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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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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국량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으로, 젊은 시절에는 비적이었으나 광동성 안찰사 노숭광의 추천으로 관군에 들어가 태평천국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1851년 흠차대신 향영의 부대에 배속되어 호남성에서 태평천국군과 싸웠고, 이후 강남대영에서 태평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1856년 진강에서 원병으로 복귀하여 저항했으나 강남대영이 괴멸되자 단양으로 후퇴했다. 1857년 호남제독이 되어 강남대영을 재건하고 양주를 회복했으며, 1860년 단양에서 패배하여 도하 중 익사했다. 사후 태자태보와 충무의 시호가 주어졌으며, 남경 영안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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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장국량 초상
초상
이름장국량
출생1810년
사망1860년 4월 (49–50세)
출생지가오야오, 자오칭, 광둥성, 중국
사망지단양, 장쑤성, 중국
별칭큰 머리 양
소속청나라
복무 기간1849–1861년
최종 계급소령, 1849년
육군 중장, 1853년
병마절도사 (후난 제독), 1855년
원수 (강남 제독), 1857년
지휘 부대강남대영
참전 전투강남대영의 첫 번째 패배 (1853–1856년)
강남대영의 두 번째 패배 (1857–1860년)
훈장1853년, 왕실의 BATURU (만주어: 용감한 자)
1857년, 황색 겉옷 (黃馬褂)
1등 용의 남작, 세습 (勇毅一等男爵, 世襲)

2. 생애

장국량은 젊은 시절 임협을 즐겨 비적이 되었으나, 광동성 안찰사 노숭광의 추천으로 관군에 들어갔다. 1856년 진강에서 강소순무 지루항가가 전사하자 원병으로 갔으나, 태평천국군에게 포위망을 뚫려 강남대영은 괴멸되었고, 향영과 함께 단양으로 물러났다. (제1차 강남대영 공략). 1857년 호남제독이 되어 5년 만에 전장을 회복하고 강남대영을 재건하여 화춘과 함께 남경을 다시 포위했다. 1858년 양주를 회복하고 강남제독으로 이동했다. 1860년 태평천국군이 다시 강남대영을 공격하여 장국량은 단양에서 패배하고, 도하 중에 익사했다. 잔존 병력은 부하인 풍자재가 수습하여 태평천국에 저항했다. 사후 태자태보와 충무의 시호가 주어졌다. 남경 전투 (1853년)에서 남경의 SOS 요청에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도착하여 남경을 구원했다. 같은 해, 군대를 이끌고 5년간 태평천국에 점령당했던 전강을 탈환하고 황제로부터 황색 조끼를 하사받고 일등 고급 장군으로 승진했다. 1860년 4월, 패배하여 남은 2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단양으로 후퇴, 도주하던 중 익사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군 합류

젊은 시절부터 임협을 즐겨 비적이 되었지만, 광동성 안찰사 노숭광의 추천으로 관군에 들어갔다. 1851년 함풍 원년, 수비에 발탁되어 흠차대신 향영의 부대에 배속되었고, 향영을 따라 호남성으로 들어가 태평천국군과 싸웠다. 1853년 함풍 3년부터 남경 교외의 강남대영에 주둔하면서 태평천국군과 전투를 벌였고, 총군사로 승진했다.

2. 2. 태평천국 운동 진압

1851년(함풍 원년), 장궈량은 수비로 발탁되어 흠차대신 향영의 부대에 배속되었고, 향영을 따라 호남성으로 이동하여 태평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1853년(함풍 3년)부터 남경 교외의 강남대영에 주둔하면서 태평천국군과 싸웠고, 총군사로 승진했다.

1856년(함풍 6년), 강소순무 지루항가(吉爾杭阿)가 진강에서 전사하자 원병으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태평천국군이 남경에서 강남대영으로 진군하자 장궈량은 진강에서 급히 복귀하여 저항했으나, 강남대영은 괴멸되고 향영과 함께 단양으로 후퇴했다(제1차 강남대영 공략). 이때 장궈량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며, 장강 남북의 여러 군대 중에서 태평천국군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장궈량군이었다고 전해진다. 향영 사후, 화춘이 후임 흠차대신이 되었다.

1857년(함풍 7년), 장궈량은 호남제독이 되어 5년 만에 전장을 회복하고 강남대영을 재건하여 화춘과 함께 남경을 다시 포위했다. 1858년, 양주를 회복하고 강남제독으로 이동했다.

1860년(함풍 10년), 태평천국군이 다시 강남대영을 공격하자 청군은 패배하고, 화춘과 장궈량은 단양으로 후퇴했다(제2차 강남대영 공략). 장궈량은 단양에서도 패배하고, 도하 중 익사했다. 그의 잔존 병력은 부하인 풍자재가 수습하여 태평천국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2. 3. 사망 이후

남경 전투(1853년) 이후, 장궈량은 남경의 영안당에 안장되었다.

3. 수상

연도내용
1853년바투루 칭호 수여
1857년황마괘 하사
(시기 불명)일등 이용 남작 작위 수여


4.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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