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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스카 이에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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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이다.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시코쿠 정벌 이후 아와 1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들 하치스카 요시시게를 동군에 참여시켜 영지를 보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가문과의 복잡한 관계를 가졌으며, 다테 마사무네에게 "아와의 너구리"로 평가받았다. 다도에 조예가 깊고, 기독교에도 관심을 보였다. 1639년에 81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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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스카 이에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하치스카 이에마사
본명하치스카 이에마사 (蜂須賀 家政)
별칭히코에몬 (彦右衛門)
아와노코다누키 (阿波の古狸)
출생1558년
사망1639년 2월 2일
출생지오와리국
사망지불명
묘소고겐지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계명즈이운인덴 호안 조센 다이코지 (瑞雲院殿蓬庵常僊大居士)
관위종5위하 아와노카미
증 종4위
가문하치스카 씨
아버지하치스카 마사카쓰
어머니다이쇼인 (마쓰 또는 마쓰)
형제자매조손 (이부형)
하치스카 이에마사
나라히메 (가시마 나가마사의 아내)
이토히메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내)
배우자이코마 이에나가의 딸, 지코인 (히메)
자녀요시시게
소쿠신인 (이케다 요시유키의 아내)
아키히메 (이이 나오타카의 아내)
짓소인 (마쓰다이라 다다미쓰의 아내)
이치시게 (一茂), 이에마사 (家政), 아키나가 (秋長), 호안 (蓬庵) (호)
직위
가독 상속1586년
가독 계승 이전하치스카 마사카쓰
가독 계승 이후하치스카 다다테루
도쿠시마 번주1600년 ~ 1614년
도쿠시마 번주 이전불명
도쿠시마 번주 이후하치스카 요시시게
정치 경력
주군오다 씨
도요토미 씨
도쿠가와 막부
소속오다 씨
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관직오토기슈
군사 경력
주요 전투야마자키 전투 (1582년)
시코쿠 정벌 (1585년)
임진왜란 (1592년 ~ 1598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가족 관계
아버지하치스카 마사카쓰
손자하치스카 다다테루
처남구로다 나가마사

2. 생애

에이로쿠 원년(1558년) 오와리국에서 하치스카 마사카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2][3]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고,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주고쿠 공략, 시즈가타케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며 공을 세웠다.[1][2][3]

덴쇼 13년(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의 공적으로 히데요시는 아버지 마사카쓰에게 아와 1국을 주려 했으나 마사카쓰가 사양하자, 이에마사가 대신 아와 1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1][2][3][6] 이후 도쿠시마성을 축성하고 영지 경영에 힘썼으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 히데요시의 통일 전쟁에 계속 참여했다.[1][2][7]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미리 관계를 맺어둔 상태에서, 아들 요시시게를 동군에 보내고 자신은 병을 이유로 오사카에 머물다 고야산으로 출가하는 형식을 취하여 가문의 영지를 보전했다. 전투 후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 때는 도요토미 가문의 가담 요청을 거절하고 이에야스에게 밀서를 제출하며 충성을 보였고, 스스로 에도로 가 인질이 되었다.[4] 아들 요시시게의 전공으로 아와지 국을 추가로 받아 영지가 25만 7천 석으로 늘어났다.[4] 겐나 6년(1620년) 아들 요시시게가 사망하자 어린 손자 다다테루의 후견인이 되어 도쿠시마번 통치의 기틀을 다졌으며,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는 오토기슈(御伽衆)로 활동하기도 했다.[4] 간에이 15년(1638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사와 초기 활동

에이로쿠 원년(1558년), 하치스카 마사카쓰의 장남으로 오와리국 니와군 미야우시로촌(현 고난시)의 미야고성에서 태어났다.[1][2][3]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고,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처음으로 출진했다.

