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숙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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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인숙은 1945년 대구에서 태어난 모델로, 197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모델, 배우로 활동했으며, 1960년대 유흥업소 접대부로 일하며 정계 고위 인사들과 교류했다. 정인숙은 정일권 전 국무총리와의 관계를 통해 아들 정성일을 낳았으며, 1970년 교통사고로 위장된 살인 사건으로 사망했다. 정인숙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정성일의 친부 논란이 일었으며, 정일권, 박정희 등이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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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숙 (모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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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인숙 |
본명 | 정금지 |
다른 이름 | 정혜미, 박지연, 최순주, 고승희 (모두 모델 시절 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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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 |
직업 | 전직 모델 겸 배우 은퇴자 출신의 서울특별시 시내의 고급 요정의 접대부 |
학력 | 명지대학교 영어교육학과 |
가족 관계 | |
친척 | 정도찬(재종숙부) |
부모 | 정도환(부), 전덕조(모) |
형제자매 | 오빠 5명(그들 가운데 첫째오빠 정종진, 둘째오빠 정종구, 다섯째오빠 정종욱 등 이외에도 2명)과 쌍둥이 누이동생 1명(정옥지) |
배우자 | 정일권(내연) |
자녀 | 정성일(아들)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962년~1965년(모델 겸 배우 활동 당시) |
2. 생애
정인숙은 1945년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지금의 대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정도환과 어머니 전덕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도환은 해방 후 대구광역시 부시장을 지냈고 대구일보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7남매 중 여섯째로, 위로 오빠 다섯 명과 쌍둥이 자매가 있었으나,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은 어릴 때 사망했다.[1]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몸종과 같은 여자아이를 따로 둘 정도였다.[1]
1962년 대학 중퇴 후, 영화배우를 꿈꾸며 충무로를 맴돌았고, 단역 광고 모델 및 영화 단역으로 활동했다.[2] 문학 공부를 원했던 정인숙은 1963년 시나리오 작가 장사공과 1년 정도 교제하며 동거했다는 의혹을 받았다.[2],[4] 그러나 장사공의 사업 실패와 성추행 및 구타, 바람기 등으로 1년 만에 관계가 파탄났다.[2]
이후 비밀요정을 경영하던 김씨를 만나 패션모델로 활동하다, 김씨가 운영하는 서울 한남동 고급 요정에서 접대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유명 요정 선운각으로 옮겨 타고난 미모와 영어 실력으로 1급 접대부가 되었다. 선운각에서 백두진과 그의 일행을 만나고, 이들을 통해 민주공화당과 정부 주요 인사들과 교류했다.[2]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은 정인숙을 만나 관계를 가졌고, 1968년 6월 아들 성일을 출산하였다.[7] 정인숙은 정일권이 자신을 서운하게 할 때마다 자신이 정일권 총리의 아이를 낳았다고 떠벌리고 다녀 정일권을 난처하게 했다.
