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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미야성 (도쿠시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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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노미야성(도쿠시마현)은 1338년 오가사와라 나가무네에 의해 축성된 일본의 성이다. 남북조 시대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여러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이후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주어졌다. 1638년 일국일성령에 따라 폐성되었으며, 현재는 석벽과 해자가 남아있고, 2017년 속 일본 100명성으로 선정되었다. 성곽 구조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여러 구루와와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저수지 등 물을 활용한 방어 체계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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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미야성 (도쿠시마현)
위치 정보
이치노미야 성 비석
이치노미야 성 비석
혼마루 터의 석벽
혼마루 터의 석벽
기본 정보
이름이치노미야 성
로마자 표기Ichinomiya-jo
별칭이치노미야 성
종류산성
소재지도쿠시마현도쿠시마시이치노미야초
역사
축성 연도1338년
축성 가문오가사와라 씨
주요 인물오가사와라 나가무네, 하치스카 이에마사, 마스다 모치마사
폐성 연도1638년
구조
성곽 구조구루와, 돌담, 가라 호리, 호리키리, 다테보리, 우물 터 등
천수불명 (천수에 가까운 건물 또는 망루 문의 가능성 있음)
문화재 정보
지정도쿠시마현 지정 사적, 도쿠시마 시민 유산
소유 및 관리
소유오가사와라 씨, 이치노미야 씨, 조소카베 씨
건축 정보
건축 자재석벽
건설 시작1338년
건설 주체오가사와라 씨
사용 정보
기타 정보

2. 역사

남북조 시대인 1338년 아와 국 슈고 오가사와라 나가후사의 아들 오가사와라 나가무네가 축성하였다. 이후 나가무네의 자손들은 성씨를 이치노미야 씨로 바꾸고 대대로 이 성을 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구축했다.[1]

센고쿠 시대에는 긴키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미요시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미요시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가문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아와 국의 정세는 혼란에 빠졌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 호소카와 사네유키가 미요시 나가하루에게 반기를 들자, 당시 성주였던 이치노미야 시게스케는 조소카베 가문과 손잡고 사네유키 측에 가담하여 나가하루를 토벌했다. 이후 미요시 측의 소고 마사야스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성을 빼앗고 되찾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자 전세는 조소카베 가문에 유리하게 흘러갔고, 1582년 나카토미가와 전투에서 이치노미야 가문은 조소카베 군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나, 전투 후 시게스케는 조소카베 가문에 의해 살해되었다.[4] 이후 성은 조소카베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함락되었다. 이에마사는 잠시 이 성을 거처로 삼았으나 이듬해 도쿠시마성을 축성하여 옮겨갔고, 이치노미야 성은 가신 마스다 모치마사가 관리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1615년 공포된 일국일성령에 따라 1638년 폐성되었다.[2]

이치노미야 성의 산


이치노미야성은 동룡왕산 북동쪽 능선 끝, 해발 144.3m, 기슭에서부터의 비고 약 120m 지점에 축조된 산성이다. 북쪽의 아유쿠이 강, 동쪽의 후나토 강과 소노세 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뒤로는 시코쿠 산맥이 버티고 있어 천연의 요새 조건을 갖추었다. 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나뉘며, 혼마루는 북성에 속한다. 현재 성터에는 석벽과 가라보리(마른 해자)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도쿠시마현 내 최대 규모의 산성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1954년 8월 6일 도쿠시마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17년 4월 6일에는 속 일본 100명성 (176번)으로 선정되었다.[8]

2. 1. 남북조 시대 (1338년 ~ 1392년)

1338년 아와 국의 슈고였던 오가사와라 나가후사의 넷째 아들 오가사와라 나가무네가 이 지역의 이치노미야 무네나리를 멸망시키고 성을 쌓았다. 나가무네는 이치노미야 신사의 분령을 성 안에 모셨으며, 이후 성씨를 이치노미야 씨로 바꾸고 대대로 이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치노미야 가문은 신직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자 오가사와라 나가무네는 고다이고 천황남조 측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이는 무로마치 막부의 창시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지지했던 아버지 오가사와라 나가후사와는 다른 행보였다.[1] 하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지지하는 북조 측의 호소카와 요리하루는 남조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340년 호소카와 군은 오니시 성과 시라치 성 등을 공격하며 압박했고, 이치노미야성에 대한 공격도 개시했다.