덴쇼 3년(1575년)부터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며 기모이리슈(肝煎衆)가 되었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명으로 주고쿠 지방을 공략할 때는 아버지 마사카쓰와 함께 종군했다. 덴쇼 6년(1578년)에는 하리마국 히로세성의 우노 시게노리(宇野重規)를 토벌했고, 이듬해인 덴쇼 7년(1579년)에는 호키국 우바야마성(姥山城)의 성주 난조 모토쓰구(南条元続)를 구출하는 공을 세워 히데요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2][3]

덴쇼 10년(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하시바 히데요시를 따라 야마자키 전투에 참전하여 미쓰히데 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전쟁에 종군하며 전공을 세웠다. 덴쇼 11년(1583년)에는 시즈가타케 전투에 참가했으며, 덴쇼 12년(1584년)에는 네고로슈와 사이카슈를 진압한 공으로 하리마국 사요군 내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1][2][3] 한편, 외교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덴쇼 10년부터 덴쇼 13년(1585년)까지 3년에 걸쳐 아버지 마사카쓰, 구로다 요시타카와 함께 모리씨와의 영토 협상(주고쿠 고쿠분, 中国国分)에 참여했다. 이는 모리 가문의 깃카와 모토하루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형제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확인된다.[4][5]

덴쇼 13년(1585년), 히데요시의 기이 정벌에 참가하여 사이카 세력을 제거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같은 해 시코쿠 정벌에서는 아와의 기쓰성, 이치노미야성 등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시코쿠 정벌 후, 히데요시는 이에마사의 아버지 마사카쓰에게 아와 1국을 주려 했으나, 마사카쓰는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남기를 원하며 이를 사양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이에마사에게 아와를 주었고(시코쿠 고쿠분, 四国国分), 이로써 이에마사는 덴쇼 14년(1586년)에 아와 1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같은 해 1월 2일(음력), 종오위하 아와노카미(阿波守)에 서임되었다.[1][2][3][6]

하치스카 이에마사 탄생지비(아이치현 고난시 미야고마치)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에 참전하여 휴가국 다카나베성(高鍋城, 다카성) 공략에서 공을 세웠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이즈국 니라 산성 공격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선봉을 맡아 무공을 세웠다.[1][2][7]

2. 2. 도요토미 정권 하의 활동

덴쇼 3년(1575년)에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하여 기모이리슈(肝煎衆)가 되었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수행한 주고쿠 공략에는 아버지 하치스카 마사카츠와 함께 종군했다. 덴쇼 6년(1578년)에는 하리마 히로세 성의 우노 시게노리(宇野重規)를 토벌하고, 이듬해 덴쇼 7년(1579년)에는 호키 우바야시 성(姥ヶ谷城)의 난조 모토쓰구(南条元続)를 구출하는 공을 세워 히데요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자, 히데요시를 따라 야마자키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전쟁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 참가했으며, 덴쇼 12년(1584년)에는 네고로슈·사이카슈(根来衆・雑賀衆) 토벌전에서의 공적으로 하리마 사요군 내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한편 외교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덴쇼 10년부터 덴쇼 13년(1585년)까지 3년에 걸쳐 아버지 마사카츠, 구로다 요시타카와 함께 모리씨(毛利氏)와의 영토 협정(주고쿠 고쿠부와케, 中国国分) 교섭에 참여했다.

덴쇼 13년(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는 아와 기즈 성(木津城) 공략, 이치노미야 성(一宮城) 공략 등에서 무공을 세웠다. 시코쿠 정벌 후, 히데요시는 그 공적으로 마사카츠에게 아와 일국을 주려 했으나, 마사카츠는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남기를 원하며 사양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이에마사에게 아와를 주었다(시코쿠 고쿠부와케, 四国国分). 이로써 이에마사는 덴쇼 14년(1586년)에 아와 1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고, 같은 해 1월 2일(음력) 종오위하 아와노카미(阿波守)에 서임되었다.