미국과 일본 등지를 여행하던 정인숙은 정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하였다. 이후 그녀는 다시 남성 편력을 시작했는데, 국내로 들어온 정인숙은 호텔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지를 홀로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잠자리도 같이 하는 등 난잡한 생활을 했다. 1969년 10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의 주선으로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되돌아 왔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의문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해 누이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29] 그러나 정종욱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3],[29] 정인숙 사건은 '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의혹 속에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29]
2. 1. 생애 초반
정인숙은 1945년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지금의 대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정도환과 어머니 전덕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도환은 해방 후 대구광역시 부시장을 지냈고 대구일보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7남매 중 여섯째로, 위로 오빠 다섯 명과 쌍둥이 자매가 있었으나,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옥지)은 어릴 때 사망했다.[1]정인숙은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몸종과 같은 여자아이를 따로 둘 정도였다. 아버지 정도환은 자식 교육에 엄격했지만, 정인숙에게는 관대하여 오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터울이 컸던 두 오빠는 일찍 결혼하여 분가했는데, 정인숙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1]
2. 1. 1. 출생과 가계
1945년 2월 13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지금의 대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정도환과 어머니 전덕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도환은 해방 후 경상북도 대구부 부부윤(지금의 대구광역시 부시장)을 지냈고, 1946년 1월 초부터 1958년 3월까지 대구일보 명예회장을 지냈다. 재종숙부(7촌 아저씨) 정도찬 역시 자유당 정권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부시장을 지냈다.[1]정도환은 아들만 넷을 둔 탓에 딸을 원했고, 그의 부인은 종교가 없음에도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릴 정도였다. 정인숙은 7남매 중 여섯째로, 위로 오빠 다섯 명과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쌍둥이 딸에게는 금지(金枝)와 옥지(玉枝)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옥지는 생후 1년 반 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금지가 살아남아 후일의 정인숙이 되었다.[1]
정인숙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몸종과 같은 여자아이를 따로 둘 정도였다. 아버지 정도환은 자식 교육에 엄격했으나, 유독 정인숙에게는 관대하여 오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터울이 컸던 두 오빠는 일찍 결혼하여 분가했는데, 정인숙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1]
정인숙은 개인 교사를 둘 정도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예쁘고 명랑한 성격으로 친구가 많았고, 특히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2] 1956년 대구 S여중에 진학했을 때까지도 가정 형편이 넉넉했고, 1958년 3월에는 아버지가 매일신문 명예회장(1958.03.~1960.05.)에 취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1959년 여중 졸업 후 신명여고에 진학하고 이듬해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재종숙부 정도찬이 경상북도 대구 부시장 직에서 물러나고, 아버지 정도환이 매일신문 명예회장 직에서 물러나면서였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정인숙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대구 남산동 집을 팔고 삼덕동으로 이사하면서 정인숙의 성격도 점차 비뚤어지기 시작했다.[1]
가세가 기울면서 정인숙은 방황했고, 신명여고 재학 중 성적은 중위권 이하로 떨어졌지만, 영어 실력만큼은 뛰어났다. 일본에서 전기 부속품상이나 무역회사를 하던 오빠들이 모두 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정인숙은 결혼하여 분가한 두 오빠(둘째 오빠, 셋째 오빠)의 집을 드나들며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1]
1962년 신명여고 졸업 후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떨어졌고, 같은 해 서울문리실과초급대학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했다. 빼어난 미모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
2. 1. 2. 학창 시절
정인숙은 가정 환경이 넉넉하여 개인 교사를 둘 정도로 유복하게 자랐다. 예쁘고 명랑한 성격으로 붙임성이 좋아 친구가 많았으며,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2]1956년 대구 S여중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가정 형편이 좋았다. 1958년 3월 초,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매일신문 명예회장(1958.03.~1960.05.)을 맡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959년 여중 졸업과 동시에 신명여고에 진학했고, 196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4·19 혁명이 일어났다. 경상북도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재종숙부 정도찬과 매일신문 명예회장이던 아버지 정도환이 물러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정인숙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대구 남산동 집을 팔고 삼덕동으로 이사하는 등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정인숙의 성격도 점차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가세가 기울면서 정인숙은 방황했고, 신명여고 재학 중 학교 성적은 중위권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영어 실력만큼은 뛰어났다. 정인숙이 영어를 잘 했던 것은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당시 일본에서 전기 부속품상이나 무역회사를 하던 오빠들은 모두 영어에 능통했다. 정인숙은 결혼하여 분가한 두 오빠(둘째오빠, 셋째오빠)의 집에 종종 드나들며 영어 실력을 키웠다.
1962년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1962년 이화여자대학교(영어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같은 해 서울문리실과초급대학(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으나 학교를 거의 다니지 않고 중퇴했다.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 아버지의 실직과 대학 낙방은 정인숙의 방황을 더욱 심화시켰다.
