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텐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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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텐문의 변은 헤이안 시대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조정 내 권력 다툼, 모략, 음모가 얽혀 여러 인물이 연루되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다이나곤 도모노 요시오가 사다이진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모함하며 시작되었으며, 866년 응천문 방화 사건을 계기로 마코토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후 도모노 요시오와 그의 아들 도모노 나카쓰네가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통해 범행을 자백하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았다. 이 사건은 후지와라 씨의 권력 강화와 관련된 음모론을 낳았으며,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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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텐문의 변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오텐몬의 변 |
로마자 표기 | Ōtenmon no Hen |
발생 시기 | 866년 |
발생 장소 | 헤이안쿄 조도인 오텐몬 |
원인 | 방화 정치적 암투 |
관련 인물 | |
주요 관련자 | 도모노 요시오 반젠 미나모토노 마코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
관련 가문 | 도모 씨 미나모토 씨 후지와라 씨 |
사건 전개 | |
주요 사건 | 오텐몬 방화 관련자 체포 및 처벌 정치적 권력 이동 |
결과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권력 강화 도모노 요시오의 몰락 |
배경 | |
정치 상황 | 섭관정치 초기 |
시대적 배경 | 헤이안 시대 |
영향 | |
정치적 영향 | 후지와라 씨의 권력 기반 강화 |
역사적 평가 | 후지와라 씨의 섭관정치 확립에 기여한 사건으로 평가됨 |
기타 | |
관련 작품 | 응천문 (영화) (2020년 영화) |
2. 배경
864년, 반 요시오(伴善男)는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에게 모반 혐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나모토노 마코토는 좌대신이었는데, 반 요시오는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실각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려 했다고 한다.[1]
864년, 다이나곤 도모노 요시오(伴善男)는 사다이진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를 모반 혐의로 고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년 뒤인 866년 윤3월 10일, 응천문이 방화로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오는 우다이진 후지와라노 요시미(藤原良相)에게 마코토를 범인으로 고발했다. 요시미는 마코토의 저택을 포위했으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에게 요청하여 마코토의 혐의가 풀렸다.[5]
866년 윤3월 10일, 응천문(応天門)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반 요시오는 우대신 후지와라 요시사스에게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범인이라고 고발했다. 응천문은 반 씨(伴氏)가 건설한 것이었는데, 요시오는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반 씨를 저주하여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지와라 모토쓰네가 아버지인 태정대신 후지와라 요시후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요시후사가 세이와 천황에게 주상하여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변호하면서 그는 무죄로 밝혀졌다.
이후, 오오야케노 타카토리(大宅鷹取)가 응천문 방화의 범인은 반 요시오와 그의 아들 반 나카쓰네(伴中庸)라고 고소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3. 경과
8월 3일, 빗추 국(備中国) 곤노시쇼(権史生) 오야케노 다카토리(大宅鷹取)가 도모노 요시오와 그의 아들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를 방화범으로 고발했다. 다카토리는 요시오 부자와 하인 기노 도요시로(紀豊城)가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다카토리의 딸이 요시오의 하인에게 살해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5] 다카토리는 게비이시(検非違使)에 인도되어 조사를 받았다.
