒤인 2월 23일에 전사했다.[47]
5.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과의 관계 논란
이종락은 북한 김일성의 청소년 시절 상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일성이 1926년 화성의숙을 다닐 때 함께 수학하며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48] 이종락은 5년 연상이었으며, 김일성의 화성의숙 후배일 가능성은 낮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이종락과 박차석(朴且石)이 자신과 화성의숙을 같이 다녔으며,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과 건설동지사를 함께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을 꾸릴 때도 같이 활동했다고 언급되어 있다.[48]
: "박차석과 리종락은 나와 화성의숙에도 같이 다니였고 《ㅌ.ㄷ》와 건설동지사도 같이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을 꾸릴 때에도 같이 활동한 사람들이였습니다. 혁명을 몇해만 같이하면 형제나 다름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두사람은 나와 혁명을 4∼5년동안이나 같이하였습니다."[48]
《ㅌ·ㄷ》는 타도제국주의동맹(打倒帝國主義同盟)을 의미하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26년 화성의숙 재학 시절 조직했다고 주장한다.[50] 그러나 실제로는 1930년 전후 이종락이 조직한 단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51][52]
: "1930년 전후, 만주의 장춘 서쪽, 회덕현 이통현 일대의 한인 농촌은 이종락이라는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동맹의 애초 목적은 반제운동이었고, 이를 일컬어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라고 불렀는데, 북한은 이를 김일성의 업적인양, 그것도 엄청난 수준으로 과장 선전 하고 있다."[51]
해방 직후 간행된 최형우(崔衡宇, 1905~1950)의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에는 북한 김일성이 몇몇 동지들과 함께 1926년 《ㅌ·ㄷ》를 조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4] 그러나 최형우는 김일성이 1930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회덕현 오가자(五家子)에 머물 때 알게 된 인물로, 1926년 김일성의 행적을 직접 알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최형우는 해방 후 서울에 머물렀으며, 자신이 알던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자로 부상하자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책에 김일성을 미화하는 내용을 썼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는 김일성과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북한으로 가지 않았고,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처형당했다.[55] 북한은 뒤늦게 최형우의 책이 김일성 우상화에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김일성 사망 직전인 1993년에 그를 복권시켰다.
최형우의 책은 내용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같은 책 p.25에서 그는 이종락이 국민부를 탈퇴하고 만든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과 혼동하게끔 같은 이름으로 표기했으며, 이종락의 체포 시기를 실제 1931년 1월이 아닌 1928년 겨울로 잘못 기록했다.
허동찬(許東粲)은 북한이 최형우의 책 내용을 변조하여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했다.[56]
: "⑴ 최형우는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의 결성장소가 이통현과 회덕현 사이 즉 이·회간(伊·懷間)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이 「ㅌ·ㄷ」의 결성장소를 제멋대로 이·회간의 동남쪽에 있는 화전현성(樺甸縣城)으로 바꾸어 버렸다...
: ⑵ 최형우는 위의 문장에서 「ㅌ·ㄷ」이 마치 1926년에 결성된 것처럼 쓰고 있다. 그러나 그가 회덕현 오가자에 있었던 것은 1930년의 일이고 그가 이곳에서 김일성과 만난 해도 30년이다... 최형우가 쓴 26년이란 30년을 잘못 계산하여 적은 오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일성은 이 최형우의 어쩌면 단순한 잘못을 최대한으로 악용하여 26년 그가 화성의숙에 있을 때 「ㅌ·ㄷ」이 결성된 것으로 사실을 왜곡하였다.
