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이이타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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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이이타이병은 일본 도야마현에서 발생한 카드뮴 중독으로 인한 공해병이다. 환자들이 겪는 심한 통증을 표현하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미쓰이금속광업 가미오카 광산에서 배출된 카드뮴이 진즈강을 오염시켜 발생했다. 카드뮴에 오염된 물과 쌀을 섭취한 주민들에게서 골연화증, 신부전 등의 증상이 나타났고, 1968년 정부는 이타이이타이병을 공해병으로 인정했다. 이후 소송을 통해 미쓰이금속광업의 배상과 오염 토양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카드뮴 배출량 감소 및 토양 정화 사업 완료로 피해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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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이이타이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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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질병 정보 | |
질병 이름 | 이타이이타이병 |
로마자 표기 | Itai-itai byō |
문자적 의미 | 아파 아파 병 |
원인 | |
주요 원인 | 카드뮴 중독 |
오염 경로 | 광산 폐수 오염된 쌀 오염된 물 |
발병 지역 및 시기 | |
주요 발병 지역 | 일본 도야마현 |
발병 시기 | 1912년경 최초 보고 |
확산 시기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
증상 | |
주요 증상 | 심한 통증 뼈 연화 골절 신장 손상 빈혈 |
피해 | |
피해자 | 주로 여성 |
관련 역사 | |
원인 규명 | 1960년대 후반에 카드뮴 중독으로 원인 규명 |
책임 소재 | 미쓰이 금속 광업의 가미오카 광산 |
정부 대응 | |
정부 조치 | 오염 방지 대책 피해자 보상 환경 규제 강화 |
참고 자료 | |
추가 정보 | 국제 환경 기술 이전 센터 |
학술 연구 | Cadmium toxicity and treatment A Literature Review of Effects of Cadmium on Fish Itai-Itai disease and the countermeasures against cadmium pollution by the Kamioka mine Political Opportunities and Local Grassroots Environmental Movements: The Case of Minamata |
관련 뉴스 | 이타이이타이병 피해의 풍화 방지 “계승하는 모임” 설립… 도야마 |
외부 링크 | 이타이이타이병 증상이 있나요? 한겨레 지역 섹션 기사 |
2. 명칭
이타이이타이병(イタイイタイ病|이타이이타이뵤일본어)은 환자들이 척추와 관절에서 느끼는 심한 통증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피해 지역 주민들이 만들어낸 것이다.[6] 일본어에서 痛い (itai)는 "아프다"라는 의미의 형용사 또는 "아야"와 같은 감탄사로 사용된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가네모리 나가치카는 히다를 평정하고 에치젠오노에서 히다로 전봉되어 광산 개발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에도 시대부터 신통강 상류 지역에서는 구리, 은, 납 등을 생산했지만 소규모였고, 당시에도 주변 농업과 식수에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미쓰이 그룹이 본격적으로 경영을 시작하면서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고, 러일 전쟁을 계기로 비철금속이 주목받으면서 생산량이 더욱 늘었다. 일중 전쟁, 태평양 전쟁, 전후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증산으로 대량의 폐기물이 방출되어 하류 지역의 농업과 인체에 피해를 주었다.
병명의 유래는 환자가 그 고통에 "아파, 아파!" 하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5년(쇼와 30년) 현지 개업의인 하기노 노보루를 현지 『도야마 신문』 기자인 하다 키요노부가 취재했을 때, 간호사가 환자를 "이타이이타이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여 '이타이이타이병'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한 데서 유래한다. 1955년(쇼와 30년) 8월 4일 도야마 신문 사회면에서 처음으로 병명으로 보도되었다.