세이와 천황은 미나부치노 도시나(南淵年名)와 후지와라노 요시나와(藤原良縄) 등에게 요시오를 심문하도록 명했다. 8월 7일 심문에서 요시오는 혐의를 부인했다. 음양료(陰陽寮)는 화재 원인이 산릉(山陵) 훼손에 있다고 점쳤고, 실제로 산릉에서 벌목 흔적이 발견되어 산릉 관리자가 처벌되었다.[6] 8월 19일,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섭정이 되었는데, 이는 요시오에게 방화 혐의가 더해진 상황에서 요시후사에게 정무를 맡기려는 의도였다.[7]
8월 29일, 오야케노 다카토리 부녀 살상 사건 조사와 관련하여 도모노 나카쓰네가 좌위문부(左衛門府)에 구금되고, 요시오의 종자 등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나카쓰네는 오텐문 방화까지 자백하여 요시오 부자의 혐의가 다시 부상했다. 요시오는 계속 부인했으나, "나카쓰네가 자백했다"는 거짓말에 속아 결국 자백했다.(《고단쇼(江談抄)》)
9월 22일, 조정(태정관)은 도모노 요시오 등을 응천문 방화범으로 단죄하고 사형에서 1등 감형하여 유배에 처했다. 주모자인 도모노 요시오는 이즈국(伊豆国), 도모노 나카쓰네는 오키국(隠岐国), 기노 도요시로는 아와 국(安房国), 도모노 아키자네(伴秋実)는 이키국(壱岐国), 도모노 기요나와는 사도국(佐渡国)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주모자의 친족 8명도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오야케노 다카토리 부녀 살상 사건에 대한 심리도 계속 진행되어, 이쿠에노 쓰네야마 등 2명이 처벌받은 것은 10월의 일이었다. 이 처분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나모토노 마코토와 후지와라노 요시미 모두 급서했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관련자 유배지 도모노 요시오(伴善男) 이즈국[5]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 오키국[5] 기노 도요시로(紀豊城) 아와 국[5] 도모노 아키자네(伴秋実) 이키국[5] 도모노 기요나와(伴清縄) 사도국[5]
3. 1. 발단
당시 다이나곤(大納言)이었던 반 요시오는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마코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실각시키고 공석이 된 사다이진 자리에 우다이진(右大臣) 후지와라 요시미가 승진하면, 자신이 우다이진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864년인 조간(貞観) 6년, 반 요시오는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 소문이 받아들여졌다.
2년 뒤인 866년 윤3월 10일(양력 4월 28일), 응천문이 방화로 불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교토 황궁의 정문이 방화로 소실된 사건에 조정은 크게 놀라 성대한 가지기도(加持祈祷)를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 요시오는 우대신 후지와라 요시미에게 응천문 방화의 범인이 미나모토노 마코토라고 고발하였다. 교토 황궁의 정문이었던 응천문은 당시 반 씨가 지은 것으로,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반 씨에 대한 저주로써 응천문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후지와라 요시미는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체포하고 병사를 동원해 그의 저택을 포위하게 하였다. 응천문 방화 혐의를 쓰게 된 미나모토노 마코토의 집안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크게 탄식하고 비통해하였다. 산기(参議) 후지와라 모토쓰네가 이를 아버지 태정대신(太政大臣) 후지와라 요시후사에게 알렸고, 놀란 요시후사는 세이와 천황에게 아뢰어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변호하였다. 미나모토노 마코토의 혐의는 풀렸고, 그의 저택 포위도 풀려 병사들은 철수하였다.
3. 2. 응천문 방화 사건 발생
864년, 다이나곤 도모노 요시오(伴善男)는 사다이진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를 모반 혐의로 고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년 뒤인 866년 윤3월 10일, 응천문이 방화로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은 크게 놀라 성대한 가지기도를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모노 요시오는 우다이진 후지와라노 요시미(藤原良相)에게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응천문 방화의 범인이라고 고발하였다. 당시 응천문은 오토모 씨(大伴氏) (도모 씨(伴氏))가 지은 것이었는데,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도모 씨에 대한 저주로써 응천문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후지와라노 요시미는 미나모토노 마코토의 체포를 명하고 병사를 동원해 그의 저택을 포위하게 하였다. 억울하게 응천문 방화 혐의를 쓰게 된 미나모토노 마코토의 집안 사람들은 절망하여 크게 슬퍼하였다. 산기(参議)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가 이를 아버지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에게 알렸고, 놀란 요시후사는 세이와 천황에게 아뢰어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변호하였다. 결국 미나모토노 마코토의 혐의는 풀렸고, 그의 저택의 포위도 풀려서 병사들은 철수하였다.