덴쇼 13년 6월 아와에 입국한 이에마사는 처음 이치노미야 성에 들어가 성주가 되었지만, 곧바로 도쿠시마성 축성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덴쇼 14년에 완성했다. 이치노미야 성은 견고한 산성이었지만 아와 전역을 지배하기에는 부적합하고 수군을 운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영지 경영의 새로운 거점으로 요시노강 하구 삼각주 위의 이즈(渭津)를 도쿠시마성 건설지로 선택한 것이다. 성 아랫마을(조카마치, 城下町) 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아와의 질서 회복과 장악에도 힘썼다. 시코쿠 정벌로 황폐해진 지역의 부흥과 각지에 할거하던 토호(土豪) 및 유력 농민에 대한 대책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쓰루기산(剣山)을 중심으로 한 산간 지역의 토호 세력은 지역 농민에게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전 영주였던 초소카베 모토치카로부터 지배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에마사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마사가 입국한 직후인 덴쇼 13년 8월, 이야야마(祖谷山)·니우야(仁宇谷)·오구리야마(大栗山) 등 산간부의 토호 세력이 이에마사의 검지(検地) 등의 정책에 반대하여 이야야마 잇키(祖谷山一揆)를 일으켰다. 이에마사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력 진압에 나서는 한편, 회유책을 병행하여 토호 세력의 분열을 꾀했다. 많은 토호를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야야마 등 산간부 토호들은 저항을 계속하여 진압에는 5년이 걸렸다. 이야야마가 하치스카씨의 지배하에 완전히 편입된 것은 32년 후인 겐나 3년(1617년)의 가타나가리(刀狩) 실시 이후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에마사는 토호 세력 해체와 포섭이라는 회유와 탄압 정책을 병행하며, 덴쇼 17년(1589년) 태합검지(太閤検地)를 실시하여 병농분리(兵農分離)를 추진해 나갔다.

또한 아와구성(阿波九城)과 역로사(駅路寺) 제도를 시행했다. 아와구성은 이야야마 잇키나 다른 영지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하고 지방 농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아와 내 9개 성을 활용한 지성(支城) 제도였다. 역로사는 9개 성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8개의 사찰을 여행객의 숙소 및 감시 거점으로 활용하여 치안을 유지하려는 제도였다. 두 제도 모두 군사적 목적이 강했던 시기에 제한적으로 기능했으며,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유명무실해졌지만, 그 대신 도쿠시마성의 개수가 진행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에 참가하여 휴가 다카나베 성(高鍋城) 공략에서 공을 세웠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이즈 니라야마 성(韮山城) 공략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선봉을 맡아 무공을 세웠다.

일설에 따르면, 아와오도리(阿波踊り)는 도쿠시마성이 준공되었을 때 이에마사가 성 아래 백성들에게 "성의 완공을 축하하며 마음껏 춤을 추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쿠가와 정권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이듬해인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세상을 떠나자 일본 정계는 불안정해졌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무단파 다이묘들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칠장 습격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마사 역시 이 사건에 가담했다는 기록과 그렇지 않다는 기록이 모두 존재한다. 이 시기 이에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그의 양녀(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외증손녀인 케이다이인)를 아들 요시시게의 아내로 맞이하며 사돈 관계를 맺는 등, 전형적인 친이에야스 무단파 다이묘로서의 행보를 보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이에마사는 병을 이유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서군에 병력을 보내 오사카 주변 경비를 담당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아들 요시시게를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 군대에 참여시켜 동군 소속으로 공을 세우게 했다. 한편, 이에마사 자신은 오사카에 머물렀는데, 이는 병 때문이라는 설과 친 도쿠가와파로서 후방을 지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서군이 거병하자 이에마사는 모리 테루모토에게 서군 참여를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이 서신은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오사카성을 장악한 테루모토에 의해 칩거당했다. 결국 이에마사는 히데요리에게 영지인 아와를 반납하고 삭발하여 봉안(蓬庵)이라 칭하며 고야산으로 출가하는 형식을 취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들 요시시게가 동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덕분에, 하치스카 가문은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을 수 있었다. 이에마사는 서군에 가담했던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태로 출가하였고, 가독을 아들 요시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2. 4. 도쿠시마 번주 시대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가문 측으로부터 가담 요청 밀서를 받았다. 이에마사는 아들 요시시게(이에타다)를 설득하여 도요토미 측에 서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무이의 간토(関東) 편이다'"라고 자처하며 원조를 거절하고, 슨푸 성의 이에야스를 방문하여 밀서를 제출했다. 그는 스스로 인질이 되어 에도로 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무르며 막부에 순응하여 하치스카 가문의 안전을 도모했다.[4] 한편, 아들 요시시게는 도쿠가와 측으로 출진하여 기즈가와구치 전투, 하쿠로부치 전투, 혼마치바시 야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요시시게의 전공 덕분에 전투 후 하치스카 가문은 아와지 국 1국을 추가로 하사받아 영지는 25만 7천 석으로 늘어났다.[4] 이때의 공을 치하하며 명물 준케이 사몬지(順慶左文字)가 이에마사에게 하사되었다.[4]