2. 2. 유흥업 진출과 정·관계 인맥 형성
1962년 대학 중퇴 후, 정인숙은 영화배우를 꿈꾸며 충무로를 맴돌았고, 단역 광고 모델 및 영화 단역(1965년 은퇴할 때까지 3편)으로 활동했다.[2] 문학 공부를 원했던 정인숙은 1963년 시나리오 작가 장사공을 만나 1년 정도 교제하며 동거했다는 의혹도 받았다.[2],[4] 장사공은 당시 KBS에서 《태양은 늙지 않는다》를 집필 중이었고, 정인숙은 그를 "유명한 작가"라며 자랑했다.[5] 장사공의 소개로 영화사와 접촉,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5]그러나 신촌, 수유리 등에서 하숙 생활을 하던 중, 장사공의 사업 실패와 성추행 및 구타, 바람기 등으로 1년 만에 관계가 파탄났다.[2] 정인숙은 대구 집으로 도망쳤고, 장사공을 사위로 여기던 가족들은 인내를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정인숙은 낙태를 했으며, 장사공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는 방송에서 잘못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2] 1970년 초 피살 한 달 전, 정인숙은 친구에게 "장사공이 그립다"고 털어놓았다.
정인숙은 장사공과 헤어진 후 비밀요정을 경영하던 김씨를 만나 패션모델로 활동하다, 김씨가 운영하는 서울 한남동 고급 요정에서 접대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유명 요정 선운각으로 옮겨 타고난 미모와 영어 실력으로 1급 접대부가 되었다.
선운각에서 백두진(전 초대 임시외자관리청장)과 그의 일행 B씨를 만났고, B씨를 통해 민주공화당과 정부 주요 인사들과 교류했다.[2] 이후 백석주(전 조달청장)의 일행 S씨와 3개월간 관계를 맺었고, 홍승희(전 재무부 장관)의 지인 K씨와 원용석(전 경제기획원장)의 측근 A씨가 한 달간 정인숙을 차지하려 갈등하기도 했다.[2] 정인숙은 선운각을 그만두고 비밀요정으로 옮겼다.
정인숙은 여러 요정에 출입했지만, 주로 김씨가 경영하는 한남동 고급 요정을 이용했다. 2류급 여배우와 가수들을 불러내는 S마담 집에도 단골로 불려 다녔지만, 콧대가 높아 웬만한 이름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 한 회고에 따르면, 접대부 중 정인숙의 미모가 1위였다고 한다.
선운각, 옥류장 등 일류 요정들은 정인숙을 데려가기 위해 다투었다.[3] 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고위층 인사와 교분을 쌓았고, 저명인사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했다. 비밀요정을 주 무대로 정부 A급 고관대작들만 상대했으며,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 없다"며 정치권 고위 인사와 '깊은 관계'임을 털어놓았다.[5] 이 명성 때문에 '정인숙 피살 사건'은 제3공화국 최대 '섹스 스캔들'로 비화됐다.[5]
밤에는 고위 인사들과 접하고, 낮에는 필동 변두리 집에서 어머니와 지냈으며, 오빠 정종욱이 근처에 살며 자주 왕래했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몇 번 방문한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정관계 최고 인사들과 어울리며 여러 번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고, 박정희 대통령과도 술자리를 가졌다.
1980년대에 국회의원을 지낸 모 인사는 "정인숙을 편력한 이들은 박정희, 박종규, 정일권 씨 등이었다."라고 말했다.[6] 이후락 등과도 관계를 가졌다.
경찰은 정인숙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오빠 정종욱이 살해했다고 발표했다.[3],[29] 그러나 정종욱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3],[29] 정인숙 사건은 '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의혹 속에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29] 2010년, 정종욱은 "마지막으로 재심청구를 통해서라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29]
2. 3. 정일권과의 관계와 출산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은 정인숙을 만나 관계를 가졌다. 정일권은 그녀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다가 주민들에게 목격되어 소문이 퍼졌다. 정인숙이 임신하자 정일권은 낙태를 권유하려다가 결국 아이를 낳으라고 하였다. 정인숙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8년 6월 아들 성일을 출산하였다.[7]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는 정일권 혹은 박정희라는 소문이 돌았다.[8] 정인숙은 정일권이 자신을 서운하게 할 때마다 자신이 정일권 총리의 아이를 낳았다고 떠벌리고 다녀 정일권을 난처하게 했다. 정일권은 불법 여권 두 개를 만들어 정인숙을 해외로 보내고 생활비를 주며 조용하게 살라고 당부했다.
