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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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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간 선언'은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이 발표한 조서로, 공식 명칭은 '신일본 건설에 관한 조서'이다. 이 선언은 천황의 신성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일본의 민주주의가 일본 고유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인간 선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점령 하에서 일본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천황의 신격화와 군국주의적 이념을 해체하기 위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서구에서는 천황의 신격 완전 부인으로 해석되었으며, 일본 내에서는 천황의 신격 부정이 조서의 핵심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간 선언'은 일본의 정치 체제를 입헌군주제에서 상징천황제로 전환하고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가속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명칭

이 조서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인간 선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인간 선언'은 널리 알려진 통칭이며, 정식 명칭은 '신일본 건설에 관한 조서'이다. '천황의 인간 선언', '신격 부정 선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3. 배경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일본이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히로히토 천황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1945년 9월 2일, 연합군과 일본 천황 측은 도쿄 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고, 공식적으로 패전한 일본은 연합군 점령 하에서 과거 군국주의 사회 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은 인간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천황과 국민 간의 유대가 전설에 기초한 것이 아니며, 인간으로 현현한 천황 자신과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사상이 '가공의' 개념이라는 명시가 포함되었다. 이는 대일본제국 헌법에 명시되었던 천황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성격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되며, 이후 새로운 일본국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천황이 신성성과 통치 권한을 잃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그동안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여겼던 일본 신토와 이를 숭배했던 일본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4. 내용

쇼와 천황은 1946년 새해를 맞아 '인간 선언'으로 알려진 조서를 발표했다. 이 조서는 메이지 유신 당시 메이지 천황이 발표한 오개조 서문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오개조 서문은


  • 널리 회의를 열어 모든 일을 여론에 따라 결정할 것
  • 상하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국가 경영에 힘쓸 것
  • 관료, 군인, 서민 모두 각자의 뜻을 펼치고 민심이 지치지 않도록 할 것
  • 낡은 관습을 버리고 천지의 올바른 도리에 따를 것
  •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쇼와 천황은 오개조 서문을 인용하며 일본의 민주주의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할 것을 천명했다. 조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 피해 복구와 민생 안정: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 평화주의: 평화주의를 추구하고, 국제 평화에 기여할 것을 선언한다.
  • 국민 통합과 인류애: 국민 통합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인류애를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 천황과 국민의 관계: 천황과 국민의 관계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상호 신뢰와 경애에 기반하며, 천황을 신격화하거나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관념임을 명시한다.[4]


조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천황은 자신의 신격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쇼와 천황은 1977년 기자 회견에서 조서의 목적이 일본의 민주주의가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오개조 서문에 기초한 오랜 전통임을 강조하고,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31]

4. 1. 전문

茲ニ新年ヲ迎フ。顧ミレバ明治天皇明治ノ初國是トシテ五箇條ノ御誓文ヲ下シ給ヘリ。曰ク、일본어

一、廣ク會議ヲ興シ萬機公論ニ決スヘシ일본어
하나, 널리 회의를 일으켜 만기공론에 따라 결정할 것.
一、上下心ヲ一ニシテ盛ニ經綸ヲ行フヘシ일본어
하나, 상하를 막론하여 마음을 하나로 모아 열심히 경륜할 것.
一、官武一途庶民ニ至ル迄各其志ヲ遂ケ人心ヲシテ倦マサラシメンコトヲ要ス일본어
하나, 관무일도하여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그 뜻을 이루어 인심으로 하여금 게으름이 없도록 요함.
一、舊來ノ陋習ヲ破リ天地ノ公道ニ基クヘシ일본어
하나,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여 천지의 공도에 의거할 것.
一、智識ヲ世界ニ求メ大ニ皇基ヲ振起スヘシ일본어
하나, 지식을 세계에 구하여 크게 황기를 진기할 것.