1350년 오가사와라 나가무네가 병으로 사망하자 아들 이치노미야 나리무네가 성주 자리를 이었다.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이끄는 북조 군대는 에비스야마 성과 노다야마 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그 기세를 몰아 이치노미야성까지 쳐들어와 성 주변 지역을 불태웠다. 이것이 이치노미야성이 역사상 처음으로 전장이 된 사건이다.

이후에도 남조와 북조 양측의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1362년 이치노미야 나리무네는 호소카와 요리유키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나리무네는 호소카와 요리유키와 화해하고 아들 이치노미야 나리유키에게 성주 자리를 물려준 뒤, 자신은 시게키요 성으로 물러나 은거했다. 성주가 된 이치노미야 나리유키는 북조에 항복했으며, 이후 이치노미야 가문은 호소카와 씨의 지휘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호소카와 씨 내부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기나이 지역으로 출병한 고쿠진들 중에 이치노미야 씨의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2. 2. 센고쿠 시대 (1467년 ~ 1573년)

이치노미야 가문은 긴키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미요시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세력을 유지했다. 아와국의 지배권이 호소카와 씨에서 미요시 씨로 넘어가자, 12대 성주 이치노미야 나리히데(오가사와라 나리츠구) 때에는 미요시 가신단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미요시 나가요시의 동생인 미요시 요시카타는 아와 국 슈고였던 호소카와 모치타카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 호소카와 사네유키를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미요시 요시카타는 이후 구메다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그의 아들 미요시 나가하루가 가독을 승계했다.

미요시 나가하루가 아와국의 국주가 된 후, 미요시 가신단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가미자쿠라 성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가신단도 분열 상태가 되었다.

2.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년 ~ 1603년)

1577년(덴쇼 5년) 아와 국의 실권을 장악했던 미요시 나가하루에 불만을 품은 호소카와 사네유키가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이치노미야 성주 이치노미야 시게스케(이치노미야 나리히데)는 조소카베 가문과 손잡고 사네유키 측에 가담하여 나가하루를 공격했다. 아라타노 전투 등에서 미요시 군의 배후를 위협했고, 결국 이마키리 성으로 퇴각한 나가하루를 포위하여 1577년 3월 18일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미요시 측의 반격도 거세어, 야노 구니무라의 모략으로 이자와 요리토시가 멸망하고 이치노미야 시게스케는 고립되었다. 그는 고소카베 치카야스를 통해 조소카베 모토치카와 동맹을 맺었다.[4]

같은 해 봄,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아와 국에 침공하여 오니시 성 등을 점령했다. 기세를 얻은 시게스케는 쇼즈이 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기이국, 아와지국의 지원을 받은 미요시 세력의 시노하라 지테쓰가 이끄는 7천 병력에게 이치노미야 성을 공격당했다. 불리함을 느낀 시게스케는 성을 버리고 쇼잔지로 피신했다.

1578년(덴쇼 6년) 소고 마사야스(소고 도키야스)가 쇼즈이 성주가 되었으나, 1579년(덴쇼 7년) 12월 와키 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시게스케는 다시 이치노미야 성으로 돌아왔다. 1580년(덴쇼 8년) 시게스케는 소고 마사야스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마사야스가 소고 성으로 도망간 사이 쇼즈이 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1581년(덴쇼 9년) 7월,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은 소고 마사야스가 반격에 나섰다. 마사야스는 조소카베 측의 니시쇼 성을 함락시킨 기세를 몰아 쇼즈이 성을 탈환하고 이치노미야 성까지 공격했다. 이치노미야 성은 견고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시게스케도 잘 방어했다. 같은 해 9월,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대규모 원군을 보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고 마사야스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1582년(덴쇼 10년) 5월, 오다 노부나가에게 귀순한 미요시 야스나가가 오다 정권의 시코쿠 진출 선봉으로 아와 국에 들어와 소고 마사야스와 함께 이치노미야 성 등을 수비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미요시 야스나가는 급히 교토로 돌아갔고, 이 기회를 틈타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2만 3천의 대군을 이끌고 아와 국을 침공했다. 나카토미가와 전투에서 소고 마사야스 군을 격파하고 아와 국을 평정했다.