정인숙은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 없다”, “서교동 집도 아기 아빠가 사준 거야” 등의 말을 공공연히 했다. 주변의 발설로 정일권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설이 유포되었고, 이는 신민당 의원들이 국회와 언론에 언급하면서 알려졌다.
1968년 12월 30일, 정인숙은 회수여권을 발급받았다. 1969년 3월에는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0월에는 워싱턴 D.C.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9]
2. 4. 의문의 암살
정인숙의 출국 배경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자꾸 박정희의 소생인 것처럼 행세하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0] 3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춘은 정인숙의 아이는 박정희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7]대통령 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온 당시, 정인숙에게서 퍼져 나오는 소문이 박정희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그녀를 암살하였다는 설도 제기되었다.[12]
미국과 일본 등지를 여행하던 정인숙은 정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하였다. 이후 그녀는 다시 남성 편력을 시작했는데, 국내로 들어온 정인숙은 호텔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지를 홀로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잠자리도 같이 하는 등 난잡한 생활을 했다. 이 때는 전과는 달리 주로 돈을 잘 쓰는 사람들을 상대했고, 재일교포와 사업가 등 유력 인사들이 그녀를 거쳐 갔다. 1969년 10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의 주선으로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되돌아 왔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주변에 “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 “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고, 한때는 “이젠 미국 안 갈래”라고 하기도 했다. 사건 당일인 3월 17일 낮, 자동차 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 6기통짜리를 흥정하기도 했다.
정인숙과 관련된 소문은 이미 국회와 청와대(대통령 비서실)에도 확산되었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이라는 풍자곡이 시중에 유행하였다. 난감한 처지에 빠진 정일권은 오빠 정종욱에게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고, 동생 정인숙의 사생활을 잘 감시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정인숙을 목격한 연예기자 정홍택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날도 나는 남산 중턱에 있는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에 갔다. 밤 8시 반쯤 되었을까? 나는 만나기로 한 일행보다 먼저 도착했고 클럽 안에서는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자 한 분이 카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 술집에서 카운터 앉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 여인과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가까이 보니 아주 미인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하얀 것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3]
내가 카운터에 앉자 그 여인은 나한테 술을 한잔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리벙벙했다. 이런 경우 술을 권하는 사람은 대체로 남자 쪽이 아닌가? 나는 솔직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쑥스러웠다. 내 느낌으로는 그녀에게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인데다가 우울한 분위기였다. 더욱 더 나를 묘하게 만든 일은 그녀가 밴드에게 연주해 달라고 주문한 노래 때문이었다. 그 노래는 ‘릴리스 미(Release Me)’였다. 이것은 영국의 엥겔버트 험퍼딩크라는 가수가 부른 곡이고 그 당시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하고 있었다. “나를 좀 놔 주세요. 떠나갈 수 있게 놔 주세요.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나한테는 새로운 사람이 생겼답니다. 당신의 입술은 차갑지만 그이의 입술은 따뜻합니다.” 이런 가사 내용이다.[3]
그녀는 이 노래를 세 번 네 번 연속으로 부탁을 했고, 악단은 계속해서 연주를 해 주었다. “아하, 이 여인에게 분명히 무슨 사연이 있구나”라고 직감적으로 생각을 했지만 약 두 시간 후에 그렇게 큰 사건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정말로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물론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9시가 조금 지나서 그 여인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이트클럽을 빠져 나갔다.'[3]
사망 사건 당시 경찰은 “정인숙이 요정에 나가면서 많은 남자와 사귀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낳아 기르는 등 사생활이 좋지 않아 운전을 하던 오빠(정종욱)가 권총으로 살해했다.[3]”라고 발표했다. 경찰은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해 누이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동생의 문란한 행실을 보다 못한 정종욱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동생을 죽이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29] 그러나, 사건에 대한 의혹은 지난 40년간 계속됐다. 당시 사건 수사가 정인숙 주변에 대해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빠의 범행 동기가 석연치 않았으며 중요한 범행 현장인 사고 차량은 사건 발생 몇 시간 만에 다른 곳으로 치워졌다. 무엇보다 범행 도구인 권총조차 발견하지 못했다.[29]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은 정종욱은 형을 마치고 교도소에서 출감한 뒤 기자 인터뷰에서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3] 그는 "나는 범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 동생 아들 성일이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확실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누명을 벗을 것이다.[3]"라고 주장했다.
