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전촉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전촉은 907년부터 925년까지 존재했던 오대 십국 시대의 국가이다. 왕건이 건국했으며, 당나라 말기 혼란 속에서 사천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왕건은 당나라의 검남서천 절도사를 장악하고, 903년 촉왕에 봉해진 후 당나라 멸망 후 황제를 칭했다. 전촉은 천혜의 요새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문화 발전을 이루었으나, 왕연 대에 사치와 부패로 인해 민심을 잃고 925년 후당에 멸망했다. 멸망 후 후당의 장수 맹지상이 후촉을 건국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쓰촨성의 역사 - 촉한
    촉한은 유비가 세력을 확장하여 건국한 국가로, 한나라의 정통 계승을 명분으로 건국되었으나, 제갈량 사후 쇠퇴하여 위나라에 멸망하였으며, 국력의 약세와 내부 문제로 멸망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쓰촨성의 역사 - 2008년 쓰촨 대지진
    2008년 5월 12일 쓰촨성 원촨현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으로, 중국 지진국은 규모 Ms 8.0, 미국 지질조사국은 Mw 7.9로 발표했으며, 막대한 피해와 함께 부실 공사 논란이 있었다.
전촉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명 (일반명칭)전촉
국명 (공식 명칭)촉 / 한 (漢)
다른 이름대촉 (大蜀)
국가 유형제국
위치중국
존속 기간907년 ~ 925년
지도
전촉 지도
지도
역사
건국 계기당나라 멸망
건국 날짜907년 6월 1일
멸망 계기후당에 의해 멸망
멸망 날짜925년
이전 국가당나라의 촉국
이후 국가후당
사건 1촉나라 건국 (당나라 통치 하)
사건 날짜 1903년
통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성도
공용어파촉어
화폐중국 주화, 중국 엽전
역대 황제
황제 1왕건
재위 기간 1907년 ~ 918년
황제 2왕종연
재위 기간 2918년 ~ 925년

2. 역사

허주 무양현 출신 왕건황소의 난 평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당나라 실력자인 환관 전령자(田令孜)의 양자가 되었다. 당 희종검남서천도로 피신했을 때 도운 것을 계기로 벽주 자사가 되었다.

888년 영평군(永平軍) 절도사가 되었고, 891년 성도에 있던 검남서천 절도사 진경선과 양부 전령자를 살해하고 성도를 장악하였다. 이후 검남서천도 관할 전 지역을 장악하여 사천성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901년 군벌 봉상 절도사 이무정에게서 산남서도를 빼앗았다. 903년 당나라 조정에서 촉왕에 봉해졌고, 907년 후량이 당나라를 멸망시키자 황제를 자칭하였다.

촉은 천혜의 요새로 주변 침략 위험이 적었고, 소금, 등 자원이 풍부하여 "천부"라 불렸다. 중원의 전란을 피해 많은 문인, 승려, 백성들이 평화로운 촉으로 몰려왔다. 왕건은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를 보호하고 목판 인쇄를 통한 유교, 불교 경전 출판과 비단 직물 생산 등의 사업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침략 위험이 적어 군대는 내부 감시로 눈을 돌렸고, 심사단(尋事團)이라는 비밀경찰을 만들어 불만 분자를 탄압했다.

918년 왕건 사후, 아들과 양자 사이에 계승권 다툼이 일어나 막내아들 왕연이 즉위했다. 왕연은 사치에 몰두하고 정치를 환관에게 일임하여 백성을 착취했다. 민심이 급속히 이반하여 925년 후당군 침공에 저항 없이 멸망했다. 왕연은 장안으로 호송 중 살해되었다.

전촉 멸망 후, 후당의 장수 맹지상이 통치를 맡았지만, 후에 독립하여 후촉을 건국했다.

2. 1. 건국 배경

허주 무양현 출신 왕건황소의 난 평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당나라 실력자인 환관 전령자(田令孜)의 양자가 되어, 당 희종검남서천도(劍南西川道, 본부는 지금의 사천성 성도시)로 피신했을 때 도운 것을 계기로 벽주(璧州, 지금의 사천성 통강시)자사가 되었다.

