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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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러미 소프는 1929년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의 정치인으로, 자유당 당수를 역임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및 텔레비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1959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자유당 당수로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자유당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1970년대 후반 동성애 관계와 관련된 노먼 스콧 살해 음모에 연루되어 당수직에서 사임하고,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정치적 생명은 끝났고, 이후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다 201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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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소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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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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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제러미 소프 |
출생일 | 1929년 4월 29일 |
사망일 | 2014년 12월 4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런던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
배우자 | 캐롤라인 올패스 (1968년 결혼, 1970년 사별) 마리온 슈타인 (1973년 결혼, 2014년 사망) |
부모 | 존 헨리 소프 어슐라 노턴-그리피스 |
친척 | 존 노턴-그리피스 (외조부) |
자녀 | 1명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
정당 | 자유당 (1988년까지) 자유민주당 (1988년부터) |
정치 경력 | |
직책 | 자유당 당수 |
임기 시작 | 1967년 1월 18일 |
임기 종료 | 1976년 5월 10일 |
총재 | 로드 웨이드 데스몬드 뱅크스 로드 보몬트 오브 휘틀리 잉가-스티나 롭슨 스티븐 테럴 트레버 존스 로드 로이드 오브 킬게런 아서 홀트 마가렛 윙필드 바질 골드스톤 |
이전 | 조 그리몬드 |
이후 | 데이비드 스틸 |
선거구 | 노스 데번 |
임기 시작 (선거구) | 1959년 10월 8일 |
임기 종료 (선거구) | 1979년 4월 7일 |
이전 (선거구) | 제임스 린지 |
이후 (선거구) | 앤서니 스펠러 |
2. 가족과 어린 시절
제러미 소프는 1929년 4월 29일 런던 사우스켄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헨리 소프는 변호사이자 보수당 소속 정치인으로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국회의원을 지냈다. 어머니 어슐라 노턴그리피스는 열정적인 제국주의 옹호론자로 "엠파이어 잭"이라는 별명을 가진 존 노턴-그리피스 경의 딸이었다. 소프 가문은 1372년 대법관을 지낸 로버트 소프 경과 1453년부터 1454년까지 하원의장을 지낸 토마스 소프와 먼 친척 관계라고 주장했지만,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제러미 소프는 1929년 4월 29일 런던 사우스켄싱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헨리 소프는 변호사이자 보수당 정치인으로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맨체스터 러슐름 지역구 하원 의원을 지냈다. 어머니 우슬라 노튼그리피스는 "엠파이어 잭"이라는 별명을 가진 열정적인 제국주의 옹호론자인 보수당 하원 의원 존 노튼그리피스 경의 딸이었다. 소프 가문은 1372년 잠시 대법관을 지낸 로버트 소프 경과 1453년부터 이듬해까지 하원 의장을 지낸 토머스 소프와 먼 친척 관계라고 주장했지만, 이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소프의 조상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올리버 크롬웰 휘하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던 두 형제 중 형의 후손이었다. 두 형제는 모두 토지를 받았지만, 동생의 후손들은 더블린의 고위 보안관과 시장을 역임하며 번창한 반면, 형의 후손들은 땅을 잃고 소작농과 상인이 되었다. 제러미 소프의 증조부인 윌리엄 소프는 경찰관으로 경정까지 진급했다. 윌리엄의 아들 중 한 명인 존 소프는 성공회 사제가 되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맥클스필드 대주교로 재직했다. 1884년 존 소프가 앵글로아일랜드인인 아일머 가문의 딸과 결혼하고, 그의 장녀 올리브가 크리스티-밀러 가문과 결혼하면서 소프 가문은 상당한 부를 얻게 되었다. 존 헨리와 제러미 소프는 모두 크리스티-밀러 가문으로부터 교육비를 지원받았다.
제러미는 두 명의 누나가 있는 부모의 셋째 아이였다. 그는 유모와 보모의 보살핌 아래 특권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1935년 퀸스게이트에 있는 바그너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에 능숙해져서 학교에서 종종 공연을 하기도 했다. 당시 존 헨리 소프는 국회의원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인 활동과 친분을 유지했으며, 정치인들이 정기적으로 소프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중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제러미의 정치적 영웅이자 롤모델이 되었으며, 자유당에서의 정치 경력을 쌓기 위한 야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1]
3. 교육
소프 가문의 조상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올리버 크롬웰 휘하에서 아일랜드 재정복에 참전한 군인이었던 두 형제 중 형의 후손이었다. 두 형제는 모두 토지를 받았지만, 동생의 후손들은 더블린의 고위 보안관과 시장을 역임하며 번창한 반면, 형의 후손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상인이 되었다. 제러미 소프의 증조부인 윌리엄 소프는 더블린 출신의 노동자 출신 경찰관으로, 경정까지 진급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존 소프는 성공회 사제가 되어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맥클스필드의 부주교를 지냈다. 1884년 존 소프가 부유한 앵글로아일랜드인 에일머 가문의 딸과 결혼하면서 소프 가문은 상당한 부를 얻었고, 그의 장녀 올리브가 체셔의 크리스티-밀러 가문과 결혼하면서 더욱 부유해졌다. 존 헨리와 제러미 소프 모두 크리스티-밀러 가문이 교육비를 지원해주는 혜택을 받았다.