정종욱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뒤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정도환)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을 뿐,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정인숙 사건은 단순 살인 사건이라는 수사 기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권력 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 채 현재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있다.[29] 2010년 2월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정종욱은 "억울해서가 아니라면 수감 생활까지 다 마치고 나와 '내가 쏘지 않았다'고 얘기하겠냐"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지막으로 재심 청구를 통해서라도 명예 회복을 하고 싶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29]
3. 정인숙 피살 사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강변도로에서 정인숙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모델 정인숙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함께 있던 오빠 정종욱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생존했다.[15]
사건 직후 정종욱이 용의자로 체포되었고, 경찰은 그가 동생의 문란한 생활과 자신에 대한 멸시에 분노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검찰 역시 정종욱을 범인으로 결론 내렸지만, 정종욱은 범행을 부인하며 의문의 차량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15]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 고위층 개입 의혹을 제기했고, 사건은 정치적 논란으로 번졌다.[15]
정인숙의 시신 부검 결과, 낙태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6] 정종욱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권력층 인사를 언급했지만, 그의 요청은 거절당했다.[16]
수사 과정에서 정인숙의 수첩에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등 고위 인사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다.[19] 이로 인해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당시 유행했던 노래 가사 중에는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구절이 있었는데,[5][20] 이는 정인숙과 권력층 간의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인숙과의 관계, 그리고 정일권과의 관계에 대한 소문에 분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일권은 이 사건으로 인해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5]
정인숙 사건은 권력층의 부도덕성과 연루된 의혹을 남긴 채, 오빠 정종욱의 범행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정종욱은 지속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고,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17] 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기도 했다.[18]
3. 1. 사건 발생과 초기 수사
1969년 10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의 주선으로 미국에 갔다가 3개월 만에 귀국한 정인숙은 주변에 미국에 갈 것이라며 차를 팔려고 하거나, 돈을 달라는 사람이 많아 귀찮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건 당일인 3월 17일 낮에는 자동차 매매업소에서 시보레 6기통짜리 자동차를 흥정하기도 했다.[3]정인숙과 아들의 존재에 대한 소문은 이미 국회와 청와대(대통령 비서실)에도 확산되었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이라는 풍자곡이 시중에 유행하였다. 난감해진 정일권은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에게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며 동생의 사생활을 잘 감시해줄 것을 부탁했다.[3]
사건 당일 밤, 정인숙은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연예기자 정홍택에게 목격되었다. 정홍택의 회고에 따르면, 정인숙은 카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그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다. 그녀는 우울한 분위기였고, 엥겔버트 험퍼딩크의 '릴리스 미(Release Me)'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신청했다.[3]
사건 직후, 현장에 있던 정종욱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경찰은 정종욱이 정인숙의 난잡한 생활과 자신에 대한 멸시에 분노하여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의 허벅지를 쏴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종욱은 진술에서 건너편 차선에서 의문의 차량을 봤다고 주장했다.[15]
검찰 수사 결과, 범인은 오빠인 정종욱으로 밝혀졌다. 정종욱은 정인숙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으나, 정인숙이 말을 듣지 않고 심한 폭언을 하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살해하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였다. 정인숙 살해 사건 이후 의혹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관련자를 색출하였으나, 정일권 총리의 해임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다.
