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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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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는 1863년 미국 남북 전쟁 당시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연대이다. 노예 해방 선언 이후 흑인들의 입대가 허용되면서 창설되었으며,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이 초대 지휘관을 맡았다. 이 연대는 와그너 요새 전투, 그림볼 상륙 전투, 올러스티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으며, 특히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윌리엄 H. 카니 상사의 용맹한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다. 급여 차별에 맞서 싸웠으며, 1864년 급여 지급을 위한 의회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연대는 기념비와 문학 작품, 영화 '영광'을 통해 기려지고 있으며, 2008년에는 매사추세츠 육군 방위군 의례 부대로 재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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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부대 정보
부대 명칭제54 매사추세츠 보병 연대
원어 명칭54th Massachusetts Infantry Regiment
1890년 커츠와 앨리슨이 제작한 포트 와그너 공격 리토그래프
1863년 7월 18일 제2차 포트 와그너 전투에서의 제54 매사추세츠 연대
창설일1863년 3월 13일
해체일1865년 8월 4일
재창설일2008년 11월 21일
소속북군
병과보병
규모1,000명 (1863년 5월 기준)
전투 및 작전
주요 전투그림볼 상륙 전투
제2차 포트 와그너 전투
올러스티 전투
허니 힐 전투
보이킨스 밀 전투
지휘관
초대 지휘관로버트 굴드 쇼 대령
2대 지휘관에드워드 니들레스 핼러월 대령
관련 정보
관련 부대이전: 제53 매사추세츠 보병 연대
다음: 제55 매사추세츠 보병 연대

2. 역사

남북전쟁 발발 초기, 미국의 흑인들은 북군에 복무하기를 희망했으나 "이 전쟁은 연방을 위한 백인들의 전쟁"이라는 이유로 입대가 거부되었다. 그러나 1862년 노예 해방 선언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흑인의 군 입대를 허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쟁부 장관 에드윈 M. 스탠튼은 백인 장교가 유색인 부대를 지휘하도록 결정했고, 이에 따라 1863년 3월 매사추세츠 주지사 존 A. 앤드루의 주도로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가 창설되었다.

초대 연대장으로는 노예제 폐지론자 가문 출신의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이 임명되었으며, 연대는 백인 장교와 흑인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적극적으로 모병 활동을 벌였고, 유명한 흑인 민권운동가인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아들도 이 부대에 합류했다. 연대는 매사추세츠주 리드빌의 캠프 메익스[7]에서 훈련을 받았다.

1863년 7월 18일, 제54연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와그너 요새 공격에 선봉으로 나섰다. 이 전투에서 연대는 연대장 쇼 대령을 포함한 많은 병사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들의 용맹함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윌리엄 H. 카니 상사는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흑인 최초로 명예 훈장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와그너 요새 전투 이후 연대는 플로리다주 등지에서 계속 전투에 참여했으며, 제54연대의 활약은 이후 더 많은 흑인 부대가 창설되어 남북전쟁에 참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1. 창설 배경

남북전쟁 발발 초기, 미국의 흑인들은 북군에 복무하기를 희망했지만 "이 전쟁은 연방을 위한 백인들의 전쟁"이라는 이유로 입대가 거부되었다. 그러나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군 입대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전쟁부 장관 에드윈 M. 스탠튼은 백인 장교가 유색인 부대를 지휘하도록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1863년 1월 26일 매사추세츠 주지사 존 A. 앤드루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포함한 연대 창설을 지시했다. 앤드루 주지사는 전쟁성의 승인을 받아 1863년 3월,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를 창설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존 A. 앤드루는 전쟁부 장관 스탠턴의 승인을 받은 후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 창설을 명령했다.


앤드루 주지사는 연대 지휘관으로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을, 중령으로 노우드 펜로즈 할로웰을 직접 선택했다. 쇼 대령은 뉴욕 주방위군 7 연대와 매사추세츠 2 연대를 거친 장교였으며, 보스턴의 명망 있는 노예제 폐지론자 가문 출신이었다. 쇼와 할로웰은 연대의 나머지 백인 장교들을 엄선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폐지 운동 가문 출신이거나 참전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노우드 할로웰 중령의 동생 에드워드 니들스 할로웰도 연대에 합류하여 쇼 대령 사후 연대를 지휘하게 된다. 초기에는 모든 장교와 부사관이 백인이었으나, 이후 미군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 부사관도 배출하게 된다.