이치노미야 시게스케는 나카토미가와 전투에서 조소카베 군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나, 미요시 야스나가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결국 같은 해 11월 7일,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포상을 논의한다는 명분으로 시게스케를 에비스 산성(이자야마 성)으로 유인하여 습격했고, 시게스케는 궁지에 몰려 자결했다. 모토치카는 이후에도 신카이 도젠, 호소카와 사네유키 등 아와 국의 여러 무장들을 제거하며 지배 기반을 다졌다.[4]

이후 이치노미야 성은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모토치카는 성을 증축하고 가신인 다니 다다즈미에게 남쪽 부분을, 에무라 치카토시에게는 기존의 북쪽 부분을 맡겨 관리하게 했다.

1585년(덴쇼 1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코쿠 정벌을 단행하여 조소카베 모토치카 세력을 공격했다.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4만 대군이 이치노미야 성을 포위했다. 성 안에는 1만 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수적 열세와 수원 차단 등의 공격으로 결국 같은 해 7월 하순에 항복했다. 이치노미야 성의 함락은 시코쿠 정벌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곧 조소카베 모토치카 자신도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5][6]

같은 해 9월, 히데요시는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아와 국을 영지로 주었다. 이에마사는 이치노미야 성을 자신의 거성(居城)으로 삼고 대대적인 개수를 진행했다. 현재 남아있는 석축 등의 유구는 이때 정비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듬해인 1586년(덴쇼 14년), 이에마사는 도쿠시마성을 새로 축성하여 거처를 옮겼다. 이후 이치노미야 성은 가신인 마스다 모치마사(마스다 미야우치)가 성주 대리(城代)로 관리하며 아와 구성 중 하나로서 도쿠시마 성의 중요한 지성(支城) 역할을 수행했다.

2. 4. 에도 시대 이후 (1603년 ~ 현재)

1615년 공포된 일국일성령에 따라 이치노미야성은 1638년 폐성되었다.[2] 이때 성의 석재 일부는 도쿠시마성으로 옮겨져 수축에 사용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현재 성터에는 석벽과 가라보리(마른 해자)의 원형이 온전히 남아 있다. 남아있는 유적 대부분은 성벽과 계단이며, 부지에는 관광객 방문을 위한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7]

이 성은 2017년에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8]

3. 성곽 구조



이치노미야성은 남북조 시대에 처음 축조되어 후대에 걸쳐 개수된 산성이다. 동룡왕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능선 끝, 해발 144.3m(비고 약 120m) 지점에 위치하며, 가파른 경사와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이다. 북쪽의 아유쿠이 강, 동쪽의 후나토 강과 소노세 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배후에는 시코쿠 산맥이 자리한다.

성은 크게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으로 나뉘며, 산기슭에는 거관(居館) 터가 남아있다. 도쿠시마현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미요시 씨와 초소카베 씨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1954년 현 지정 사적으로, 2017년에는 속 일본 100명성으로 선정되었다.

