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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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통제는 1435년 선덕제의 뒤를 이어 9세의 나이로 명나라 황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태황태후와 유능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환관 왕진의 전횡으로 국정이 혼란에 빠졌다. 1449년 토목의 변으로 포로가 되었으나, 동생 경태제가 즉위하여 복위의 기회를 얻었고, 이후 탈문의 변을 통해 복위하여 천순제로서 통치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불안을 겪었으며, 1464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통제는 환관의 전횡, 부정부패, 농민 봉기 등으로 명나라의 쇠퇴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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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제의 황자 - 경태제
경태제는 명나라 황제로, 1449년 정통제가 포로로 잡힌 후 즉위하여 북경을 방어하고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정통제의 복위로 폐위된 인물이다. - 15세기 중국의 군주 - 건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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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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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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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주기진(朱祁鎭) |
묘호 | 영종(英宗) |
시호 |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헌무지덕광효예황제(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 |
존호 | 예제(睿帝) |
생몰 | 1427년 11월 29일 ~ 1464년 2월 23일 |
능묘 | 유릉(裕陵), 명나라 황릉 내 위치, 베이징 |
재위 정보 | |
제6대 황제 (첫 번째 재위) | 1435년 2월 7일 ~ 1449년 9월 22일 |
연호 (첫 번째 재위) | 정통(正統) |
섭정 | 장태황태후(1435년 ~ 1442년),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포(楊溥), 장보(張輔) (1435년 ~ 1442년) |
태상황 | 1449년 9월 22일 ~ 1457년 2월 11일 |
제8대 황제 (복위) | 1457년 2월 11일 ~ 1464년 2월 23일 |
연호 (두 번째 재위) | 천순(天順) |
황태자 (추존) | 1428년 ~ 1435년 |
가계 | |
아버지 | 선덕제 |
어머니 | 효공장황후 |
배우자 | 효장예황후 전씨 (1442년 ~ 1464년) 효숙황후 주씨 (1464년) |
자녀 | 성화제 기간왕 주기준 |
기타 정보 | |
영어 명칭 | Emperor Yingzong of Ming |
중국어 간체 | 明英宗 |
로마자 표기 (병음) | Míng Yīngzōng |
로마자 표기 (웨이드-자일스) | Ming2 Ying1-tsung1 |
별칭 | 정통제(正统帝), 천순제(天順帝) |
중국어 간체 (별칭 - 정통제) | 正统帝 |
중국어 번체 (별칭 - 정통제) | 正統帝 |
로마자 표기 (병음, 정통제) | Zhèngtǒng Dì |
로마자 표기 (웨이드-자일스, 정통제) | Chêng4-tʻung3 Ti4 |
중국어 간체 (별칭 - 천순제) | 天顺帝 |
중국어 번체 (별칭 - 천순제) | 天順帝 |
로마자 표기 (병음, 천순제) | Tiānshùn Dì |
로마자 표기 (웨이드-자일스, 천순제) | Tʻien1-shun4 Ti4 |
2. 즉위 과정과 초기 통치
정통제 주기진은 1427년 11월 29일, 선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손씨였다. 1428년 2월 20일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3월 선덕제는 손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1435년 선덕제가 죽자, 9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5]
정통제의 즉위는 선덕제의 장남이자 공식적으로 책봉된 태자였기에 법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홍무제가 세운 법률은 장관들의 조언을 받기는 하지만 강력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가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이러한 체제는 어린 군주가 통치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규정이나 선례가 없었다.
어린 정통제를 대신하여 초기에는 황제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성효소황후)가 섭정을 하고, 양사기, 양영, 양부 등 이른바 '삼양(三楊)'으로 대표되는 유능한 관료들이 보좌하여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했다.[6] 장태황태후는 삼양과 환관들의 수장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태황태후와 삼양이 사망하거나 은퇴하면서, 환관 왕진(王振)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아 국정을 농단하였다.[6] 왕진은 명태조 주원장이 환관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기 위해 궁문에 세워놓은 철패를 파괴하는 등,[7][8] 명나라 환관 정치의 폐단을 심화시킨 인물로 비판받는다.
