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가쓰라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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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가쓰라 내각은 1908년 7월 14일부터 1911년 8월 30일까지 1143일 동안 가쓰라 다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군부, 관료, 귀족원 출신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재정 건전화를 위한 긴축 정책, 미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한 고평-루트 협정 체결, 관세 자주권 회복, 대한제국 강제 병합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 운동 탄압, 무신 조서 발표, 남북조 정윤 문제 해결 등을, 국외적으로는 만주와 필리핀에서의 외교권 보장, 관세 자주권 회복 등을 추진했다. 러일 전쟁 이후의 국내외적 문제와 정우회와의 갈등, 대역 사건 등을 겪으며 1911년 8월 25일 총사퇴하고, 사이온지 내각으로 정권을 이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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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가 이끈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입헌정우회 총재를 겸임하며 행정 및 재정, 선거 제도 개혁을 추진했으나, 육군대신 사임으로 총사직하여 군부의 정치 개입 사례로 평가받고 다이쇼 정변의 배경이 되었다. - 1911년 일본 - 해달 및 물개류 보호 국제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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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가쓰라 내각 | |
---|---|
기본 정보 | |
![]() | |
내각 정보 | |
내각 명칭 | 제2차 가쓰라 내각 |
원어 명칭 | 第2次桂内閣 (다이니지 가쓰라 나이카쿠) |
대수 | 13대 |
성립 | 1908년 7월 14일 |
해산 | 1911년 8월 30일 |
국가 원수 | 메이지 |
총리 | 가쓰라 다로 |
이전 내각 | 제1차 사이온지 내각 |
후임 내각 | 제2차 사이온지 내각 |
여당 | 관료 내각 |
임기 | 1908년–1912년 |
주요 인물 | |
내각총리대신 | 가쓰라 다로 |
전직 | 육군대장, 군사참의관 |
기타 | |
관련 링크 | 내각 각료 명단 (일본 총리대신 관저) |
2. 재직 기간
1908년 (메이지 41년) 7월 14일부터 1911년 (메이지 44년) 8월 30일까지 재직하였다. 총 재직 일수는 1143일이다.
제2차 가쓰라 내각은 가쓰라 다로 총리대신을 중심으로 군부, 관료, 귀족원 출신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내각 발족 당시 국무대신 9명(총 10개 직위) 중 귀족원 출신이 4명으로 가장 많았고, 군부 출신이 3명(총리 포함 시 4개 직위), 관료 출신이 2명이었다.[1]
3. 내각 구성 및 인사
총리대신인 가쓰라 다로는 대장대신을 겸직하였고,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내각 초기 잠시 외무대신을 임시 겸직했다가 1908년 8월 27일 고무라 주타로에게 자리를 넘겼다.[2][3] 사이토 마코토 해군대신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신은 전임 내각에 이어 유임되었다. 사법대신 오카베 나가모토, 문부대신 고마쓰바라 에이타로, 체신대신 고토 신페이는 이번 내각에서 처음으로 입각하였다.[2]
내각은 1908년 7월 14일에 발족하여 1911년 8월 30일까지 총 1,143일간 존속했다.[2]
3. 1. 국무대신
1908년(메이지 41년) 7월 14일 임명[2]. 재직일수 1,143일 (제1차, 2차 통산 2,824일).
직명 | 대 | 성명 | 출신 등 | 특명 사항 등 | 비고 | |
---|---|---|---|---|---|---|
내각총리대신 | 13 | 가쓰라 다로 | -- | 육군대장 후작 | 대장대신 겸임 | |
외무대신 | 22 | 데라우치 마사타케 | ![]() | 육군 대장 자작 | 임시 겸임 (육군대신 겸임) | 1908년 8월 27일 면겸[3] |
23 | 고무라 주타로 | ![]() | 외무성 백작 | 1908년 8월 27일 임명[3] | ||
내무대신 | 22 | 히라타 도스케 | ![]() | 귀족원 무소속 (다화회) 자작 | ||
대장대신 | 13 | 가쓰라 다로 | -- | 육군 대장 후작 | 내각총리대신 겸임 | |
육군대신 | 7 | 데라우치 마사타케 | -- | 육군 대장 (자작→) 백작 | 외무대신 임시 겸임 | 유임 |
해군대신 | 6 | 사이토 마코토 | ![]() | 해군 중장 (해병6기) 남작 | 유임 | |
사법대신 | 15 | 오카베 나가모리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자작 | 첫 입각 | |
문부대신 | 21 | 고마쓰바라 에이타로 | -- | 귀족원 무소속 (다화회) | 첫 입각 | |
농상무대신 | 21 | 오우라 가네다케 | -- | 귀족원 무소속 (다화회) 자작 | ||
체신대신 | 18 | 고토 신페이 | -- | 내무성 남작 | 철도원 총재 | 첫 입각 |
colspan="7" | | ||||||
3. 2. 기타 직책
1908년(메이지 41년) 7월 14일 임명[4].