888년 영평군(永平軍, 본부는 지금의 사천성 성도시 현급시 공래시) 절도사가 되었고, 891년 성도에 있던 검남서천 절도사 진경선과 양부 전령자를 살해하고 성도를 장악하였다. 이후 검남서천도 관할 전 지역을 장악하여 사천성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901년 군벌 봉상 절도사 이무정에게서 산남서도(山南西道, 본부는 지금의 섬서성 한중시)를 빼앗았다. 903년 당나라 조정에서 촉 왕에 봉해졌고, 907년 후량이 당나라를 멸망시키자 황제자칭하였다.

2. 2. 왕건의 통치

왕건은 황소의 난 평정에 가담하여 공적을 세웠다. 그 후 당나라의 실력자였던 환관 전령자(田令孜)의 양자가 되어, 당 희종검남서천도(劍南西川道)로 피신해 왔을 때 도운 일이 계기가 되어 벽주 자사가 되었다.

888년 영평군(永平軍) 절도사가 되었고, 891년에는 성도에 있던 검남서천절도사인 진경선과 양부 전령자를 살해하고 성도를 장악하였다. 그 다음에는 검남서천도 관하의 전 지역을 장악하여 사천성 전지역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901년에는 군벌 봉상절도사의 이무정으로부터 산남서도(山南西道)을 빼앗았다. 이로 인해 903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촉왕에 봉해졌고, 이후 907년 후량에 의해 당나라가 멸망하자 황제자칭하였다.

촉은 천연의 요해에 위치했기에 주변으로부터의 침공위험이 적었고, 소금등 자원과 물자가 풍부하여 예로부터 [천부](天府)라고 불리었다. 그래서 중원의 전란을 피해 많은 문인, 승려, 백성들이 평화로운 촉으로 몰려들어왔다. 왕건도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를 보호하여 목판인쇄를 통해 유교, 불교의 경전 출판과 이 땅에서 나는 견직물같은 특산품 생산사업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침공의 위험성이 희박한 것 때문에 군대의 눈은 내부의 감시로 향해져, 심사단(尋事團)이라 불리는 비밀경찰을 만들어 불평분자들을 압박하고 살해했다.

918년 왕건이 죽자 왕건의 아들과 양자 사이에서 계승권 다툼이 일어났다.

2. 3. 왕연의 실정과 멸망

918년 왕건이 죽자 왕건의 아들과 양자 사이에서 계승권 다툼이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왕건의 막내아들 왕연이 뒤를 계승했다. 왕연은 촉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사치에 몰두하고, 정치는 환관에게 일임하여 백성들을 쥐어짰다. 이로 인해 민심은 급속도로 떨어져 나갔고, 925년 후당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자가 없어, 간단하게 멸망당했다. 왕연은 장안으로 호송 도중 살해되었다.

2. 4. 전촉 멸망 이후

925년 후당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자가 없어, 전촉은 간단하게 멸망하였다. 왕연은 장안으로 호송되던 도중 살해되었다. 전촉 멸망 후, 후당의 무장 맹지상이 이 지역의 통치를 일임받았으나 후에 독립하여 후촉을 건국하였다.

3. 문화

전촉이 보호했던 문인으로서 저명한 인물은 당나라 말기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위장과 북송의 화단에 영향을 끼친 궁정화가 황전, 서(書)와 그림에 뛰어났던 선월대사 관휴 등이 있다.