3. 원인
미쓰이금속광업 가미오카 광산 아연 제련소에서 광산 폐수에 포함되어 배출된 카드뮴(Cd)이 원인으로, 섬아연석이라는 광물에 불순물로 약 1% 정도의 카드뮴을 포함하고 있다.[21] 1886년 미쓰이 그룹에 의한 전산 통일부터 1972년 이타이이타이병 재판 판결까지 폐기물에 의한 카드뮴 방출은 854t으로 추정된다.[21]
신통강 이외에 취수원이 없는 후츄정(당시)에서는 카드뮴이 용출된 물을 농업용수(관개)와 식수로 사용했고, 카드뮴은 농작물에 축적되는 성질 때문에 카드뮴을 다량 함유한 쌀이 계속 수확되었다. 이 쌀을 주식으로 했던 농민들은 체내에 카드뮴을 축적하게 되었고, 이 카드뮴의 유해성으로 인해 이타이이타이병 증상을 일으켰다. 피해자 체내에 축적된 카드뮴은 기준치의 수십 배에서 수천 배에 달했다.
카드뮴의 독성은 오랫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공해 발생 당시 카드뮴과 이타이이타이병의 특유 증상과의 관련도 명확하지 않아 카미오카 광산 측의 대책이 늦어져 공해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5년 8월 4일, 구마노무라의 개업의인 하기노 노보루(萩野昇)가 이타이이타이병을 소개하는 기사를 도야마 신문(富山新聞)에 게재하면서 알려졌고, 명명자 또한 하기노이다.[25] 이 기사에서 하기노는 "이 병은 후부군 중부 및 대안의 도야마시 남교외에서 카미신카와군에 걸친 진쓰강(神通川) 본류 수계에서 발생한다. 환자는 이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35세에서 갱년기에 이르는 여성이 많다."라고 적었다.[25]
당시에는 과로설이나 영양실조설 등도 제기되었으나, 1957년 12월 하기노는 도야마현 의학회에서 "광독설(鑛毒説)"을 발표하였다. 1961년 1월, 하기노 노보루와 농학자 요시오카 킨이치(吉岡金市)가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이 카드뮴임을 발표하였다.[25] 1968년 5월, 후생성은 "이타이이타이병의 본태는 카드뮴의 만성 중독에 의한 골연화증이며, 카드뮴은 진쓰강 상류의 가미오카 광업소의 사업 활동에 의해 배출된 것이다."라고 단정지었다.[25] 이에 따라 이타이이타이병은 정부에 의해 인정된 최초의 공해병이 되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카드뮴 축적만으로는 이타이이타이병의 모든 증상이 발현되지 않으며, 카드뮴으로 인한 미토콘드리아 손상이 다른 심각한 증세를 유발시킨다고 한다.
3. 1. 카드뮴 오염
가미오카 광산에서 채굴되는 섬아연석에는 불순물로 카드뮴이 포함되어 있으며, 제련 과정에서 다량의 카드뮴이 발생한다.[6]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등을 거치면서 광산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카드뮴 오염도 심화되었다.[1]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에 광산 채굴로 인해 많은 양의 카드뮴이 방출되었고, 1912년경 이타이이타이병이 처음 나타났다.[1]
1920년대에는 새로운 거품 부상법 공정 도입으로 오염된 광미(鑛滓) 발생량이 증가하여 오염을 가속화시켰다.[6] 이 과정에서 발생한 미세한 광물 입자는 대기 중으로 퍼져 하천으로 흘러갔고, 산화되어 이온 형태로 수생 식물, 벼, 어류, 그리고 사람에게 흡수되었다.[6]
미쓰이 광업 주식회사는 광산 폐수를 강으로 유입하기 전 저장하는 저수지를 건설했지만, 이는 효과가 없었다.[1] 산업 폐기물로 배출된 카드뮴은 토양, 조류, 강 생물에 축적되었고, 먹이 사슬을 통해 어류와 사람에게 전달되었다.[10] 특히, 진즈강의 물을 관개에 사용한 논의 벼는 카드뮴에 쉽게 오염되었고, 이를 섭취한 주민들은 체내 카드뮴 수치가 높아져 이타이이타이병 증상을 겪었다.[11][12]
도야마현(富山県)은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오염 실태를 조사했다. 신통강(神通川) 좌안 1,480ha, 우안 1,648ha, 총 3,128ha가 오염되었으며, 이 중 1,500.6ha가 대책 지역으로 지정되었다.[20] 대책 지역 내 평균 카드뮴 농도는 표층토가 1.12ppm, 다음 층 토양이 0.70ppm이었으며, 상류 충적 선상지에서는 평균 2.0ppm으로 매우 높았다.[20]
