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 사건 (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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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코 사건은 887년 일본 우다 천황 즉위 초기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천황과 간파쿠 후지와라노 모토쓰네 사이의 권력 다툼과 직책 해석의 차이로 인해 조정 기능이 마비된 사건이다. 모토쓰네는 천황이 자신에게 내린 '아형' 직책에 대한 해석을 문제 삼아 정무를 거부했고, 이는 천황의 권위 약화와 후지와라 씨의 권력 강화를 초래했다. 이 사건은 '간파쿠' 제도의 정착과 셋칸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율령 체제의 변화와 귀족 정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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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 사건 (887년) | |
---|---|
개요 | |
유형 | 정치적 논쟁 |
시기 | 887년 |
장소 | 일본 헤이안 시대 |
원인 | 미나모토노 요시아리의 아코 임명에 대한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의 반대 |
결과 | 미나모토노 요시아리의 사임 및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의 권력 강화 |
배경 | |
주요 인물 | 우다 천황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미나모토노 요시아리 |
관련 사건 | 간표의 변 |
영향 | |
정치적 영향 | 후지와라 씨의 섭관 정치 강화 |
역사적 의미 | 일본 정치사에서 섭관 정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건 |
2. 사건의 경위
닌나(仁和) 3년(887년) 11월 21일,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추천으로 신적(臣籍)에서 황적으로 복귀하여 황태자에 이어 천황으로 즉위한 우다 천황은 즉위 직후 모토쓰네를 간파쿠(関白)로 삼는다는 조칙을 내렸다. 모토쓰네는 선례에 따라 일단 사양했으나, 천황은 사다이벤(左大弁) 다치바나노 히로미(橘広相)에게 명하여 두 번째 조칙을 작성하게 했다.
두 번째 조칙에는 "마땅히 아형(阿衡)의 임무를 경에게 맡긴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형은 고대 중국 은의 현신 이윤이 맡았던 관직으로, 다치바나노 히로미가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박사(文章博士)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가 "아형은 지위는 높으나 직무는 없다"고 모토쓰네에게 말한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모토쓰네는 모든 정무를 방기했고, 국정 운영까지 지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천황은 모토쓰네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으나, 모토쓰네는 강경한 태도를 풀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용어 해석 문제를 넘어 천황과 모토쓰네 간의 권력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 1. 아형(阿衡)의 의미 논란
닌나 3년(887년) 11월 21일,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추천으로 황태자에 이어 천황으로 즉위한 우다 천황은 즉위 조서에서 모토쓰네를 간파쿠(関白)로 삼는다고 하였다. 모토쓰네는 일단 사양했으나, 천황은 다치바나노 히로미(橘広相)에게 명하여 두 번째 조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 조서에는 "마땅히 아형(阿衡)의 임무를 경에게 맡긴다"는 문장이 있었다.[3]'아형'은 고대 중국 은의 이윤이 맡았던 관직명으로, 다치바나노 히로미가 이 고사를 인용하였다. 그러나 문장박사(文章博士)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는 모토쓰네에게 "'아형'은 지위는 높지만 실제 직무는 없는 직책"이라고 주장했다.[3] 이 발언은 큰 문제가 되었고, 모토쓰네는 모든 정무를 중단하며 반발하여 국정 운영까지 지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듬해인 닌나 4년(888년) 4월, 천황은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토오루(源融)에게 명하여 박사들에게 아형에 직무가 없는지를 연구하도록 명했다.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위세를 두려워했던 박사들은 스케요와 같은 견해를 보였다. 히로미는 이에 반박하였으나, 6월에 천황은 앞서의 조서를 거두어들였고 히로미는 파면되었다.
2. 2. 조정의 대응과 갈등 심화
888년 4월, 우다 천황은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토오루(源融)에게 명하여 여러 학자들에게 '아형'에 직무가 있는지 연구하게 했다.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위세를 두려워한 학자들은 대부분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와 같은 견해를 보였다.[3]다치바나노 히로미(橘広相)는 "'아형'은 삼공(三公)으로서 만기를 다스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직무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4] 5월 23일에는 기전도(紀傳道)의 유학자인 후지와라노 스케요, 미요시노 키요유키(三善清行), 키노 나가오(紀長緒)에게 자문했지만, 그들 역시 아형에는 직무가 없다고 답했다.[4] 6월 1일에는 천황의 어전에서 히로미와 다른 학자들 간의 토론이 있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6월에 천황은 앞서 내렸던 조서를 거두고, 다치바나노 히로미를 파면했다. 그러나 모토쓰네는 히로미를 절해고도로 유배 보낼 것을 요구하며 압박을 계속했다.