성도 교외에는 영릉이라 불리는 왕건의 묘가 남아있는데, 그중에는 왕건의 관을 둘러싼 24명의 진자(秦者)와 12명의 역사(力士)의 석조(石彫)가 있다. 이 묘는 1942년에 발견되어 현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4. 역대 군주

전촉의 군주
대수묘호이름생몰년재위
1고조왕건광도847년 - 918년903년 - 918년
2왕연화원901년 - 926년918년 - 925년[1]



왕건 사후 왕연이 뒤를 이었다.[1]

4. 1. 역대 황제

전촉의 역대 황제 (907년 ~ 925년)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및 연도
고조(너무 길어서 사용하지 않음)왕건907년 ~ 918년천복(天復) 907년
무성(武成) 908년 ~ 910년
영평(永平) 911년 ~ 915년
통정(通正) 916년
천한(天漢) 917년
광천(光天) 918년
없음없음왕연918년 ~ 925년건덕(乾德) 918년 ~ 925년
함강(咸康) 925년


5. 정치

전촉의 정치 체제는 당나라의 제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왕건의 양자들이나 환관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등 독자적인 특징을 보였다.

동중서문하평장사(약칭 동평장사)는 전촉의 재상으로, 대부분 중서시랑이나 문하시랑이 겸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중서령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서령의 지위가 높았으나, 전촉의 중서령은 대부분 왕건의 양자들이 겸임하였고, 전임은 따로 두지 않았다.[1]

추밀사910년대 이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중요한 관직이었다. 공식 직함은 내추밀사(內樞密使)였다. 당나라에서는 추밀사에 환관을 임명하였다. 전촉은 초기에는 문관을 내추밀사로 임명하였으나, 후기에는 장수들의 통제를 우려하여 환관을 임명하면서 조정 정치가 점차 악화되었다.[1]

5. 1. 중앙 정치

전촉의 재상은 동중서문하평장사(약칭 동평장사)였다. 대부분 중서시랑이나 문하시랑이 겸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중서령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서령의 지위가 높았으나, 전촉의 중서령은 대부분 왕건의 양자들이 겸임하였고, 전임은 따로 두지 않았다.

전촉의 추밀사는 중요한 관직으로, 910년대 이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공식 직함은 내추밀사(內樞密使)였다. 당나라에서는 추밀사로 환관을 임용하였다. 전촉은 전반기에는 문관을 내추밀사로 임용하였으나, 후반기에는 장수들이 통제를 받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환관을 내추밀사로 임용하면서 조정의 정치는 점점 나빠졌다.

5. 1. 1. 중서령

이름재임 기간
왕종길907년 ~ 908년
왕종필918년 ~ 925년


5. 1. 2. 동중서문하평장사

동중서문하평장사(약칭 동평장사)는 전촉의 재상으로, 대부분 중서시랑이나 문하시랑이 겸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중서령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서령의 지위가 높았으나, 전촉의 중서령은 대부분 왕건의 양자들이 겸임하였고, 전임은 따로 두지 않았다.[1]

동중서문하평장사재임 기간
주상907년 ~ 920년
위장908년 ~ 910년
장격908년 ~ 918년, 924년 ~ 925년
왕개909년 ~ 912년, 913년 ~ 925년
유전소910년 ~ 917년, 918년 ~ 925년
허적924년 ~ 925년


5. 2. 추밀원

전촉의 추밀사910년대 이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중요한 관직이었다. 공식 직함은 내추밀사(內樞密使)였다. 당나라에서는 추밀사에 환관을 임명하였다. 전촉은 초기에는 문관을 내추밀사로 임명하였으나, 후기에는 장수들의 통제를 우려하여 환관을 임명하면서 조정 정치가 점차 악화되었다.[1]

5. 2. 1. 역대 내추밀사

이름재임 기간비고
당도습907년 ~ 910년, 913년
반항910년 ~ 911년, 913년
반초911년 ~ 913년, 913년 ~ 914년
모문석914년 ~ 917년내추밀원(內樞密院) 판사(判事)
유응적917년 ~ 918년?유전소의 재종제, 917년 모문석 후임으로 내추밀원 판사, 그 해 연말 정식 내추밀사 임명. 이후 행적 불명.
송광사918년 ~ 925년환관


참조

[1] 문서 廟号はない
[2] 문서 唐の昭宗の元号を使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