제러미는 두 누나를 둔 부모의 셋째 아이였다. 그는 유모와 간호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특권적인 환경에서 자랐고, 1935년 퀸스게이트에 있는 바그너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에 능숙해져서 학교 콘서트에서 자주 공연했다. 존 헨리 소프는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니었지만, 많은 정치적 인맥과 친분을 유지했고, 주요 정치인들이 정기적으로 소프 가에 초대되었다. 이들 중 가장 강력한 관계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가문과의 관계였는데, 우슬라 소프는 전 자유당 총리의 딸 메간과 절친한 친구였고, 메간은 제러미의 대모가 되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제러미의 정치적 영웅이자 롤모델이 되었으며, 그가 자유당에서 정치 경력을 쌓겠다는 야망을 형성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1938년 1월, 소프는 이튼 칼리지 합격생들을 배출하던 옥스퍼드셔주 코실 하우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9년 여름, 소프 가족은 런던에서 서리주 림스필드로 이사하였고, 제러미는 헤이즐우드 학교에 재학하였다.[104]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1940년 6월, 소프 가족은 미국의 보스턴으로 갔다. 그해 9월 제러미는 코네티컷주 폼프렛에 있는 렉터리 스쿨을 다녔다. 제러미는 렉터리 스쿨에서 3년 동안 대체로 행복한 생활을 보냈으며, 주요 일과는 학교 돼지들을 돌보는 것이었다고 회상하였다. 1943년, 아이들이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존 헨리는 자신의 정치적인 인맥을 이용하여 영국 왕립해군 순양함 HMS 피비에 탑승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943년 9월부터 소프는 이튼 칼리지를 다녔다. 그는 운동에 소질을 보이지 않았으며, 겉으로는 순응하지 않으면서도 권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번지르르한 소프"(Oily Thorpe|오일리 소프영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학생들을 짜증나게 했으며, 학교 사관생도단에서 사임하여 학교 전통주의자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마거릿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바이올린 연주로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 외에는 이튼 칼리지에서의 생활을 거의 밝히지 않았다. 이튼에서의 시간은 1944년 존 헨리가 5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엉망이 됐다.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합격한 소프는 1947년 3월 이튼을 떠났다. 그해 9월 18개월간의 군 복무를 시작하였지만, 6주 만에 의료 문제로 제대하였다. 1948년 10월 8일 트리니티에 입학하기 전까지 소프는 옥스퍼드에서 임시 예비학교 교사로 일하였다.
3. 1. 옥스퍼드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소프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와 사회 문제였다.[1] 그는 대학 시절부터 화려한 행동으로 주목받았는데, 전기 작가 마이클 블로흐는 그의 외모가 "악마 숭배자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묘사했다.[2]
소프는 옥스퍼드 대학교 자유 클럽(OULC)에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자유당은 전국적으로 침체기였지만, OULC는 800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활발한 클럽이었다.[3] 소프는 1949년 11월 OULC 회장이 되었다.[4] 옥스퍼드 외부에서도 자유당 선거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50년 4월에는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5]
OULC 외에도 옥스퍼드 대학교 법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직을 목표로 했다. 1950년 초 회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로빈 데이에게 패배했다.[6] 그러나 1950년 말, 딕 태번과 윌리엄 리스-모그를 꺾고 1951년 힐러리 학기의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이 되었다.[7]
소프의 회장 임기 동안 헬샴 경, 노먼 버켓, 스티븐 포터 등 저명인사들의 초청 강연이 있었다.[8] 소프는 1952년 여름, 3등급 명예 학위를 받고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9]
4. 초기 경력
1950년과 1951년 총선에서 자유당의 의석수가 감소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프는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기로 결심했다.[2] 클레멘트 데이비스의 은퇴 후 몽고메리셔 지역구를 이어받을 기회가 불확실해지자, 노스 콘월 자유당 후보 딩글 풋의 도움을 받아 노스 데번 지역구를 선택했다.
