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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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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이엔 시대는 러일 전쟁 시기부터 메이지 천황 서거까지 약 10년간 일본에서 가쓰라 다로와 사이온지 긴모치가 내각총리대신을 번갈아 역임하며 번벌과 입헌정우회가 교대로 정권을 담당한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양대 세력 간의 내각 윤번제와 유사했으며, 영일 동맹, 러일 전쟁 승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등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나, 노동 문제와 공해 문제도 발생했다. 게이엔 시대는 정치적 안정기를 거쳤지만, 군부와 정당 간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으며, 2차례의 중의원 임기 만료 선거가 치러지는 등 헌정 사상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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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엔 시대
개요
시대메이지 시대 말기 ~ 다이쇼 시대 초기
기간1901년 (메이지 34년) ~ 1913년 (다이쇼 2년)
정의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 번갈아 가며 총리대신을 맡았던 시대
배경
러일 전쟁 이후의 정국입헌정우회의 영향력 확대, 겐로의 존재감 약화
주요 인물
총리대신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관련 인물야마가타 아리토모 (겐로)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
이누카이 쓰요시
주요 사건
가쓰라 다로 내각러일 전쟁 후 처리
한일 병합
대역 사건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시베리아 출병 결정
징병령 일부 개정
재정 문제 심각화
다이쇼 정변가쓰라 다로의 복귀 시도
국민의 반발
내각 총사퇴
영향
정당 정치 발전입헌정우회의 성장
정당 내각 수립의 기반 마련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다이쇼 정변 이후 군부의 입김 강화
평가
긍정적 평가정당 정치 발전의 토대 마련
부정적 평가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

2. 역사적 배경

러일 전쟁 무렵부터 메이지 천황이 서거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가쓰라사이온지가 번갈아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번벌과 입헌정우회가 교대로 정권을 담당한 시기를 '게이엔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양대 세력 간의 내각 윤번제라고도 할 수 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야마모토 곤노효에, 히라타 도스케 등을 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게이엔 시대는 제1차 가쓰라 내각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며,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04년 12월부터 가쓰라와 사이온지 간의 제휴가 모색되었다.[3] 1906년 1월, 가쓰라는 사이온지를 후계 총리로 지명하고 퇴임하면서 게이엔 시대가 본격화되었다.[3] 1911년 1월, 가쓰라와 정우회의 하라 다카시 간의 '정의투합'을 통해 군부, 관료와 정우회가 암묵적으로 협력하는 정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게이엔 시대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로 평가되며, 이 기간 동안 실시된 제1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제1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모두 임기 만료 후에 치러졌다. 이는 일본 헌정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1912년 12월, 육군이 2개 사단 증설을 요구한 것에 대해 당시의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재정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거부하면서 제휴 관계가 끊어졌다. 육군과의 대립 속에 며칠 지나지 않아 사이온지 내각은 결국 총사퇴하였다.[6]

게이엔 시대는 영일 동맹러일 전쟁의 승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등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무쓰 무네미쓰, 고무라 주타로 등의 노력으로 불평등 조약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중공업 발전과 도시화가 진전된 시기였다. 한편으로 노동 문제나 공해 문제가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2. 1. 가쓰라 다로 내각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파벌에 속하며 군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가쓰라 다로의 내각은 야마가타 파벌 인물들로 구성되어 '야마가타 2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 가쓰라는 귀족원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정국을 운영하였다.[1]

가쓰라는 본래 정당 정치에 불신감을 품고 있었으나, 1910년(메이지 43년)에 발생한 대역 사건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제2차 가쓰라 내각정우회와의 협력 없이는 국내 정책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5] 가쓰라는 대역 사건 관련자들보다 정우회가 상대적으로 온건하다고 판단하여, 1911년(메이지 44년) 1월 26일 사이온지, 하라, 마쓰다 마사히사와 회담하여 타협을 이루었다.[5]

1911년(메이지 44년) 1월 29일, 가쓰라 수상은 정우회 의원들과의 모임에서 "'''정의 투합'''(情意投合, じょういとうごう)하고, 협동 일치하여, 이로써 헌정의 미과를 거둔다"라고 연설했다.[6] 여기서 '정의 투합'은 관료·군부 세력과 정우회가 암묵적으로 소통하며 정권 운영에 협력하는 가쓰라-사이온지 시대의 정치 체제를 의미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6]