叡旨公明正大、又何ヲカ加ヘン。朕ハ茲ニ誓ヲ新ニシテ國運ヲ開カント欲ス。須ラク此ノ御趣旨ニ則リ、舊來ノ陋習ヲ去リ、民意ヲ暢達シ、官民擧ゲテ平和主義ニ徹シ、敎養豐カニ文化ヲ築キ、以テ民生ノ向上ヲ圖リ、新日本ヲ建設スベシ。일본어

大小都市ノ蒙リタル戰禍、罹災者ノ艱苦、產業ノ停頓、食糧ノ不足、失業者增加ノ趨勢等ハ眞ニ心ヲ痛マシムルモノアリ。然リト雖モ、我國民ガ現在ノ試煉ニ直面シ、且徹頭徹尾文明ヲ平和ニ求ムルノ決意固ク、克ク其ノ結束ヲ全ウセバ、獨リ我國ノミナラズ全人類ノ爲ニ、輝カシキ前途ノ展開セラルルコトヲ疑ハズ。일본어

夫レ家ヲ愛スル心ト國ヲ愛スル心トハ我國ニ於テ特ニ熱烈ナルヲ見ル。今ヤ實ニ此ノ心ヲ擴充シ、人類愛ノ完成ニ向ヒ、獻身的努力ヲ效スベキノ秋ナリ。일본어

惟フニ長キニ亙レル戰爭ノ敗北ニ終リタル結果、我國民ハ動モスレバ焦躁ニ流レ、失意ノ淵ニ沈淪セントスルノ傾キアリ。詭激ノ風漸ク長ジテ道義ノ念頗ル衰ヘ、爲ニ思想混亂ノ兆アルハ洵ニ深憂ニ堪ヘズ。일본어

然レドモ朕ハ爾等國民ト共ニ在リ、常ニ利害ヲ同ジウシ休戚ヲ分タント欲ス。朕ト爾等國民トノ間ノ紐帶ハ、終始相互ノ信賴ト敬愛トニ依リテ結バレ、單ナル神話ト傳說トニ依リテ生ゼルモノニ非ズ。天皇ヲ以テ現御神トシ、且日本國民ヲ以テ他ノ民族ニ優越セル民族ニシテ、延テ世界ヲ支配スベキ運命ヲ有ストノ架空ナル觀念ニ基クモノニモ非ズ。일본어

朕ノ政府ハ國民ノ試煉ト苦難トヲ緩和センガ爲、アラユル施策ト經營トニ萬全ノ方途ヲ講ズベシ。同時ニ朕ハ我國民ガ時艱ニ蹶起シ、當面ノ困苦克服ノ爲ニ、又產業及文運振興ノ爲ニ勇往センコトヲ希念ス。我國民ガ其ノ公民生活ニ於テ團結シ、相倚リ相扶ケ、寬容相許スノ氣風ヲ作興スルニ於テハ、能ク我至高ノ傳統ニ恥ヂザル眞價ヲ發揮スルニ至ラン。斯ノ如キハ實ニ我國民ガ人類ノ福祉ト向上トノ爲、絕大ナル貢獻ヲ爲ス所以ナルヲ疑ハザルナリ。일본어

一年ノ計ハ年頭ニ在リ、朕ハ朕ノ信賴スル國民ガ朕ト其ノ心ヲ一ニシテ、自ラ奮ヒ自ラ勵マシ、以テ此ノ大業ヲ成就センコトヲ庶幾フ。일본어

御名御璽일본어

昭和二十一年一月一日일본어

內閣總理大臣兼第一復員大臣第二復員大臣 男爵 幣原喜重郞일본어

4. 2. 핵심 구절

짐과 그대 국민 사이의 유대는 종시 상호의 신뢰와 경애에 의해 맺어지며,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천황을 현어신(現御神)으로 삼고, 또한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으로 생각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졌다는 가공의 관념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다.[4]

이 구절은 천황의 신격을 부정하고, 일본 국민의 우월성을 비판하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평가받는다. 쇼와 천황은 이 선언을 통해 천황이 신의 후손이라는 일본 신화적 믿음과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원문에서는 '현인신'(現人神, 아라히토가미) 대신 '현어신'(現御神, 아키쓰미카미)이라는 특이한 용어가 사용되었다.[7] 이는 '살아있는 신'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면서도, 천황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의미를 담기 위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5. 해석을 둘러싼 논쟁

「인간 선언」은 고대 일본어로 발행되었으며, 그 정확한 의미는 상당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천황이 신이라는 그릇된 개념"으로 번역된 구절에서, 흔히 사용되는 아라히토가미(現人神, "살아있는 신") 대신 現御神|아키쓰미카미일본어라는 특이한 용어가 사용되었다.[7]