겐나 6년(1620년) 아들 요시시게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막부의 명을 받아 어린 손자 다다테루(다다히데)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에마사는 도쿠시마 성 서쪽 마루(니시노마루)에 머물며 다다테루가 성인이 되는 간에이 4년(1627년)[4] (혹은 자신이 병으로 물러난 간에이 6년(1629년)[4])까지 정무를 보며 도쿠시마번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겐나 4년(1618년)에는 영지 통치 원칙을 체계화한 '고헤키쇼(御壁書) 23개조'를 제정했고(아들 이에타다가 제정했다는 설도 있음)[4], 간에이 4년(1627년)에는 이를 보완하는 '이면서(異면서) 7개조'를 제정하여 번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4]

센고쿠 시대를 경험한 원로로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는 쇼군의 정치·군사 자문역인 오토기슈(御伽衆)로 활동하기도 했다.[4] 간에이 원년(1624년)에는 히라시마 구보(平島公方) 가문에 히라시마 관(平島館)의 수리 자재를 하사했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유품인 목조상 ‘목조 풍태합상(木造 豊太閤像)’을 아들 요시시게와 함께 히데요리에게서 받았다. 은거 후 호를 봉암(蓬庵)이라 칭하고 나카다(中田) 땅에 별장을 지은 이에마사는, 게이초 19년(1614년) 히데요시 17주기를 맞아 별장 인근에 풍국신사(豊国神社)를 세우고 이 목조상을 안치했다.[6][7] 또한 같은 시기 화가 이와사 마타베에에게 풍국제례를 묘사한 '풍국제례도 병풍'(豊国祭礼図屏風) 제작을 의뢰하여 소장했다는 설도 있다.[4] 이 병풍은 이에마사 사후 고야산 고묘인(光明院)에 봉납되었다고 추정되지만[4], 다른 설도 있다.[4] 창건된 풍국신사는 에도 시대 동안 막부의 권력 강화로 인해 규모가 축소되거나 이름이 변경되기도 했으나 은밀히 유지되었으며,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본래 이름을 되찾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간에이 15년(1638년) 음력 12월 30일, 81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시모조지닌마치(下助任町)의 고겐지(興源寺)에 있다.

흥원사의 묘소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시모조지닌마치)

3. 인물 및 평가

일설에는 아와오도리도쿠시마성이 준공되었을 때 이에마사가 성 아래 백성들에게 "성의 완성을 축하하며 마음껏 춤을 추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이 그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다이쇼 6년(1917년)에 종사위가 추증되었다.[9]

3. 1. 다테 마사무네의 평가

다테 마사무네는 하치스카 이에마사를 '''아와의 너구리'''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장언행록』에 따르면 다테 마사무네는 이에마사를 "'''아와의 늙은 여우'''(ふるだぬき|후루다누키일본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8] 이는 이에마사의 신중하고 능숙한 처세를 빗댄 표현으로 해석된다. 한편, 두 사람은 다도를 통해 교류하기도 했는데, 마사무네 저택에서 열린 아침 다회에 이에마사가 보낸 예장에 대해 마사무네가 답례하는 내용의 서장(날짜 미상, 6월 11일자)이 남아 있다.

