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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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지상은 오대 십국 시대의 인물로, 후당의 장종에게 전촉 지역을 위임받아 통치했다. 그는 형주 출신으로, 후당에서 무장으로 활동했으며, 이극용의 사위가 되었다. 925년 전촉을 멸망시킨 후 서천 절도사가 되었고, 명종에게 시중으로 임명되었으나, 서천 지역을 개인적으로 통치하려 했다. 934년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후촉을 건국했다. 맹지상은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맹창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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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당은 사타족 출신으로 후당 시대에 활약하며 이종가의 견제를 받다가 거란과의 동맹을 통해 후진을 건국했지만, 요나라에 연운 16주를 할양하고 조공을 바치는 외교 정책을 펼치다 매국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맹지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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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맹지상 |
한자 | 孟知祥 |
자 | 보윤 |
묘호 | 고조(高祖) |
시호 | 문무성덕영렬명효황제(文武聖德英烈明孝皇帝) |
생년 | 874년 5월 10일 |
몰년 | 934년 9월 7일 |
매장지 | 화릉 (和陵; 현대 청두 시 위치) |
신분 | |
직책 | 후촉의 초대 황제 |
재위 기간 | 934년 3월 16일 – 9월 7일 |
연호 | 명덕(明德) |
왕조 | 후촉 |
휘 | 맹지상(孟知祥) |
묘호 | 고조(高祖) |
시호 | 문무성덕영렬명효황제(文武聖德英烈明孝皇帝) |
관직 | |
즉위식 | 후당 응순(應順) 원년 윤 1월 28일 (934년 3월 16일) |
후임자 | 맹창 |
직함 1 | 촉왕(蜀王) |
재위 기간 1 | 933년 – 934년 |
직함 2 |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 |
재위 기간 2 | 925년 – 934년 |
임기 유형 2 | 재임 |
가문 | |
성 | 맹(孟) |
가문 | 맹씨 |
아버지 | 맹도(孟道) |
배우자 | 이황후(李皇后) |
첩 | 이귀비(李貴妃) |
생애 | |
출생 | 874년 5월 10일 |
출생지 | 형주(邢州) 용강(龍岡, 지금의 허베이성 싱타이 시 서남쪽 싱타이 현) |
사망지 | 성도 |
연호 | |
연호 | 명덕(明德) |
사용 기간 | 934년 5월 27일 – 938년 2월 2일 |
2. 생애
후당의 장종이 925년 전촉을 멸망시킨 후, 맹지상은 서천절도사로 임명되어 성도 지역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18] 그는 형주 용강현 출신으로, 아버지 맹도와 숙부 맹천, 백부 맹방립 등 가족들이 당나라 말기와 오대십국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무인 가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초기 생애 및 배경 참고)
후당에서 장종이 살해되고 명종이 즉위한 후, 명종은 점차 강성해지는 맹지상을 경계하여 압박을 가했다.[19] 이에 반발한 맹지상은 930년 (장흥 원년) 후당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고,[23] 932년 (장흥 3년)까지 옛 전촉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23] 명종은 맹지상을 완전히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회유책으로 전환, 933년 (장흥 4년) 그를 '''촉왕'''(蜀王)에 봉했다.[4]
934년 (응순 원년) 1월, 명종이 사망하고 후당 내부에서 황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4] 맹지상은 이 기회를 틈타 완전히 자립하였다. 국호를 '''대촉(大蜀)'''으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명덕(明德)으로 개원했다.[4] 그러나 황제로 즉위한 지 불과 7개월 만인 같은 해 가을, 뇌졸중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3] 그의 뒤를 이어 셋째 아들 맹창이 황위를 계승했다.[3]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맹지상은 당 의종 치세인 874년에 태어났다.[29] 그의 집안은 형주(邢州, 지금의 허베이성 싱타이 시) 출신으로, 할아버지 맹찰(孟察)과 아버지 맹도(孟道)를 비롯한 조상들은 여러 대에 걸쳐 형주에서 장교를 지냈다.[29][5] 그의 백부 맹방립과 숙부 맹천(孟遷) 역시 당나라 말기 혼란기에 소의군 절도사를 지냈으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부침을 겪었다.[29][8][30][9][31][32] (자세한 가족 관계는 #가족 관계 문단 참고)아버지 맹도(孟道)는 당나라 말기의 주요 군벌이었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극용 휘하에 있었으나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26][33][28][1][6][7] 그러나 이극용은 젊은 맹지상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큰딸과 혼인시켰고,[26][33][28][1][6][7] 이후 맹지상은 하동군 교련사(敎練使)를 맡아 군 경력을 시작했다.[33][6] 이는 맹지상이 이극용 세력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맹지상의 여동생 또한 이극용의 동생 이극녕과 혼인하였다.[33][6])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진(晉)나라 왕으로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908년 이극용이 사망하고 아들 이존욱이 뒤를 이으면서,[12] 맹지상은 이존욱 휘하에서 활동하게 된다.