1952년 4월, 소프는 노스 데번의 자유당 후보로 채택되었다. 그는 당의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급진 개혁 그룹을 창설하고, 지역 문제와 식민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등 국제 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를 통해 지지를 얻고자 했다. 앤서니 이든 총리의 조기 총선 발표 후, 소프는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통해 보수당의 과반수를 줄이고 자유당을 2위로 끌어올렸다.[2]
1954년 2월, 소프는 이너 템플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1] 텔레비전 저널리즘에서도 활동하며 Associated-Rediffusion에 고용되어 과학 토론 프로그램과 시사 프로그램 ''This Week''를 진행했다.[2] ''This Week''를 통해 가나 독립 기념 행사를 취재하고,[3] 요르단에서 후세인 1세 국왕 암살 음모를 보도하기도 했다.[4] BBC 라디오 프로그램 ''Any Questions?''의 고정 게스트로도 활동했다.[5] 1959년, 수석 해설자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의원 후보직을 포기해야 했기에 거절했다.[6]
4. 1. 국회의원 후보
자유당은 1950년과 1951년 총선에서 의석수가 감소하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2] 그럼에도 소프는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소프는 클레멘트 데이비스가 은퇴하면 몽고메리셔 지역구에서 그의 뒤를 이을 기회를 제안받았지만, 이 전망이 불확실해지자 데번과 콘월 지역을 중심으로 다른 선거구를 찾았다. 소프는 노스 콘월의 자유당 후보 딩글 풋의 도움을 받아 인접한 노스 데번 지역구를 선택했다.
1952년 4월, 소프는 노스 데번의 자유당 후보로 채택되었다. 그는 당이 보수 정부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사회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는 젊은 활동가들과 함께 급진 개혁 그룹을 창설했다. 소프는 지역 문제와 식민주의,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국제 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를 섞어 노스 데번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앤서니 이든 총리가 1955년 4월 조기 총선을 발표하자, 소프는 열정적인 선거 운동을 벌여 보수당의 과반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자유당을 2위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2]
4. 2. 변호사 및 텔레비전 저널리스트
수입이 필요했던 소프는 변호사 일을 선택했고, 1954년 2월 이너 템플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1] 변호사 수임료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다른 수입원을 찾던 중, 텔레비전 저널리즘에서 그 수입원을 찾았다. 소프는 Associated-Rediffusion에 고용되어 처음에는 과학 토론 프로그램인 ''The Scientist Replies''의 사회자로 일했고, 나중에는 이 방송국의 주요 시사 프로그램인 ''This Week''의 인터뷰 진행자로 일했다.[2] ''This Week''를 통해 1957년 가나 독립 기념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가나로 갔으며,[3] 1958년에는 후세인 1세 국왕 암살 음모를 보도하기 위해 요르단에서 보도했다.[4] 소프는 뛰어난 방송인이었고, 텔레비전 활동 외에도 BBC 라디오 프로그램 ''Any Questions?''의 고정 게스트가 되었다.[5] 1959년에는 Associated Rediffusion으로부터 수석 해설자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의원 후보직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거절했다.[6]5. 국회의원
1959년 영국 총선에서 노스데번 선거구에서 362표 차이로 보수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는 자유당이 유일하게 의석을 확보한 선거구였다.[3] 1959년 11월 10일, 정부의 지역 고용 법안에 대한 토론에서 첫 연설을 했다. 그는 노스데번의 고용 기회 부족의 주요 이유로 열악한 통신을 지적하며, 정부의 긴급한 조치를 촉구했다.[4]
소프는 지역 문제(새 종합 병원과 엑서터-토턴 고속도로로의 연결 도로 건설)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비칭 삭감으로부터 번스타플-엑서터 철도 노선을 구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5] 그는 더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사형 반대, 친 이민, 친 유럽 의견을 숨기지 않았으며, 이는 그의 지역구 유권자들과는 크게 달랐다.[5] 그는 식민지 및 소수 민족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옹호했고,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 및 니아살랜드 연방과 같이 억압적인 정권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자였다.[5]
그는 또한 활력과 재치로 유명했다. 1962년 일련의 보궐 선거 참패 후 맥밀런이 내각의 3분의 1을 해고했을 때, 소프는 요한복음 15장 13절[6]을 뒤집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자기 친구들을 자기 목숨을 위해 버리는 것이라"라고 말했다.