: ⑶ 당시 이·회간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회적 중견의 한 사람이었던 최형우는 「ㅌ·ㄷ」를 결성한 인물은 장기명(張基明)·이정락(李貞洛)·현균(玄均)·김혁(金赫)·최천(崔泉)·문시선(文時宣) 등과 김일성·이(李)·계(桂) 양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화전의 ㅌ·ㄷ」을 날조하기 위하여 「이·회간의 사회적 중견」들을 모두 집어치워 버렸다."[56]
허동찬의 분석에 따르면, 최형우가 언급한 이정락(李貞洛)은 이종락의 본명이며, 최천(崔泉)은 최형우 본인이다.[56] 장기명(張基明)은 장소봉(張小峰, 蘇峰)으로도 불렸고[57][58][59], 문시선(文時宣) 역시 김일성의 회덕현 오가자 시절 연고 인물로 언급된다. 허동찬은 「ㅌ·ㄷ」의 결성 시기가 최형우 책의 해당 절 처음에 나오는 1926년보다는, 뒤에 김일성이 19세 때라고 언급한 부분과 문맥상 더 부합하며, 따라서 1930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최형우가 거론한 인물 중 이종락이 가장 중심인물로 보이며, 19세의 김일성과 최형우 본인도 조직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결성 시기는 두 사람이 오가자에 함께 있었던 1930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와다 하루키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의 다른 이름이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동맹)이라고 보았다. 그는 1931년 3월 17일자 중공 남만특위 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하며, 이 보고서가 반국민부 세력 중 제3세력으로 고유신파, 프로동맹,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언급하고 있으며, 타도제국주의동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 “타제동맹은 국민부 군인 속에서 분화해온 일부가 조직한 것이다. 그 중심지도자는 리종락이며 근거지는 반석 북부, 고유수 길강 노선, 회덕현 등이다. 800여호의 조선농민에, 20여명의 무장이 있다. 지난해 12월 당 특파원이 해결하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해결하지 못하였다. 올해 2월 리종락 등 4명이 일제에 붙잡혔다. 이 타제동맹은 대중의 역량과 사상에서 프로동맹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무장은 그들보다도 강력하다.”[60]
서재진은 이러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김일성이 1926년에 조직했다고 주장하는 ㅌ·ㄷ동맹은 실제로는 이종락이 조직한 것이며, 김일성은 화성의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종락의 ㅌ·ㄷ동맹을 자신이 조직한 것처럼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60]
6. 평가
조선혁명군 대원으로 활동했던 계기화(桂基華, 1910~2002)는 이종락과 소학교 동창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회고록에는 이종락에 대한 언급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60] 계기화에 따르면 이종락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고, 본인 역시 공산주의 성향을 갖기 전에는 신앙심이 깊었다고 한다.
회고록에서 계기화는 이종락이 체포되어 6년형을 살고 1935년 7월에 출옥했다고 기록했으나, 실제 이종락의 가출옥(假出獄) 시기는 1936년 7월 4일이다.[42][1][2] (계기화의 회고에는 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출소 직후 이종락은 전향(轉向)하여 과거 적대했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측과 다시 접촉하며 귀순을 권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기화는 출옥 후 찾아온 이종락과의 대화를 회고록에 남겼다. 당시 이종락은 "지금 동양에서 일본을 누를 자는 없으니 죽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협력하여 조금이라도 편히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조선혁명군의 하산(下山,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과거 동지였던 장소봉(張小峰), 장세용(張世勇) 등과 함께 일본인 와다 케이(和田莖)라는 인물을 만나 공작을 논의했으며, 조선혁명군을 하산시켜 만주국 경찰 유격대로 개편하고 가족들은 농장에 보내 영농케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언급했다고 한다. 계기화는 이종락이 자신에게 토벌대를 만나도 무사 통과할 수 있는 증명서를 보이며 함께 입산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다고 술회했다.
계기화는 이종락이 "감옥에서 나오는 즉시 왜(倭)의 백색주구(白色走狗)들과 더불어 남은 청춘을 끝내 망쳤다"고 평가했다.
조선혁명군의 마지막 총사령 김활석(金活石)과 문무경(文武卿) 등 지도부 대다수는 1937년 4월 일제에 귀순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 400명의 대원이 무장을 해제했다. 이로써 조선혁명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는데, 이는 가출옥한 이종락의 설득 활동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참조
[1]
데이터베이스
이정락 (李貞洛)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http://db.history.go[...]
[2]
서적
소화사상통제사자료(昭和思想統制史資料) 24권
https://www.nl.go.kr[...]
高麗書林
1989
[3]
웹사이트
이종락(李鐘洛)
http://people.aks.ac[...]
