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삼대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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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삼대실록은 858년부터 887년까지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의 치세를 다룬 일본의 역사서이다. 우다 천황의 명으로 편찬이 시작되어 901년에 완성되었으며, 후지와라노 토키히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 한문체로 5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육국사 중 가장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천황의 칙령,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에 대한 묘사, 869년 조간 산리쿠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기록 등이 있다. 육국사의 마지막 텍스트이며, 이후 신국사 편찬이 시도되었으나 완결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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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삼대실록 | |
---|---|
개요 | |
제목 | 일본삼대실록 |
원어 제목 | 日本三代実録 |
다른 이름 | 니혼산다이지쓰로쿠 |
종류 | 역사서 |
언어 | 한문 |
시대 | 헤이안 시대 |
편찬 | |
편찬 시기 | 901년 |
편찬자 |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등이 주도 |
주도자 |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
관여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등 |
관여 인물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
내용 | |
범위 |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 시대 (850년 ~ 887년) |
수록 시대 |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 (850년 ~ 887년) |
구성 | 기전체, 전50권 |
체재 | 기전체 |
권수 | 전50권 |
중요성 | |
의미 | 육국사의 마지막 역사서 |
관련 | |
관련 서적 | 유취국사 본조세기 신국사 일본기략 |
2. 편찬
우다 천황은 일본문덕천황실록(879) 이후의 연대기를 편찬하도록 명했다. 후지와라노 토키히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오쿠라노 요시유키, 미무네노 마사히라 등이 편찬에 참여하여 901년에 책이 완성되었다.
『일본삼대실록』 서문에 따르면, 간표 5년(893년) 경 우다 천황이 미나모토노 요시유키, 후지와라노 토키히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오쿠라노 요시유키, 산토 리헤이에 편찬을 명했다.[3] 이후 다이고 천황의 칙명으로 편찬을 재개, 엔기 원년(901년) 8월에 완성되었다.[3]
2. 1. 편찬 과정의 정치적 배경
일본문덕천황실록(879)에 이어 우다 천황은 그 이후의 연대기를 편찬하도록 명했다. 후지와라노 토키히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오쿠라노 요시유키, 미무네노 마사히라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 901년에 책이 완성되었다.『일본삼대실록』의 서문에 따르면, 본서의 편찬은 간표 5년(893년) 경, 우다 천황이 미나모토노 요시유키, 후지와라노 토키히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오쿠라노 요시유키, 산토 리헤이에 편찬을 명한 것으로 시작되었다.[3]
다음 다이고 천황의 칙명을 받아 편찬을 재개하여, 사실상 엔기 원년(901년) 8월에 완성되었다.[3] 도중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실각하여 다자이후로 좌천되고, 산토 리헤이는 전임하여 편찬에서 제외되었다. 완성을 보고한 것은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와 오쿠라노 요시유키 두 명이었다. 편찬의 실질적인 중심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오쿠라노 요시유키 두 명으로 추측된다.
3. 내용
한문으로 작성된 50권 분량의 이 책은 858년부터 887년까지 30년간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의 치세를 다루고 있다. 이전 텍스트보다 상세하며, 많은 천황의 칙령을 담고 있다. 특히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에 대한 묘사가 유명하다.[1] 15권, 19권, 48권의 일부는 미완성이다.
편집 방침은 「서(序)」에 제시되어 있으며, 국가 의례, 경사, 재이(災는 ⺍ 아래에 火)는 모두 싣는다고 밝히고 있다.[4] 육국사(六国史) 중 가장 정교한 기술을 가지며[3], 후세 사서(史書)의 규범이 되었다.[3] 조칙(詔勅)이나 표주문(表奏文)을 풍부하게 수록하고, 선례로 정해진 관행을 기재하는 등, 독자인 관인(官人)의 편의를 도모했다. 절회(節会)나 제사 등 연중행사(年中行事)의 집행도 기록하고 있다.[3]
현존하는 사본에는 서위(叙位) 임관(任官)이나 조칙·상표(上表) 본문, 훙졸(薨卒) 관련 기술에 빠진 글이나 생략이 많다.[3] 이를 성실한 태도의 발현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5] 편자가 고의로 숨긴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6] 에도 시대 마쓰시타 켄린(松下見林)이나 카리야 에키사이(狩谷棭斎) 등이 보정 작업을 했다.[3]
조간(貞観) 10년(868년)과 조간 13년(871년) 1월부터 닌와(仁和) 원년(885년) 12월까지에 해당하는 권15와 권19부터 권48에는 곳곳에 사본의 생략된 부분이 있어, 전문(全文)이 전해지지 않는다.