2. 1. 환관 왕진의 전횡
왕진은 내시 양성기관인 내서당 출신으로, 학식이 뛰어나 정통제의 황태자 시절 교육을 담당했었다. 정통제 즉위 후에는 사례감의 우두머리 태감이 되었다.[9] 왕진은 정통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문서를 조작하는 등 전횡을 행하고 국정을 농단했다. 이는 이후 명나라가 환관의 전횡과 폐단으로 여러 차례 파국을 맞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3. 토목의 변 (1449년)
1449년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Oirāt)가 세력을 형성하고 무역 확장을 위해 명나라와 교섭하였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자, 오이라트족의 족장 에센은 명나라 변방을 침입하였다. 이에 환관 왕진(王振)은 정통제에게 친정(親征)을 권했으나, 이부상서와 병부상서는 이를 만류했다. 하지만 정통제는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그러나 이 군대는 문신(文臣), 귀족(貴族) 등 전쟁과 무관한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실제 전투력은 약했다.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는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하였고, 왕진은 전횡을 일삼다 피살당했다. 이 패전 소식은 북경(北京)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남경(南京) 천도설이 나왔지만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宋, 960년 ~ 1279년)의 예를 못 보았느냐"라며 북경 사수를 주장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결국 에센군은 토목보를 포위하여 정통제를 포로로 잡았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외적에게 포로로 잡힌 것은 정통제가 처음이었다.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한다.[10]
3. 1. 오이라트와의 관계
1449년,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는 무역 확장을 위해 명나라와 교섭하였으나 결렬되자 명나라 변방을 침입했다. 오이라트족의 족장 에센은 명군의 수급로를 차단하고 연승하며, 토목보를 포위하여 정통제를 포로로 잡았다.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한다.[10]몽골은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서쪽의 오이라트가 몽골을 장악하게 되었다. 1440년 지도자 토곤이 죽자 그의 아들 에센이 몽골의 지배자가 되었다. 에센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중요한 도시 하미를 공격하여 1448년에 정복했다. 동쪽으로는 그의 영향력이 한국 국경까지 미쳤다.
몽골은 주로 중국과의 자유무역에 관심이 있었으나, 명나라 당국은 몽골과의 무역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제한했다. 에센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명나라 당국은 점점 더 적대적이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1449년 몽골은 필요한 물품의 5분의 1만 받았고, 이로 인해 그들은 무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에센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황실 공주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에센은 포로로 잡은 정통제가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1450년에 명나라 조정에 조건 없이 송환했다.[11] 정통제는 태상황이 되었으나 궁에 유폐되었다. 한편, 명나라는 몽골 문화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몽골 의복 착용과 베이징에서 몽골어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4. 경태제의 즉위와 정통제의 유폐