3. 1. 주요 시설

— 미요시키(三好記)

이 기록은 미요시 짓큐(三好実休)가 아와국 수호였던 호소카와 모치타카(細川持隆)를 살해한 것에 격분한 구메 요시히로(久米義広)가 미요시 짓큐의 매형이었던 이치노미야 나리히데(一宮成祐)가 있는 이치노미야성을 공격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하야시키(下屋敷)'는 평상시 거주하는 저택, 즉 사토지(里城, 산성 아래 평지에 있는 성)를 의미하며, "요가이 키비시쿠(要害きびしく)"는 해자와 토루로 둘러싸인 견고한 거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3. 2. 방어 시설

이치노미야성(一宮城)과 주변 지역의 항공 사진/국토교통성 국토지리원 [https://mapps.gsi.go.jp/ 지도・항공 사진 열람 서비스]의 항공 사진을 기반으로 작성


이치노미야성(一宮城)은 혼마루(本丸)를 중심으로 동서 800m, 남북 500m 범위에 걸쳐 사이조마루(才蔵丸), 묘진마루(明神丸), 오구라마루(小倉丸) 등의 구루와(曲輪, 성곽 구역)가 배치되어 있다. 성 내부에는 창고터, 밭터, 저수지터 등이 있었으며, 능선을 따라서는 호리키리(堀切, 능선을 끊어 만든 해자), 요코보리(横堀, 가로 해자), 타테보리(竪堀, 세로 해자), 소규모 구루와 등을 설치하여 견고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1817년 (분카 14년)에 편찬된 『이치노미야성 고성지(一宮城古城跡書)』에 따르면, 주요 구루와는 6곳, 소규모 구루와까지 포함하면 총 13곳의 마루(丸, 구루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혼마루의 돌담은 도쿠시마현에서 많이 나는 결정편암을 사용한 노즈라즈미(野面積み, 자연석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특히 모서리 돌에는 타테이시(입석)(立石) 기법을 사용하는 등 근세 성곽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돌담의 규모는 도쿠시마 현 내에서는 이케다성(池田城)과 비슷하며, 도쿠시마성(徳島城) 다음으로 크다.

'''혼마루(本丸)'''

성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며, 유일하게 주위에 석축이 둘러져 있다. 폐성 후에는 와카미야 하치만구(若宮八幡宮) 신사가 들어섰다. 석축을 기준으로 한 혼마루의 크기는 동북쪽으로 36m, 서북쪽으로 23m이다. 혼마루에는 천수대(天守台)가 없어 천수각의 존재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성곽 구조와 혼마루 남쪽에 초석 흔적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천수각 또는 그에 준하는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혼마루 동쪽에는 호구(虎口, 성문)가 한 곳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곳에는 야구라 문(櫓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분은 주변보다 지대가 약간 낮아 독특한 구조를 이룬다. 혼마루 석축의 높이는 위치마다 다르지만 동쪽은 5m에 달하며, 대부분 급경사를 이룬다. 1986년(쇼와 61년) 봄, 도쿠시마시에서 혼마루 부분의 석축을 수리했다. 혼마루 서쪽에는 한 단 아래에 가마바닥 구루와(釜床曲輪)가 있다. 혼마루 호구의 석단, 혼마루의 초석, 가마바닥의 석조물은 같은 시기의 유구로 여겨진다.

'''오구라마루(小倉丸)'''

혼마루 남쪽에 위치하며 해발 123.4m이다. 혼마루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늘고 긴 구루와로, 서남쪽에는 높이 2m의 토루(土塁, 흙으로 쌓은 방벽)가 둘러져 있다. 혼마루를 등지는 방향에는 토루가 없다. 호구는 중앙부에 한 곳 있으며, 토루의 길이는 안쪽 기준으로 58m이다. 토루는 직선이 아니라 지형에 따라 조금씩 휘어져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야구라다이(櫓台, 망루 터)가 돌출되어 있다. 현재 야구라다이는 무너졌지만, 원래는 모서리가 있는 사각형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루의 흙은 풍화로 인해 일부 붕괴되었고 경사도 완만해졌다. 토루 바깥쪽에는 빈 해자(空堀)가 둘러져 있는데, 이 해자는 횡 이동 통로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남쪽 호구와 연결된다. 오구라마루는 빈 해자, 토루, 야구라다이를 이용한 측면 공격(横矢掛かり) 구조를 갖추고 있어 이치노미야성 남쪽 방어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토루 흔적