병사 모집은 프레데릭 더글러스, 마틴 딜레이니와 같은 흑인 노예 폐지 운동가들과 쇼 대령의 부모를 포함한 백인 노예 폐지 운동가들이 주도했다. 보스턴의 조이 스트리트 교회 등지에서 모집 집회가 열렸고, 웬델 필립스와 에드워드 L. 피어스 등이 연설하며 자유 흑인들의 입대를 장려했다. 앤드루 주지사는 흑인 지원병들에게 백인 지원병과 동등한 보수 및 대우를 약속했다. 연대는 백인 장교 37명과 흑인 사병 1,007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병 중 매사추세츠주 출신은 133명(보스턴 27명, 뉴베드포드 39명, 버크셔 카운티 33명 등)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다른 주나 캐나다 등지에서 온 지원자들이었다.[8]

연대의 훈련은 매사추세츠주 리드빌에 위치한 캠프 메익스에서 이루어졌다.[7] 이곳에서 연대는 랄프 왈도 에머슨을 비롯한 매사추세츠의 노예 폐지 운동가들로부터 많은 도덕적, 물질적 지원(따뜻한 의류, 전투 깃발, 군악대 장비 지원 등)을 받았다. 지원자가 몰려 신체검사는 매우 엄격하게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매우 건장하고 건강한 병사들이 선발되었다고 평가받았다. 당시 남부 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가 흑인 병사와 백인 장교를 포로로 잡으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포고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제54연대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1863년 5월 13일 연방군에 정식으로 편입된 후, 제54연대는 5월 28일 보스턴을 떠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보퍼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현지 흑인들과 포트 로열 실험에 참여했던 북부 노예 폐지 운동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보퍼트에서 제54연대는 제임스 몽고메리 대령이 이끄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제2의용군과 합류했다. 이후 두 부대는 몽고메리의 지휘 아래 조지아주 다리엔을 습격했는데, 이때 몽고메리가 마을 약탈과 방화를 명령하자 쇼 대령은 이것이 자신의 모범적인 연대에 적합한 활동이 아니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2. 2. 부대 구성 및 훈련

1862년 노예 해방 선언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북군 입대를 허용했다. 이전까지 흑인들은 "이 전쟁은 연방을 위한 백인들의 전쟁"이라는 이유로 입대가 거부되었었다. 전쟁부 장관 에드윈 M. 스탠튼은 백인 장교가 유색인 부대를 지휘하도록 결정했고, 1863년 1월 26일 매사추세츠 주지사 존 A. 앤드루에게 "아프리카계" 병사들로 구성된 연대 창설을 지시했다.[7] 앤드루 주지사는 전쟁부의 승인을 받아 1863년 3월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를 창설했다.

초대 연대장으로는 앤드루 주지사가 직접 선택한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이 임명되었고, 중령으로는 노우드 펜로즈 "펜" 할로웰이 임명되었다. 쇼 대령은 뉴욕 주방위군 7 연대와 매사추세츠 2 연대를 거친 장교로, 보스턴의 명망 있는 노예 폐지 운동 지지 가문 출신이었다. 연대의 나머지 백인 장교들은 쇼와 할로웰이 직접 엄선하여 선발했다. 이들 중 다수는 노예 폐지 운동 가문 출신이었으며, 헨리 제임스윌리엄 제임스의 동생인 가스 윌킨슨 "윌키" 제임스도 포함되었다. 29명의 장교 중 24명은 참전 경험이 있었으나, 이전에 장교로 임관했던 사람은 6명뿐이었다. 연대의 모든 장교 및 부사관은 연대장 쇼 대령을 비롯하여 모두 백인이었으나, 이후 미군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 부사관도 배출하게 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명예 훈장을 최초로 수상한 흑인 병사 중 한 명인 윌리엄 H. 카니 상사다.

병사 모집은 프레데릭 더글러스, 메이저 마틴 로비슨 델라니(M.D.)와 같은 흑인 노예 폐지 운동가들과 쇼 대령의 부모를 포함한 백인 노예 폐지 운동가들이 주도했다. 연대 최초의 백인 장교 중 한 명인 J. 애플턴 중위는 ''보스턴 저널''에 모집 공고를 냈고, 웬델 필립스와 에드워드 L. 피어스는 조이 스트리트 교회에서 열린 모집 집회에서 연설하며 자유 흑인들의 입대를 독려했다. 약 100여 명이 모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주간 앵글로-아프리카''의 군사 특파원이었던 조지 E. 스티븐스는 필라델피아에서 200명 이상의 병사를 모집하고 이후 제54연대에서 일등 상사로 복무했다. 앤드루 주지사는 흑인 지원병들에게 백인 지원병과 동등한 보수 및 대우를 약속했다.