토목의 변 이후 황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남경으로 천도하는 것 또한 검토되었다. 그러나 우첨의 반대로 북경에 남기로 결정되었다. 정통제의 동생인 주기옥이 경태제로 즉위하였다.[4] 우첨은 석형 등과 협력하여 병력을 북경과 그 주변 지역에 집중시켜 군비를 강화하고, 재난을 불러온 환관 왕진 세력을 숙청하여 사기를 높였으며, 오이라트의 공격으로부터 북경을 방어했다. 경태 원년(1450년)에 양측 간에 강화가 성립되었고, 정통제는 명나라로 송환되어 태상황이 되었다.[4]
경태 정권은 실패한 통치자로 여겨진 전임 통치자를 폄하하려 했다. 국경 방어 사령관들은 정통제와 소통하지 않도록 지시받았다. 예센은 정통제의 석방을 확보하려고 시도했고, 그의 귀환을 협상하기 위해 두 차례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3] 그러나 정통제는 1450년 9월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12개월 반 동안의 포로 생활 동안, 그는 오이라트에게 공정하게 대우받았고 그들의 친구로서 중국으로 돌아왔다.[3]
1450년 9월 19일, 정통제는 북경에 도착했다. 신료들은 그를 맞이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가마와 두 마리의 말을 가지고 그를 만나러 두세 명만 보내졌다. 경태제는 궁궐의 측문에서 그를 만났고, 정통제는 모든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금성 남동쪽의 남궁에 배정되었고, 그곳에서 앞으로 6년 반 동안 사실상 죄수로 지냈다.[3]
5. 탈문의 변 (1457년)과 복위
1457년 2월 11일 밤, 남궁에 갇혀 있던 전 황제 정통제에게 한 무리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그가 다시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즉위식장으로 데려갔다. 이 쿠데타는 환관 장군 조길상과 장군 석형, 장월, 그리고 전략가 서유정이 이끄는 소규모 집단이 주도했다. 남궁 침입에는 주로 몽골인으로 구성된 400명의 병력이 투입되었고, 나중에 2,800명이 추가로 합류하여 절반은 황제를 호위하고 나머지 절반은 베이징의 주요 거점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도문(奪門)'—"궁궐 문을 강제로 열다"—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복위(復位)'—"왕위 복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정통제는 천순제라는 이름으로 복위에 성공했다.
경태제는 이 정변으로 폐위되었으며, 폐위된 지 한 달 후에 급사했다.[1] 경태제는 실패한 통치자로 여겨졌고, 정통제 복귀 이후 그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영종은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사실상 유폐 상태에 놓였다가, 1457년 경태제가 병상에 눕자 서유정, 석형, 조길상 등의 정변으로 복위했다. 우겸 등 중신들은 살해되었고, 경태제 또한 같은 해 사망했다.[1]
5. 1. 복위 이후의 통치
정통제는 복위 후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중용했지만, 이들은 곧 권력을 남용하고 부패를 일삼았다. 특히 석형과 조길상은 "조석(曹石)"이라 불리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1] 정통제는 이현 등 청렴한 관리를 등용하여 국정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으나,[2] 남북 지역 출신 관리들 간의 갈등,[3] 환관 세력의 재등장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건문제의 아들 주문규를 석방하고,[4] 황제 사후 궁녀들의 순장 제도를 폐지하는 등[4] 인도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탈문의 변을 성공시킨 석형(石亨)과 조길상(曹吉祥) 일파는 그 후 공을 빙자하여 난폭하게 행동하여 “조석(曹石)”이라 불리며 혐오받았다.[1] 후에 마찬가지로 쿠데타를 주모했던 서유정(徐有貞)과 사이가 틀어지고, 서유정파의 참언으로 인해, 천순 3년(1459년)에 석형을 친족의 죄에 연좌시키는 형태로 실각시켰고, 죄를 인정하지 않은 석형을 이듬해 구금 중 고문으로 살해했다. 조길상의 조카인 조흠(曹欽)이 천순 5년(1461년)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조흠은 자살했으며 조길상 또한 사형당했다.[1]