자유당 내에서 소프는 "승산 있는 선거구"라고 알려진 비공식 조직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 조직은 선정된 표적 선거구에 에너지와 자금을 투입했다. 이 전략은 1961-62년에 몇몇 보궐 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게 했고, 1962년 3월 오핑턴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절정에 달했다.
1964년 영국 총선 결과, 자유당은 전국 득표율을 거의 두 배로 늘려 11.2%를 기록했지만, 순수하게 두 개의 의석만 확보했다. 노스 데본에서 소프는 개인적으로 5,000표 이상으로 격차를 벌렸다.
1965년 7월, 로디지아 및 니아살랜드 연방 해체 이후, 소프는 중앙 및 동아프리카를 순회하며 잠비아와 로디지아를 방문했다. 그는 귀국 후 해럴드 윌슨 당시 총리에게 이안 스미스가 이끄는 로디지아의 백인 정부가 무력 개입의 위협에 의해 저지되지 않는 한 연말 전에 일방적인 독립 선언(UDI)을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윌슨은 군대 사용을 용납하지 않았고, 11월 11일에 UDI가 발생했다. 1966년 9월 자유당 총회 연설에서 토프는 로디지아 문제에 대한 윌슨의 처리 방식("잘못 판단하고 잘못 계획했다")을 비난하고, UDI 이후 로디지아 정부가 석유를 공급받는 철도 연결에 대해 유엔 항공기의 폭격을 촉구했다.
1966년 3월 윌슨은 의회 과반수를 늘리기 위해 선거를 치렀다. 자유당은 전체 득표율이 8.5%로 떨어졌지만, 의원 수를 9명에서 12명으로 늘렸다. 토프는 노스 데본에서 개인적으로 실망했는데, 그의 격차가 1,166표로 줄었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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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1대 | 자유당 | 32.45% | 11,558표 | 2위 | 낙선 |
1959년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2대 | 자유당 | 42.94% | 15,831표 | 1위 | |
1964년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3대 | 자유당 | 50.71% | 19,031표 | 1위 | |
1966년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4대 | 자유당 | 43.57% | 16,797표 | 1위 | |
1970년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5대 | 자유당 | 44.07% | 18,893표 | 1위 | |
1974년 2월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6대 | 자유당 | 53.87% | 34,052표 | 1위 | |
1974년 10월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7대 | 자유당 | 48.07% | 28,209표 | 1위 | |
1979년 영국 총선 | 하원의원 (노스데번 선거구) | 48대 | 자유당 | 36.67% | 23,338표 | 2위 | 낙선 |
6. 자유당 당수
1966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100석 가까이 의석을 늘렸다. 자유당은 득표율이 8.5%로 하락했지만, "승리 가능한 의석" 전략으로 의석을 9석에서 12석으로 늘렸다. 소프는 노스데번 선거구에서 1,166표 차로 당선되었다.[52]
6. 1. 1967–1970
1966년 선거 이후, 조 그리몬드는 당 고위 관계자들에게 곧 당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소프는 그리몬드 다음으로 자유당에서 오랫동안 의원직을 맡았고, 당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49] 그러나 당 조직위원회의 의장이었던 티모시 보몬트는 일기에 "그가 의회 내에서 인기가 거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적었다.[48]그리몬드가 1967년 1월 17일에 사임했을 때, 후임자를 결정하는 선거가 48시간 이내에 치러지도록 마련되어, 작전을 세울 시간이 거의 없었다. 12명의 자유당 하원 의원이 전체 유권자였다. 첫 번째 투표 이후 소프는 6표, 에릭 러벅과 엠린 후손이 각각 3표를 얻었다. 1월 18일 러벅과 후손은 후보직을 사퇴했고, 소프가 승자로 선언되었다.[49][50]
자유당 대표로서 소프는 해럴드 윌슨과 에드워드 히스의 평범한 이미지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이 두 사람보다 훨씬 젊었고, TV에도 훨씬 잘 나왔다.[51] 그러나 당수 재임 초기에 문제는 많았다. 우선 자유당 주류보다 좌익적인 정책을 추진하려던 젊은 자유당과 대립했다. 그들은 국영 산업에서의 노동자 경영, 영국의 NATO 탈퇴, 국방비 대폭 삭감을 주장했고, 당내에서도 이견이 터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당의 공공 이미지 하락으로 이어졌다. 당시 급진적인 정책이 받아들여질 만한 정치 상황이 아니었고, 윌슨 내각의 급격한 지지율 하락은 오히려 우익에 대한 지지율을 높였다. 이로 인해 기세를 얻은 것은 보수당이었고, 보궐 선거에서 노동당을 대신하여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반면 자유당은 별다른 영향도 남기지 못했다.[49] 소프의 당 운영에 대한 불만은 취임 1년 만에 터져 나왔고, 1968년 6월에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당의 원로들이 젊은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당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사건이 발생했다.[52] 소프는 캐롤라인 올패스와 결혼한 직후였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신혼 여행으로 해외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일을 일으킨 타이밍은 당 안팎에서 배신 행위로 간주되었고, 오히려 당 간부들로부터 소프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했다(소프 귀국 후 그는 48표 중 반대 2표로 신임을 얻었다).[53]