아키쓰미카미일본어는 종종 "신성한" 또는 "신성함"으로 번역되지만, 일부 서구 학자들은 실제 의미가 "현현하는 kami일본어" (또는 "신의 화신")이며, 따라서 선언에 따르면 천황은 아라히토가미일본어 ("살아있는 신")는 아니지만, 아키쓰미카미일본어 ("현현하는 kami일본어")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1946년 1월 1일, 칙서는 각 신문의 1면에 보도되었다. 아사히 신문은 "새해 벽두, 국운 융성의 칙서, 간팔, 평화에 헌신, 국민 복지 증진, 사상의 혼란"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고, 마이니치 신문은 "새해 칙서를 내게 하소서. 유대는 신뢰와 존경, 나의 마음, 그리고 국민과 함께"라고 보도했다. 신문의 제목에는 신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일본의 평화와 천황이 국민과 함께한다는 내용만 보도되어, 천황의 신성 부정은 전혀 뉴스 가치가 없었다.[8]

2005년에 영어 칙서가 발견되어 2006년 1월 1일 마이니치 신문에 게재되었다. 와타나베 오사무 교수는 칙서 초안은 천황의 신성을 부인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이나, 일본 측이 내용을 수정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문부대신 마에다 타몬, 가쿠슈인 대학 이사 야마나시 가츠노신,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는 인간 선언 초안을 검토한 주요 인물이다. 시데하라 기주로퀘이커 교도로서 많은 일본 기독교인들처럼 천황을 존경했다.[12] 1945년 12월, 그는 제국 의회에서 "천황은 신이다"라고 답하며, "서구적 개념의 신이 아니라 '전통적인 일본적 개념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의미에서' 신이다"라고 덧붙였다.[12][13]

「인간 선언」에서 쇼와 천황은 "천황을 현어신일본어(아키츠미카미)으로 하는 것은 가공의 관념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성을 부정했다.[14] 다만, 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일본의 민주주의가 오서조의 어서문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인간 선언」으로 여겨지는 기술은 다음과 같다.

> 짐과 너희 국민과의 끈은, 시종 상호의 신뢰와 경애에 의해 맺어져, 단순한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천황을 현어신으로 하고, 또한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에 우월한 민족으로 하여, 나아가 세계를 지배해야 할 운명을 가진다는 가공의 관념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현대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 나와 당신들 국민과의 끈은, 항상 서로의 신뢰와 경애에 의해 맺어져, 단순한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다. 천황을 신으로 하고, 또는 일본 국민은 다른 민족보다 뛰어난 민족으로 하여, 그래서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운명이 있는 것과 같은 가공의 개념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다.

영문 번역은 다음과 같다.

> The ties between Us and Our people have always stood on mutual trust and affection. They do not depend upon mere legends and myths. They are not predicated on the false conception that the Emperor is divine, and that the Japanese people are superior to other races and fated to rule the world.

「인간 선언」에 대해서는 최종 단락의 몇 줄뿐이며, 조서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그 몇 줄도 사실 확인을 할 뿐이며, 특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17] 「인간 선언」에서는, 「천황의 조상이 일본 신화의 신이라는 것」, 역대 천황의 신격, 신화의 신이나 역대 천황의 숭배를 위해 천황이 행하는 신성한 의식을 부정하지 않았다.[18]

쇼와 천황은 이 조서를 발표한 지 31년 후인 1977년 8월 23일 기자 회견에서, GHQ의 조서 초안이 있었던 것에 대해 "지금 비판적인 의견을 말할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저는 신헌법에서 천황이 상징이라는 것(일본국 헌법 제1조)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헌법까지 천황이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 선언이 나왔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강제가 있더라도"라고 말했다.[37]

헌법학자 아시베 노부요시는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와 일본국 헌법의 천황제는 원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하며, 종전 후에는 천황의 "인간 선언"에 의해 "천황의 신격성이 부정됨과 동시에, 불경죄는 폐지되었고, 일본국 헌법에서는 천황을 신의 자손으로 특별시하는 태도는 취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41] 같은 헌법학자인 시시도 츠네토시는 이 조서를 천황이 "자신의 신성을 부정했다"고 하며, "인간 선언"의 한 구절은 "국체 관념, 나아가 헌법 원리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42]

