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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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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의황후는 송나라 진종의 후궁으로, 훗날 송 인종이 되는 아들 조정(趙禎)을 낳았다. 원래 비구니였던 이씨는 유씨의 시녀로 입궁하여 진종의 눈에 띄었고, 아들 조정은 유씨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씨는 신비로 진봉된 후 사망했으며, 인종이 즉위한 후 장의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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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소설
소설 "후속대송양가장문무곡성포공적청초전"의 1814년 판화 삽화
이름이비
출생987년
출생지항저우, 송나라 (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시)
사망1032년
사망지개봉, 송나라 (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묻힌 곳영정릉(永定陵)
추존 시호장의황태후(莊懿皇太后)
장의황태후(章懿皇太后)
아버지이인덕(李仁德)
배우자송 진종
자녀송 인종, 아들
상세 정보
씨족이씨
가문알 수 없음
기타 정보
봉호숭양현군(崇陽縣君), 순용(順容), 신비(宸妃), 황태후(皇太后)
사망일 (음력)명도(明道) 원년 2월 26일

2. 생애

이씨는 항저우 첸탕 현 출신으로, 서민 이인덕과 그의 아내 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비구니가 되었으나, 후궁에 들어가 유씨의 시녀가 되었다. 과묵하고 장중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송 진종의 눈에 띄어 1010년 아들 조정(후의 송 인종)을 낳았지만, 진종의 허락으로 아들은 빼앗겨 유씨의 아들로 둔갑되었다. 이씨는 숭양현군에 봉해졌다.[2] 다른 후비들이 낳은 5명의 아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태자를 낳은 "공적"으로 유씨는 황후로 승진했다. 대중상부 9년(1016년) 2월, 이씨는 재인이 되었고, 천희 2년(1018년) 9월에는 완의(종1품 빈)에 올랐다.

1022년 진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지만, 인종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 몰랐다. 1032년 이씨는 병에 걸려 신비(宸妃)로 진봉되었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 태후 유씨는 이씨를 궁인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재상 여이간이 반대했다. 여이간은 유씨 집안의 평안을 위해 이씨의 장례를 후하게 치를 것을 충고했고, 유씨도 이를 받아들였다.[5] 여이간은 이씨에게 황후의 옷을 입혀 염습하고 관 속을 수은으로 채웠다.

이듬해 태후 유씨가 세상을 떠나자, 연왕 조덕소는 인종에게 이씨가 그의 생모임을 알렸다. 인종은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이씨를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하고 영정릉에 모셨다. 또한 이씨의 동생인 이용화를 찾아 벼슬을 내리고, 딸 복강공주를 이용화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2. 1. 출생과 입궁

이씨는 항저우 첸탕 현 출신으로, 서민 이인덕과 그의 아내 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비구니가 되었으나, 후궁에 들어가 유씨(후의 장헌명숙황후)의 시녀가 되었다.[2] 과묵하고 장중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송 진종의 눈에 띄어 1010년 아들 조정(후의 송 인종)을 낳았지만, 진종의 허락으로 아들은 빼앗겨 유씨의 아들로 둔갑되었다. 이씨는 숭양현군에 봉해졌다.[2] 다른 후비들이 낳은 5명의 아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태자를 낳은 "공적"으로 유씨는 황후로 승진했다. 대중상부 9년(1016년) 2월, 이씨는 재인이 되었고, 천희 2년(1018년) 9월에는 완의(종1품 빈)에 올랐다. 진종이 붕어하자 순용(종1품 빈)으로 진봉되어 원릉 봉사에 종사했다.

2. 2. 진종의 후궁

이씨는 어려서 입궁하여 진종의 아내인 유씨의 궁녀가 되었다가 진종의 눈에 띄었다.[5] 1010년 조정을 낳은 이씨는 숭양현군으로 봉해졌고[2] 이어서 재인을 거쳐 완의까지 올랐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 조정은 황후 유씨의 아들로서 자랐다. 1022년 진종이 죽고 인종으로 즉위한 뒤에도 조정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 몰랐다. 1032년 중병에 걸린 이씨는 신비(宸妃)로 진봉되었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

2. 3. 인종 즉위와 죽음

1022년 진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지만, 인종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 몰랐다. 1032년 이씨는 병에 걸려 신비(宸妃)로 진봉되었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 태후 유씨는 이씨를 궁인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재상 여이간이 반대했다. 여이간은 유씨 집안의 평안을 위해 이씨의 장례를 후하게 치를 것을 충고했고, 유씨도 이를 받아들였다.[5] 여이간은 이씨에게 황후의 옷을 입혀 염습하고 관 속을 수은으로 채웠다.