4. 주요 정책
러일 전쟁 이후 출범한 제2차 가쓰라 내각은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는 보신 조서를 반포하여 사회 기강을 다잡고,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으며 대역 사건(고토쿠 사건)을 처리하고 남북조 정윤 문제에 개입했다. 또한, 긴축 재정 정책을 펴고 지방 개량 운동을 통해 재정 건전화와 지방 통제 강화를 시도했다. 대외적으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일 병합)하였고, 불평등 조약 개정을 통해 관세자주권을 회복하여 국제적 지위 향상을 꾀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당시 일본 사회와 이후 역사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1. 국내 정책
러일 전쟁 이후의 재정 압박 속에서 출범한 제2차 가쓰라 내각은 긴축 재정을 통한 국가 재정 건전화와 사회 통제 강화를 주요 국내 정책으로 추진했다.'''건전 재정'''
러일 전쟁 등으로 인해 누적된 대외 채무를 해결하고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08년 8월 28일, 재정 정리 및 행정 정리 방침을 결정하고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1911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는 내각이 관료 증봉 30% 인상을 제안하면서 입헌정우회와 갈등을 빚었다. 정우회는 증봉안 삭감과 지세 1% 감면을 주장했으며, 결국 같은 해 2월 증봉 25% 인상과 지세 0.8% 감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사회 통제 강화'''
- '''보신 조서''': 1908년 10월 13일 칙유 형태로 발표되었다. 러일 전쟁 승리 이후 사회 기강을 다잡고 보수적 가치를 강조하며 풍기 단속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 '''사회주의 운동 탄압''': 보신 조서 발표와 함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다. 특히 1910년 5월 메이지 천황 암살 음모 혐의로 고토쿠 슈스이 등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 대거 검거된 대역 사건(고토쿠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1911년 1월, 고토쿠를 포함한 다수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면서 사회주의 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 '''출판물 단속''': 사회 통제의 일환으로 출판물에 대한 단속 역시 강화되었다.
'''지방 개량 운동'''
중앙 정부는 긴축 재정 기조 속에서 지방 개량 운동을 추진하여 피폐해진 지방의 재정을 재건하고, 동시에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남북조 정윤 문제'''
대역 사건을 계기로 남북조 시대의 정통성 문제가 정치적으로 부상했다. 정부는 추밀원에서의 논의를 거쳐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었다.
'''철도 광궤화 계획'''
내각은 조선 및 만주와의 철도 연결을 고려하여 일본 내 철도의 궤간을 표준궤(광궤)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철도 부설을 통한 지역 개발을 우선시했던 하라 타카시 등 입헌정우회 측의 반대로 계획은 무산되었고, 일본 국내 철도는 기존의 협궤로 계속 건설되었다.
4. 2. 대외 정책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국력 신장에 경계심을 품은 미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1908년 11월 30일에는 고무라-루트 협정(고평-루트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표면적으로 양국의 우호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만주에서의 일본의 특수 이익과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세력권 분할 합의의 성격을 띠었다.가쓰라 내각 시기 가장 중요한 대외 정책 중 하나는 1910년 8월 29일에 단행된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다. 이는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사건이다. 이 강제 병합은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핵심적인 단계였으며, 한국 민족에게는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한편, 1911년 7월 17일에는 서구 열강들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 개정에 성공하여 관세 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목표 중 하나였으며,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4. 3. 철도 정책
제2차 가쓰라 내각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및 영향권 아래에 있던 만주의 철도 규격(광궤)에 맞춰 일본 본토(내지)의 철도 선로 역시 광궤로 변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하라 타카시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우회는 철도 유치와 관련된 여러 사정을 이유로 이 계획에 반대했다. 결국 광궤화 계획은 무산되었고, 일본 내 철도는 기존의 협궤 규격을 유지한 채 노선 연장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되었다.5. 정권 운영 및 몰락
제2차 가쓰라 내각은 1908년 7월 12일 발족하였다. 제1차 내각 시기와 마찬가지로 의회 운영은 입헌정우회의 각외 협력에 의존했으며, 하라 다카시 전 내무대신이 가쓰라 총리와의 교섭 창구 역할을 하였다.
내각은 보신 조서를 통해 사회 풍기 단속을 명분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또한 대역 사건(고토쿠 사건)을 수사하고 남북조 정윤 문제에 개입하였으며, 출판물에 대한 단속도 이전보다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긴축 재정을 추진하는 한편, 지방 개량 운동을 전개하여 지방의 재정 건전성 확보와 생활 개선을 도모하였다. 외교 분야에서는 한일 병합을 추진하였고, 관세자주권 회복을 목표로 한 조약 개정을 통해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중의원 제2당의 지위에 있던 헌정 본당을 중심으로 정당 재편 움직임이 나타났다. 여러 중소 정당과 합당하여 1910년 3월 13일, 이누카이 쓰요시를 당수로 하는 입헌 국민당이 새롭게 결성되었다. 그러나 입헌정우회의 하라 다카시는 이들 신당과의 연계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에 따라 번벌 세력과 입헌정우회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나누어 갖는 기존의 정치 구도는 유지되었다.
1910년 5월 대역 사건이 발생하면서 내각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전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이 적기 사건에 대한 미흡한 대처를 이유로 총사퇴했던 전례가 있었기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번벌 세력은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대역 사건을 계기로 하라 다카시는 가쓰라 총리의 정계 은퇴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1911년 1월 26일, 쓰키지 세이요켄에서 열린 오찬회 자리에서 가쓰라 총리는 입헌정우회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이른바 ‘정의투합’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을 통해 가쓰라는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권을 이양할 의사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후 진행 중이던 조약 개정 교섭이 마무리되자, 1911년 8월 25일 내각은 총사직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원로회의는 소집되지 않았으며, 가쓰라 총리의 추천에 따라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대명 강하가 이루어져 8월 30일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성립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econd Katsura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08-07-14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08-08-27
[4]
간행물
『官報』第7515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08-07-15
[5]
문서
1911-05-05
[6]
간행물
『官報』第8359号「叙任及辞令」
19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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