5. 1. 서구의 관점

서구 사회에서는 '인간 선언'을 천황이 자신의 신격을 완전히 부인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 조서를 일본 국민을 일본의 민주화로 이끌겠다는 천황의 약속으로 보았다.[2] 1946년 1월 1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 조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천황이 일본 국민의 민주화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하며,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자세"(his stand for the future along liberal lines)를 분명히 했다고 말하며 환영했다.[36]

5. 2. 일본의 관점

쇼와 천황을 포함한 서구적 해석 비판가들은 신성 부정이 칙서의 요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9] 이들은 칙서가 메이지 천황의 1868년 오개조 서문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1977년 8월 23일 언론 인터뷰에서 쇼와 천황은 일본 국민들이 일본에 대한 자부심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고 밝혔다. 즉, 천황의 진정한 의도는 일본이 이미 메이지 시대부터 민주주의적이었으며, 점령군에 의해 민주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는 해석이다.[1] 이러한 해석은 칙서가 내각총리대신 시데하라 기주로의 해설과 함께 발표되었고, 이 해설이 메이지 시대 민주주의의 선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천황의 "신성 포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쇼와 천황은 일본 천황이 신의 후손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1945년 12월, 그는 시종 차장 기노시타 미치오에게 "일본인이 신의 후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천황이 신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비현실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10]

오늘날 일본 전역의 신토 관계자들과 우익 단체들은 이 선언이 천황과 국가가 신성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11]

쇼와 천황은 이 조서를 발표한 지 31년 후인 1977년 8월 23일 기자 회견에서, 오개조 서문이 인용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오하라 야스오는 "일본어의 '且'에는 병렬적 의미 외에 '그 위에'라는 첨가적인 의미도 있다"고 지적하며, "그 위에"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가공의 관념"으로 여겨진 것은 "천황을 현어신으로 삼고"라는 것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으로 하여, 나아가 세계를 지배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더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38]

도고 시게히코는 오하라 야스오와 이토 하루오와 비슷한 해석을 하면서도, 시종차장 기노시타 미치오의 『측근일기』의 기술을 근거로 쇼와 천황 자신도 "과도한 신격화"를 부정하기를 희망했지만, 조서의 문면에 한정구가 없는 채로 "현어신"이라고 쓰여진 것으로 인해, 조서의 본래 취지였던 "과도한 신격화"를 뛰어넘어 천황의 신성을 부정하는 해석이 생겨났다고 한다.

6. 작성 과정

'인간선언'의 작성 과정은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개입 정도, 일본 측의 역할, 쇼와 천황의 의도 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초기 초안은 GHQ 주도로 작성되었으나, 이후 일본 측의 수정과 쇼와 천황의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총리대신, 마에다 다몬 문부대신 등 일본 측 인사들이 초안 작성 및 검토에 참여했다.[19]

날짜내용
1945년 12월 15일GHQ의 민간 정보 교육국(CIES)이 신도 지령을 발령, 국가 신도에 대한 지원을 금지.[19]
1945년 12월 (시기 불명)궁내성(현재의 궁내청)이 레지날드 브라이스에게 GHQ가 납득할 만한 초안 작성을 의뢰.[19] 브라이스는 해럴드 헨더슨과 함께 초안 작성.[19][21]
1945년 12월 24일쇼와 천황, 요시다 시게루에게 메이지 천황의 5개조 서약을 활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힘.[24]
1945년 12월 25일 이후요시다 시게루, 마에다 다몬의 초안을 바탕으로 영문 원안을 작성하고 일본어 번역 지시.[25] 마에다 타몬, 시다 다이자부로, 나라하시 와타루 등이 초안 검토.
1945년 12월 29일키노시타 미치오 시종차장, 원안을 수정하여 천황이 현어신(아키츠미카미)임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변경.[23]
1945년 12월 30일각의에서 키노시타 안 검토, 마에다 문부대신이 천황의 허가를 받음.[23]
1945년 12월 31일요시다 시게루의 의향에 따라 마에다 다몬은 키노시타 시종차장을 방문, 천황이 신의 자손임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복원 요구, 쇼와 천황도 허가.[23]



그러나 일본어로 발표된 것은 천황이 '현어신'임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영문 원안은 "the Emperor is divine"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2005년에 발견된 영문 조서는 2006년 마이니치 신문에서 발표되었다. 와타나베 오사무는 초안과 최종 조서를 비교하며, 일본 측이 내용을 수정하고 추가했음을 지적했다.