토양 중 카드뮴 농도와 현미 중 카드뮴 농도 사이에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었으며, 토양 중 카드뮴 함량이 낮더라도 고농도 오염미가 나타나기 쉬웠다.[20] 조사 결과, 식품위생법(食品衛生法) 기준을 초과하는 카드뮴 오염미가 230곳의 논에서 검출되어 경작이 중지되었다.[20]
3. 2. 인체 축적
카드뮴은 물에 잘 녹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일본 도야마현의 진즈강 물을 사용한 농경지에서 벼가 카드뮴을 쉽게 흡수하게 되었다.[11] 오염된 쌀과 물을 장기간 섭취한 주민들은 체내에 카드뮴이 축적되었고, 이는 이타이이타이병의 특징적인 증상으로 이어졌다.[12]
카드뮴은 주로 간과 신장에 축적되지만, 특히 신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14] 카드뮴은 혈액 내 메탈로티오네인에 결합하여 신장의 사구체로 이동한 후, 세뇨관 세포에서 방출되어 신피질에 축적된다.[15][14] 신피질에서 카드뮴 농도가 위험 수준에 도달하면 금속 의존성 효소를 비활성화하거나 칼모듈린을 활성화시켜 신장 기능 장애를 일으킨다.[14]
칼슘 항상성 교란으로 인해 발생하는 근골격계 손상은 이타이이타이병의 특징인 골통과 골 변형을 유발한다.[14]
4. 증상
이타이이타이병의 주요 증상은 뼈에서 나타난다. 카드뮴은 철분 대신 뼈에 흡수되어 칼슘 흡수를 막고, 뼈를 약하게 만든다.[13] 척추와 다리에 심한 통증이 나타나며, 이로 인한 기형적인 걸음걸이는 뼈의 기형과 골절을 유발한다. 심하면 기침만으로도 골절될 수 있다.[13]
환자는 뼈가 약해져 골절을 겪고, 기침, 빈혈, 심부전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기도 한다.[13] 이타이이타이병은 폐경 후 고령 여성에게서 많이 발생하는데, 이는 칼슘 흡수 부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3] 최근 연구에 따르면 카드뮴으로 인한 미토콘드리아 손상이 다른 심각한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13]
카드뮴은 주로 간과 신장에 축적되지만, 신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14] 카드뮴은 혈액 내 메탈로티오네인과 결합하여 신장 사구체로 이동한다.[15] 이후 세뇨관 세포에서 방출, 신피질에 축적되어 독성 수준에 이른다.[14] 신피질 내 카드뮴 농도가 위험 수준에 도달하면 금속 의존성 효소를 비활성화하거나 칼모듈린을 활성화할 수 있다.[14]
신장 손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하면 칼슘 항상성 교란으로 인해 근골격계 손상이 시작된다.[14] 이는 이타이이타이병의 특징인 골통과 뼈 변형을 일으킨다.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에 의한 다발성 근위 세뇨관 기능 이상증과 골연화증을 주 특징으로 하는 만성 질환이다. 카드뮴 오염 지역에서 생산된 쌀과 채소 섭취, 오염된 물 섭취 등이 원인이다.[19]
초기에는 다뇨, 빈뇨, 구갈, 다음, 변비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다발성 근위 세뇨관 기능 이상증이 진행되면 인산, 중탄산 재흡수 저하 증상이 나타나고, 골량도 점차 감소한다. 이때부터 일어서기 힘들거나 힘이 빠지는 등의 근력 저하가 시작된다. 더 진행되면 보행 시 하지 골통, 호흡 시 늑골통, 상지, 배부, 요부 등에 운동통이 발생한다. 최종적으로 뼈 강도가 극도로 약해져 가벼운 움직임이나 재채기, 진찰을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골절된다. 이 단계에서는 거동이 불가능해진다.[19]
다발성 근위 세뇨관 기능 이상증과 함께 신장 기능도 점차 저하되어 말기에는 신부전에 이른다. 빈혈이 심해지고 피부는 암갈색으로 변한다. 활성 비타민 D 생산 장애로 장에서 칼슘 흡수가 저하된다. 혈청 칼슘이 저하되고, 심하면 테타니가 발생한다.[19]
뼈가 약해져 경미한 움직임에도 골절된다. 피해자는 주로 출산 경험이 있는 중년 여성이지만, 남성 피해자도 있었다.[19] 골연화증은 비타민 D 대량 투여로 증상이 완화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비타민제를 구입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 환자가 적었다. 또한, 이 치료법은 다발성 근위 세뇨관 기능 이상증을 개선하지 못해 골연화증이 재발하는 경우가 많았다.[19]
