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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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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기봉행은 에도 시대에 나가사키를 관할하던 직책으로, 행정, 사법, 통상, 외교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나가사키가 직할지가 된 후 설치되었으며, 초기에는 다이묘가 임명되기도 했지만, 이후 하타모토가 주로 임명되었다. 장기봉행은 나가사키의 최고 책임자로서, 청, 네덜란드와의 무역, 기리시탄 단속, 주변 다이묘 감시 등을 담당했다. 부교는 에도와 나가사키를 오가며 근무했으며, 막부의 지시를 받아 나가사키의 재판을 처리하고, 수입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기도 했다. 장기봉행은 시대극의 단골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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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봉행
지도
기본 정보
유형에도 막부지방 행정 관청
설치 시기1603년 (게이초 8년) 경
폐지 시기1868년 (메이지 원년)
별칭오나가사키 (御長崎)
위치나가사키
역대 봉행
초대나베시마 가쓰시게
말대다카기 스케타카
상세 정보
관할나가사키 시중 및 소노기군, 다카시마군, 니시소노기군 일부
직무나가사키의 통치
무역 관리
외국인 감시
재판
정원2명 (격년 교대)
봉행 소재지나가사키 데지마
소관지샤부교
석고300석

2. 역사

전국 시대에 오무라 씨의 영지였던 나가사키는 덴쇼 8년(1580년) 이래 예수회에 기증되었으나, 규슈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덴쇼 16년(1588년) 4월 2일에 나가사키를 직할지로 삼았고, 이어서 나베시마 나오시게(히젠국사가성주)를 나가사키 대관으로 삼았다. 분로쿠 원년(1592년)에는 봉행으로 테라자와 히로타카(히젠 가라쓰성주)가 임명되었다. 이것이 나가사키 봉행의 전신이다.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씨의 창입지를 몰수하고, 나가사키 행정은 에도 막부로 이관되었다. 초기에는 다케나카 시게요시 등 도쿠가와 히데타다 측근의 다이묘가 임명되었지만, 이윽고 소록의 하타모토가, 후년에는 1000~2000석 정도의 상급 하타모토가 임명되게 되었다. 나가사키 봉행직은 막말까지 상설되었다. 막부 직할지였으며, 막부의 명령에 따라 경호를 후쿠오카번사가번이 교대로 맡았다.

2. 1. 기원

2. 2. 제도 정비

이 기간 동안 나가사키는 "쇼군 직할 도시"로 지정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이러한 쇼군의 직할 도시는 3개에서 11개로 증가했다.[4]

2. 3. 나가사키 부교의 위상 변화

이 기간 동안 나가사키는 "쇼군 직할 도시"로 지정되었다. 도쿠가와 행정부 하에서 이러한 도시의 수는 3개에서 11개로 증가했다.[4]

3. 기구

나가사키 봉행의 정원은 초기에는 1명이었으나, 시마바라의 난 이후 비상시 규슈 다이묘 지휘를 위해 1638년부터 한 명은 상주하게 되었다. 1633년 2인, 1686년 3인, 1699년 4인, 1713년 3인, 교호 연간(1716-1736) 이후 대체로 2인으로 정착하였다. 1843년에는 1인제가 되었지만, 1845년에 다시 2인제로 복귀하였다. 2명의 봉행은 1년 교대로 에도와 나가사키에서 근무했으며, 매년 8월에서 9월 무렵 교대했다. 1746년 이후 한때 간조 부교가 겸임하기도 했다.

봉행은 노중의 지배를 받았으며, 에도 성에서는 부용 사이에 위치했다. 1690년에는 종5위 아래 관직인 대부격으로 알려졌다. 초기에는 나가사키 봉행만이 평민 신분으로 부교 사이의 말석을 차지했으나, 가와구치 무네쓰네가 1690년 종5위하 관직을 받은 뒤 동등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고, 1699년에는 교토 마치 부교보다 상석이 되었다. 그러나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사가 번이 당시 나가사키 봉행 마쓰다이라 야스히데의 지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사건 후 책임을 지고 자결한 야스히데는 유서에 "봉행에는 신분 높은 자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남겼다.