최종적으로 제54연대는 백인 장교 37명과 흑인 사병 1,007명으로 구성되었다. 1,007명의 흑인 사병 중 매사추세츠주 출신은 133명에 불과했다.

출신 지역인원수
보스턴27명
뉴베드포드39명
버크셔 카운티33명
기타 매사추세츠 지역34명
매사추세츠 총계133명

[8]

연대는 보스턴 근처 리드빌의 캠프 메익스[7]에서 훈련을 받았다. 훈련 기간 동안 랄프 왈도 에머슨을 비롯한 매사추세츠의 노예 폐지 운동가들로부터 많은 도덕적, 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지원에는 따뜻한 의류, 전투 깃발, 연대 군악대 장비 및 훈련을 위한 기부금 500USD 등이 포함되었다. 지원자가 넘쳐났기 때문에 매사추세츠 군의관은 제54연대의 신체검사를 "엄격하고 철저하게" 진행했으며, 그 결과 "미국 군대에 이처럼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징집된 적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당시 다른 부대들처럼 몇몇 병사들은 캠프 메익스를 떠나기 전 질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남부 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가 1862년 12월 23일 발표한 포고령에 따라, 흑인 병사와 그들을 지휘하는 백인 장교는 포로로 잡힐 경우 노예 반란 선동 혐의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제54연대는 매우 높은 사기를 유지하며 1863년 5월 28일, 보스턴 시민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향해 출정했다.

2. 3. 주요 전투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는 남북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전투에 참전하며 용맹을 떨쳤다. 연대의 첫 교전은 1863년 7월 16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제임스 섬에서 벌어진 그림볼 상륙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연대는 남부 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연합군 사령부로부터 그 용맹함을 인정받았다.

이틀 뒤인 7월 18일, 연대는 찰스턴 항의 전략적 요충지인 와그너 요새 공격의 선봉에 섰다. 비록 큰 피해를 입고 공격은 실패했지만, 이 전투에서 보여준 제54연대의 용기는 북부 전역에 알려져 흑인 병사 모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연대는 플로리다주로 이동하여 작전을 이어갔다. 1864년 올러스티 전투에서는 패배한 연합군의 후퇴를 엄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열차를 직접 끌어 부상병들을 구출하기도 했다.[3][1]

같은 해 11월에는 허니 힐 전투에 참전하여 남군 민병대의 참호선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전쟁 막바지인 1865년 4월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벌어진 보킨스 밀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는 남북 전쟁의 마지막 전투 중 하나였다.

2. 3. 1. 와그너 요새 전투

윌리엄 하비 카니 (William Harvey Carney) 1864년경


1863년 7월 18일, 제54 매사추세츠 연대는 찰스턴 항으로 가는 수로를 내려다보는 요충지인 와그너 요새를 공격하며 널리 명성을 얻었다. 연대는 제임스 섬에서의 어려운 철수 작전 이후 식량 없이 이틀을 보낸 상태였으며, 7월 18일 오후 늦게 연합군에 복귀하자마자 피곤하고 배고픈 상태로 4,000명의 공격 부대 선두에 배치되었다.

공격은 오후 7시 45분, 좁은 육지 곶을 따라 시작되었다. 남군의 방어선까지의 거리는 약 약 1463.04m였고, 좁은 지형과 위험한 늪지는 공격 부대에 어려움을 주었다. 병사들은 물이 찬 참호를 건너 요새의 외벽을 점령했으나, 남군의 강력한 방어로 인해 약 오후 9시경 연합군 여단들이 철수하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만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공격 당시 600명이었던 제54 매사추세츠 연대는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총 270명(전체 병력의 40% 이상)이 교전 중 사망, 부상 또는 포로로 잡혔다. 연대장 대령은 부하 29명과 함께 전사했고, 24명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15명은 포로가 되었고, 52명은 실종되었으며, 14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는 단일 교전에서 연대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 수였다. 두 명의 중대 지휘관도 이 공격 중에 사망했다.