5. 역사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도야마현의 가미오카 광산은 원자재 수요 증가와 새로운 광산 기술 도입으로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광산 채굴 과정에서 다량의 카드뮴이 방출되었고, 1912년경 이타이이타이병이 처음 나타났다.[1] 일본 정부는 1911년(메이지 44년)을 최초 환자 발생 시점으로 추정한다.[24]
1920년대에는 거품 부상법이라는 새로운 공정 기술이 개발되면서 오염된 광물 찌꺼기(광미)가 더 많이 발생했다. 이 찌꺼기에서 나온 미세한 광물 입자가 바람을 타고 하류로 퍼져나가 사람들에게 흡수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미쓰이 광업 주식회사는 전쟁 물자 수요를 맞추기 위해 광산 생산량을 늘렸고, 이로 인해 진즈강과 그 지류의 오염은 더욱 심해졌다.[1]
지역 주민들은 미쓰이 광업에 항의했고, 회사는 광산 폐수를 강으로 보내기 전 저장하는 시설을 만들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린 상태였고, 1946년까지는 이 병이 지역적인 질병이나 세균 감염으로 오인되기도 했다.[1]
1955년, 도야마 신문(富山新聞)에 하기노 노보루(萩野昇)가 이타이이타이병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 병명을 직접 지으면서 이 병이 처음 알려졌다.
1961년 도야마현은 조사 결과 가미오카 광산이 카드뮴 오염의 원인이며, 광산에서 30km 떨어진 하류 지역이 가장 피해가 크다고 발표했다. 1968년 후생성은 카드뮴 중독이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8]
카드뮴 수치가 낮아지면서 1946년 이후 새로운 환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타이이타이병이 처음 보고된 1912년부터 역학 조사를 통해 카드뮴 중독이 원인임을 밝혀내기까지 55년이 걸렸다.[9]
5. 1. 피해 발생
1920년, 당시 상신가와군 농회장이었던 가네오쿠 마타자에몬이 농상무대신과 도야마현 지사에게 가미오카 광산의 광독 제거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하면서 신토가와 유역의 광독 피해 문제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25] 이 건의서에는 광산 개발로 인해 논벼의 발육에 이상이 생겨 이삭이 제대로 맺히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니, 광산 경영자에게 피해 방지 시설을 설치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25]이후에도 부부군 농회와 도야마현 의회에서 비슷한 요구가 계속되자, 도쿄 광무서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가미오카 광업소에 파쇄 및 폐수 처리 개선을 명령했다. 도야마현 또한 재해 대책비를 지원하여 용수로 취수구에 침전지를 설치하도록 하여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조치로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으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으로 가미오카 광업소가 생산량을 늘리고, 여러 차례 홍수로 침전지가 유실되거나 매몰되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각한 오염이 발생하게 되었다.[25]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도 광산 생산량은 증가하였으며, 특히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광산 채굴 작업으로 인해 상당량의 카드뮴이 방출되었다.[1] 1920년대에는 새로운 거품 부상법 공정 개발로 오염된 광미(광물 찌꺼기)의 양이 더욱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미세한 광물 입자가 대기 중으로 퍼져 하류로 흘러갔고, 결국 사람들에게까지 흡수되었다.[6]
전쟁 이후, 미쓰이 광업 주식회사가 관리하는 광산의 생산량이 전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욱 증가하면서 신주 강과 그 지류의 오염은 더욱 심각해졌다.[1] 이 강물은 주로 논의 관개 용수로 사용되었지만, 하류 지역 주민들의 식수, 세탁, 어업 등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1]