[4]
뉴스
朝鮮○○軍(조선○○군) 男女三名(남녀삼명) 被捉(피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03-26
[5]
파일
만주일대(滿洲一帶)를 교란(攪亂)하야 민주주의 국가건설(民主主義 國家建設) / 일행 구명(一行 九名) 신의주(新義州)에서 취조중(取調中) / 이종락 사건(李鍾洛 事件)의 내용(內容)
동아일보
1931-03-30
[6]
파일
다수부하(多數部下)를 파견(派遣) / 영경(領警)과 교화(交火)도 수차(數次) / 이번도 군자 모집하다 잡혀 / 이종락 등의 활동 경로(李鍾洛等 活動 徑路)
동아일보
1931-02-03
[7]
웹사이트
화전현 화성의숙
http://www.okpedia.k[...]
[8]
뉴스
爆彈製造에 滿鐵社員도 關與 / 主犯인 金永淳은 ○○○○軍의 顧問
https://www.nl.go.kr[...]
메일신보(每日申報)
1932-05-05
[9]
데이터베이스
鮮匪團正義府의 移轉과 中央通信 發行에 關한 件
http://db.history.go[...]
1926-06-17
[10]
파일
南滿韓人靑年總同盟 收拾大會 決議錄
[11]
파일
國民府革命軍ト第九隊長李鐘洛トノ關係ニ付報告ノ件
[12]
파일
朝鮮共産黨再建設滿洲部ノ赤軍々事委員會組織ニ関スル件
https://www.jacar.ar[...]
[13]
파일
조공 만주부 위원 이종락 압래(朝共 滿洲部 委員 李鍾洛 押來), 장춘경찰에 톄포(체포)되어 신의주서(新義州署)로 인치(引致)
중외일보[中外日報]
1930-08-03
[14]
뉴스
多年間 滿洲에서 獨立運動을 하던 李鍾洛이 長春 日本領事館 경찰에 被逮되다.
http://db.history.go[...]
朝鮮日報
1930-08-09
[15]
뉴스
朝鮮革命黨은 國民府 근거지에서 黨執行委員會를 개최하고 다음 사항을 결의하다.
http://db.history.go[...]
[16]
파일
국민부(國民府)내 공산주의자들의 1930년 8월 19일자 탈퇴 선언문(脫退宣言文)
[17]
파일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조직에 관한 건(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組織ニ関スル件)
[18]
파일
재만선인 공산운동 내정에 관한 건(在滿 鮮人 共産運動 內情ノ関スル件)
1930-09-22
[19]
웹사이트
満州ニ於ケル共産黨ノ 直接行動
https://www.jacar.ar[...]
조선총독부 경무국
1930-09
[20]
뉴스
李鐘洛 일파 진용을 갱신. 「중국공산당에 가입」 적극적 행동에 전환
조선일보
1931-04-01
[21]
파일
조선혁명군 사령부 조직에 관한 건(朝鮮革命軍 司令部 組織ニ関スル件)
[22]
파일
조선인 공산주의자 등의 장춘 잠입설에 관한 건(鮮人 共産主義者 等ノ長春 潛入說ニ関スル件)
[23]
뉴스
勢力挽回(세력만회)를 目的(목적)코 各派首領 大同團結(각파수령 대동단결)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1-01-19
[24]
뉴스
軍資募集數回(군자모집수회) 巡査(순사)까지 射殺(사살) 【酌婦(작부)도 數名(수명)을 殺害(살해)】 李鍾洛等 犯行詳報(이종낙등 범행상보)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1-02-04
[25]
파일
조혁군 수령(朝革軍 首領) 이종락 검거(李鍾洛 檢擧)
동아일보
1931-01-31
[26]
뉴스
不逞團の巨魁李鐘絡逮捕, 長春署の綱に入る
https://www.nl.go.kr[...]
조선신문[朝鮮新聞]
1931-01-30
[27]
뉴스
明大二年修業の巨魁李鐘洛, 李鐘洛
https://www.nl.go.kr[...]
조선신문[朝鮮新聞]
1931-03-03
[28]
뉴스
嚴重한 警戒裡에 李鍾洛等九名送局 폭탄三개와 一건서류와 함 八日新義州檢事局에
https://www.nl.go.kr[...]
매일신보[每日申報]
1931-04-10
[29]
파일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 세화군 - 동방혁명군
[30]
서적
최형우(崔衡宇, 1905~1950)
http://www.cybernk.n[...]