조의 반란 진압 후, 정부는 평온을 되찾았다. 이현이 팽시(彭時)의 지원을 받아 내각사를 맡았고, 인사부상서(吏部尙書) 왕온(王翱)은 외조(外朝)를 감독하며 관리들의 자질을 확보했다.[5] 이후 몇 년 동안 정부는 안정을 유지했고, 대신들과 내각사들은 죽거나 은퇴할 때까지 그 직책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남북 지역 출신들 사이에는 빈번한 갈등이 있었다. 1449년까지 북방 출신들이 우대받았는데, 이는 왕진의 북방 편향적 영향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1449년부터 1457년까지 경태제 재위 기간 동안 많은 남방 출신들이 출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복위 후 남방 출신들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사실 경태제는 북방 세력을 지지하고 임명에서 북방 출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저명한 내각사인 하남(河南) 출신의 이현의 조언에 크게 의존했다.[3]
두 번째 통치 기간 동안 정통제는 정부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 매일 국정과 서류 처리에 임했다. 그는 자비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결과 황제 사후 빈궁(嬪宮)의 자살 관행을 폐지했다. 1457년에는 1402년 그의 아버지가 폐위된 이후 난징(南京)에 투옥되었던 건문제(재위 1398~1402)의 아들 주문규를 석방해 주기도 했다.[3]
정통제는 짧은 병환 끝에 1464년 2월 23일에 사망했다.[6] 그는 그의 장남인 주견심에게 뒤를 이었고, 그는 성화제가 되었다. 정통제와 주견심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통치 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이현을 중심으로 한 내각사들이 그에게 장남의 계승을 유지하도록 설득한 후에야 그는 승인했다.[7]
6. 경제 정책
정통제 시기 명나라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430년대 중반부터 북반구의 한랭 기후로 인해 흉작과 기근이 발생했고, 홍수, 가뭄,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도 잇따랐다. 정부는 세금 감면 등의 정책을 통해 백성들을 지원하려 했으나, 강제 노역 제도 등으로 인해 민심의 불만이 커졌다. 명나라는 은(銀)을 주요 통화로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보초(지폐)의 실패를 인정한 것이었다. 화폐(동전) 주조는 중단되었고, 은광 채굴은 제한되었다.
6. 1. 경제적 혼란과 사회 불안
1436년 은본위세(銀本位稅) 시행으로 은 수요가 늘자, 명나라 정부는 2년 후 저장성과 복건성 접경 지역의 은광을 폐쇄하고 소규모 은 채굴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인구 밀도가 높고 일자리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는 불법 은 채굴이 계속되었다.[11] 1447년, 저장성과 복건성 사이 산악 지대의 광부 집단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추종자들을 모아 군대를 형성했다.[12]복건성 내륙에서는 등모칠과 등모팔 두 형제가 소작농 착취에 반대했다.[13] 소작농들은 스스로 지주들에게 임대차 계약 범위를 넘어선 지불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13] 1448년 3월, 등씨 형제는 반란을 일으켜 한 현씩 정복하기 시작했다.[14] 명나라 정부는 미납 세금을 탕감하고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3년간 노역 면제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반란군의 강경파는 물러서지 않았다.[14] 현지 민병대는 상황을 처리할 수 없었고, 정부는 1448년 9월 5만 명의 군대를 동남쪽으로 파병했다.
1448년 말, 복건성과 강소성 접경 지역에서 반란 광부들은 정부군에 패했다. 등씨 형제는 1449년 2월에 체포되었고, 그들의 후계자들은 같은 해 5월에 패배했다. 일본 역사가 다나카 마사요시에 따르면, 등씨 형제의 봉기는 마을 내 계급 관계에 도전하는 최초의 중국 농민 봉기였다. 광부들의 반란은 1449년 8월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고, 남은 복건성 반란군들은 1452년까지 해산되었다.