비록 연합군은 요새를 점령하고 유지하는 데 실패했지만, 제54 연대는 전투 중 보여준 용맹함으로 널리 칭찬받았다. 이들의 활약은 이후 더 많은 흑인 병사들의 모집과 동원을 장려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또한 이를 최종 승리를 위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했다.

수십 년 후, 윌리엄 하비 카니 상사는 전투 중 깃발 운반자가 쓰러지자 미국 국기를 확보하여 적의 성벽까지 가지고 갔다가 돌아오면서 "얘들아, 낡은 깃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라고 외친 공로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의 이 말은 1900년에 그를 기리는 노래 가사가 되기도 했다.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카니보다 먼저 명예 훈장을 받은 사례가 있지만, 카니의 행동은 흑인에게 명예 훈장이 수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와그너 요새 전투 이후 많은 장교들이 사망하여 지휘 체계에 공백이 생겼고, 부사관들이 실질적으로 중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석이 된 장교 자리에 흑인 병사들을 진급시키는 대신, 이전 백인 장교들과 달리 노예 제도 반대 신념이 부족하고 경험이 없는 백인들을 다른 연대에서 데려와 제54 매사추세츠 연대를 지휘하게 했다.[1]

와그너 요새 전투 후 연대는 플로리다로 이동하여 계속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전투는 이후 수많은 흑인 부대들이 창설되어 전쟁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2. 그림볼 상륙 전투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가 처음으로 전투를 치른 것은 1863년 7월 16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외곽의 제임스 섬에서 벌어진 그림볼 상륙 전투였다. 이 공격은 연합군이 곧 있을 와그너 요새 공격을 앞두고, 남부 연합군 병력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 전투에서 제54매사추세츠 연대는 용감히 싸워 남부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했으며, 이 과정에서 45명의 사상자를 냈다.

훗날 이 전투에 대해 기록한 제54매사추세츠 연대의 제1상사 로버트 존 시몬스(버뮤다 출신으로 영국 육군 복무 경험이 있었다)는 당시 상황을 '필사적인 전투'였다고 묘사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약 250명의 연대 초병이 약 900명에 달하는 남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남부 연합군 측에는 3,000명의 예비 병력까지 지원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고 추정했다. 제54매사추세츠 연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남부 연합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후, 시몬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야영지를 향해 사격하며 후퇴해야 했다'.[2]

전투가 끝난 후, 사단장인 앨프레드 H. 테리 준장은 쇼 대령에게 전령을 보내고 공식 작전 보고서를 통해 제54매사추세츠 연대의 '침착함과 군인다운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칭찬은 연대원들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 3. 3. 올러스티 전투

올러스티 전투에서 연합군이 패배하자, 에드워드 할로웰 대령이 이끄는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는 플로리다주 잭슨빌로 후퇴하는 연합군을 엄호하는 후위 부대 역할을 맡았다. 후퇴 과정에서 제54연대는 제35 미국 흑인 병사들과 협력하여 남부동맹군의 추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연합군이 잭슨빌까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3] 제7 뉴햄프셔 연대와 제8 미국 흑인 병사 연대가 후퇴할 때, 예비대로 있던 제54연대가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지연 작전 덕분에 연합군은 철수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제54연대는 20,000발 이상의 탄약을 소모한 것으로 알려졌다.[1] 전투 후 제54 매사추세츠, 연방 기병대, 코네티컷 제7 연대의 일부 병력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장비가 버려졌으나, 다행히 남부동맹군의 대규모 추격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연합군은 비교적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후퇴 도중, 부대는 갑자기 텐 마일 역(Ten Mile Station)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상당한 연합군 병사들을 태운 열차의 기관차가 고장 나, 부상병들이 남군에게 포로로 잡힐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제54연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엔진과 객차에 밧줄을 연결하여 약 약 4.83km 떨어진 캠프 파이건(Camp Finegan)까지 열차를 직접 끌었다. 이후 말들이 동원되었고, 병사들과 말들은 총 약 16.09km의 거리를 이동하여 잭슨빌까지 열차를 옮겼다. 이 과정은 42시간이 소요되었다.