3. 2. 도요토미 가문과의 관계

아버지 마사카츠를 따라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다가 덴쇼 3년(1575년)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중국 공략,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 참전하며 공을 세웠다. 덴쇼 13년(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 무공을 세운 후, 히데요시는 아버지 마사카츠에게 아와국을 주려 했으나 마사카츠가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남겠다며 사양하자, 히데요시는 이에마사에게 아와 18만 석을 주어 다이묘로 삼았다. 이는 히데요시로부터 입은 큰 은혜였다.

임진왜란에는 문록의 역과 게이초의 역 모두 참전하여 남원성 전투, 울산성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울산성 전투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키나가 등을 구출하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전투 후 충분히 적을 추격하지 않고, 구로다 나가마사 등 다른 다이묘들과 함께 전선 축소를 건의하는 서신을 본국에 보낸 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 조선 파견군의 군감(메츠케)이었던 후쿠하라 나가타카, 가키미 이치쵸쿠, 구마가이 나오모리 등이 이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했고, 결국 이에마사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영지 일부 몰수와 자택 칩거 처분을 받았다. 이 처벌에는 군감들과 가까웠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설이 있으며, 이 일로 이에마사는 미쓰나리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곤경에 처한 이에마사를 도운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이듬해 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세상을 떠나자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이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마사가 이 사건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이 무렵 이에마사는 아들 하치스카 요시시게를 이에야스의 양녀(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와 혼인시켜 이에야스와 사돈 관계를 맺는 등, 대표적인 무단파 친이에야스 다이묘로서의 행보를 보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이에마사는 병을 핑계로 직접 참전하지 않고 오사카성에 머물며 주변 경비를 담당했다. 이는 서군에 가담한 것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반면, 아들 요시시게는 아이즈 정벌부터 이에야스를 따라 동군에 가담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러한 양면적인 태도 덕분에 하치스카 가문은 전후에도 영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마사 자신은 서군에 가담했던 책임을 지는 형태로 출가하여 '봉암(蓬庵)'이라 칭하고 고야산으로 들어갔으며, 가독을 아들 요시시게에게 물려주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이러한 이에마사의 처신을 두고 '아와의 너구리'라고 평했다고 전해진다. 이에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이시다 미쓰나리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을 다이묘로 만들어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은혜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히데요시 사후에도 이에마사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예를 표했다. 히데요시의 유품인 목조상 ‘목조 풍태합상’을 도요토미 히데요리로부터 아들 요시시게와 함께 하사받았고, 은거 후인 게이초 19년(1614년), 히데요시의 17주기에 맞춰 자신의 은거지 근처에 도요쿠니 신사를 세워 히데요시를 기렸다.[6][7] 이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이에마사의 복잡한 심정을 보여주는 일화로 평가받는다.

3. 3. 종교

게이초 원년(1596년) 12월 13일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에마사는 교쿠쿄 다카토시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 기록에는 이에마사가 지동설과 같은 천문학이나 신과 불교의 문제 등에 대해 토론하며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영지와 목숨을 잃더라도 신앙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도, 자신이 키리시탄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고 적혀 있다.

이후 게이초 13년(1608년)의 예수회 기록에는, 디오고 유키와 신부가 아와를 방문했을 때 은거 중이던 이에마사가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아와의 키리시탄 영민들을 소개해주고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설교를 듣고 칭찬하는 등, 자신과 가신들 모두 키리시탄에게 이해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인 간나 5년(1619년)에는 법화종 요호지의 22대 주지인 다이유인 니치온(日奥)의 가르침에 귀의했으며, 도산(兎山)에 은거하며 지낼 거처를 마련했다.