야구라다이 흔적


오구라마루 아래에 있는 빈 해자


'''북쪽 구루와 (시이마루, 미즈노테마루)'''

저수지 흔적


시이마루(椎の丸)와 미즈노테마루(水の手丸)는 성의 북쪽에 위치하며, 둘 다 저수지를 방어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 구루와들은 토루, 타테보리, 호리키리 등으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시이마루는 주요 6개 구루와 중 가장 작으며, 동서와 남북 길이가 각각 20m 정도이다. 두 구루와 모두 혼마루 방향으로 각각 호구가 나 있다.

'''저수지'''

이치노미야성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저수지와 음폭포(陰滝)이다. 물을 저장했던 둑은 현재 끊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수지 덕분에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군대의 맹공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저수지는 말굽 형태로 오구라마루, 시이마루, 미즈노테마루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 구루와들을 연결하는 작은 구루와들도 배치되어 방어 시설을 구성했다. 성 안에는 저수지 외에도 혼마루 아래에 빈 우물 터가 있고, 사이조마루 주변에는 용수 터가 남아 있다. 이 용수 터가 당시의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성내에 작은 수원지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토 문장(伊藤文書)』, 『모리 고전기(森古伝記)』, 태합기(太閤記), 『이본 아와지(異本阿波志)』 등 여러 사료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공격 당시 '물의 손(水の手)'과 관련된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물 공급 시설이 중요한 방어 요소였음을 시사한다.

'''사이조마루(才蔵丸)'''

사이조마루 흔적


사이조마루와 묘진마루를 구분하는 호리키리 흔적


이치노미야 신사(一宮神社)에서 등성로를 따라 올라가면 처음으로 마주치는 주요 구루와로, 산노마루(三の丸)라고도 불린다. 해발 129.2m이며, 자연 지형을 따라 동서로 길쭉한 부정형 형태를 띤다. 구루와 내부는 평탄하지 않고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호구는 서쪽 끝 한 곳에 있으며, 호리키리에 면해 있다. 사이조마루 동쪽 끝에는 한 단 아래에 또 다른 구루와를 배치하고, 그 북쪽 능선에는 호리키리를 파서 능선을 통한 침입을 방어했다.

'''묘진마루(明神丸)'''

띠 구루와로의 문터


묘진마루 터


띠 구루와 터


니노마루(二の丸)라고도 불리며, 해발 140.9m로 혼마루보다 3.4m 높다. 혼마루보다 동북쪽에 위치하여 조망이 좋다. 묘진마루 주위는 거의 전체에 걸쳐 좁은 띠 구루와(帯曲輪)가 둘러싸고 있다. 북쪽 능선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자와 계단식 구루와가 배치되어 있으며, 북서 방향에도 이중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 구루와에는 '검산 요배소(剣山遥拝所)'가 있었다는 전승이 있으며, 남서 부분에는 초석과 기초 단이 남아 있어 배전(拝殿)과 본전(本殿) 형식을 갖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혼마루와 묘진마루 사이에는 길이 64m, 폭 13m의 깎아지른 띠 구루와가 있어 혼마루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띠 구루와의 남쪽에는 석단으로 된 호구가 한 곳 있다.

'''남쪽 구루와 (창고 구루와)'''

창고 구루와 터


용수 터


창고 구루와(倉の段)는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해발 89.7m이다. 이 구루와는 완전히 평탄하지 않고 자연 능선을 약간 손질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탄화곡물이 출토되었다.