3. 1. 주요 내용
한문체로 작성되었으며 50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858년부터 887년까지 30년간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의 치세를 다루고 있다. 많은 천황의 칙령을 담고 있으며, 이전의 텍스트보다 상세하다. 특히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에 대한 묘사가 유명하다.[1] 15권, 19권, 48권의 일부는 미완성이다.869년 7월의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묘사도 있는데, 쓰나미는 일본 북동부 평원을 덮쳤다. "바다는 곧 마을로 덮쳐 수백 마일에 달하는 해안 지역을 뒤덮었다. 보트와 높은 지대가 바로 앞에 있었지만, 피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약 1,000명이 사망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2011년 도호쿠 지진과 쓰나미로 침수된 평원과 동일하며, 869년 쓰나미에 의해 남겨진 퇴적물을 분석한 결과 지진의 규모는 8.3으로 추정된다.[2]
편집 방침은 「서(序)」에 제시되어 있으며, 국가 의례, 경사, 재이(災는 ⺍ 아래에 火)는 모두 싣는다고 밝히고 있다.[4] 육국사(六国史) 중에서 가장 정교한 기술을 가지며[3], 후세의 사서(史書)의 규범이 되었다.[3] 조칙(詔勅)이나 표주문(表奏文)을 풍부하게 수록하고, 선례로 정해진 관행을 기재하는 등, 독자인 관인(官人)의 편의를 도모했다. 절회(節会)나 제사 등 연중행사(年中行事)의 집행도 기록하고 있다.[3]
현존하는 사본은 서위(叙位), 임관(任官), 조칙·상표(上表)의 본문, 훙졸(薨卒)에 관한 기술에 탈문(脱文)이나 생략이 많다.[3] 이를 성실한 태도의 발현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5] 그 부분에 편자가 고의로 숨긴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6] 에도 시대, 마쓰시타 켄린이나 카리야 에키사이 등이 보정 작업을 했다.[3]
권15와 권19부터 권48, 즉 조간(貞観) 10년(868년)과 조간 13년(871년) 1월부터 닌와(仁和) 원년(885년) 12월에는, 곳곳에 사본의 생략된 부분이 있어, 전문(全文)이 전해지지 않는다.
3. 2. 재해 기록
869년 7월의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쓰나미는 일본 북동부 평원을 덮쳤다. "바다는 곧 마을로 덮쳐 수백 마일에 달하는 해안 지역을 뒤덮었다. 보트와 높은 지대가 바로 앞에 있었지만, 피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약 1,000명이 사망했다."[2] 한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2011년 도호쿠 지진과 쓰나미로 침수된 평원과 동일하다. "869년 쓰나미에 의해 남겨진 퇴적물을 분석한 결과 지진의 규모는 8.3으로 추정된다."[2]29년 간의 기록 중에서, 지진은 300건 이상 기록되어 있다. 주요 재해는 다음과 같다.
4. 육국사 이후
(Nihon Sandai Jitsuroku)은 육국사 시리즈의 마지막 텍스트이다. 936년, 기존의 국사를 유지하고 편찬을 계속하기 위해 국사소(撰国史所)가 설립되었다. 새로운 텍스트인 가 시작되었지만, 초고 상태로 남아 완결되지 못했다. 율령 제도의 쇠퇴가 그 원인으로 언급된다.
그 후에도 수사 사업이 시도되어 신국사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약간 남아있는 산일된 문헌으로 볼 때 완성되어 상주에 이르지 못했다는 견해가 주류이며, 원인으로는 율령 정치의 쇠퇴가 꼽힌다.
참조
[1]
서적
Nihon Koten Bungaku Jiten
2007
[2]
뉴스
Blindsided by Ferocity Unleashed by a Fault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1-03-21
[3]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第4巻
岩波書店
1984-07
[4]
서적
貞観地震からの復興
朝日新聞出版社
2017-06-25
[5]
서적
六国史
[6]
논문
元慶の乱小考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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