연합군은 전투 이틀 후인 2월 22일, 잭슨빌로 성공적으로 후퇴했다. 제54연대는 올러스티 도착부터 전투 참여, 그리고 잭슨빌로의 후퇴까지 약 4일 반 동안 대략 약 193.12km를 행군하여 심한 피로를 겪었다.[1]

올러스티 전투와 이어진 후퇴 과정에서 연합군은 총 1,861명(사망 203명, 부상 1,152명, 실종 506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중 제54연대는 후위 작전 중에 발생한 사상자가 87명(장교 3명, 사병 84명 - 사망, 부상 또는 실종 포함)에 달했다.[4] 반면, 약 5,400명의 병력으로 전투에 참여한 남부동맹군의 사상자는 약 946명으로, 연합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전쟁 이후, 올러스티 전투 당시 후퇴 엄호 작전에서 코네티컷 제7연대와 제54연대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당시 연합군 제2여단(코네티컷 제7연대, 뉴햄프셔 제7연대, 제8 미국 흑인 병사 연대 포함)을 지휘했던 조셉 홀리 장군[5]은 당시 신문 보도의 부정확성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는 "신문에는 거짓말이 가득해서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된 역사가 쓰여지거나 쓰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홀리 장군은 찰스 더들리(Charles Dudley)에게 보낸 편지에서 "코네티컷 제7연대 외에는 그 누구도 올러스티에서 후퇴를 엄호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발표하지 말라. 제54 매사추세츠와 노스 캐롤라이나 제1 연대가 '승리를 거두고' '후퇴를 엄호했다'는 거짓말을 쓴 '장교'는 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54연대의 공적을 평가절하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6]

2. 3. 4. 허니 힐 전투

이후 플로리다 작전에서 앨프레드 S. 하트웰 대령이 지휘하는 흑인 여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제54 매사추세츠 연대는 1864년 11월 허니 힐 전투에서 참호에 진지를 구축한 남군 민병대를 공격했지만, 이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1865년 4월 중순에는 남부 캐롤라이나에서 벌어진 보킨스 밀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이는 전쟁의 마지막 교전 중 하나였다.

2. 3. 5. 보킨스 밀 전투

1865년 4월 중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는 남부 캐롤라이나에서 벌어진 작은 규모의 전투인 보킨스 밀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 전투는 남북 전쟁의 마지막 교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2. 4. 급여 차별 논란과 투쟁

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의 흑인 사병들은 모집 당시 백인 병사들과 동일한 수준의 급여와 수당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이는 생계비와 더불어 한 달에 13USD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남부군관구(Department of the South)로부터 한 달에 7USD만 지급받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는 의복비 명목으로 3USD가 공제된 금액이었으며, 백인 병사들은 의복비를 전혀 지불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적인 조치에 대해 연대장 대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즉각 항의했다. 연대의 일원이었던 조셉 바르케(Joseph Barquet)는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의 질에 대해서도 항의하다가 군사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매사추세츠주 정부가 차액을 보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병사들은 원칙의 문제로 이를 거부하고 지급일마다 급여 수령을 보이콧하는 방식으로 투쟁했다.

1863년 7월 18일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쇼 대령이 전사한 후, 1864년 6월 18일부터 약 한 달간 헨리 N. 호퍼 중령이 연대를 임시로 지휘했으며, 이후 에드워드 니들스 할로웰 대령이 부임하여 병사들의 정당한 급여를 받기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급여 삭감을 거부하는 것은 제54연대 병사들에게 단순한 금전 문제를 넘어 명예의 문제였다. 1864년 올러스티 전투에서 연합군의 후퇴를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병사들은 "매사추세츠와 한 달에 7USD!"라고 외치며 용감히 전진하기도 했다.

마침내 1864년 6월 16일, 미국 의회1861년 4월 19일 기준으로 자유민 신분이었던 흑인 병사들에게 백인 병사들과 동등한 급여를 소급하여 지급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모든 병사가 이 기준에 명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퀘이커 신자였던 할로웰 대령은 노예 제도 자체를 부정했기에, 모든 병사들이 1861년 4월 19일에 자유민이었다고 선서하게 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소급된 급여를 받기 위해 연대 전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퀘이커 맹세"를 해야 했다. 할로웰 대령은 "'당신은 1861년 4월 19일 또는 그 이전에 누구에게도 보답받지 못한 노동을 빚지지 않았음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는 내용으로 맹세를 진행했다.