결혼으로 소프는 감정적으로 안정되었고, 1969년 4월에는 아들도 태어났다.[54] 이 직후, 노동당 의석이었던 버밍엄 레이디우드에서 자유당 후보가 보궐 선거에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면서, 소프에게 정치적 호재가 불어왔다. 그러나 이 결과는 단발적인 승리에 그쳤고, 1970년 영국 총선에서 당은 신임 하락에 시달리게 되었다.[55] 그 결과는 그들의 비관적인 예상을 증명했고, 전국 득표율은 7.5%로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레이디우드를 포함하여 13석 중 7석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소프 자신도 노스데번 선거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불과 369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당선자는 소프 외에 3명이 더 있었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당선된 것은 그리몬드와 후손뿐이었다.[52] 히스의 보수당은 30석 과반수를 차지했다.[47]
6. 2. 1970–1974
1970년 자유당의 부진한 선거 결과에 따라 소프는 비판을 받았지만, 선거 10일 후 아내 캐롤라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이러한 비판은 잠잠해졌다.[7] 1970년의 나머지 기간과 1971년 대부분 동안 소프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캐롤라인을 위한 영구적인 기념비를 세울 계획에 몰두했다. 그동안 자유당은 주로 전국적인 문제보다는 지역 문제에 참여하는 "지역 정치"를 채택함으로써 회복하기 시작했고, 1971년 지방 선거에서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1972년 초, 비숍스 토턴의 코든 힐에 캐롤라인의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소프는 정치 생활에 완전히 복귀했다. 2월, 그는 하원에서 히스의 유럽 공동체 법안 통과를 도왔는데, 이는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에 대한 영국의 승인을 의미했다. 이 법안은 노동당과 일부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소프는 당을 정부와 제휴함으로써 법안의 2차 독회에서 8표 차이의 다수를 확보했고, 결국 법으로 제정되었다. 1972년 중반까지 자유당의 운세는 눈에 띄게 상승했고, 대중은 양대 정당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지역 정치는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인상적인 지방 선거 결과는 선동적인 보궐 선거 결과로 이어졌다. 1972년 10월 로치데일에서 노동당을 상대로 승리했고, 이듬해에는 서튼, 아일 오브 일리, 리폰, 버윅어폰트위드에서 보수당을 상대로 4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1973년 3월 14일, 소프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조지 라셀스, 제7대 헤어우드 백작의 전 부인이었던 마리온 스타인과 결혼했다. 이 부부는 1년 전 피아니스트 모라 림파니의 소개로 만났다. 소프에게 그 해는 좋지 않게 끝났는데, 1971년 5월부터 이사로 재직했던 런던 앤드 카운티 증권의 2차 은행이 부실 경영과 사기 혐의로 붕괴되었고, 이는 1973–1975년의 2차 은행 위기의 시작을 알렸다. 세부 사항은 1976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974년 2월, 산업 불안에 시달렸던 히스 정부는 "누가 영국을 통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총선을 치렀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히스와 윌슨 모두에 대한 불만과 자유당 지지의 급증이 나타났다. 소프는 당이 상당한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2월 28일 선거 당일, 600만 표라는 최고 득표수와 1929년 이후 최고 득표율(19.3%)을 기록했다. 단순 다수 대표제 하에서 이러한 수치는 단 14석으로 이어졌다. 소프의 노스 데본 득표 차는 11,072표로 증가했다.
6. 3. 연립 정부 협상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는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노동당은 301석, 보수당은 297석을 얻었다. 현직 총리였던 에드워드 히스는 사임하지 않고 자유당과의 연립 정부 구성을 시도했다.히스는 1974년 3월 2일 소프와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히스는 소프에게 각료직을 제안하는 공식적인 연립 정부를 선호했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57%에 달했기 때문에, 히스는 이러한 연립 정부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프가 연립 정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보수당 정부 유지를 위한 덜 공식적인 협력도 가능했다.