주민들이 미쓰이 광업 주식회사에 항의하자, 회사는 광산 폐수를 강으로 흘려보내기 전에 저장하는 저수지를 건설했지만, 이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린 상태였다.[1] 1948년, 구마노촌 등 3정 4촌의 농가들이 신토가와 광독 대책협의회를 결성하여 도야마현을 통해 교섭을 진행했고, 1951년에 가미오카 광업소가 관계 시정촌에 농업 협력비를 지불하도록 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25]
5. 2. 원인 규명 및 공해병 인정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질병의 원인을 찾기 위한 의학 검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상류의 납 채굴로 인한 납 중독으로 예상되었다.[1] 1955년, 도야마 신문(富山新聞)에 하기노 노보루(萩野昇)가 이타이이타이병을 소개하는 기사를 기고하면서 이 병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고, 하기노가 직접 병명을 명명하였다. 이 기사에서 하기노는 이 병이 35세에서 갱년기에 이르는 여성에게 많이 발생하며, 허리, 어깨, 무릎 등의 통증으로 시작하여 골절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질병이라고 설명했다.[25]하지만 당시에는 과로설이나 영양실조설 등도 제기되었다.[25] 1957년 12월, 하기노는 도야마현 의학회에서 "광독설(鉱毒説)"을 발표하였다.[25] 1961년 1월, 하기노 노보루와 요시오카 킨이치(吉岡金市)는 환자의 뼈와 내장, 가미오카 광업소의 폐수와 강물에서 카드뮴을 검출한 오카야마 대학(岡山大学)의 고바야시 준(小林純)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이 카드뮴임을 발표하였다.[25] 같은 해, 도야마현도 조사를 시작하여 가미오카 광산이 카드뮴 오염의 원인이며,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은 광산에서 30km 하류 지점임을 밝혔다.[8]
1961년 12월 도야마현, 1963년 6월 후생성 및 문부성이 독자적으로 원인 규명에 나섰다. 1966년 9월 합동회의를 열고, 원인 물질로 카드뮴의 가능성이 높지만 영양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카드뮴 플러스 알파설(カドミウムプラスアルファ説)"을 발표했다.[26]
1968년 5월, 후생성은 이타이이타이병이 카드뮴 만성 중독에 의한 골연화증이며, 가미오카 광업소가 원인이라고 공식 발표했다.[25] 이로써 이타이이타이병은 일본 정부에 의해 인정된 최초의 공해병이 되었다.[25]
6. 이타이이타이병 재판
1968년, 피해 주민들은 미쓰이 금속광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971년 도야마 지방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려 미쓰이 금속광업의 책임을 인정했다. 미쓰이 금속광업은 항소했지만, 1972년 나고야 고등법원도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고, 미쓰이 금속광업은 상고를 포기했다.[1][25]
재판 결과, 미쓰이 금속광업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 오염된 토양 복원 및 공해 방지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25] 이타이이타이병은 법적 조치를 통해 거의 완벽한 오염 방지에 성공한 유일한 4대 공해병 사례로 꼽힌다.[6]
6. 1. 소송 경과
1968년 3월, 이타이이타이병 환자 9명과 그 가족 20명 등 총 29명이 미쓰이 광산을 상대로 도야마현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1] 같은 해 1월에는 도야마현 변호사회 원로인 마사리키 요스케 변호사와 현지 후추마치 출신 시마바야시 이츠키 변호사를 비롯해 전국에서 모인 20명의 변호사로 이타이이타이병 소송변호단이 결성되었다.[25] 1968년 3월 9일, 환자와 유족 28명은 미쓰이금속광업을 상대로 총액 약 6.3억엔의 제1차 소송을 제기했다.[25]1971년 6월, 1심에서 도야마 지방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32][33]