한편, 일본의 학자 가토 토루는 맹지상이 후주의 곽위나 시영과 같은 형주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그가 한화된 돌궐 사타부 출신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2. 1. 1. 가족 관계
맹지상은 당 의종 치세인 874년에 태어났다.[29] 그의 집안은 형주(邢州, 지금의 허베이성 싱타이 시) 출신으로, 할아버지 맹찰(孟察)과 아버지 맹도(孟道)를 포함한 조상들은 여러 대에 걸쳐 형주에서 장교를 지냈다.[29][5]그의 백부 맹방립은 당나라 말기에 형주가 속해 있던 소의군 절도사(昭義軍節度使, 본부는 지금의 산시성 창즈시)가 되었다.[29][5] 882년, 맹방립은 절도사의 수도를 노주(潞州)에서 형주로 이전하였고, 이는 883년 번진(藩鎭)이 둘로 분열되는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9][8] 889년 맹방립이 자살하자 그의 동생이자 맹지상의 삼촌인 맹천(孟遷)이 뒤를 이었다.[30][9] 맹천은 890년 자신이 지배하던 소의군 번진의 일부를 당시 강력한 군벌이었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본부는 지금의 산시성 타이위안시) 이극용에게 바치고 투항하였다.[30][9] 이극용은 899년 맹천에게 재통합된 소의군 번진의 지휘권을 잠시 돌려주었으나,[31] 901년 소의군이 이극용의 숙적인 선무군 절도사(宣武軍節度使, 본부는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 시) 주전충의 공격을 받자, 맹천은 다시 주전충에게 번진을 넘기고 투항하였다.[32]
맹지상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맹찰(孟察) | 추존황제 세조(世祖) |
부친 | 맹도(孟道) | 추존황제 현종(顯宗) |
백부 | 맹방립(孟方立) | 소의군 절도사 |
숙부 | 맹천(孟遷) | 소의군 절도사, 이극용과 주전충에게 투항 |
여동생 | 맹씨(孟氏) | 이극용의 동생 이극녕과 결혼. 이극녕이 이존욱 제거 음모 실패로 처형된 후 맹지상에게 돌아옴. |
2. 2. 후당에서의 활약
이극용은 맹지상의 재능을 높이 사 자신의 맏딸과 혼인시켰고[1][6][7], 이후 맹지상은 하동군에서 훈련 장교로 복무했다.[6] 908년 이극용이 사망하고 아들 이존욱이 진왕의 자리를 계승한 후에도[12] 맹지상은 계속해서 훈련관으로 일했다. 912년경, 이존욱이 최근 항복한 관리 이엄(李嚴)을 처형하려 하자, 맹지상은 이존욱의 명성에 해가 될 것이라며 중재하여 이엄의 목숨을 구했다.919년경, 이존욱은 맹지상을 새로 점령한 천웅 절도사 (본부는 현재의 허베이성 한단시)의 중문사(中門使)로 임명하려 했으나, 맹지상은 이전 중문사들이 부정 혐의로 처형된 것을 두려워하여 거절했다. 대신 그는 곽숭도를 추천했고, 이존욱은 그를 임명했다.[14] 이 추천으로 곽숭도는 맹지상에게 감사하게 되었다.[6] 이후 맹지상은 하동의 규찰관으로 임명되었고[14], 이존욱으로부터 후궁 이씨를 하사받아 919년 셋째 아들 맹인찬(훗날의 맹창)을 얻었다.[5]
923년,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하고 황제(장종)로 즉위하자, 태원을 서경으로 삼고 맹지상을 태원의 시장 겸 부방어사로 임명했다.[15] 맹지상의 아내는 황제의 누이였으므로 경화장공주(瓊華長公主)로 봉해졌다.[7][16] 장종은 곧 경쟁국 후량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15]
925년, 장종은 전촉 정벌을 계획하며 총사령관에 이계급, 부사령관에 곽숭도를 임명했다. 낙양을 떠나기 전, 곽숭도는 과거 자신을 추천해 준 맹지상에게 감사하며, 정벌 성공 시 맹지상을 서천 절도사로 추천하겠다고 약속했다.[17] 그해 말, 전촉이 멸망하자 장종은 맹지상을 낙양으로 불러 서천 절도사로 임명하고 명예 재상 직함인 同中書門下平章事|동중서문하평장사zho를 하사했다.[18]