다음 날, 소프는 히스에게 선거 제도 개혁에 대한 약속이 연립 정부 구성의 전제 조건임을 통보했다. 소프는 선거 제도 개혁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할 국회의장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추가 논의 후, 히스는 국회의장 회의 개최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권고안을 미리 수용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는 소프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소프는 국가적 위기 해결을 위한 "국민 통합 정부" 구성을 제안했다. 히스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3월 4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소프는 후에 연립 정부 합의가 자유당을 분열시켰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특히 젊은 자유당원들은 연립 정부에 반대했을 것이다. 또한 소프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이나 얼스터 연합당과의 협의 없이는 연립 정부가 의회 과반수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히스의 사임 이후, 해럴드 윌슨은 소수 노동당 정부를 구성했다.
6. 4. 쇠퇴하는 운세
1974년 10월 총선에서 자유당은 70만 표 이상을 잃고 의석도 1석 줄어 13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해럴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은 3석 차이로 과반수를 확보했다.[8] 이 결과로 소프와 자유당은 큰 실망감을 느꼈다. 윌슨의 과반수 확보로 소프는 킹메이커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자유당은 뚜렷한 정체성 부재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정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1]자유당 내부적으로도 당의 공식 입장보다 훨씬 좌파적인 급진주의 활동가들과, 보수당에서 이탈하여 자유당 지지로 돌아선 지지자들 간의 불협화음이 문제였다. 소프는 자신의 지역구인 노스 데본에서 과반수가 7,000표 미만으로 줄어들자, 당이 조만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신의 당 대표직도 위태로울 수 있다고 측근에게 털어놓았다.[9]
1975년에 소프는 선거 개혁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며, 전년도의 선거를 "대규모 득표 강탈"이라고 비판했다.[10] 그는 비례 대표제를 기반으로 한 선거 개혁이 영국 정치에 중도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14] 1975년 6월 영국 EEC 회원 지속 여부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소프는 찬성 투표를 위해 캠페인을 벌였지만,[15] 1975년 6월 26일 울위치 웨스트 보궐 선거에서 자유당은 1974년 10월 득표의 3분의 2 이상을 잃는 "심각한 굴욕"을 겪었다.[16]
7. 노먼 스콧과의 관계
소프의 동성애 행위는 당국의 주목을 받아 경찰 조사를 받았고, 관련 정보는 MI5 파일에 추가되었지만, 그에 대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17] 1971년, 모델 지망생 노먼 스콧은 1960년대 초 소프와 성관계를 맺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당내 조사 결과 혐의는 기각되었지만,[18] 스콧의 주장은 계속해서 소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소프는 측근인 데이비드 홈즈에게 "그 남자가 주변에 있는 한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8]
1961년 초, 스콧(당시 노먼 조시프)은 소프의 부유한 친구를 위해 일하는 20세 마부였다. 첫 만남은 짧았지만, প্রায় 1년 후 궁핍해진 스콧은 하원 의사당을 찾아가 소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9] 소프는 우정이 발전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육체적 관계는 부인했다.[19] 스콧은 하원 회의 다음 날 밤에 소프에게 유혹당했다고 주장했다.[19] 이후 몇 년 동안 소프는 스콧의 구직을 도왔지만, 스콧은 소프에게 분개하여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1965년 소프는 동료 의원 피터 베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셀은 스콧을 만나 그의 위협이 협박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국민 보험 카드를 새로 발급받도록 도왔다.[20] 잠시 문제는 잠잠해졌지만, 1년 안에 스콧은 다시 찾아왔다. 소프의 동의 하에 베셀은 스콧에게 주당 5GBP의 "유지비"를 지불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스콧이 분실된 카드 때문에 받을 수 없었던 복지 혜택에 대한 보상이라고 알려졌다.[21] 베셀은 1968년까지 소프가 스콧을 영구적으로 침묵시킬 방법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데이비드 홈즈가 이를 조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21] 홈즈는 소프의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를 섰고, 그에게 충성했다.