# 논, 토양, 하천 등의 카드뮴 등 중금속류에 의한 오염은 피고인 가미오카 광업소에서 배출된 폐수가 신토강 상류의 고원가와에 장기간 방류된 것에 의해 발생하였다.
# 이타이이타이병의 주요 원인은 카드뮴이다.
# 피고 측은 광업법 109조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 위자료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입은 육체적 및 정신적 고통의 심각성, 피고의 손해배상에 대한 불성실성을 고려하여, 최근 사망자에게는 500만엔, 그 이전의 사망자 및 생존 환자에게는 400만엔이 상당하다.
미쓰이금속광업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즉시 항소하였다. 1972년 8월, 나고야 고등법원 가나자와 지부는 피고 측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고 측의 부대 항소를 인정하여 위자료 금액을 2배로 증액하는, 원고 측 거의 전면 승소 판결을 내렸다.[25][32] 항소심 판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32]
# 토양 등의 카드뮴 등 중금속류에 의한 오염 원인은 1심과 같다.
# 이타이이타이병의 주요 원인은 1심과 같이 카드뮴이다.
# 재산상의 손해에 대해서는 피해자 구제가 지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위자료 금액에 포함하여 청구하는 것은 허용된다. 다만, 손해액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산출해야 하며, 개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산정 청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 피고 측은 위자료로 사망 환자 전원에게 1000만엔, 생존 환자에게는 800만엔을 지급한다.
미쓰이금속광업은 상고를 포기하고, 제2차 이후 소송도 판결 내용에 따라 보상하기로 결정했다. 판결에서는 카드뮴 유출과 이타이이타이병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했다. 미쓰이금속광업은 제5차 소송까지 총액 23.563299999999998억엔의 손해배상금 지급, 농업 피해 배상과 오염 토양 복원 의무, 주민 출입 조사권을 인정하는 공해 방지 협정서 체결의 3가지 내용을 담은 합의에 응하게 되었다.[25]
1차 소송 이후에도 다음과 같이 소송이 이어졌다.[32]
소송 차수 | 제기일 | 소송 건수 |
---|---|---|
제2차 | 1968년 10월 8일 | 148건 |
제3차 | 1969년 3월 10일 | 14건 |
제4차 | 1970년 2월 20일 | 13건 |
제6차 | 1971년 5월 7일 | 8건 |
제7차 | 1971년 7월 3일 | 1건 |
이들 소송은 병합되어 1차 소송 이후인 1971년 7월부터 심리가 시작되었다. 그 후, 1차 소송 이후 미쓰이금속광업과 피해 주민 간의 협상으로 성립된 「이타이이타이병의 배상에 관한 서약서」에서 회사는 제2차~제7차 소송의 원고에 대해서도 1차 소송과 같은 손해 배상 지급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제2차~7차 소송은 원고 측의 취하로 종결되었다.[32]