8월 3일, 빗추노곤노시쇼(備中権史生) 오야케 다카토리(大宅鷹取)가 응천문 방화의 범인은 도모노 요시오와 그의 아들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라고 고발하였다. 다카토리는 응천문 앞에서 도모노 요시오와 나카쓰네 부자, 그리고 그 하인인 기노 도요시로(紀豊城) 세 사람이 도망치는 것을 보았고 그 직후 응천문이 불타올랐다고 진술하였다. 다카토리의 딸이 요시오의 하인 이쿠에노 쓰네야마(生江恒山)에게 살해된 것에 원한을 품었다는 것이었다.[5] 고발자를 보호하고 허위 고발일 경우 처벌하기 위한 법규에 따라 다카토리는 사게비이시(左検非違使)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세이와 천황은 칙을 내려 산기 미나부치노 도시나(南淵年名)와 후지와라노 요시나와(藤原良縄) 등에게 도모노 요시오에 대한 취조를 명하였다. 8월 7일에 행해진 요시오에 대한 국문에서 요시오는 응천문 방화는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음양료(陰陽寮)에서 응천문의 화재는 산릉(山陵)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라는 점괘가 나왔고, 14일에 실제로 산릉을 점검해 본 결과 산릉에 누군가가 들어와 나무를 베어간 흔적이 발견되어, 18일에는 응천문 화재는 산릉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신들의 견책이라고 판단되어 산릉 관리 책임자가 처분되었다.[6]
3. 3. 범인 지목과 수사
당시 다이나곤(大納言)이었던 도모노 요시오(伴善男)는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와 사이가 나빴다. 도모노 요시오는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실각시키고, 공석이 된 사다이진 자리에 우다이진(右大臣) 후지와라 요시미(藤原良相)가 승진하면 자신이 우다이진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조간(貞観) 6년(864년), 도모노 요시오는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다.
2년 뒤인 조간 8년(866년) 윤3월 10일(양력 4월 28일), 응천문(応天門)이 방화로 불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교토 황궁의 정문이 불에 타자 조정은 크게 놀라 성대한 가지기도(加持祈祷)를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모노 요시오는 우다이진 후지와라 요시미에게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응천문에 불을 질렀다고 고발했다. 도모노 요시오는 응천문이 도모 씨(大伴氏)가 지은 것이므로,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도모 씨를 저주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후지와라 요시미는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체포하고 병사를 동원해 그의 저택을 포위하도록 명했다. 방화 혐의를 쓰게 된 미나모토노 마코토의 가족들은 절망하여 크게 슬퍼하며 탄식했다. 산기(参議)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가 이 소식을 아버지인 태정대신(太政大臣)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에게 알렸고, 놀란 요시후사는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에게 아뢰어 미나모토노 마코토를 변호했다. 결국 미나모토노 마코토의 혐의는 풀렸고, 그의 저택을 포위했던 병사들은 철수했다.
8월 3일, 빗추노곤노시쇼(備中権史生) 오야케노 다카토리(大宅鷹取)가 도모노 요시오와 그의 아들 나카쓰네(中庸)가 응천문에 불을 지른 범인이라고 고발했다. 다카토리는 응천문 앞에서 도모노 요시오와 나카쓰네 부자, 그리고 그들의 하인인 기노 도요시로(紀豊城) 세 사람이 도망치는 것을 보았고, 그 직후 응천문이 불타올랐다고 진술했다. 다카토리의 딸이 요시오의 하인 이쿠에노 쓰네야마(生江恒山)에게 살해된 것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5] 고발자를 보호하고 허위 고발일 경우 처벌하기 위한 법규에 따라 다카토리는 사게비이시(左検非違使)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세이와 천황은 칙을 내려 산기 미나부치노 도시나(南淵年名)와 후지와라노 요시나와(藤原良縄) 등에게 도모노 요시오를 심문하도록 명했다. 8월 7일에 행해진 요시오에 대한 심문에서 요시오는 자신은 응천문 방화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음양료(陰陽寮)에서 응천문 화재는 산릉(山陵)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라는 점괘를 내놓았고, 14일에 실제로 산릉을 점검한 결과 누군가가 들어와 나무를 베어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18일에는 응천문 화재가 산릉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신들의 견책이라고 판단되어 산릉 관리 책임자가 처분되었다.[6] 19일에는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셋쇼(摂政)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자택에서 근신하고 후지와라노 요시미도 병으로 출사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다이나곤인 도모노 요시오마저 방화 혐의를 받게 되자 형식상 명예직이었던 태정대신 요시후사에게 태정관의 정무에 관여하도록 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7] (다이나곤 도모노 요시오가 실제 방화범일 경우, 요시오의 처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상관인 대신뿐이었다)[8]
응천문 화재 조사와는 별개로 진행되고 있던[9] 오야케노 다카토리 부녀 살상 사건 조사와 관련하여, 8월 29일에 도모노 나카쓰네가 좌위문부(左衛門府)에 구금되고, 요시오의 종자인 이쿠에노 쓰네야마와 도모노 기요나와(伴清縄) 등이 체포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다카토리 사건뿐만 아니라 응천문 방화에 대해서도 자백하면서, 한 번 무고로 판단되었던 도모노 요시오 부자에 대한 방화 용의가 다시 떠올랐다. 요시오에 대한 심문이 언제 다시 재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부인하던 요시오에게 "도모노 나카쓰네가 자백했다"고 거짓으로 말하며 자백을 요구하자 요시오는 체념하고 응천문 방화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했다고 한다(《고단쇼(江談抄)》).