당시 시종장이었던 후지타 나오노리는 쇼와 천황이 국가 정책에 의한 천황 신격화를 혐오했다고 밝혔다.[33]

마에다 타몬은 퀘이커교 신도로서 천황을 존숭했으며, 제국 의회에서 천황이 '일본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신이라고 답변했다.

7. 영향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일본이 패전한 후, 1946년 쇼와 천황은 인간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천황과 국민 간의 관계가 신화나 전설이 아닌 상호 신뢰와 존경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명시했다.[26]

인간선언은 일본 국내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외에서는 천황이 신에서 인간으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환영받았고, 퇴위 요구를 받던 쇼와 천황의 이미지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이미 당연하게 여겨지던 내용이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이 선언에서 신격 부정보다는 일본의 평화와 천황이 국민과 함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보도했다.[26]

인간선언은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에서 상징천황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가속화시켰다. 또한, 프래카드 사건[27]에서 볼 수 있듯이, 불경죄의 유효성과 관련하여 법적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28]

7. 1. 정치적 영향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고, 연합군 점령 하에 있던 일본은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의 인간선언을 발표하였다. 인간선언에서 천황은 자신과 국민 간의 유대가 신화나 전설이 아닌, 상호 신뢰와 경애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하며, 천황을 신격화하고 일본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이라는 주장은 '가공의 개념'이라고 명시하였다.[1] 이는 대일본제국 헌법에 명시된 천황의 신성불가침 조항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되며, 일본국 헌법 공포 이후 천황의 신성성과 통치 권한이 사라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선언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여겼던 일본 신토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1] 1년 후, 미국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면서 천황은 '일본의 상징'으로 격하되었고, 국가 통치에 대한 개입도 제한되었다.(내각제 및 입헌군주제)[1] 쇼와 천황은 이러한 변화에 순응하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헌법에 따른 국사를 성실히 이행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이 입헌군주제에서 상징천황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주주의적 가치가 강조되면서 일본 사회의 민주화가 가속화되었다.

7. 2. 사회문화적 영향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은 인간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에는 자신과 국민 간의 유대가 전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으로 현현한 천황 자신과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사상이 '가공의' 개념이라는 분명한 명시가 포함되었다.[26] 이는 대일본제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었던 천황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성격을 부정한 것이라고 해석되며, 이후 새로운 일본국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천황이 신성성 및 통치 권한을 빼앗긴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그동안 천황을 현인신으로 여겼던 일본 신토와 이를 숭배했던 일본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이 칙서는 일본 국외에서는 "천황이 신에서 인간으로 역사적인 변모를 이룩했다"며 환영받았다. 퇴위와 추소를 요구받던 쇼와 천황의 인상도 호전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당연한 것을 말했을 뿐이었기에, 일본에서는 이 칙서가 특별히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26]

1946년 5월에 일어난 프래카드 사건[27]에서는, "포츠담 선언"의 수락 및 "인간 선언"과 관련하여 불경죄가 여전히 유효한지가 문제가 되었다.[28] 대일본제국 헌법 제3조는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군주의 정치적 무책임을 규정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천황의 신격화에 이용되었고, 현인신인 천황의 존엄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된 행위는 형법의 불경죄에 의해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최고 재판소는 천황의 헌법상 지위에 언급하지 않고, 일본국 헌법 공포에 따른 대사령에 의해 면소로 판결했다(최고 재판소 대법정 판결 1948년 5월 26일).[29]

8. 평가

1946년 1월 1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 조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쇼와 천황이 일본 국민의 민주화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하며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고 환영했다.[36]

8. 1. 긍정적 평가

쇼와 천황의 인간선언은 일본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선언을 통해 천황은 스스로 신격화를 해체하고, 군국주의적 잔재를 청산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4]

1977년 쇼와 천황은 기자 회견에서 "신격의 포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으로, 본래의 목적은 일본의 민주주의가 외국에서 유입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31] 즉, 메이지 유신 시기 오서조의 어서문에서 이미 민주주의적 요소가 있었음을 강조하며, 일본 민주주의의 주체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1946년 1월 1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 조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천황이 일본 국민의 민주화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36]

8. 2. 부정적 평가

미시마 유키오는 "신헌법에서 천황이 상징이라는 것(일본국 헌법 제1조)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헌법까지 천황이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 선언이 나왔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강제가 있더라도"라고 말했다.[37]