7. 남방 원정과 반란 진압
1436년 은본위세(銀本位稅) 시행으로 은 수요가 늘어나자, 명나라 정부는 2년 후 저장성과 복건성 접경 지역의 은광을 폐쇄하고 소규모 은 채굴을 금지했다. 그러나 인구 밀도가 높고 일자리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불법 은 채굴이 계속되었다.[1] 1447년 저장성과 복건성 사이 산악 지대의 광부 집단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추종자들을 모아 군대를 형성했다.[2]
복건성 내륙에서는 등모칠과 등모팔 형제가 소작농 착취에 반대하며,[3] 소작농들 스스로 지주들에게 임대차 계약 범위를 넘어선 지불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3] 1448년 3월,[2] 등씨 형제는 반란을 일으켜 한 현씩 정복하기 시작했다.[4] 명나라 정부는 미납 세금을 탕감하고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3년간의 노역 면제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반란군의 강경파는 물러서지 않았다.[4] 현지 민병대는 상황을 처리할 수 없었고, 1448년 9월 명나라는 5만 명의 군대를 동남쪽으로 파병했다.[5]
1448년 말, 복건성과 강소성 접경 지역에서 반란 광부들은 정부군에 패했다. 등씨 형제는 1449년 2월에 체포되었고, 그들의 후계자들은 같은 해 5월에 패배했다. 일본 역사가 다나카 마사요시는 등씨 형제의 봉기가 마을 내 계급 관계에 도전하는 최초의 중국 농민 봉기라고 평가했다.[6] 광부들의 반란은 1449년 8월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고,[7] 남은 복건성 반란군들은 1452년까지 해산되었다.[7]
정통제는 동남부와 남서부에서의 성공으로 명나라 군대의 강력함과 자신의 군대 지휘 능력을 과대평가했을 수 있다.[8][9]
8. 외교 관계
1430년대 중반부터 북반구에 60년간 혹한기가 시작되면서 잦은 홍수와 가뭄으로 흉작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했다.[1]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1430년대 후반과 1440년대에 걸쳐 홍수, 가뭄, 전염병,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2] 1448년에는 황하 제방이 무너져 장쑤성 북부 지역이 물에 잠겼고, 이듬해 또 다른 제방 붕괴로 황하 물길 일부가 회하로 흘러들어 장쑤성 남부 해안까지 이르렀다.[7] 이러한 홍수는 1450년대까지 이어졌고, 황하의 물길 변화는 베이징의 수자원 공급에 큰 위협이 되었다.[7]
명나라 정부는 세금 감면 등을 통해 피해를 입은 백성을 지원하려 노력했지만, 강제 노역 등으로 인해 백성의 불만은 계속 커져갔다.[2] 이로 인해 장인들은 국가의 요구를 회피하고 농민들은 땅을 버리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특정 지역에서는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도적과 부랑자가 늘어났다.[8]
1440년대 초부터 1460년대 중반까지 명나라의 경제 침체는 도자기 생산, 특히 수출용 도자기 생산 감소로 이어졌다.[3] 1439년 황제는 청화백자의 사적 판매를 금지했지만, 생산 증가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1448년 1월에는 금지령이 강화되어 징더전으로 유명한 라오저우(饒州) 지역에서 청백색 이외의 다른 색상 도자기 생산을 사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4]
"삼양(三楊)"은 경제 문제에 대응하여 국가 예산을 삭감했다. 이는 남서부 분쟁으로 인한 광산업 쇠퇴와 맞물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 결과, 해외 원정을 취소하고 공식적인 해외 무역을 제한했다.[5] 이러한 긴축 조치는 해양 원정에 관여하고 은광에도 이해관계가 있던 황궁 내시들의 경제적 영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5][6]
당시 몽골은 우량카이, 동몽골(타타르족), 오이라트의 세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9] 1434년 동몽골 지도자 아르구타이가 오이라트에게 패배하면서 오이라트가 몽골을 장악하게 되었고,[10] 지도자 토곤은 자신의 딸을 동몽골 칸 토그토아 부카와 결혼시켜 권력을 공고히 했다.[10] 1440년 토곤이 죽자 그의 아들 에센이 몽골의 지배자가 되었다.[10] 에센은 1443년과 1445년에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중요한 도시이자 중국 국경 근처에 위치한 하미를 공격했고, 1448년에 하미를 정복했다. 그는 서쪽 감숙에 있는 명나라 군대의 몽골 부대 지원을 얻으려 했고, 동쪽으로는 그의 영향력이 조선 국경까지 미쳤다.[9]
몽골은 주로 중국과의 자유무역, 특히 말을 차와 비단 같은 사치품과 교환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10] 명나라 정부는 몽골과의 국경 무역 대신, 칭하이와 감숙에서 차와 말을 교환하는 데 집중했다.[11] 명나라는 몽골과의 무역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제한했으며, 왕진은 국경 도시 환관-수탁자 네트워크를 통해 수익성 있는 무역을 감독했다.[11]