천황이 난처한 입장에 처한 가운데, 당시 사누키노카미(讃岐守)로 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중재에 나섰다. 미치자네는 분쟁을 계속하면 후지와라 씨(藤原氏)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모토쓰네에게 보냈고, 이를 받은 모토쓰네가 노여움을 거두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3. 사건의 모순점과 배경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아형'이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를 정말 몰랐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사건 발생 3년 전인 884년 7월 8일, 고코 천황에게 정무 요청을 받은 모토쓰네가 "아형의 막중한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아형'이라는 단어를 이미 사용한 기록이 있다.[7]
정사요략에 실린 우다 천황의 일기에는, 천황이 모토쓰네에게 고코 천황 때부터 섭정을 맡았으니 부자처럼 친밀하다며 섭정을 맡기겠다고 전하자, 모토쓰네가 "삼가 명을 받들어 따르겠다"고 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우다 천황을 배신했다고 분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정황들을 볼 때, 모토쓰네가 '아형'의 의미를 몰랐다기보다는, 사사키 무네오가 주장한 대로 고코 천황 시절에 받았던 전면적인 정무 위임(왕권 대행) 권한을 우다 천황에게도 똑같이 요구하기 위해 '아형' 문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9]
3. 1. 섭정과 간파쿠의 인식 차이
우다 천황은 '섭정(摂政)'과 '간파쿠(関白)'를 같은 것으로 오해하고, '아형'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사용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7] 반면, 모토쓰네는 '섭정'과 '간파쿠'의 차이를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우다 천황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7][9]모토쓰네는 고코 천황에게 정무를 요청받았을 때 이미 '아형'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7] 또한 우다 천황의 일기에는 모토쓰네가 천황의 명을 받들어 따르겠다고 답해놓고 배신했다고 분개하는 내용이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다키나미 사다코는 우다 천황이 '섭정'과 '간파쿠'를 혼동하고 '아형'을 잘못 사용한 것을 모토쓰네가 사보타주를 통해 바로잡으려 했다고 보았다.[7] 사사키 무네오는 모토쓰네가 고코 천황 때와 같은 권한을 요구하며 우다 천황에게 반감을 품었을 것이라는 설을 제시했다.[9]
4.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역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당시 사누키 국의 수령([讃岐守])으로서 사누키 국에 있었다. 미치자네는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와 다치바나노 히로미 양측 모두와 친분이 있었다.[4] 그는 모토쓰네에게 서신을 보내 히로미를 처벌하는 것이 모토쓰네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점을 설득하여 사태 해결에 기여했다.
미치자네는 히로미의 의뢰를 받아 은밀히 교토로 들어가 모토쓰네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안에서 히로미를 벌하면 천황의 원한을 사게 되어 모토쓰네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또한 사소한 문구만으로 전체 글의 뜻을 파악하지 않고 처벌을 가하면 앞으로 글을 쓰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5. 사건의 영향 및 역사적 평가
아코 사건은 우다 천황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를 위시한 후지와라 일문의 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천황이 후지와라 씨의 권력 앞에 사실상 꼭두각시와 같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3]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모토쓰네에게 편지를 보내 중재한 덕분에, 다치바나노 히로미는 유배를 면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후지와라 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5]
941년 스자쿠 천황 때에는 섭정 후지와라노 타다히라가 '닌나의 예'에 따라 '섭정'을 '간파쿠(관백)'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 성인(成人) 천황을 보좌하는 간파쿠 제도가 정착되었다.[5] 이는 훗날 셋칸 정치(섭관 정치)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코 사건은 율령 체제의 변화와 귀족 정치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6. 한국사의 관점
아코 사건은 일본 내부의 권력 투쟁이었지만, 당시 한반도의 신라 말기와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일본의 정치적 상황은 외교 관계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nobility of failure: tragic heroes in the history of Japan
https://archive.org/[...]
Secker and Warburg
[3]
서적
平安朝史
https://dl.ndl.go.jp[...]
早稲田大学出版部
[4]
서적
奉昭宣公書 菅丞相讃州刺史時
岩波書店
[5]
기타
佐藤誠實博士手校蔵本、阿波国文庫旧蔵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6]
논문
摂政制・関白制の成立
日本歴史
[7]
서적
阿衡の紛議 : 上皇と摂政・関白
[8]
기타
ささきむねお、1948년-、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学) 문학부(文学部) 촉탁강사(嘱託講師, 2018년 7월 시점, 깃카와고분칸吉川弘文館 공표 프로필)
[9]
서적
摂政制・関白制の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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