오하라 야스오는 "일본어의 '且'에는 병렬적 의미 외에 '그 위에'라는 첨가적인 의미도 있다"고 지적하며, "'그 위에'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가공의 관념'으로 여겨진 것은 '천황을 현어신(現御神)으로 삼고'라는 것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으로 하여, 나아가 세계를 지배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더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8] 이토 하루오도 "흔들리지 않는 천황국 일본"(전전사)에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또한, 황실에서는 정초의 궁중 제사를 위해 통상 조서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GHQ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인의 신관념·천황관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킨 "인간 선언"의 무효를 주장했다.[39]

도고 시게히코는 오하라, 이토와 비슷한 해석을 하면서도, 시종차장 기노시타 미치오의 『측근일기』를 근거로 쇼와 천황 자신도 "과도한 신격화"를 부정하기를 희망했지만, 조서 문면에 한정구 없이 "현어신"이라고 쓰여 천황의 신성을 부정하는 해석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도고는 쇼와 천황이 1977년 8월 23일 나스 어용저에서의 회견 등 신성 부정 해석을 부정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신의 후예임을 표명하는 것이 입헌군주로서의 신념에 반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한다.[40]

헌법학자 아시베 노부요시는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와 일본국 헌법의 천황제는 원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하며, "메이지 헌법에서는 천황은 신성 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져 천황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무겁게 처벌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종전 후 천황의 "인간 선언"으로 "천황의 신격성이 부정됨과 동시에 불경죄는 폐지되었고, 일본국 헌법에서는 천황을 신의 자손으로 특별시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성격의 상이"가 있음을 들었다.[41] 같은 헌법학자인 시시도 츠네토시는 이 조서를 천황이 "자신의 신성을 부정했다"고 하며, "인간 선언"의 한 구절은 "국체 관념, 나아가 헌법 원리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42]

9. 한국의 관점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고, 일본은 연합군 점령 하에 군국주의 사회 구조를 개편했다.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은 이른바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자신과 국민 간의 유대가 신화나 전설이 아닌 상호 신뢰와 경애에 기반하며, 천황이 신(神)이라는 '가공의 관념'에 근거하지 않음을 명시했다.[14] 이는 대일본제국 헌법에 명시된 천황의 신성불가침 성격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되며, 일본국 헌법 공포로 천황의 신성성과 통치 권한이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다.

'인간 선언'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 군국주의의 종식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일본 보수 진영의 역사 수정주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인간 선언'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데 있어 '인간 선언'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10. 관련 인물


  • 쇼와 천황: 1946년 1월 1일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자신과 국민 간의 유대가 전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며, 천황이 신성하다는 것은 '가공의' 개념임을 명시했다.[4]
  •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인간선언을 일본 국민을 일본의 민주화로 이끌겠다는 천황의 약속으로 보고 매우 만족했다.[2]
  • 레지날드 호레이스 블라이스, 해럴드 굴드 헨더슨: 일본 문화 학자로서 인간선언 칙서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참조