그러나 장종과 유황후는 곽숭도가 전촉의 재물을 빼돌리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의심했다. 장종은 맹지상에게 "곽숭도가 반역할 뜻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도착하면 그를 처형하라"고 명했으나, 맹지상은 "곽숭도는 충성스러운 신하이니 먼저 조사해보고 혐의가 없으면 돌려보내겠다"고 답했다.[18] 유황후는 독단적으로 환관 馬彥珪|마언규zho를 통해 곽숭도 처형 명령을 이계급에게 전달했다. 맹지상은 이를 알고 급히 성도로 향했으나, 마언규가 먼저 도착하여 이계급은 926년 봄 곽숭도와 그의 아들들을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성도는 혼란에 빠졌으나, 맹지상이 도착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이후 이계급은 맹지상에게 성도를 맡기고 낙양으로 떠났다.[19]
곽숭도와 또 다른 주요 장군인 주우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후당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이사성 (본명 강언소)이 이끄는 반란군은 서천 절도사를 자칭하며 성도를 공격하려 했으나, 맹지상은 동장, 임환과 연합하여 이들을 신속히 격파했다. 이사성이 패배하자 이계급은 낙양으로 돌아갔다. 혼란 속에서도 맹지상은 유능한 관리를 등용하고 세금을 감면하여 촉 지역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18]
이계급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인 926년 여름, 장종은 낙양의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장종의 양자이자 맹지상 부인의 양오빠인[7] 이사원 (후당 명종)이 혼란을 수습하고 황제로 즉위했다.[19] 명종 이사원은 점차 강성해지는 맹지상을 경계하여 압박을 강화했다. 이에 반발한 맹지상은 930년(장흥 원년) 후당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고, 932년(장흥 3년)에는 촉 땅에서 후당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933년(장흥 4년), 명종은 회유책으로 맹지상을 '''촉왕'''에 봉했다.
934년(응순 원년) 1월, 맹지상은 후당의 계승 분쟁을 틈타 독립하여 국호를 '''후촉'''이라 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명덕(明德)으로 고쳤다. 그러나 황제 즉위 7개월 만인 같은 해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3. 후촉 건국
후촉이 건국되기 이전, 촉 지역은 전촉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내부의 부패가 심하여 925년 후당의 장종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이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은 인물이 바로 후촉의 시조인 맹지상이었다.후당에서는 장종이 살해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명종은 촉에 있는 맹지상을 경계하여 그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반발한 맹지상은 930년 (장흥 원년) 군사를 일으켜 후당군을 촉 지역에서 몰아내고, 932년 (장흥 3년)까지 촉 전역을 장악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명종은 맹지상을 완전히 지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회유책으로 전환하여, 933년 (장흥 4년) 맹지상을 '''촉왕'''에 봉하였다.
934년 (응순 원년) 1월, 명종이 사망하고 후당의 황위 계승이 혼란에 빠지자 맹지상은 이 틈을 타 완전히 자립하였다. 국호를 '''대촉'''으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명덕으로 개원하였다.