1864년 9월 28일, 미국 의회는 최종적으로 제54연대 병사들에게 밀린 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18개월 동안 복무하며 겪었던 급여 차별 문제와 이에 대한 투쟁은 마침내 정당한 보상을 받으며 마무리되었다.

3. 유산

와그너 요새 전투 이후 연대는 플로리다로 이동하여 계속 참전하였으며, 이들의 용맹함은 이후 수많은 흑인 부대들이 창설되어 전쟁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화국 대군 제146호 기지, 54 매사추세츠 생존 회원들이 1871년에 설립한 "RG 쇼 기지"의 제복 모자 배지


1884년부터 1898년까지 조각가 오거스터스 생 고댕은 보스턴 커먼에 쇼와 54 매사추세츠 연대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설했으며, 이는 현재 보스턴 흑인 유산 산책로의 일부이다. 이 기념비의 석고 모형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미국 회화 갤러리 입구에도 전시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존 A. 앤드루는 이 연대에 대해 "나는 인류 역사상 주어진 1,000명의 무장한 병사들에게 이토록 자랑스럽고, 소중하며, 희망과 영광으로 가득 찬 임무가 맡겨진 적을 알지 못한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의 유명한 작품 "쇼 대령과 그의 유색인 연대"는 그의 관현악 모음곡 ''뉴잉글랜드의 세 장소''의 첫 번째 악장으로, 기념비와 연대를 모두 기리고 있다.

54 매사추세츠 연대의 스티븐 A. 스웨일스 상사는 정규 연합군 전투 연대의 장교로 임명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1]

쇼 대령과 그의 부하들은 시인 로버트 로웰남북 전쟁 100주년 기념 시 "연합을 위한 죽음"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시는 원래 "쇼 대령과 매사추세츠 54연대"라는 제목으로 로웰의 시집 ''삶의 연구'' (1959)에 실렸으며, 로버트 굴드 쇼 기념비를 상징으로 사용하여 인종 차별과 분리, 그리고 급변하는 보스턴 사회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인 고뇌를 담아냈다.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전사한 쇼 대령의 시신 반환을 연합군 장교가 요청했을 때, 남부 연합군 지휘관 존슨 하구드 준장은 "우리는 그를 그의 흑인들과 함께 묻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쇼 대령의 아버지는 아들이 평등을 위해 싸웠던 부하들과 함께 묻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하며 "우리는 병사의 가장 적절한 매장지는 그가 쓰러진 현장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54 매사추세츠의 대량 매장지인 배터리 바그너 현장에서 남북 전쟁이 끝날 무렵, 제1 사우스 캐롤라이나 의용군과 제33 유색 연대가 이를 기리고 존중하여 해산되었다.

더 최근에는 이 부대의 이야기가 1989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영광''에서 묘사되었으며, 매튜 브로데릭이 쇼 역, 덴젤 워싱턴이 트립 사병 역, 모건 프리먼, 캐리 엘위스, 지미 케네디, 안드레 브라우어가 출연했다. 이 영화는 남북 전쟁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수행한 전투 역할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를 재확립했으며, 역사적인 전투 재연에서 자주 묘사되는 이 부대는 현재 "영광" 연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3. 1. 재창설

부대는 2008년 11월 21일에 재창설되어 매사추세츠 육군 방위군 의례 부대로서 장례식과 국가 행사에서 군사적 예우를 제공하게 되었다. 새로운 부대는 현재 제54매사추세츠 의용연대로 알려져 있다.

참조

[1] 서적 A Voice of Thunder; a Black Soldier's Civil War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8
[2] 웹사이트 BCF « Written in Glory http://54th-mass.org[...] 2014-08-16
[3] 웹사이트 The 54th Massachusetts Infantry Regiment https://www.battlefi[...] 2020-07-14
[4] 웹사이트 54th Massachusetts Colored Infantry Regiment March 30, 1863–August 20, 1865 https://www.american[...] 2024-04-29
[5] 웹사이트 Colonel Joseph Roswell Hawley https://battleofolus[...]
[6] 간행물 In the Aftermath of the Battle of Olustee: A Beecher's Surprise Visit to Florida. http://www.jstor.org[...] 2008
[7] 문서 현재는 보스턴 하이드 공원(Boston Hyde Park)의 한 구역이다.
[8] 웹사이트 Mass Moments: 54th Massachusetts Regiment Marches Through Boston http://www.massm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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