9월 22일, 조정(태정관)은 도모노 요시오 등을 응천문 방화범으로 단죄하고 사형에서 1등 감형하여 유배에 처했다. 주모자인 도모노 요시오는 이즈국(伊豆国), 도모노 나카쓰네는 오키국(隠岐国), 기노 도요시로는 아와 국(安房国), 도모노 아키자네(伴秋実)는 이키국(壱岐国), 도모노 기요나와는 사도국(佐渡国)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주모자의 친족 8명도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오야케노 다카토리 부녀 살상 사건에 대한 심리도 계속 진행되어, 이쿠에노 쓰네야마 등 2명이 처벌받은 것은 10월의 일이었다. 이 처분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나모토노 마코토와 후지와라노 요시미 모두 급서했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았던 후지와라 요시후사는 도모 씨(伴氏)와 기 씨(紀氏) 유력 관인을 배척하고, 사건 후에는 세이와 천황의 셋쇼(섭정)가 되어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후지와라 씨의 세력 소멸을 노렸던 도모노 요시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도모 씨 일족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후지와라 씨가 권세를 늘리는 결과만 낳았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을 후지와라 씨가 도모 씨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로 보는 견해가 강하지만, 사학자 스즈키 다쿠로(鈴木琢郎)는 실제로 해당 사건은 도모노 나카쓰네의 독단에 의한 범행이었고,[10] 도모노 요시오는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었지만, 세이와 천황의 의향으로 요시오까지 같은 죄로 처리된[11]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3. 4. 도모노 요시오 부자 심문과 자백
864년, 도모노 요시오(伴善男)는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에게 모반 혐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66년 윤3월 10일, 오텐문(応天門)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요시오는 미나모토노 요시미(源良相)에게 마코토를 범인으로 고발했다. 요시미는 마코토의 저택을 포위했으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에게 요청하여 마코토의 혐의가 풀렸다.[5]
8월 3일, 빗추 국(備中国) 곤노시쇼(権史生) 오야케노 다카토리(大宅鷹取)가 도모노 요시오와 그의 아들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를 방화범으로 고발했다. 다카토리는 요시오 부자와 하인 기노 도요시로(紀豊城)가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다카토리는 딸이 요시오의 하인에게 살해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다카토리는 게비이시(検非違使)에 인도되어 조사를 받았다.[5]
세이와 천황은 미나부치노 도시나(南淵年名)와 후지와라노 요시나와(藤原良縄) 등에게 요시오를 심문하도록 명했다. 8월 7일 심문에서 요시오는 혐의를 부인했다. 음양료(陰陽寮)는 화재 원인이 산릉(山陵) 훼손에 있다고 점쳤고, 실제로 산릉에서 벌목 흔적이 발견되어 산릉 관리자가 처벌되었다.[6] 8월 19일,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섭정이 되었는데, 이는 요시오에게 방화 혐의가 더해진 상황에서 요시후사에게 정무를 맡기려는 의도였다.[7]
8월 29일, 오야케노 다카토리 부녀 살상 사건 조사와 관련하여 도모노 나카쓰네가 좌위문부(左衛門府)에 구금되고, 요시오의 종자 등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나카쓰네는 오텐문 방화까지 자백하여 요시오 부자의 혐의가 다시 부상했다. 요시오는 계속 부인했으나, "나카쓰네가 자백했다"는 거짓말에 속아 결국 자백했다.