한편, 후당 내부의 혼란은 후촉에게 영토 확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민황제의 참모인 주홍조와 풍윤은 석경당과 민황제의 양자 이종가를 의심하여 그들의 주둔지를 옮기려 했다. 이종가는 이것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민황제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산남서 지역의 절도사 장건소(張虔釗)와 무정 절도사 손한소(孫漢韶)는 민황제 측에 섰다가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관할 구역과 함께 후촉에 항복하였다. 이로 인해 후촉은 친링 산맥 이남 지역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3]
맹지상은 황제 즉위 후 약 1년 넘게 뇌졸중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934년 가을 병세가 위독해졌다. 그는 자신의 셋째 아들 맹자인(孟仁贊, 훗날의 맹창)을 황태자로 책봉한 당일,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 황위는 맹창이 계승하였다.[3]
2. 4. 통치 및 최후
925년 전촉이 멸망한 후, 후당의 장종은 맹지상을 서천절도사로 임명하고 명예 재상 직함인 ''同中書門下平章事|중국어''를 하사하여 성도 지역의 통치를 맡겼다.[18] 그러나 이존욱이 살해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명종과 그의 참모장 안중회는 맹지상과 동천절도사 동장이 독자 세력화할 것을 경계하여[19] 이엄(李嚴)을 서천 군대의 감시역으로 파견하는 등[19] 억제책을 폈다. 맹지상은 이에 불만을 품고 927년 성도에 도착한 이엄을 처형했다.[19] 명종은 맹지상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성도로 보내주었으나[16][19], 양측의 긴장은 계속되었다.맹지상은 한때 동장과 소금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20], 후당 조정이 무신절도사(武信節度使), 보녕절도사(保寧節度使) 등에 중앙 관리를 임명하고[20][21][22] 면주(綿州) 분리 움직임까지 보이자[20], 위협을 느낀 두 사람은 930년 동맹을 맺고 후당에 맞서 거병했다.[23] 그들은 보녕, 무신, 조무(昭武) 등 후당에 충성하는 절도사들을 공격하여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23] 검문관 방어에서 일시적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23], 맹지상의 군대는 931년 무신절도사를 점령하고[23] 무태절도(武泰節度)와 영강절도(寧江節度)까지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23]
후당의 안중회가 실각하고 명종이 유화책을 쓰자[23] 맹지상은 후당에 복속할 뜻을 내비쳤으나, 동장은 이를 거부하며 오히려 맹지상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23] 932년, 동장이 먼저 맹지상을 공격했으나, 맹지상은 조정은 등과 함께 이를 격파하고 오히려 동천을 장악했다.[23] 이로써 맹지상은 서천과 동천을 포함한 옛 전촉 지역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23] 결국 명종은 맹지상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의 권한을 공식화했으며[4], 933년에는 그를 정식으로 촉왕(蜀王)에 봉했다.[4]
934년 초, 후당에서 명종이 사망하고 내부 혼란이 발생하자[4], 맹지상은 이를 기회로 삼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촉(大蜀, 후촉)이라 정했으며, 연호를 명덕(明德)으로 개원했다.[4] 직후 후당의 장건소(張虔釗)와 손한소(孫漢韶)가 관할하던 산남서도(山南西道)와 무정절도(武定節度) 지역이 후촉에 귀속되면서 영토는 더욱 확장되었다.[3]
그러나 황제로 즉위할 당시 맹지상은 이미 1년 넘게 뇌졸중을 앓고 있었고, 병세는 점차 악화되었다. 934년 가을, 그는 아들 맹인찬(孟仁贊)을 황태자로 책봉한 바로 그날 사망했다.[3] 향년 61세였으며, 황태자 맹인찬(이후 맹창으로 개명)이 제위를 계승했다.[3]
3. 가족 관계
- 조부 : 추존황제 세조(世祖) 맹찰(孟察)
- 부친 : 추존황제 현종(顯宗) 맹도(孟道)
- 황후 : 이씨(李氏, 873년 ~ 932년) - 후당 장종 이존욱의 누이이자 진왕 이극용의 장녀이다. 후당에서 경화장공주(瓊華長公主, 923년 또는 925년 책봉), 복경장공주(福慶長公主, 930년 책봉) 등의 칭호를 받았고, 이사원에 의해 진국옹순장공주(晉國雍順長公主)로 추존되었다. 934년 후촉 건국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슬하에 맹이범(孟貽範), 맹이옹(孟貽邕) 등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귀비 : 이씨(李氏, ? ~ 965년) - 원래 후당 장종의 후궁이었으나, 맹지상의 후궁이 되어 후촉의 2대 황제인 맹창을 낳았다. 맹창 즉위 후 황태후로 추존되었다.
3. 1. 황자
봉란숙위도지휘사(奉鑾肅衛都持揮使)(본명: 맹인찬(孟仁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