3. 4. 문화

다도에 조예가 깊어 당대의 여러 다인과 교류하였다. 센노 리큐와는 자주 다도구를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덴쇼 13년(1585년) 음력 1월 16일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쓰다 소우키津田宗及|쓰다 소규일본어의 다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호상(豪商)인 미키 마사미치, 와타나베 미치미치(리큐의 조카), 시오야 소우키(리큐의 제자) 등을 등용하여 다도를 통해 교류를 깊게 했다. 한때 우에다 시게야스上田重安|우에다 시게야스일본어(소코宗箇|소코일본어)를 빈객으로 대우하며 초빙하였는데, 그가 조경한 구 도쿠시마 성 표어전 정원은 현재 도쿠시마 중앙공원 내에 남아 있다. 다도구 수집에도 열심이어서, 쇼와 8년(1933년)에 하치스카 가문이 내놓은 물품 목록에는 리큐와 관련된 다도구들이 확인된다. 또한, 죠로쿠지丈六寺|조로쿠지일본어에는 이에마사가 기증했다고 전해지는 세토(瀬戸) 차호(茶壺)와 다이코(太閤) 장식 개구(飾りの蓋) 일식이 남아 있다.

다테 마사무네와도 다도를 통해 교류하였는데, 마사무네의 저택에서 열린 아침 다회에 참석할 때 입을 예복을 이에마사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마사무네의 답례 서장이 남아 있다. 한편,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따르면 다테 마사무네는 이에마사를 "아와의 늙은 여우(阿波の古狸|아와노 후루다누키일본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8]

게이초 원년(1596년) 음력 12월 13일예수회 연보에는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이에마사가 교쿠쿄 다카토시(玉甫紹琮)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에마사는 지동설 등 천문학이나 신과 불교의 문제 등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는 등 지적 호기심이 많았으며, 영지와 목숨을 잃더라도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기리시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또한, 게이초 13년(1608년) 예수회 연보에는 디오고 유키(結城了悟)가 신부와 함께 아와를 방문했을 때, 은거 중이던 이에마사가 그들에게 호의를 보이며 아와의 기리시탄 영민들을 소개하고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하여 설교를 듣고 칭찬하는 등, 자신과 가신들 모두 기리시탄에게 이해심 있는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겐나 5년(1619년), 법화종 요호지要法寺|요호지일본어 22대 주지 다이유인 니온大猷院日穏|다이유인 니치온일본어의 교화를 받고 도산(到山)에 은거소를 지었다.

4. 가족


  • 아버지: 하치스카 마사카쓰
  • 어머니: 다이쇼인(大聖院, ? ~ 1611년) - 미와 기요타카 또는 마스다 모치마사의 딸
  • 정실: 지코인(慈光院, 1563년 ~ 1606년) - 고오리(郡) 성주 이코마 이에나가의 딸
  • * 장남: 하치스카 요시시게
  • 측실: 이름 미상 (평민 출신)
  • * 딸: 만히메(萬姫, 1593년 ~ 1612년) - 이케다 요시유키의 부인
  • * 딸: 아키히메(秋姫) - 이이 나오타카의 부인
  • * 딸: 다쓰히메(龍姫, ? ~ 1629년) - 마쓰다이라 다다미쓰의 부인

5. 이에마사를 모시는 신사

참조

[1] 서적 A Korean War Captive in Japan, 1597–1600: The Writings of Kang Hang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11-12
[2] 서적 An Official Guide to Eastern Asia, Trans-continental Connections Between Europe and Asia ... https://books.google[...] 1914
[3] 문서 [[三輪吉高|三輪五郎左衛門吉高]]または[[益田持正|益田太郎右衛門持正]]の娘。
[4] 서적 詳註刀剣名物帳 : 附・名物刀剣押形 https://dl.ndl.go.jp[...]
[5] 문서 平島公方史料集
[6] 웹사이트 コラム―豊国神社(中国四国農政局|那賀川農地防災事業所|地域の紹介) https://www.maff.go.[...]
[7] 웹사이트 小松島市 豊国神社 https://www.city.kom[...]
[8] 서적 渭水聞見録 https://kotenseki.ni[...]
[9]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10] 웹사이트 兵庫県神社庁 http://www.hyogo-jin[...]
[11] 웹사이트 北海道神社庁 http://www.hokkaid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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