3. 5. 범인 단죄와 처벌
조정은 도모노 요시오(伴善男) 등을 응천문 방화의 범인으로 단죄하였다. 9월 22일, 조정(태정관)은 도모노 요시오를 주모자로, 그의 아들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와 기노 도요시로(紀豊城) 등을 공범으로 판결하였다. 이들은 사형에서 1등 감형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관련자 | 유배지 |
---|---|
도모노 요시오(伴善男) | 이즈국[5] |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 | 오키국[5] |
기노 도요시로(紀豊城) | 아와 국[5] |
도모노 아키자네(伴秋実) | 이키국[5] |
도모노 기요나와(伴清縄) | 사도국[5] |
또한, 주모자의 친족 8명도 연좌되어 유배되었다.[5]
이러한 처벌은 오야케노 다카토리(大宅鷹取)의 고발과 도모노 나카쓰네 등의 자백에 따른 것이었다. 다카토리는 자신의 딸이 도모노 요시오의 하인에게 살해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5]
조정의 조사 과정에서 도모노 요시오는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하였으나, 아들 나카쓰네가 자백했다는 거짓말에 속아 결국 범행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고단쇼(江談抄)》)[5]
이 사건 이후, 미나모토노 마코토와 후지와라노 요시미가 모두 급서하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5] 일각에서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4. 사건 관련 인물
866년 (조간 8년)에 발생한 오텐문의 변은 헤이안 시대 초기의 정치적 사건으로, 여러 가문과 인물들이 연루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유력 가문이었던 도모 씨와 기 씨 등이 몰락하고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가계, 관위, 처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문 | 성명 | 관위 등 | 처벌 내용 |
---|---|---|---|
반씨 | 반노오 | 정삼위・대납언 | 이즈 국으로 유배 |
반씨 | 반추요 | 종5위상・우에몬노사 | 오키 국으로 유배[2] |
반씨 | 반아키자네 | 반노오의 종복 | 이키 섬으로 유배 |
반씨 | 반키요나와 | 반노오의 종복 | 사도 국으로 유배 |
기씨 | 기노토요시로 | 반노오의 종복 | 아와 국으로 유배 |
그 외 | 이쿠에노쓰네야마 | 반노오의 종복 | 원류[3] |
그 외 | 우라베노타누시 | 반노오의 종복 | 원류[3] |
기씨 | 기노나쓰이 | 종5위상・히고노카미 | 토사 국으로 유배(연좌: 기노토요시로의 형제) |
반씨 | 반카와오 | 종5위상・시모쓰케노카미 | 노토 국으로 유배(연좌: 반노오의 형제) |
반씨 | 반나쓰카게 | 정8위상・가즈사 곤쇼조 | 에치고 국으로 유배(연좌: 반아키자네의 형제) |
반씨 | 반후유미쓰 | 히타치 국으로 유배(연좌: 반아키자네의 형제) | |
기씨 | 기노하루미치 | 가즈사 국으로 유배(연좌: 기노토요시로의 형제[4]) | |
반씨 | 반다카요시 | 시모사 국으로 유배(연좌: 반노오의 조카) | |
기씨 | 기노타케시로 | 휴가 국으로 유배(연좌) | |
반씨 | 반하루노리 | 사쓰마 국으로 유배(연좌: 반아키자네의 조카) | |
4. 1. 도모 씨
866년 오텐문의 변에서 도모노 요시오(伴善男)가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도모 씨(伴氏) 일족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했다. 주요 인물과 처벌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름 | 관위 등 | 처벌 내용 |
---|---|---|
도모노 요시오(伴善男) | 정3위 ・ 다이나곤 | 이즈국(伊豆国)으로 유배 |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 | 종5위상 ・ 우에몬노스케(右衛門佐) | 오키국(隠岐国)으로 유배[12] |
도모노 아키자네(伴秋実) | 도모노 요시오의 하인 | 이키섬으로 유배 |
도모노 기요나와(伴清縄) | 도모노 요시오의 하인 | 사도국(佐渡国)으로 유배 |
도모노 나쓰카게(伴夏影) | 정8위상 ・ 가즈사노곤노소죠(上総権少掾) | 에치고국(越後国)으로 유배 (연좌: 도모노 아키자네의 형제) |
도모노 후유미쓰(伴冬満) | 히타치국(常陸国)으로 유배 (연좌: 도모노 아키자네의 형제) | |
도모노 다카요시(伴高吉) | 가즈사국(下総国)으로 유배 (연좌: 도모노 요시오의 조카) | |
도모노 하루노리(伴春範) | 사쓰마국(薩摩国)으로 유배 (연좌: 도모노 아키자네의 조카) | |
도모노 가와오(伴河男) | 종5위상・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 | 노토국(能登国)으로 유배(연좌: 도모노 요시오의 형제) |
이 사건은 도모 씨의 몰락과 후지와라 씨의 권력 강화로 이어졌다.