에센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물자 필요성도 증가했고, 이는 중국인들의 몽골인 유입에 대한 항의로 이어졌다.[12] 1440년대 후반까지 매년 최대 2천 명의 몽골인이 주요 무역 중심지인 대동에 도착했고, 이는 안보 위협이 되었다.[10] 명나라 당국은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했고,[12] 1449년 몽골은 필요한 물품의 5분의 1만 받자 결국 무력을 사용했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에센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황실 공주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12]
8. 1. 조선과의 관계
정통제 시기 명나라는 1430년대 중반부터 60년간 이어진 혹한기로 인해 흉작, 기근, 전염병과 같은 심각한 자연재해를 겪었다.[1] 이러한 상황은 명나라 경제를 침체시켰고, 특히 수출용 도자기 생산량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다.[3] 명나라는 국가 독점을 강화하기 위해 청화백자의 사적인 판매를 금지했으나, 오히려 징더전으로 유명한 라오저우 지역에서는 다른 색깔의 도자기 생산까지 금지하는 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4]명나라 내부의 혼란은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삼양(三楊)'은 국가 예산을 줄이면서 해외 원정을 취소하고 공식적인 대외 무역을 제한했다.[5] 이는 해양 원정과 은광 채굴에 깊이 관여했던 황궁 내시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5][6]
당시 몽골은 오이라트 부족의 지도자 에센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에센은 명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얻고자 했다.[10] 그러나 명나라는 몽골과의 무역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제한하여 몽골의 불만을 샀다.[11] 1449년, 몽골은 요구했던 물품의 5분의 1밖에 받지 못하자 결국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토목의 변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2]
이처럼 명나라의 대외 정책 변화와 몽골과의 갈등은 조선의 외교 정책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에센의 영향력이 조선 국경까지 미쳤다는 기록은[9] 당시 조선이 처한 긴박한 국제 정세를 보여준다.
8. 2.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화폐 주조 중단은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본은 중국산 화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전국 시대(戦国時代)를 야기한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9. 평가
정통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황제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안정적으로 통치했지만, 성장 후 환관 왕진의 전횡과 실정으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토목의 변으로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사건은 그의 통치에 큰 오점을 남겼다.[1]
토목의 변 이후, 동생 경태제가 즉위하면서 정통제는 태상황으로 물러나 유폐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변으로 복위에 성공한 후에는 일부 긍정적인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건문제의 아들 주문규를 석방하고, 순장 제도를 금지한 것이 대표적이다.[1]
하지만 정통제는 아첨하는 간신을 중용하고 유능한 인재를 억울하게 처형하는 등 실정을 반복했다. 이 때문에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로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1] 토목의 변에서 공을 세운 우겸을 처형한 것은 큰 과오로 지적된다.[1]
결과적으로 정통제 시기는 명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이 심화된 시기였으며, 이는 명나라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권력 견제와 민생 안정에 실패한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10. 가족 관계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비고 |