2013년 12월 17일, 신통강 유역 카드뮴 피해 단체 연락협의회가 원인 기업인 미쓰이금속광업과 전면적인 해결 합의서를 교환했다. 피해 주민 단체는 환자 배상과 토양 복원, 미쓰이금속광업의 자회사인 가미오카광업의 환경 대책이 해결되었다고 판단하여 미쓰이금속광업의 사과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국가 기준으로는 구제받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1인당 60만엔의 일시금을 지불한다.[34]
6. 2. 보상
이타이이타이병 환자로 인정되면, 일본 후생노동성의 평가를 거쳐 국가와 미쓰이 금속광업으로부터 의료비, 장애 보상비, 요양 수당 등을 지급받는다.[1] 환자 인정 기준은 오염 지역 거주, 신장 기능 장애 및 골연화증을 앓고 있지만 심장 질환은 없는 경우이다. 1967년 이후 184명의 환자가 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그중 54명은 198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인정되었다. 1993년 기준으로 15명의 환자가 생존해 있었다.[1]농업 피해에 대해서는 미쓰이 금속광업이 작물 손실 및 생산량 감소에 대한 보상을 제공했다.[25] 카드뮴 농도가 0.4ppm 이상 1.0ppm 미만인 쌀은 정부가 '준오염미'로 매입하여 식용 외 용도로 사용했다. 준오염미는 파쇄하여 벵갈라(弁柄)로 착색하여 공업용 풀(糊)의 원료로 판매되었다.[20]
1968년, 환자와 가족들은 미쓰이 광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971년 1심에서 승소했다. 미쓰이 광산은 항소했지만 1972년 2심에서도 패소하여 상고를 포기했다. 미쓰이금속광업은 총 2356330000JPY의 손해배상금 지급, 농업 피해 배상, 오염 토양 복원 의무, 주민 출입 조사권을 인정하는 공해 방지 협정서 체결에 합의했다.[25]
6. 3. 발생원 대책 및 복원
1972년 미쓰이 금속광업(현 미쓰이 마이닝)은 법원 판결에 따라 광산 및 주변 지역 복구에 합의했다. 과학자와 정부 관계자로 구성된 팀의 현장 조사를 시작으로, 매년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연 6~7회 추가 특수 조사가 실시되고 있다.[16]광산 배출수는 카드뮴 함량이 높아 분리하여 가미오카 광산 슬래그 매립지로 우회시키고, 지하수 오염 방지를 위해 배출 전 물과 고형물을 분리 처리한다. 아연 제련 과정 부산물인 공기 중 카드뮴을 확인하기 위해 처리 시설 배기가스도 모니터링한다.[16]
지속적인 조사 결과, 카드뮴 배출량 및 농도가 크게 감소했다.
- 카드뮴 배출량: 1972년 월 35kg → 2010년 월 3.8kg
- 광산 배출수 평균 카드뮴 농도: 1972년 9ppb → 2010년 1.2ppb
- 개선된 집진 설비 덕분에 매월 배출되는 카드뮴 양: 1972년 5kg 이상 → 2010년 0.17kg
- 1996년 농경지 평균 카드뮴 농도: 배경 수준인 0.1ppb로 회복[6]
1970년 제정된 「농경지 토양 오염 방지법」에 따라 토양 카드뮴 농도 1ppm 이상 지역은 경작 중단 및 토양 복원 대상이 되었다. 1971년 도야마현에서 조사가 시작, 1977년까지 진즈강(Jinzū River)을 따라 1,500ha가 복원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농민들은 미쓰이 금속광업, 도야마현, 일본 정부로부터 작물 손실 및 생산량 감소 보상을 받았다. 1992년 기준 오염 지역은 400ha만 남았다.[1]
1992년 연간 보상액은 다음과 같다.