부교의 역소는 원래 하카타 정에 있었으나, 1663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에도 정에 서역소와 동역소가 세워졌다. 1671년 동역소는 다테야마로 옮겨져 다테야마 역소로 개칭되었으며, 이 두 곳을 통틀어 나가사키 부교도코로라고 불렀다.

부교 휘하에는 지배조두, 지배하역, 지배조역, 지배정역하역, 요리키(10기), 도신(15명), 국 통사, 네덜란드 통사 등이 있었고, 이 외에도 지역인, 정방역인, 나가사키 정 연기 등도 나가사키 행정에 관여하여 총 1천 명 정도의 행정 조직을 이루었다. 부교와 그 부하, 부교에 딸린 요리키와 도신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단신부임이었다.[24]

부교도코로 현관에는 철포 100정, 활 20장(화살 두 상자), 창 50자루 등이 있었고, 별도로 봉화시 50정, 백목장통 1정, 활 18장, 철포 20정, 창 5자루가 무기고에 비치되어 있었다.[25]

인근 다이묘들은 나가사키에 올 때 나가사키 부교에게 인사를 했으나, 오무라 씨만은 친척으로 취급되어 다른 다이묘들과 달리 대접받는 것이 관례였다.

4. 임무

청에서 오는 상인들이 머물렀던 나가사키의 도진야시키. 네덜란드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청의 상인들은 일본 내에서의 거동이 도진야시키라는 성벽 내로 제한되었다.


나가사키 부교는 천령(天領) 나가사키의 최고책임자로써, 나가사키의 행정 ・ 사법에 더해, 나가사키 회소를 감독하고、이나 네덜란드와의 통상, 수익의 막부로의 상납, 갓테호칸쇼 부교(勝手方勘定奉行)와의 연락, 여러 구니와의 외교 접대, 도진야시키데지마를 관리했다. 또한 규슈 지역 다이묘들을 비롯한 여러 구니의 동정을 탐색하고 일본의 국외 수출품인 구리나 해산물 등의 관리, 사이고쿠(西国) 지역의 기리시탄에 대한 금압, 나가사키 항 경비를 통괄하였다. 나가사키 항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나가사키 부교는 사가 ・ 가라쓰을 비롯한 인접 다이묘들과 제휴하여 해당 사건에 대한 해결을 지휘할 권한이 있었다.

17세기경부터는 기리시탄 대책이나 사이고쿠 지역의 다이묘들의 감시가 나가사키 부교들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한편 교역 관리와 통제를 목적으로 1630년대에 나가사키 부교의 직무를 규정한 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집정하던 무렵에 해박호시신제(海舶互市新例)가 발호되었을 때는 교역을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 나가사키 부교의 중요한 직무가 되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 들어 러시아의 니콜라이 레자노프의 내항, 페이튼 호 사건, 지볼트 사건, 예프피미 푸탸틴 내항 등 나가사키 인근의 바다는 늘 떠들썩했고, 부교의 수완이 우선적으로 중요시되게 되었다.

나가사키에 나아가 근무하는 부교를 나가사키 사이킨 부교(長崎在勤奉行)、에도에 있는 쪽을 에도 사이후 부교(江戸在府奉行)라 불렀다. 사이후 부교는 에도에서 에도 막부 당국과 나가사키 사이킨 부교의 사이를 중개하고 연락책을 맡았다. 사이킨 부교의 손에서 처리될 수준이 아닌 중요한 문제나 선례가 존재하지 않는 사항은 에도 막부의 로주에게 보이고 재결을 구하였는데, 이는 사이킨 부교로부터 사이후 부교를 통해 행해졌고, 그 회답이나 지시도 사이후 부교를 통해 행해졌다. 네덜란드 상관장의 쇼군 배알 때에 그 선도역을 맡은 것도 사이후 부교였다.