'''거관(居館)'''

거관 추정지


기신사


본성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고텐이(御殿居)"라고 불리는 거관 터가 있다. 정확한 면적은 불분명하지만, 남북 약 140m, 동서 약 130m로 추정된다. 이 부근의 해발고도는 18m이며, 내부에는 요리 신사(寄神社)가 있다. '고텐이'라는 지명은 토루로 둘러싸인 성이나 관(館)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 각지에 영주 저택 터로서 유사한 지명이 남아있는 예가 있다. 따라서 이치노미야성의 거관 역시 해자와 토루로 둘러싸여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는 그러한 유구는 남아있지 않고 으로 변해있다. 이 거관은 『미요시키』에도 언급되는데, 미요시 나가요시가 아와국(阿波国) 수호인 호소카와 모치타카를 살해한 것에 격분한 구메 요시히로가 미요시 나가요시의 매형이었던 이치노미야 나리히데의 이치노미야성을 공격했을 때, 나리히데가 머물던 하야시키(下屋敷, 아래 저택, 즉 거관)를 야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기록에서 '요가이 키비시쿠(要害きびしく, 방비가 엄중하고)'라는 표현은 해자와 토루로 둘러싸인 거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등성로와 문'''

현재의 등산로도 당시 등성길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성의 정문인 대문(大手門)은 현재 등산로와 다른 위치인 덴만다니(天満谷) 계곡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 입구 북쪽 마을에는 가신단 저택으로 추정되는 평지가 계단 형태로 배치되어 현재도 주택지로 남아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보존 상태가 좋은 곳에서는 폭이 2m에 달해 현재의 등산로보다 넓으며, 물자 반입로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 올라가면 길이 갈라져 서쪽과 동쪽의 창고 구역으로 연결된다. 뒷문(搦手門)은 대문의 반대편인 남쪽 능선에 있었다고 『명동군사(名東郡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해자 등의 구조를 통해 출격이나 철수에 사용된 길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길은 구루와와 달리 대규모 공사가 필요 없어 매몰되기 쉽고 폐성 후의 길과 구별하기 어려워 정확한 경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 정비된 등산로 외에 추정되는 대문과 뒷문 쪽 길은 정비되지 않았다.

'''방어 구조 특징'''

이치노미야성의 주요 6개 구루와의 호구는 모두 평입구(平入虎口) 형태이며, 마스카타(枡形, 네모난 방어 공간)나 엇갈림(食い違い)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카타는 근세 성곽에서 급속히 발전한 구조이므로, 이치노미야성은 그보다 이른 시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성터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아, 성 안의 건물은 모두 판자 덮개(板葺き)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치노미야성에는 측면 공격(横矢掛かり)을 위한 구조가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이조마루와 묘진마루를 구분하는 해자의 바닥길을 지나 띠 구루와로 들어가는 문으로 향하는 길은 한 단 높은 사이조마루나 묘진마루의 띠 구루와에서 공격받기 쉬운 구조이다. 이 해자 바닥길에는 일부러 타테보리를 설치하여 길을 좁힘으로써 적의 진입 속도를 늦추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묘진마루의 호구로 향하는 길 역시 한 단 높은 묘진마루에서 측면 공격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는 등, 성 곳곳에서 방어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4. 접근성

이치노미야 성으로 가는 등산구

  • '''자동차 이용'''
  • * 도쿠시마 자동차도 도쿠시마IC → 국도 11호 → 국도 192호 → 도쿠시마현도 207호 → 도쿠시마현도 21호
  • * 이치노미야 신사에 참배객을 위한 무료 주차장이 있음.
  • '''도보 이용'''
  • * 등산구에서 혼마루 터까지 도보로 약 30분 소요됨.

참조

[1] 웹사이트 Ichinomiya Castle http://www.japancast[...]
[2] 웹사이트 Ichinomiya-Castle http://www.jcastle.i[...] 2016-04-14
[3] 웹사이트 Ichinomiya Castle https://www.gojapang[...] 2018-03-28
[4] 웹사이트 Ichinomiya Castle http://www.japancast[...]
[5] 웹사이트 Ichinomiya Castle http://www.japancast[...]
[6]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7] 웹사이트 Ichinomiya-Castle http://www.jcastle.i[...] 2016-04-14
[8] 웹사이트 続日本100名城 http://jokaku.jp/jap[...] 日本城郭協会 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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