---|---|---|---|---|---|
황후(皇后) | 효장예황후(孝莊睿皇后) | 전씨(錢氏) | 1442년 ~ 1449년, 1457년 ~ 1464년 | 1426년 ~ 1468년 | [12] |
귀비(貴妃) | 효숙황후(孝肅皇后) | 주씨(周氏) | (추존) | 1430년 ~ 1504년 | [13] [14]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신비(宸妃) | 장정안목신비(靖莊安穆宸妃) | 만씨(萬氏) | 1432년 ~ 1468년 | |
혜비(惠妃) | 단정안화혜비(端靖安和惠妃) | 왕씨(王氏) | 1429년 ~ 1485년 | |
숙비(淑妃) | 장정안영숙비(莊靜安榮淑妃) | 고씨(高氏) | 1429년 ~ 1511년 | |
덕비(德妃) | 공단장혜덕비(恭端莊惠德妃) | 위씨(魏氏) | 1426년 ~ 1469년 | |
순비(順妃) | 공화안정순비(恭和安靜順妃) | 번씨(樊氏) | 1414년 ~ 1470년 | |
안비(安妃) | 장희단숙안비(莊僖端肅安妃) | 양씨(楊氏) | 1414년 ~ 1487년 | |
현비(賢妃) | 소숙정단혜비(昭肅靖端賢妃) | 왕씨(王氏) | 1430년 ~ 1474년 | |
경비(敬妃) | 정순의공경비(貞順懿恭敬妃) | 유씨(劉氏) | ? ~ 1463년 | |
여비(麗妃) | 안화영정여비(安和榮靖麗妃) | 유씨(劉氏) | 1426년 ~ 1512년 | |
소비(昭妃) | 단장소비(端莊昭妃) | 무씨(武氏) | 1431년 ~ 1467년 | |
화비(和妃) | 공안화비(恭安和妃) | 궁씨(宮氏) | 1430년 ~ 1467년 | |
공비(恭妃) | 소정공비(昭靜恭妃) | 유씨(劉氏) | ? ~ 1500년 | |
현비(賢妃) | 소의현비(昭懿賢妃) | 이씨(李氏) | ||
장비(莊妃) | 공정장비(恭靖莊妃) | 조씨(趙氏) | 1446년 ~ 1514년 | |
성비(成妃) | 공희성비(恭僖成妃) | 장씨(張氏) | ? ~ 1504년 | |
충비(充妃) | 희각충비(僖恪充妃) | 여씨(余氏) | ||
여비(麗妃) | 혜화여비(惠和麗妃) | 진씨(陳氏) | ? ~ 1500년 | |
정비(貞妃) | 영정정비(榮靖貞妃) | 왕씨(王氏) | 1427년 ~ 1507년 |
정통제는 효장예황후 전씨, 효숙황후 주씨 등 여러 황후와 후궁을 두었으며, 성화제 주견심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황후 전씨는 정통제가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나 유폐되었을 때 곁을 지킨 인물로, 정통제는 그녀에게 깊이 감사했다.[12]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
장남 | 황태자(皇太子) | 주견심(朱見深) | 1447년 ~ 1487년 | 효숙황후 주씨 | 제8대 황제 성화제(成化帝). | |
차남 | 덕왕(德王) | 장(莊) | 주견린(朱見潾) | 1448년 ~ 1517년 | 장정안목신비 만씨 | |
3남 | 주견식(朱見湜) | 1449년 ~ 1451년 | 장정안목신비 만씨 | 요절 | ||
4남 | 허왕(許王) | 도(悼) | 주견순(朱見淳) | 1450년 ~ 1453년 | 단정안화혜비 왕씨 | 요절 |
5남 | 수왕(秀王) | 회(懷) | 주견주(朱見澍) | 1452년 ~ 1472년 | 장정안영숙비 고씨 | |
6남 | 숭왕(崇王) | 간(簡) | 주견택(朱見澤) | 1455년 ~ 1505년 | 효숙황후 주씨 | |
7남 | 길왕(吉王) | 간(簡) | 주견준(朱見浚) | 1456년 ~ 1527년 | 장정안목신비 만씨 | |
8남 | 흔왕(忻王) | 목(穆) | 주견치(朱見治) | 1458년 ~ 1472년 | 장정안목신비 만씨 | 조졸 |
9남 | 휘왕(徽王) | 장(莊) | 주견패(朱見沛) | 1462년 ~ 1505년 | 공단장혜덕비 위씨 |
참조
[1]
서적
Fighting Techniques of the Oriental World AD 1200–1860: Equipment, Combat Skills And Tactics, Christer Jørgensen
Amber Books
2008
[2]
학술지
http://www.cnki.com.[...]
2018-11-19
[3]
서적
China: A Short Cultural History
The Cresset Press
[4]
서적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5]
서적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6]
서적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7]
서적
환관과 궁녀
김영사
[8]
서적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9]
서적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10]
서적
역주 몽골 황금사
[11]
서적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12]
문서
자의황태후(慈懿皇太后)
[13]
문서
성자황태후(聖慈皇太后)/성자태황태후(聖慈太皇太后)/효숙예황후(孝肅睿皇后)
[14]
문서
사후 황후로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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