나가사키 ''봉행''의 다른 임무에는 무역 과정에서 입수 가능한 서양의 뉴스 및 과학적 발전 사항을 감시하는 것이 포함되었다.[2]

5. 나가사키 부교에 의한 일 처리

나가사키의 마을 형사 재판은 부교에게 맡겨졌다. 다른 원국 봉행들과 마찬가지로 추방형까지는 독단으로 재결하고 허가할 수 있었으나, 원도형(遠島刑), 즉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시키는 것 이상의 형벌에 대해서는 대부분 나가사키 부교에서 에도 중앙으로 판결을 넘겨 처결을 받은 뒤에야 처벌했다. 당시 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 왕복 거리는 3개월 이상 걸렸고, 그 사이에 죄수가 자결하거나 병으로 죽는 일도 있었다. 이 경우 죄수의 사체를 염장보존해서 에도까지 가지고 가서 처결을 받은 뒤에 형을 집행하였다. 막부의 승인 없이 독단으로 전행하는 경우 처벌 대상이 되었다. 대사건의 경우 막부로부터 상사(上使)가 와서 그 지시 아래 해당 업무를 처리하였다.

부교도코로의 판결문집인 「범료장」(犯科帳)에서 본문 맨 마지막에 「우카가이노아게」(伺の上)로써 처벌이 기록된 것은 극형에 해당하는 중죄, 전례에 보기 드문 범죄 등 나가사키 부교 단독 판단으로 판결을 내리지 못할 때 에도에 알리고 그 처결을 얻어서 처벌을 결정한 경우를 가리킨다. 그 에도에 알리는 서류를 '''어사치사'''('''御仕置伺''')라고 불렀다. 원도형 이상의 처벌에 대해 나가사키 부교는 어사치사에 죄상을 상세히 기록하고 「원도형으로 하도록 한다」(遠島申し付くべく候や)라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였다. 처결은 보인 대로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부교의 의견에 따라서 중죄가 되거나 감형되기도 했다. 한편 기리시탄 처벌에 대해서는 범료장에는 기술하지 않았다.

원도형은 나가사키에서 먼 이키(壱岐) ・ 쓰시마(対馬) ・ 고토(五島) 등지로 유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대부분이 고토였다. 드물게 사쓰마(薩摩)나 오키(隠岐)로 보내지기도 했다.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 곳으로 알려진 아마쿠사 제도의 경우 나가사키 부교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오사카마치부교도코로(大坂町奉行所)에서 판결을 받은 유형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원도의 경우 판결이 내려져도 곧장 배를 띄워 섬으로 가는 것이 아니어서 기상이나 배의 상태, 판결 전후로 범인을 일괄 배에 실어서 보내기보다는 하나하나 보내는 식이었다. 때문에 원도형 판결문에는 말미에 「모쪼록 출선 때까지 하옥시켜 놓도록」(尤も出船迄入牢申し付け置く)라고 첨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가사키에서 재판을 받은 유형인의 대부분은 고토로 보내졌으나, 그 유형인의 지배에 대해서는 고토의 영주들에게 일임하였다. 고토의 영주들로부터 유배인이 현지에서 다시 죄를 짓거나 섬을 탈출하는 등의 보고가 있는 경우에는 부교도코로의 기록에도 그것이 부기되었다. 아마쿠사 제도의 유형인들은 나가사키에서 보내져 온 자들은 비교적 적었으나, 아마쿠사가 나가사키 부교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나가사키 부교도코로의 기록에는 아마쿠사 유형인들의 상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유형인들이 섬에서 다시 죄를 짓는 경우 나가사키 부교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마쿠사에서 부교가 그 처벌을 직접 지시하였다. 이키 ・ 고토 ・ 쓰시마 등의 경우에는 처벌은 그 영주 가문에게 지배가 맡겨졌는데 그 연락 보고를 나가사키 부교로부터 구했다.