정인숙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부검되었고, 낙태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종욱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이송되었다가 퇴원 후 구속되었다. 정인숙은 경기도 파주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16]
정종욱은 사건 직후 "당시 셋째, 넷째 가라면 분해할 정도의 권력을 휘둘렀던 P씨"를 불러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16] 수감과 출소 이후에도 정종욱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정일권과 여러 번 만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정종욱에 대해선 '권세가들에게 희생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떠돌았다.[17] 한편 정계의 유력자가 은폐하려 했다는 설과 정적관계에 있던 자의 소행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2010년 3월 20일 SBS TV '그것이 알고싶다'는 정인숙 피살 사건을 다시 추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18]
경찰은 정인숙이 많은 남자와 사귀었고 아들까지 낳아 기르는 등 사생활이 좋지 않아 오빠 정종욱이 권총으로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건 수사는 정인숙 주변에 대해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오빠의 범행 동기가 석연치 않았으며, 범행 도구인 권총조차 발견되지 않았다.[29]
정종욱은 출감 후 인터뷰에서 자신은 범인이 아니며,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정인숙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버지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을 뿐,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29] 2010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종욱은 결백을 주장하며 재심청구를 통해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29]
3. 2. 수첩 속 정치인 명단과 스캔들 확산
1969년 10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의 주선으로 정인숙은 아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되돌아왔다. 그러나 소문은 이미 국회와 청와대(대통령 비서실)에도 확산되었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이라는 풍자곡이 시중에 유행하였다.[3] 난감한 처지에 빠진 정일권은 오빠 정종욱에게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고, 동생 정인숙의 사생활을 잘 감시해 줄 것을 부탁했다.당시 정인숙을 목격한 연예기자 정홍택의 회고에 따르면, 정인숙은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에서 Release Me|릴리스 미영어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신청하며 우울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이 노래의 가사 내용은 "나를 좀 놔 주세요. 떠나갈 수 있게 놔 주세요.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와 같았다.[3]
정인숙의 빨간 가방 안에는 그녀가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들어 있었다. 이는 고위층의 부도덕한 타락상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사건의 전모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온갖 추측만 난무했다.
3. 3. 신민당의 정치 공세와 진상 규명 요구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위장된 사건으로 정인숙이 살해되었다.[13][14] 정인숙은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했으나 목숨은 건졌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구조되었다.정인숙 사건은 당시 지도층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정인숙의 빨간 가방 안에는 그가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들어 있었다. 이 사건은 고위층의 부도덕한 타락상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사건의 전모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온갖 추측만 무성하게 남았다.
정인숙이 사망하던 날 밤, 그의 집 안방 아랫목에는 세 살(만 두 살) 난 아들 정성일이 자고 있었다. 정인숙이 사망한 뒤 언론과 검찰은 집중적으로 질문하였고, 가족들은 아이를 정인숙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일찍 여읜 뒤 세간에서 잊혀졌던 정성일은 1991년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기업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3. 4. 사건의 미스터리와 풀리지 않은 의혹
1970년 3월 17일 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에서 발생한 정인숙 살해 사건은 단순 살인 사건이 아닌, 여러 의혹을 남긴 채 풀리지 않고 있다.[13][14]사건 직후,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19년 형을 선고받았다.[3] 경찰은 정종욱이 동생의 문란한 사생활에 불만을 품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15][29] 그러나 정종욱은 출소 후 인터뷰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은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 그는 정인숙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사건 배후에 있으며,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정성일이라고 주장했다.[3]
정종욱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재심 청구를 원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29] 2010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 사건을 다시 추적하며 당시 수사 기록, 부검 기록을 공개하고 총기 실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8][29]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수첩에는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등 권력 실세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19] 이 때문에 사건은 정치 스캔들로 확대되었고,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정인숙 사건은 권력층 개입 의혹,[15] 부실한 수사, 증거 부족 등 여러 미스터리를 남긴 채, 한국 현대사의 풀리지 않은 의혹으로 남아있다.[29]
4. 정성일의 친부 논란
1970년 정인숙 피살 사건은 국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야당은 이 사건을 정치 쟁점으로 삼으려 했고, 정부와 여당은 이를 수습하고자 했다.[22]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은 유진산 등 야당 인사들에게 사건을 쟁점화하지 말라고 요청했지만, 유진산은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부의 미흡한 대처를 비판하며 논란을 증폭시켰다.[24]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1991년과 1993년 두 차례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21] 첫 번째 소송은 외삼촌의 권유로 취하했으나, 두 번째 소송은 정일권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21]
정성일의 생부로는 정일권, 박정희, 박종규, 이후락 등 여러 인물이 거론되었다.[34] 정인숙의 유족들은 처음에는 정성일을 정인숙의 배다른 동생이라 했으나, 이후 정일권의 친자라고 주장했다.