1969년, 스콧이 결혼하면서 문제가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1970년 결혼은 파경을 맞았다. 1971년 초, 스콧은 북웨일스 탤리본트 마을로 이사해 미망인 웬 패리-존스와 친구가 되었고, 그녀에게 소프에게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이 정보를 엠린 후슨에게 전달했고, 후슨은 당내 조사를 촉발시켰지만 소프는 무혐의 처리되었다.[22] 다음 해 패리-존스가 사망한 후 스콧은 우울증에 빠져 한동안 잠잠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74년, 자유당 부흥의 정점에 있던 소프는 자유당 지도자 자리를 잃게 될 수 있는 폭로에 대해 두려워했다. 도미닉 샌드브룩은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스콧을 침묵시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했다."라고 언급한다.[22]
8. 사임
오랫동안 스콧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어떤 신문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풍자 잡지인 ''프라이빗 아이''는 1972년 말 이 이야기가 "명예훼손적이고, 입증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10년이나 된 이야기"라고 판단했다.[23] 1975년 10월, 앤드루 뉴턴은 스콧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대신 스콧의 애견인 그레이트 데인을 사살했다. 뉴턴은 살인 미수와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언론은 더 큰 이야기가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침묵을 지켰다.[24]
1976년 1월, 스콧이 소액의 생활 보호사취 혐의로 기소되면서 언론의 침묵이 깨졌다. 스콧은 법정에서 소프와의 과거 동성애 관계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고 주장했다.[73] 이 증언은 법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명예훼손법의 보호를 받아 널리 보도되었다.
1월 29일, 무역산업부는 런던 앤드 카운티 증권의 파산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소프가 회사와 관련된 실태 조사를 소홀히 한 것을 비판하며, "지도적 입장에 있는 모든 정치인에게 경고"라고 평가했다.[25]
1976년 3월 16일, 뉴턴의 재판이 엑서터 형사법원에서 열렸고, 스콧은 변호사의 침묵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프에 대한 주장을 반복했다. 뉴턴은 유죄 판결을 받고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소프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자유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점점 줄어들었고, 3월에는 여러 보궐 선거에서 참패했다.[74] 전 당수 그리몬드는 소프에 대한 신뢰 부족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3월 14일, ''선데이 타임스''는 "노먼 스콧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스콧의 주장에 대한 소프의 답변을 게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많은 고위 인사들은 소프가 사임해야 한다고 느꼈다.
소프의 문제는 베셀이 ''데일리 메일'' 5월 6일 자에서 이전 진술에서 소프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스콧은 소프의 개인적인 편지를 공개하겠다고 위협했고, 소프는 이를 막기 위해 ''선데이 타임스''에 1961년의 편지 두 통을 게재하도록 조치했다. 이 편지들이 결정적으로 잘못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소프가 스콧과의 진정한 우정에 대해 솔직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비난이 고조되는 가운데 1976년 5월 10일, 소프는 "지도자를 파멸시키려는 확고한 결의 자체가 당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당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9. 당수 사임 이후
쏟아지는 비판 속에 소프는 1976년 5월 10일, "지도자를 무너뜨리려는 확고한 의지가 당 자체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며 당수 직에서 물러났다.[74]
9. 1. 막간

소프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잠시나마 평온을 찾았다. 신임 자유당 대표 데이비드 스틸은 소프를 외무 담당 대변인으로 임명하고 유럽 문제를 맡겼다.[26] 같은 시기 윌슨 총리가 사임하고 제임스 캘러헌이 총리직을 승계했다.[26] 소프는 유럽 의회 직접 선거 도입 법안을 정부에 강력히 로비했다. 당시 유럽 의회 의원(MEP)들은 회원국 의회에서 임명되었다.[26]
보궐 선거 패배로 노동당의 의회 과반수가 사라지자, 1977년 3월 캘러헌은 불신임 투표 위기에 처했다. 여론조사 결과 노동당과 자유당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가 예상되자, 양당은 상호 생존을 위해 "자유-노동 협약"을 체결했다. 자유당은 특정 정책 양보를 대가로 정부를 지지하기로 했다. 소프는 유럽 의회 직접 선거 법안을 협약에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비례 대표제 도입은 이루지 못했다.[27] 의회에서 소프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자치 분권에 찬성하며, 완전 분리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27] 로디지아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에는 애국 전선과 같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28]