부교도코로의 취조나 처분에 대해서 불평하고 불만이 있는 자들은 그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자 할 때 마치랴쿠닌(町役人)을 통해 호소해야 했다. 그 수속은 번잡했고 설혹 그것이 상신된다 한들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일도 적었기 때문에 마치랴쿠닌(町役人)도 수속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시민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문서로 작성해 부교도코로에 투서하는 「나게부미」(投げ文), 「스테소에」(捨て訴え)나, 자신이 직접 랴쿠닌이나 랴쿠도코로(役所)로 진정을 넣는 「가고소에」(駕籠訴え) 「가케고미우타에」(駈けこみ訴え, 직소) 등을 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정규 수순들에 대해서는 「사이코시네가이」(差越願)로써 각하되고 투서를 넣은 자의 신원이 밝혀지면 본인이 마치랴쿠닌과 함께 호출되어 그 눈 앞에서 서장을 불태워버리게 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 그것을 각하할 경우 부교도코로에서 그것을 바탕으로 재검토해서 시민의 요구대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도진(唐人, 중국인 및 조선인)이나 오란타인(네덜란드인)에 대한 처벌은 일본인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수쇄(手鎖)를 채워서 해당 선주나 카피탄(네덜란드 상관장)에게 신병을 인도하고 귀국의 법으로 재판하기를 원한다고 요구하는 정도였다. 벌동(罰銅) 처분 즉 과료나 국금(国禁) 처분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국금 처분이 행해진 도진은 도진야시키에 유폐되어 다음에 출항하는 배에 실려 귀국조치되었고, 일본으로의 재입항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개항 후에는 대부분의 외국인에 의한 트러블이 발생했고 기존의 경우처럼 당선주(唐船主)나 데지마의 카피탄 상대로 통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각국의 영사(領事)에게 연락했고 그것도 그 대부분은 에도에서 직접 처결을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에도나 그밖의 장소에서는 비인(非人)이라 불리던 부라쿠민(피차별부락)에 대한 형벌을 그 지역의 우두머리의 손에 맡겼으나, 나가사키의 경우 직접 부교에 의해 집행되었다.

6. 나가사키 부교의 수입

나가사키 부교는 공적인 역할 1,000석, 재임 중 역료 4,400 표였지만, 공적인 수입보다 부수적인 수입이 훨씬 컸다.

수입품을 어조물(御調物)이라는 명목으로 관세 면제하에 구입할 수 있는 특권이 인정되었고, 이를 교토, 오사카에서 수배의 가격으로 전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게다가 선박 적재품을 취급하는 나가사키 주민, 무역 상인, 지역 관리들로부터 '''팔삭은'''이라고 불리는 헌금(연 72관여)과 청나라, 네덜란드인으로부터의 선물, 여러 번(藩)으로부터의 헌상 등이 있어, 한 번 나가사키 부교를 역임하면 자손 대대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해졌다. 그 때문에, 나가사키 부교 자리는 하타모토들이 탐내는 자리(猟官ポスト)가 되었고, 나가사키 부교 취임을 위해 사용된 운동비의 시세는 3,000 량(현재 가치로 약 3억 엔)이라고 말해졌지만[26], 이를 훨씬 능가하는 부수적인 수입이 있었다고 한다.

니이카타번 번주를 역임한 미조구치 나오스케는 나가사키 부교에 다이묘(후쿠오카번, 사가번)를 임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 외국에 무례하지 않게 대응하려면 하타모토는 부적절하며, 동시에 해당 부교가 수입이 많은 직책이므로 뇌물을 써서 취임하려는 자가 많다는 점을 들었다.

6. 1. 미조구치 나오스케의 지적

니이카타번 번주를 역임한 미조구치 나오스케는 나가사키 봉행에 다이묘(후쿠오카번, 사가번)를 임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 외국에 무례하지 않게 대응하려면 하타모토는 부적절하며, 동시에 해당 봉행이 수입이 많은 직책이므로 뇌물을 써서 취임하려는 자가 많다는 점을 들었다.

7. 나가사키 재근 부교의 교대

에도에 주재하던 봉행이 나가사키에 근무하는 봉행과 교대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출발하면, 그 일행이 나가사키 가도의 이사하야야가미 숙소에 도착할 즈음에, 나가사키 주재 봉행은 마치시(町使)와 지야쿠닌(地役人)의 토시요리(年行司) 각 2명씩을 안내를 위해 야가미 숙소로 보낸다. 그리고 봉행소 서역소에서는 옥내뿐만 아니라 정원의 구석구석까지 청소하여 부임하는 봉행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주재 봉행의 대리로서, 그 가신 1명이 호타루차야(蛍茶屋) 근처의 이치노세 다리(一ノ瀬橋)에, 서국의 각 번에서 파견된 나가사키 키키야쿠(나가사키 문역)는 신다이쿠마치(新大工町) 부근에, 토시반(年番)의 마치토시요리(町年寄)는 지야쿠닌의 대표로서 히미고개에, 그 하급자들은 사쿠라바바(桜馬場)에서 히미고개 사이에 정렬한다. 그리고 나가사키 다이칸 다카기 사쿠에몬은 저택 밖으로 나와, 각각 새 봉행을 기다리게 된다.