1988년 박근혜는 인터뷰에서 정성일의 생부가 박정희가 아니라고 밝혔다.[37]
4. 1. 정일권 설과 친자 확인 소송
1970년 5월 임시국회에서 정인숙 피살 사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의 대정부 질의가 이어지며 논란이 일었다.[22] 유진산 당시 신민당 총재는 정부의 미흡한 대처를 비판했고,[22] 조윤형, 김상현 등 야당 의원들은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제기하며 수사 의혹을 추궁했다.[25] 김상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인숙의 관계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파장을 일으켰다.[28]1991년 6월 5일,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21] 정성일은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에게서 정일권이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21]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미국으로 출국했다.[21] 1993년 정성일은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으나, 소송 진행 중 정일권이 사망하여 무산되었다.[21]
1989년 가석방된 정종욱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30] 그는 정일권이 정인숙의 집에 자주 찾아왔고, 정성일의 이름도 직접 지어줬다고 말했다.[31]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30] 2000년대 이후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성일의 생부가 정일권이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34]
1991년 11월 미국에서 정성일과 정일권이 대화한 내용이 정성일의 책에 묘사되어 있다.[35] 그러나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한 정성일은 정일권이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다며 박정희의 아들일 가능성을 시사했다.[35] 정성일의 친아버지 논란에 대해 정일권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이어졌다.[34] 정일권의 측근들은 정일권이 정성일 측에 금전적 지원을 했다고 증언했다.[34]
4. 2. 박정희 설과 권력 암투
1970년 5월 열린 임시국회는 정인숙 피살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정부 발언을 통해 이 사건 관련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22] 이호 법무장관은 사건을 자진 보고했는데, 이는 자신의 발언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의도였다.[22]그러나 유진산 신민당 총재는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부의 대처 방식을 비꼬았다.[22] 그는 "느닷없이 웬 강변3로 여자 살인 사건이란 말이야", "무슨 놈의 오빠가 여동생의 난륜(亂倫)을 분개해 가지고 권총을 쏘았다고"라며 상세한 보고에 의문을 제기했다.[23]
유진산을 시작으로 조윤형, 김상현 등 야당 의원들은 정인숙 피살 사건 관련 소문을 제기하며 의혹을 추궁했다. 조윤형 의원은 5월 15일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공개하고,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25] 김상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인숙의 관계 가능성을 언급하며, 계획된 타살 및 청부 살인 의혹을 제기했다.[28] 김상현의 발언으로 본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야당 의원들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밝혀지지 않았다.[26]
1991년 6월 5일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으나, 외삼촌의 권유로 취하했다.[21] 1993년 다시 소송을 제기했으나, 정일권의 사망으로 무효화되었다. 정성일은 정일권이 어머니와 교제해 자신을 낳았다고 주장했다.[21]
정종욱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말하며, 정일권이 정인숙의 집에 자주 찾아왔고 '성일'이라는 이름도 직접 지어줬다고 증언했다.[30][31] 박정희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32][30] 그러나 선우휘와 같은 해인 1971년에 정일권을 만난 재미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서 "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33]
2000년대 이후 정성일의 생부가 정일권이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2007년 언론 취재 결과, 주변 관계자들은 정성일의 친아버지가 정일권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일권이 정성일 측에 금전적 도움을 줬다고 증언했다.[34] 정인숙의 살해범은 넷째 오빠일 가능성이 높다는 진술도 나왔다.[34]
정성일은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책에서 1991년 11월 정일권과의 대화를 묘사하며, 정일권이 "나는 지금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35] 그러나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한 정성일은 정일권이 자신에게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며 박정희의 아들일 가능성을 시사했다.[35]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정성일이 박정희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35] 그는 정일권이 아닌 박정희가 정인숙 살해의 배후라고 주장했다.[30]
4. 3. 기타 인물 설
사건의 파장은 국회에까지 이르렀다. 1970년 5월 열린 임시국회는 정인숙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정부 발언을 통해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22] 1970년 5월 12일 열린 첫 본회의에서 이호 법무장관은 정인숙 사건을 자세하고 비중 있게 보고했다. 그러나 유진산 당시 신민당 총재는 5월 13일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처 방식을 비꼬았다.[22]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은 유진산과 일부 야당 인사들에게 정인숙 사건을 쟁점화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유진산은 이를 쟁점화했고 다른 야당 인사들도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사건을 쟁점화시켰다.[24]
조윤형, 김상현 등의 야당 의원들은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소문을 전달하고 그 의혹을 추궁했다. 조윤형 의원은 5월 15일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본회의장에서 공개했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수사에서 불거진 의혹을 밝히라고 요구했다.[25] 김상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인숙이 관계했을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26]
