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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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화옹주는 조선 선조와 온빈 한씨의 딸로, 1604년에 태어났다. 벙어리였고 지각이 늦어 혼기가 늦어졌으나, 인조 때 부마 간택을 거쳐 1630년 권대항에게 하가했다. 1666년 남편과 사별하고, 이듬해 64세로 사망했으며, 자녀가 없어 조카 권덕휘를 후사로 삼았다. 권대항과 함께 양주 오등관곡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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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옹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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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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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조선 선조의 옹주 |
가족 관계 | |
부친 | 선조 |
모친 | 온빈 한씨 |
배우자 | 동창위(東昌尉) 권대항 |
자녀 | 양자 ----권덕휘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604년 2월 22일 (음력) |
사망일 | 1667년 9월 24일 (음력) |
2. 생애
1604년(선조 37년) 선조와 온빈 한씨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릴 적부터 벙어리였고 지각이 없어 혼인이 늦어졌다.[2] 1629년(인조 7년) 인조의 명으로 1630년(인조 8년) 동지중추부사 권익중의 아들 권대항과 혼인하였다.[3] 권대항은 정화옹주의 이복언니 정선옹주의 남편 권대임의 재종동생이었다.[4]
1666년(현종 7년) 남편과 사별하고, 이듬해인 1667년(현종 8년) 64세로 사망하였다. 자식이 없어 조카 권덕휘를 후사로 삼았으며, 남편과 합장되었다.[5]
2. 1. 출생과 혼인
1604년(선조 37년) 2월 22일, 선조와 온빈 한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벙어리였고 지각이 없어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하였다.1629년(인조 7년) 인조가 "왕녀로서 배필이 없을 수 없다"하여 예조에 정화옹주의 부마를 간택하도록 했다.[2]
1630년(인조 8년), 동지중추부사 권익중의 아들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에게 하가하였다.[3] 권대항은 이복언니 정선옹주의 남편 권대임의 재종동생이었다.[4]
1666년(효종 7년) 남편 권대항과 사별하였다. 정화옹주 또한 다음해인 1667년(효종 8년) 9월 24일, 향년 64세에 졸하였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 조카 한산군수 권덕휘(權德徽)를 후사로 삼았다. 양주(楊州) 오등관곡(於登寬谷)의 언덕에 권대항과 합장되었다.[5]
2. 2. 혼인 이후
1630년(인조 8년), 동지중추부사 권익중의 아들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과 혼인하였다.[3] 권대항은 정화옹주의 이복언니 정선옹주의 남편 권대임의 재종동생이었다.[4]1666년(현종 7년) 남편 권대항과 사별하였다. 이듬해인 1667년(현종 8년) 9월 24일, 정화옹주는 향년 64세로 사망하였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 조카 한산군수 권덕휘(權德徽)를 후사로 삼았다. 정화옹주는 양주(楊州) 오등관곡(於登寬谷)의 언덕에 권대항과 합장되었다.[5]
3.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연려실기술 제12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2]
서적
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1629년 명 숭정(崇禎) 2년) 10월 2일(계축)
[3]
서적
승정원일기 인조 8년 경오(1630, 숭정3) 4월 18일
[4]
서적
청장관전서 제49권
[5]
문서
동창위(東昌尉) 권공(權公)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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