야가미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봉행은, 가마 옆에 5명, 토시(徒士) 5명, 창 1자루・상자 3개, 나가에가사(長柄傘)・롯샤쿠보(六尺棒) 등으로 구성된 일행으로 출발한다. 히미고개에서 소휴식을 취할 때, 마치토시요리 등이 마중 나와, 봉행의 무사 도착을 축하한다. 이어서 연도의 지야쿠닌 등이 양쪽에 정렬하는 사이를 일행은 나아간다. 주재 봉행 대리의 가신이, 그 씨명을 한 명씩 소개하지만 봉행은 그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을 하지 않는다.

사쿠라바바까지 오자, 마중 나온 여러 번의 키키야쿠의 이름을 공개하고, 거기서 처음으로 봉행은 일일이 가마를 멈추고 회석한다. 이어서 가쓰야마마치(勝山町)로 나아가, 다이칸 다카기 사쿠에몬과 같은 성씨인 미치노스케가 마중 나오는 것을 보고, 봉행은 가마에서 내려 이것과 인사를 나눈다. 서역소에 일행이 도착하는 것은 이 다음이다.

나가사키의 지야쿠닌과 선착한 가신들이 봉행소의 문 밖이나 현관에서 이것을 맞이하고, 봉행이 옥내에 들어간 곳에서, 모두 예복으로 갈아입고, 무사히 도착한 것을 축하하며, 봉행 또한 이에 응한다. 그 후 즉시 다쓰야마(立山)의 나가사키 주재 봉행에게 사자를 보내 무사 도착을 보고한다. 이것을 받은 다쓰야마 봉행소는 그것을 축하하고, 도미 1접을 보내온다. 도착한 봉행은, 점심 식사 후, 다쓰야마 봉행소에 주재 봉행을 방문하여, 적절한 절차를 마치고, 서역소로 돌아온다. 그 후, 지야쿠닌 등의 인사가 있지만, 이것에는 새 봉행은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그 후, 다쓰야마에서 주재 봉행이 여기에 답례를 온다, 라는 것이었다.

8. 역대 나가사키 부교

오가사와라 타메무네 (1603년–1604년)[5]와 오가사와라 이치안(1603년 - 1606년)을 시작으로,[6] 에도 시대 동안 임명된 나가사키 부교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