이듬해 태후 유씨가 세상을 떠나자, 연왕 조덕소는 인종에게 이씨가 그의 생모임을 알렸다. 인종은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이씨를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하고 영정릉에 모셨다. 또한 이씨의 동생인 이용화를 찾아 벼슬을 내리고, 딸 복강공주를 이용화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2. 4. 사후 추존

1032년 중병에 걸린 이씨는 신비(宸妃)로 진봉되었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후 유씨는 이씨를 궁인의 신분으로 조촐하게 장사지내려 했지만 재상 여이간이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태후께서 유씨 집안의 평안을 바라신다면 신비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셔야 합니다." 하고 충고했고 유씨도 그 뜻을 받아들였다.[5] 여이간은 이씨에게 황후의 옷을 입혀 염습하고 관 속을 수은으로 채웠다. 이듬해 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연왕 조덕소가 인종에게 그가 이씨의 소생임을 알렸다. 인종은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하며 이씨를 장의황후로 추존하고 영정릉으로 모셨다. 또한 이씨의 동생인 이용화를 찾아내 높은 벼슬을 주고 딸 복강공주를 그 아들과 결혼시켰다.[2]

3. 기타

3. 1. 조선 영조와의 비교

조선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장의황후와 인종의 사례를 언급했다고 한다.[6]

3. 2. 대중문화

원나라 시대 희곡(잡극)인 《금수교 진림포장합》(金水橋陳琳抱妝盒)은 이비와 그녀의 아들이 질투심에 눈이 먼 유비에게 희생당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더 그럴듯한 조씨고아에서 요소를 차용한 이 이야기는 엄청난 인기를 얻어 후대에도 다양한 버전으로 등장했는데, 청나라 소설 칠협오의에는 《작두환태자(The Wild Cat for Crown Prince)》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이 후대 버전에서 이비는 인종을 낳았을 때 유비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유비는 환관 곽괴와 공모하여 갓난아기를 가죽을 벗긴 고양이로 바꿔치기했다. "괴물 아기"에 분노한 진종은 이비가 저주받았다고 믿고 그녀를 금지된 궁궐로 강등시켰다. 한편, 유비는 자신의 시녀 구주에게 갓난아기를 죽여 시체를 버리라고 명령했지만, 구주는 갓난아기를 환관 진림에게 주었고, 진림은 아기를 상자에 숨겨 황제의 동생 팔왕자에게 데려갔고, 팔왕자는 조카를 아들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나중에 유비는 진종을 설득하여 이비를 죽이려 했다. 환관 유충이 자원하여 그녀 대신 죽었고, 또 다른 환관 진풍의 도움으로 이비는 마침내 궁궐에서 탈출했다. 몇 년 후, 가난한 마을에서 늙고 눈먼 여인이 된 그녀는 명재판관 포증에게 그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었다. 마침내 숨겨진 비밀이 밝혀졌고, 황태자, 즉 인종은 결국 자신의 생모를 받아들였다.

  • 《은묘환태자》의 고사에서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 미상
  • 어머니 : 미상
  • 남편 : 조진 (1010년 ~ 1063년)
  • 딸 : 경일제희 - 요절

5. 품계


  • 李氏|이씨중국어 (부터)[2]
  • * 진종 재위 ( ~ ):
  • ** 시녀(人的侍)
  • ** 숭양 현군(崇阳县君) ( 이후)
  • ** 재인(才人) (부터)
  • ** 완의(婉儀)
  • ** 순용(順容)
  • ** 〘황제 첩여〙(宸妃)
  • * 장의황후 (사후 추존)

참조

[1] 서적 宋会要輯稿
[2] 문서
[3] 서적 송사
[4] 서적 송사
[5] 서적 중국을 말한다 신원문화사
[6] 서적 영조의 세가지 거짓말 올댓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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