피해자 측은 미쓰이금속광업과 배상, 토양 오염 관련 서약서 및 공해 방지 협정을 맺고 협상을 시작했다. 1973년 7월 의료 보상 협정 체결로 환자와 요관찰자 구제가 시작되었고, 1974년 9월 1일 「공해 건강 피해 보상법」 시행으로 국가 구제도 시작되었다.[25]
1974년 8월 진쓰가와(神通川) 좌안 67.4ha가 「농용지 오염 방지법」에 따른 오염 지역으로 지정된 것을 시작으로, 최종 1630ha가 오염 지역이 되었다. 1979년부터 토양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고,[25] 1982년부터는 복원 사업 이후 처음으로 모내기가 가능하게 되었지만,[27] 여러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어,[25] 2012년 3월 17일에 완료되었다.[28] 1979년 정화 작업 시작 이후 총 407억엔의 비용으로 863ha의 표토가 교체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 정부, 미쓰이 광산, 기후현(Gifu) 및 도야마현 정부가 자금을 지원했다.[4] 그러나, 이후 보수 공사가 2026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29]
발생원 대책으로, 공해 방지 협정에 따른 출입 조사가 1972년부터 매년 1회 실시되고 있다.[30] 1972년에는 9ppb였지만, 1975년 이후에는 1ppb대로 감소하고 있다.[25][31]
2013년 8월 다카야마시(高山市) 등에서 호우 피해가 발생하여, 산사태 발생 시 오염 토사 유출 우려가 있어, 호우에도 토사 유출이 발생하지 않는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30]
7. 환자 인정 문제
이타이이타이병 환자 인정은 환경성의 위탁을 받은 도야마 현에서 담당하고 있다. 인정 조건은 1972년 제정된 환경청(현 환경성)의 관련 법규에 규정되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타이이타이병 농경 오염 지역에 거주하고 카드뮴에 대한 노출 경력이 있을 것.
#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성인기 이후에 발병했을 것.
# 요세관 장애가 인정될 것.
# 골다공증을 수반하는 골연화증의 소견이 보일 것.
위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인정된다. 마지막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 요관찰자로 인정된다. 2008년 10월 현재 인정 환자는 192명이었지만[31][35], 2014년 9월 말에는 인정 환자 198명, 요관찰자 총 408명으로 환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36]
2014년 9월 검사에서는 유역 주민에 대한 건강 조사를 전 연령 대상으로 전환한 결과, 1969년 조사 개시 이래 최대의 정밀 검사 대상자가 나왔다. 그러나 건강 조사의 수진율이 저조하여 환자 수의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36]
환자로 인정되면 공해 의료 수첩이 지급되고, 국가로부터 의료비, 장애 보상비, 요양 수당 등이 지급된다. 또한, 미쓰이금속광업으로부터도 배상비, 의료비, 입통원비, 의료 간호 수당, 온천 요양비가 지급된다.[35]
하지만, 인정 기준이 높아 행정 구제를 받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현대의 문제점은 원인 분석이 아니라 환자 인정 및 요관찰 판정의 구체적인 기준으로 옮겨가고 있다. 행정 측인 현 인정 심사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기각하는 사례가 많다. 골연화증 판정에는 유골 증가라는 특징이 있는데, 이른바 기요키 법에 따라 뼈를 염색하고 유골의 농염 부분을 관찰하여 조사한다. 그러나 장골만을 기준으로 하는 등 엄격한 판정을 하기 쉽다. 피해자 대부분은 공건법에 따라 환경성에 설치된 불복 심사 위원회에 심사 청구를 하지만, 행정 불복 심사는 일반적으로 행정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 인정 조건은 여전히 엄격하다.
이처럼 인정을 요구했다 기각된 사람 외에도, 환자임을 알리고 싶지 않아 신청하지 않았거나, 자각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 신장 장애가 간과되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의 존재가 지적되고 있다.[37]
8. 한국에 주는 시사점
이타이이타이병 재판 승소 후 30년 이상이 지나면서 공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재정난으로 시설 유지가 어려워지자, 이타이이타이병 대책협의회는 공공 시설 건설을 요청했다.[31][38] 2012년 4월 29일 도야마현립 이타이이타이병 자료관이 개관하면서 이러한 요청이 실현되었다.[39]
2014년부터는 '이타이이타이병을 계승하는 모임'이 활동하고 있으며,[40] 2018년 3월 15일에는 도야마 대학이 '이타이이타이병 자료실'을 개설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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