  • 하세가와 시게요시 (1604년–1605년)[6]
  • 하세가와 후지히로 (1605년–1614년)[6], (1606년 - 1617년)
  • 하세가와 후지마사 (1605년–1614년)[6], (1618년 - 1625년)
  • 하세가와 시게키치 (1605년)
  • 타케나카 우메네 (1626년–1631년)[7]
  • 미즈노 모리노부 (1626년–1629년), (1626년 - 1628년)
  • 타케나카 시게요시 (1629년–1634년), (1629년 - 1633년) - 분고 후나이 번 주. 직무상의 부정을 추궁당해 할복을 명받았다.
  • 이마무라 마사나가 (1633년–1634년), (1633년)
  • 소가 코스케 (1633년)
  • 사카키바라 모토나오 (1634년–1640년), (1634년 - 1638년)
  • 가미오 모토카츠 (1634년–1638년), (1634년)
  • 센고쿠 히사타카 (1635년)
  • 오코치 마사카츠 (1638년–1640년)
  • 바바 도시시게 (1636년 - 1652년)
  • 쓰게 마사토키 (1640년–1642년)
  • 야마자키 마사노부 (1642년–1650년)
  • 구로카와 마사나오 (1650년–1665년), (1650년 - 1664년)
  • 가이조 마사노부 (1651년–1660년), (1652년 - 1660년)
  • 쓰마키 요리쿠마 (1660년 - 1662년)
  • 시마다 다다마사 (1662년 - 1666년)
  • 이나오 마사토모 (1665년 - 1666년)
  • 시모소네 노부요시 (1666년 - 1666년)
  • 마쓰다이라 다카미 (1666년 - 1671년)
  • 고노 미치사다 (1666년 - 1672년)
  • 우시고메 추자에몬 시게노리 (1671년–1681년)[8], (1671년 - 1681년) - 그 시책으로 '나가사키의 은인'으로 불린다.
  • 오카노 사다아키 (1672년 - 1680년)
  • 야마오카 가게스케 (1687년–1694년), (1687년 - 1694년)
  • 가와구치 무네쓰네 (1680년 - 1693년)
  • 미야기 가즈미쓰 (1681년 - 1686년)
  • 미야기 마사즈미 (1687년–1696년)[9], (1687년 - 1696년)
  • 오사와 모토테쓰 (1686년 - 1687년)
  • 콘도 요시타카 (1694년 - 1701년)
  • 니와 나가모리 (1699년–1702년), (1695년 - 1702년)
  • 스와 요리카게 (1696년 - 1698년)
  • 오시마 요시나리 (1699년–1703년), (1699년 - 1703년)
  • 하야시 다다아키 (1699년 - 1703년)
  • 나가이 나오자네 (1702년 - 1709년)
  • 벳쇼 쓰네하루 (1702년 - 1711년)
  • 이시오 우지노부 (1703년 - 1705년)
  • 사쿠마 노부나리 (1703년–1713년), (1703년 - 1713년)
  • 고마기네 마사카타 (1706년 - 1714년)
  • 히사마쓰 사다모치 (1710년–1715년), (1710년 - 1715년)
  • 오오카 기요스케 (1711년–1717년), (1711년 - 1717년) - 해박호시신례가 발효됨
  • 이시카와 마사사토 (1715년 - 1726년)
  • 히노시타베 히로사다 (1717년 - 1727년)
  • 미야케 야스히로 (1726년 - 1732년)
  • 와타나베 나가토모 (1727년 - 1729년)
  • 호소이 야스아키 (1729년 - 1736년)
  • 오모리 토키나가 (1732년–1734년), (1732년 - 1734년)
  • 구보다 다다토 (1734년 - 1742년)
  • 하가와라 요시마사 (1736년–1743년)
  • 다쓰케 가게요 (1742년 - 1746년)
  • 마쓰나미 헤이자에몬 (1744)[10]
  • 마쓰나미 마사후사 (1743년 - 1746년)
  • 곤도 주조 (1747).[11]
  • 아베 가즈노부 (1746년 - 1751년)
  • 마쓰우라 노부마사 (1748년 - 1752년)
  • 스가누마 사다히데 (1750년 - 1757년)
  • 오하시 지카요시 (1752년 - 1754년)
  • 쓰보우치 사다오 (1754년 - 1760년)
  • 마사키 야스쓰네 (1757년 - 1763년)
  • 오쿠보 다다오키 (1760년 - 1762년)
  • 이시타니 기요마사 (1762년 - 1770년)
  • 오오카 타다요리 (1763년–1764년)
  • 오오카 다다토시 (1763년 - 1764년)
  • 신미 마사히데 (1765년 - 1774년)
  • 나쓰메 노부마사 (1770년 - 1773년)
  • 구와하라 모리카즈 (1773년 - 1775년)
  • 구리하라 모리사다 (1773년–1775년)[12]
  • 구제 히로타미 (1775년–1784년)[13], (1775년 - 1784년)