김상현의 발언은 즉각 본회의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밝혀지지 않았다.[26]
1991년 6월 5일,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1993년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친자 확인 소송을 냈으나, 소송 진행 중 정일권의 사망으로 무효화되었다.[21]
1989년 가석방된 정종욱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말한다.[30]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일권 씨가 1971년 봄, 형님인 선우휘 씨를 찾아와 '... (중략) ...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32]"고 말했다.[30] 그러나 선우휘와 같은 해인 1971년에 정일권을 만난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서 "나는 정인숙과 딱 한 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33]
2000년대 이후 정성일의 생부가 정일권이라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2007년 초 언론의 취재 결과, 당시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숨겨진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정성일의 친아버지 논란 역시 정일권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이어졌다.[34]
1971년 정일권을 만난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서 "나는 정인숙과 딱 한 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33] 그러나 정일권이 불임 수술을 한 상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77년 재혼한 부인 사이에 2남매가 출생했기 때문이다. 문명자는 이 글에서 정일권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일권이 먼저 불임 수술을 풀었다고 말해 그만두었다고 밝히고 있다.[36]
1988년 국회의원 박근혜는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정성일의 생부가 박정희는 아니라고 밝혔다.[37]
5. 영화배우 시절 단역 출연작
정인숙은 1962년 대학을 중퇴한 후 영화배우를 꿈꾸며 충무로 영화가를 전전하다 단역 광고 모델로 활동하면서 영화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2] 1965년 은퇴할 때까지 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2]
- 1963년 《대지의 지배자》 ... 모델 활동 중 영화배우 데뷔작.
- 1964년 《쌔드 무비》 ... 2번째 영화 출연작.
- 1965년 《첫사랑》 ... 모델 겸 영화배우 은퇴작.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정도환 | 전직 공무원, 미군정 시대 말기 경상북도 대구부 부부윤(지금의 대구광역시 부시장) 역임 |
어머니 | 전덕조 | |
오빠 | 정종진 | |
오빠 | 정종구 | |
오빠 | 정종욱 | 1936년 출생, 정인숙 살해 혐의로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 후 1989년 가석방[5] |
자매 | 정옥지 | 요절 |
내연 | 진항범 | 별세, 영화 제작자 겸 투자가, 자녀 없음 |
내연 | 장사공 | 1933년 4월 14일 출생, 별세, 전직 영화 시나리오 작가, 자녀 없음 |
내연 | 정일권 | 아들 정성일의 생부로 유력 (박정희, 박종규, 이후락 등이라는 주장도 있음) |
아들 | 정성일 | 기업인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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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1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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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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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6>정인숙 사건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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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정인숙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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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뉴스
"[제584호]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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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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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숙 미스테리···최대 권력 섹스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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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숙 피살 사건 미스터리 의혹 ‘누가 정인숙을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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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정종욱 씨가 밝힌 '정인숙 사건'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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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이는 내 아들, 정일권씨 71년 고백"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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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추적] 정인숙과 그아들, 진실은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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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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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회고록: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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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김형욱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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