[1] 웹사이트 Documents with Commentaries Part 3 Formulation of the GHQ Draft and Response of the Japanese Government https://www.ndl.go.j[...]
[2] 웹사이트 Emperor, Imperial Rescript Denying His Divinity (Professing His Humanity) http://www.ndl.go.jp[...]
[3] 웹사이트 Emperor, Imperial Rescript Denying His Divinity (Professing His Humanity) {{!}} Birth of the Constitution of Japan https://www.ndl.go.j[...] 2020-09-14
[4] 뉴스 Divinity of the Emperor, BBC article https://www.bbc.co.u[...] BBC
[5] 문서 Dower, pp. 308–318.
[6] 문서 Nihon Shoki
[7] 서적 Aux sources du Japon: Le Shinto Albin Michel 1964
[8] 문서 この章は、Shillony (2003)、313–14 頁 (第8章21『「神道指令」と「人間宣言」』)を参照。
[9] 서적 Embracing Defeat W. W. Norton & Co
[10] 서적 Hirohito and War University of Hawai'i Press
[11] 뉴스 The Religious Cult Secretly Running Japan https://www.thedaily[...] 2016-07-10
[12] 문서 Shillony (2003)、312頁 (第8章21『「神道指令」と「人間宣言」』)。
[13] 문서 Creemers, Shrine Shinto, pp. 124–32; Kodansha Encyclopedia, vol. 5, p. 80.
[14] 웹사이트 天皇「人間宣言」 | 日本国憲法の誕生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0-06-26
[15] 웹사이트 人間宣言 (現代語訳) http://www.ncoj21.ne[...] 日本国憲法の再誕(匿名の個人ウィキ) 2023-03-24
[16] 웹사이트 Divinity of the Emperor https://www.bbc.co.u[...]
[17] 문서 シロニー(2003)、313頁 (第8章『謎多き武人天皇』、21『天照の末裔と神の子イエス』、『「神道指令」と「人間宣言」』及び『守られた神道の聖域』)。
[18] 문서 シロニー(2003)、312-314頁 (第8章『謎多き武人天皇』、21『天照の末裔と神の子イエス』、『「神道指令」と「人間宣言」』および『守られた神道の聖域』)を参照。
[19] 문서 シロニー(2003)、311頁 (第8章21『「神道指令」と「人間宣言」』)。
[20] 문서 Woodard, The Allied Occupation, pp.54-74, 295-299.
[21] 문서 Adrian Pinnington, `R.H.Blyth, 1898-1964', in Nish, ed., Britain and Japan, pp.258-260; Woodard, The Allied Occupation, pp.245-268, 314-321; Masanori Nakamura, The Japanese Monarchy: Ambassador Joseph Grew and the Making of the“Symbol Emperor System", 1931-1991'' (tr. by Hebert P. Bix, Jonathan Baker-Bates and Derek Bowen. Armonk, N.Y.:M.E. Sharpe, 1992), p.109.
[22] 문서 木下道雄著「宮中見聞録―忘れぬために」、新小説社、1968年(新版は、「宮中見聞録―昭和天皇にお仕えして」、日本教文社、1998年。)。
[23] 문서 木下道雄著「側近日誌」、文藝春秋、1990年。
[24] 문서 藤樫準二著「天皇とともに五十年―宮内記者の目」、毎日新聞社、1977年。
[25] 서적 対論・異色昭和史 PHP研究所
[26] 문서 この章は、シロニー(2003)、313-314頁 (第8章21『「神道指令」と「人間宣言」』)を参照。
[27] 문서 最高裁判所大法廷判決昭和23年5月26日刑集2巻6号529頁
[28] 문서 渡辺康行・宍戸常寿・松本和彦・工藤達朗『憲法Ⅱ 総論・統治』、日本評論社、2020年。79-80頁。
[29] 문서 渡辺康行・宍戸常寿・松本和彦・工藤達朗『憲法Ⅱ 総論・統治』、日本評論社、2020年。80-81頁。
[30] 문서 この章は、シロニー(2003)、312頁 (第8章21『「神道指令」と「人間宣言」』)より。さらに、本書は以下の2冊を出典としている。色川ほか『天皇制』177頁。Bix, "The Showa Emperor's `Monologue'", pp.320-321.
[31] 문서 高橋紘 編『昭和天皇発言録―大正9年~昭和64年の真実』(P241)[[小学館]]、1989年
[32] 문서 松本健一『三島由紀夫の二・二六事件』(文藝春秋、2006年)『畏るべき昭和天皇』(毎日新聞社、2007年)など、[[原武史]]『昭和天皇』(岩波書店、2008年)など。
[33] 문서 藤田尚徳『侍従長の回想』「人間宣言と退位をめぐって」P.213-P.215
[34] 문서 シロニー(2003)、312頁 (第8章21『「神道指令」と「人間宣言」』)。
[35] 문서 Creemers, Shrine Shinto, pp.124-132; Kodansha Encyclopedia, vol.5, p.80.
[36] 간행물 Press Release: Gen. MacArthur Sees Liberalism in Imperial Rescript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日本国憲法の誕生』、「資料と解説」3-1 天皇「人間宣言」
[37] 서적 対話・日本人論 番町書房 (1966), 夏目書房 (2002, 신판)
[38] 뉴스 天皇の人間宣言とは何か 諸君! 1986-10
[39] 서적 天皇―その論の変遷と皇室制度 展転社 1989
[40] 서적 「天皇」永続の研究 近現代における国体論と皇室論 弘文堂 2020
[41] 서적 憲法 第七版 岩波書店 2019
[42] 서적 憲法Ⅱ 総論・統治 日本評論社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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