東方文化社
1945-12-10
[31]
뉴스
朝鮮○○軍(조선○○군) 男女三名(남녀삼명) 被捉(피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03-26
[32]
뉴스
李鍾洛 部下(이종락 부하) 三名 又被檢(삼명 우피검)
http://newslibrary.n[...]
조선일보
1931-03-26
[33]
뉴스
李鐘洛 部下 (이종락 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05-04
[34]
뉴스
平安北道, 大アジャ主義を標榜支那軍閥打倒計畫, 內鮮人合體の秘密結社東亞聯盟幹部送局
https://www.nl.go.kr[...]
조선신문(朝鮮新聞)
1931-04-10
[35]
뉴스
嚴重한 警戒裡에 李鍾洛等九名送局 폭탄三개와 一건서류와 함께 八日新義州檢事局에
https://www.nl.go.kr[...]
매일신보(每日申報)
1931-04-10
[36]
파일
滿洲를 土臺로 劃策한 大陰謀事件終豫 武器까지 購入하야 中國軍閥撲滅企圖
每日申報
1932-05-05
[37]
뉴스
남북만철도 파괴계획-신국가건설책을 신의주 법원에서 심리
http://db.history.go[...]
신한민보
1932-06-02
[38]
뉴스
朝革軍幹部 三名의 公判, 二名七年 一名은 五年 昨日 新義州法院에서 ; 金永淳 李貞洛 朴京淳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2-12-16
[39]
간행물
일제문서해제 행형편(行刑篇) : 부록 가출옥 관계 기록물 중 독립운동 관련자 목록
국가기록원
2012
[40]
간행물
일제문서해제 행형편(行刑篇) : 부록 가출옥 관계 기록물 중 독립운동 관련자 목록
국가기록원
2012
[41]
간행물
일제문서해제 행형편(行刑篇) : 부록 가출옥 관계 기록물 중 독립운동 관련자 목록
국가기록원
2012
[42]
뉴스
國民府事件의 李禎洛假出獄
https://www.nl.go.kr[...]
조선중앙일보
1936-07-09
[43]
웹사이트
연경(燕京) 지도 : 서울역사박물관
https://museum.seoul[...]
[44]
웹사이트
北半截胡同
https://baike.baidu.[...]
[45]
파일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 /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만선일보
1940-04-18
[46]
웹사이트
김창영(金昌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반민특위 조사 기록)
http://db.history.go[...]
1949-04-19
[47]
뉴스
反滿抗日 共産匪 總司令 楊靖宇 射殺
https://www.nl.go.kr[...]
만선일보
1940-02-25
[48]
서적
세기와 더불어 7권 (계승본 1편, 1996년)
[49]
판결문
최효일(崔孝一), 김형권(金亨權), 박차석(朴且石), 정계빈(鄭桂㻞)에 대한 판결문
http://e-gonghun.mpv[...]
경성복심법원
1932-04-04
[50]
웹사이트
[51]
간행물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2. 打倒帝國主義同盟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52]
웹사이트
타도제국주의동맹(打倒帝國主義同盟)
http://encykorea.aks[...]
[53]
웹사이트
최형우(崔衡宇, 1905.10.11 ~ 1950.11.05)
https://www.unamwiki[...]
[54]
서적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http://dlps.nanet.go[...]
동방문화사
1945-12-10
[55]
뉴스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 연구:34)
https://www.seoul.co[...]
서울신문
1993-02-04
[56]
서적
세기와 더불어 2권
1930-05-01
[57]
뉴스
左翼民族團體(좌익민족단체)로 革命軍司令部組織(혁명군사령부조직)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03-30
[58]
뉴스
重要建築物(중요건축물) ○○과 日滿大官(일만대관) ○○計劃(계획)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3-02-04
[59]
블로그
D-Story 60 : 김일성 회고록 속 동아일보
http://dongne.donga.[...]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010-11-30
[60]
뉴스
조선혁명군 생존자 桂基華(계기화)옹 「마지막獨立軍(독립군)」에 남은건 월세 단간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7-08-10
[61]
웹사이트
최용규(崔溶奎) 독립유공자공훈록
https://e-gonghun.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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