  • 쓰게 마사코레 (1781년-17__).[14]
  • 쓰게 마사자네 (1775년 - 1783년)
  • 쓰치야 모리나오 (1783년–1784년)[15], (1783년 - 1784년)
  • 쓰치야 마사노부 (1784년–1785년)[16], (1784년 - 1785년)
  • 도다 우지하루 (1784년–1786년)[17], (1784년 - 1786년)
  • 쓰게 히로타미 (1786).[17]
  • 마쓰우라 노부아키라 (1785년 - 1787년)
  • 미즈노 다다미치 (1786년 - 1792년)
  • 스에요시 도시타카 (1787년 - 1789년)
  • 나가이 나오카도 (1789년 - 1792년)
  • 히라가 사다요시 (1792년 - 1797년)
  • 다카오 노부후쿠 (1793년 - 1795년)
  • 나카가와 다다히데 (1795년 - 1797년) - 청속기문의 감수자
  • 마쓰다이라 다카요시 (1797년 - 1799년)
  • 아사히나 마사모토 (1798년 - 1800년)
  • 히다 요리쓰네 (1799년 - 1806년)
  • 나루세 마사사다 (1801년 - 1806년)
  • 마가리부치 게이로 (1806년 - 1812년)
  • 마쓰다이라 야스히데 (1807년–1808년), (1807년 - 1808년) - 페이튼 호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할복
  • 쓰치야 렌초쿠 (1809년 - 1813년)
  • 도야마 가게쿠니 (1812년–1816년)
  • 마키노 나리요시 (1813년 - 1815년)
  • 마쓰야마 나오요시 (1815년–1817년), (1815년 - 1817년)
  • 가네자와 치아키 (1816년–1818년), (1816년 - 1818년)
  • 쓰쓰이 마사노리 (1817년–1821년), (1817년 - 1821년) - 푸차틴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
  • 마미야 노부오키 (1818년 - 1822년)
  • 쓰치카타 가쓰마사 (1821년 - 1827년)
  • 다카하시 시게카타 (1822년 - 1826년)
  • 혼다 마사쓰 (1826년 - 1830년)
  • 오오쿠사 다카요시 (1826년 - 1833년)
  • 마키노 나리후미 (1830년 - 1836년)
  • 구제 히로마사 (1833년 - 1839년)
  • 도가와 야스기요 (1835년 - 1842년)
  • 다구치 요시유키 (1839년 - 1841년)
  • 야규 히사쓰 (1841년 - 1843년)
  • 이자와 마사요시 (1842년–1845년)[18], (1842년 - 1845년)
  • 이도 사토히로 (1845년–1849년)[19], (1845년 - 1849년)
  • 히라가 가쓰사다 (1846년 - 1848년)
  • 이나바 마사노부 (1848년)
  • 오야 아키히로 (1848년 - 1850년)
  • 나이토 다다아키 (1849년 - 1852년)
  • 잇시키 나오야스 (1850년)
  • 마키 요세이 (1850년 - 1853년)
  • 오사와 야스타쿠 (1852년 - 1854년)
  • 미즈노 타다노리 (1853년–1854년, 1857년–1858년)[20], (1853년 - 1854년, 1857년)
  • 아라오 나리마사 (1854년–1859년)[21], (1854년 - 1859년)
  • 아라오 시게미쓰 (1854년–1859년)
  • 가와무라 슈슈 (1855년 - 1857년)
  • 오쿠보 다다히로 (1857년)
  • 오카베 나가쓰네 (1857년 - 1861년)
  • 아사히나 마사토시 (1861년)
  • 다카하시 가즈누키 (1862년)[22], (1861년 - 1862년)
  • 쓰마키 요리이 (1862년) - 나가사키 봉행 대리
  • 오쿠보 다다히사 (1862년 - 1863년)
  • 스기우라 가쓰키요 (1863년)
  • 스기우라 쇼세이 (1863년)
  • 교고쿠 다카아키라 (1863년)
  • 교고쿠 다카오 (1863년)
  • 오무라 스미히로 (1863년), (1863년 - 1864년) - 나가사키 총봉행. 히젠 오무라 번 주.
  • 핫토리 쓰네즈미 (1863년–1866년), (1863년 - 1866년)
  • 아사가라 마사히로 (1864년–1866년), (1864년 - 1866년)
  • 아이하라 요시나오 (1865년) - 나가사키 봉행
  • 가와카쓰 히로유키 (1865년) - 나가사키 봉행
  • 노세 요리후미 (1865년 - 1866년)
  • 도쿠나가 마사아라 (1866년 - 1867년)
  • 가와즈 스케쿠니 (1867년–1868년)[23], (1867년 - 1868년) - 마지막 나가사키 봉행. 막부군 패배의 보고 후, 나가사키를 탈출
  • 나카다이 신타로 (1868년) - 나가사키 봉행. 가와즈의 탈출 후 잔무 정리 실시