2. 2.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

사이온지 긴모치입헌정우회 총재로서 정당 내각을 조직했지만, 하라 다카시 등 1~2명의 정당원을 주요 각료로 임명하여 실력을 키우는 한편, 정당이나 반벌 등 출신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주의를 채용하여 관료, 군부, 반벌로부터의 경계심을 풀었다.[1] 그는 중의원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1]

사이온지는 자유민권운동에도 참가했던 무쓰 무네미쓰를 존경했으며,[1] 무쓰의 유지를 이어 하라를 키운 사이온지는 다가올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1]

1906년(메이지 39년) 1월 7일에 성립된 제1차 사이온지 내각중의원의 제1당 정우회를 여당으로 발족했다.[3][4] 내각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외무대신가토 다카아키
내무대신하라 다카시
대장대신사카타니 요시로
육군대신데라우치 마사타케
해군대신사이토 마코토
법무대신마쓰다 마사히사
문부대신마키노 노부아키
농상무대신마쓰오카 야스다케
체신대신야마가타 이사부로



정우회원은 사이온지, 하라, 마쓰다 3명에 불과했다.[3] 사카타니는 이토 히로부미, 마키노는 마쓰가타 마사요시, 마쓰오카는 가쓰라 다로에 대한 배려였으며, 체신대신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양자였다.[3]

가쓰라 내각이 총사직을 표명한 후 후임 내각이 성립되기까지 철도 국유화 법안을 각의 결정했지만, 사이온지 내각은 이것을 수정하여 의회에 제출하고, 가결 후 1906년 3월에 철도국유법을 공포했다.[3]

3. 게이엔 시대의 정치

러일 전쟁 무렵부터 메이지 천황이 서거할 때까지 약 10년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 번갈아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번벌입헌정우회가 교대로 정권을 담당한 시기를 게이엔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는 양대 세력 간의 내각 윤번제와 유사한 형태였다.[1]

가쓰라는 귀족원을, 사이온지는 중의원을 기반으로 상호 견제, 협력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1] 1908년 제1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12년 제1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임기 만료 후 진행되어 정치적 안정성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일본 헌정사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1911년 1월 29일, 당시 총리였던 가쓰라가 정우회 의원들과 회합했을 때 "'''정의 투합'''하고, 협동 일치하여, 이로써 헌정의 미과를 거둔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정의투합'''(情意投合)이란, 관료, 군부 세력과 정우회가 암묵적으로 의사소통하며 정권 운영에 협력하는 게이엔 시대의 정치 체제를 상징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6]

그러나 1912년 12월, 육군이 2개 사단 증설을 요구한 것에 대해 당시의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재정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거부하면서 제휴 관계가 종결되었고, 육군과의 대립 속에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내각이 총사퇴하였다.[6]

4. 게이엔 시대의 외교 및 경제

영일 동맹러일 전쟁 승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등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무쓰 무네미쓰고무라 주타로 등의 노력으로 불평등 조약 개정이 이루어졌다.[6] 한편, 노동 문제나 공해 문제가 점차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6]

4. 1. 경제 발전

러일 전쟁 이후 메이지 천황이 서거할 때까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 번갈아 가며 내각을 구성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중공업 발전과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6] 1906년 3월에는 철도 국유화법이 제정, 공포되었다.[3]

5. 게이엔 시대의 사회 문제

러일 전쟁 이후 메이지 천황이 서거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노동 문제와 공해 문제가 점차 사회 문제로 부상하였다.[6] 1910년에는 대역 사건이 발생하여 정치적,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였다.[5]

6. 평가 및 연구사

게이엔 시대는 내정과 외정 모두에서 전전(戰前) 일본의 상대적 안정기로 평가받는다.[7] 이 시기 체제의 특질로는 가쓰라 다로가 이끄는 육군·관료·귀족원사이온지 긴모치가 이끄는 정우회의 상호 보완 관계가 꼽힌다.[7]

도쿠토미 이치로(도쿠토미 소호)는 저서 『다이쇼 정국사론』(민유사, 1916년)에서 게이엔 시대를 정국사로 파악하고 내각 교체 구조를 분석하려 한 최초의 저작이다. 『다이쇼 정국사론』은 『국민신문』에 1915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연재된 후 출판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岡崎久彦「百年の遺産-日本近代外交史(27)盛り上がる憲政擁護運動」 http://www.okazaki-i[...]
[2] 서적 伊藤(2016)p.111
[3] 서적 飯塚(2016)pp.156-158
[4] 서적 伊藤(2016)pp.105-106
[5] 서적 千葉(2012)pp.166-169
[6] 서적 鳥海(1986)
[7] 서적 千葉(2012)pp.17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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