4. 2. 기 씨
紀氏일본어는 오텐문의 변에 연루된 씨족 중 하나이다. 다음은 오텐문의 변에 연루된 기 씨 일족의 명단이다.이름 | 관위 등 | 처벌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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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 도요시로(紀豊城) | 도모노 요시오(伴善男)의 하인 | 아와 국으로 유배 |
기노 나쓰이(紀夏井) | 종5위상, 히고노카미(肥後守) | 도사국으로 유배 (연좌: 기노 도요시로의 형제) |
기노 하루미치 | 가즈사 국으로 유배 (연좌: 기노 도요시로의 형제[14]) | |
기노 다케시로(紀武城) | 휴가국(日向国)으로 유배 (연좌) |
기노 도요시로는 도모노 요시오의 하인으로, 오야케 다카토리(大宅鷹取)의 고발 내용에서 도모노 요시오, 도모노 나카쓰네(伴中庸)와 함께 오텐문 방화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다.[5] 기노 나쓰이는 기노 도요시로의 형제로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 기노 가와오는 본문에 기씨가 아닌 도모씨로 명시되어 있으므로 삭제함.
4. 3. 기타 인물
이쿠에노 쓰네야마(生江恒山)는 도모노 요시오의 하인으로, 오야케노 다카토리의 딸을 살해한 혐의로 처벌받았다.[5] 최종 처벌은 원류였다.[13]우라베노 다누시(占部田主)는 도모노 요시오의 하인으로, 이쿠에노 쓰네야마와 함께 오야케노 다카토리 부녀 살상 사건에 연루되어 원류에 처해졌다.[13]
5. 사건의 영향 및 평가
오텐문의 변은 단순한 방화 사건을 넘어, 당시 일본 사회의 권력 구조와 정치적 암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도모 씨(반 씨) 가문은 몰락하고,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독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도모 씨(반 씨)와 기 씨 등 유력 가문을 몰아내고, 세이와 천황의 셋쇼(섭정)가 되어 권력을 강화했다.
5. 1. 후지와라 씨의 권력 강화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이 사건의 처리를 맡아, 도모 씨(반 씨)와 기 씨의 유력 관인을 배척했다. 사건 후에는 세이와 천황의 섭정이 되어 후지와라 씨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후지와라 씨의 세력 소멸을 노렸던 반 요시오였지만, 결과적으로 도모 씨 일족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후지와라 씨가 권세를 늘리는 결과만 낳았다.[10][11]5. 2.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후지와라 씨 음모설: 후지와라 가문이 유력 가문이었던 도모 씨(반 씨)를 몰아내고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사건의 결과로 후지와라 씨가 셋쇼(섭정) 지위를 얻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은 이 설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 도모노 나카쓰네 단독 범행설: 도모노 나카쓰네가 독단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며, 아버지 도모노 요시오는 무관하다는 설이다. 스즈키 다쿠로(鈴木琢郎)는 나카쓰네가 가문의 지위 하락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를 대신으로 만들어 자신의 아들들을 출세시키려 했다는 동기를 제시하며 이 설을 주장한다.[10]
- 세이와 천황 개입설: 세이와 천황의 의향에 따라 도모노 요시오까지 같은 죄로 처벌받았다는 설이다. 스즈키 다쿠로는 『일본삼대실록』 겐케이(元慶) 4년 12월 4일 조의 세이와 상황 붕어 기사에, 요시오가 아들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승복하지 않았음에도 천황이 엄벌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한다.[11]
이처럼 오텐문의 변은 단순한 방화 사건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복잡한 해석을 낳고 있다.
참조
[1]
서적
日本三代実録
0864
[2]
서적
日本三代実録
0864
[3]
서적
日本三代実録
0864
[4]
논문
貫之の家系
1957
[5]
서적
일본삼대실록
[6]
서적
일본삼대실록
2018
[7]
서적
일본삼대실록
0864
[8]
서적
2018
[9]
서적
2018
[10]
서적
2018
[11]
서적
일본삼대실록
2018
[12]
서적
일본삼대실록
0864
[13]
서적
일본삼대실록
0864
[14]
논문
貫之の家系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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