에도 시대의 데지마 섬 (빨간색으로 윤곽선 표시)과 현대 나가사키의 경계.


나가사키 부교의 주요 관심사는 데지마 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의 도시는 이 섬을 둘러쌌고, 사진 상단에서 강변 교통 동맥을 넓히기 위해 이 섬의 일부가 철거되었다. 2004년 데지마에 설치된 표지판에서 촬영된 이 사진은 예전 사진과 모형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시대의 건물을 하나씩 재현하는 복원 작업을 보여준다. 데지마에 대한 이러한 관심의 부활은 나가사키 행정관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9. 시대극 작품, 문헌

장기 봉행은 『대에도 수사망』, 『폭풍을 부르는 장군』, 『조시로 에도 일기』, 『미토 고몬』 등 많은 시대극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역할이다. 피해자 역할(대개 무고한 죄로 할복하고, 아내나 딸 등 연고자에 의한 복수를 주인공이 돕는) 또는 악의 흑막 역할(대개 부정한 축재를 하고 에도로 돌아와 권세를 부리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에 의해 악행이 폭로되어 처단됨)으로 나뉜다. 후자의 대표작은 『유키노조 변화』로 자주 드라마 및 연극으로 제작되었다.

만야 긴노스케가 주인공으로 장기 봉행을 연기한 『나가사키 범과장』이 있다. 원작은 향토사학자 모리나가 타네오의 『장편 소설 나가사키 봉행 범과장』 (5월 서방, 1958년)과 모리나기 자신으로부터의 자료 제공을 바탕으로 이케다 이치로 (후의 작가 류케이치로)가 집필했다. 또한 모리나가는 『범과장 나가사키 봉행의 기록』, 『유배인과 비인 속 나가사키 봉행의 기록』 (각 이와나미 신서)을 저술하여 향토사 출판으로 많은 자료 문헌을 편찬 및 출판했다.

나가사키현이사하야 출신의 각본가이자 작가인 이치카와 모리이치는 1990년대에 봉행으로 부임한 토야마 카게스스·토야마 킨시로 부자를 주인공으로 한 시대 소설 『꿈의 달력 나가사키 봉행』을 간행하여 NHK금요 시대극에서 드라마화했다. 2005년에 나가사키 역사 문화 박물관에서 재간행되었다.

참조

[1] 서적 Select Documents on Japanese Foreign Policy, 1853–1868 1955
[2]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https://books.google[...]
[3] 간행물 Imported Dutch astronomical instrument (1792) http://www.pd.astro.[...] IAU/Prague 2006
[4] 서적 A History of Japan, 1582–1941: Internal and External Worlds https://books.google[...]
[5] 서적 China in the Tokugawa World
[6] 서적 Hasegawa Fujihiro in Japan Encyclopedia 2005
[7] 서적 The Kakure Kirishitan of Japan: A Study of Their Development, Beliefs and Rituals to the Present Day 1998
[8] 서적 Kaempfer's Japan: Tokugawa Culture Observed https://books.google[...] 1999
[9] 서적 https://books.google[...]
[10] 서적 The Vaccinators: Smallpox, Medical Knowledge, and the 'opening' of Japan https://books.google[...] 2007
[11] 서적 https://books.google[...]
[12] 문서
[13] 서적 https://books.google[...]
[14] 서적
[15] 서적 https://books.google[...]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https://books.google[...] 1972
[21] 서적 Select Documents
[22] 웹사이트 Handlist of Japanese manuscripts acquired since 1984 http://www.bl.uk/col[...] British Library
[23] 서적
[24] 문서
[25] 문서
[26] 웹사이트 江戸時代の貨幣価値と物価表 http://www.teiocolle[...]
[27] 문서
[2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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