언론은 소프 사임 이후 대체로 잠잠했지만, 기자들은 여전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펜코트"로 알려진 배리 펜로즈와 로저 코티어는 소프가 남아프리카 정보 기관의 표적이라고 믿고 캘리포니아의 베셀에게까지 조사를 진행했다. 베셀은 더 이상 소프를 옹호하지 않고, 스콧 살해 음모와 소프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29] 펜코트의 진행 상황은 소프를 극도로 자극했고 ''Private Eye''에 보도되었다. 1977년 초, 그들이 데번 자택 밖에서 소프에게 질문을 시도하자 소프는 그들을 기소하겠다고 위협했다.[30]
소프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는 1977년 10월, 뉴턴이 석방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런던 ''Evening News''에 팔면서 끝이 났다. 뉴턴이 스콧을 살해하기 위해 "유력한 자유당원"에게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큰 파장이 일었고, 장기간의 경찰 수사가 이어졌다.[31] 이 기간 동안 소프는 의회 안팎에서 공적인 삶을 이어가려 노력했다.[31] 1978년 8월 1일, 형사 고발이 확실해 보이자 그는 법무 장관에게 신청자가 얼마의 자본을 소유해야 법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지 물었다.[31] 다음 날, 그는 로디지아에 대한 토론에서 하원 마지막 연설을 했다.[32]
8월 4일, 소프는 홈스, 홈스의 두 동료와 함께 스콧 살해 음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소프는 1968년 베셀, 홈스와의 논의를 근거로 살인 교사 혐의도 추가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난 후, 소프는 무죄를 주장하며 혐의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혔다.[33] 그는 노스 데번 국회의원직을 유지했지만, 1978년 9월 14일 자유당 연례 총회에 잠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는 당 지도부가 그에게 참석하지 말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었다.[34]
9. 2. 구속 및 선거 패배
1978년 11월, 소프는 데이비드 홈즈, 존 르 메저리어, 조지 디킨과 함께 서머싯주 미네헤드에서 약식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노먼 스콧, 앤드루 뉴턴, 피터 베셀의 증언을 들었고, 베셀이 ''더 선데이 텔레그래프''로부터 50000GBP를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36] 그 결과, 네 명 모두 올드 베일리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37] 재판은 1979년 4월 30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3월에 정부가 붕괴되고 5월 3일에 총선이 치러지면서 5월 8일로 연기되었다.소프는 패배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스 데번 지역구에서 재출마했다. 노스 콘월의 국회의원 존 파도를 제외한 주요 인사들은 소프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지 않았다. 소프는 아내, 어머니, 친구들의 지원을 받으며 선거 운동을 펼쳤지만, 보수당 후보에게 8,500표 차로 패배했다.[37] 이 선거에서 보수당은 43석의 과반수를 확보하여 마거릿 대처가 총리가 되었다. 자유당의 전국 득표율은 13.8%로 감소했고, 총 의석수는 13석에서 11석으로 줄었다. 더튼은 자유당 득표율 감소의 많은 부분이 소프 사건으로 인한 부정적인 여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37]
10. 재판과 무죄 판결
조지 카먼은 변호인으로 참여하여, 베셀이 소프의 유죄 판결에 따라 기고료를 더 받는다는 점을 폭로하여 그의 증언 신뢰성을 약화시켰다.[38] 카먼은 스콧을 심문하며 소프의 동성애 성향을 인정하면서도, 성관계 증거는 없다고 주장하며 스콧을 거짓말쟁이로 몰았다.[39]
변호 측 증인으로는 디킨만이 나섰고, 그는 뉴턴을 소개했지만 살인 음모는 몰랐다고 증언했다. 소프를 비롯한 다른 피고인들은 검찰 측 증거 부족을 이유로 침묵했다.[39]
캔틀리 경은 배심원들에게 훈시하며 검찰 측 증인들을 비판했다. 베셀은 사기꾼, 스콧은 거짓말쟁이, 뉴턴은 사건을 이용하려는 자로 묘사되었다.[39]
배심원단은 이틀간의 심의 끝에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소프는 이를 "완전한 정당화"라고 평했으나, 스콧은 판사의 인신공격에 불만을 표했다.[39]
11. 만년
무죄 판결 후, 소프는 1979년 자유당 총회와 캐나다에서 열릴 예정인 자유주의 인터내셔널 회의에 참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40] 그러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언론의 비판을 받았고,[40] 대중은 그가 "잘 빠져나왔다"고 인식했다. 소프는 자유당 내에서 자신의 역할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노스 데본 협회에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스틸은 소프가 "적절한 휴식과 회복의 시간을 가진 후 ... 그의 뛰어난 재능을 사용할 수 있는 많은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40]
새로운 경력을 찾기 위해 소프는 올드버러 페스티벌의 관리자 직과 대런던 시의회의 인종 관계 고문 직에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텔레비전 경력을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도 실패했다.[41] 1982년, 국제 앰네스티 영국 지부의 이사가 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지만,[41] 많은 조직 구성원들이 반대했고,[42] 그는 한 달간의 논란 끝에 그 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유엔 협회 정치 위원회 의장직을 유지했지만, 1979년에 처음 진단받았던 파킨슨병의 진행으로 인해[43] 1985년에는 대부분의 공적인 활동을 축소했다. 그는 노스 데본에 계속 거주했고, 1987년에는 자유당-SDP의 합당 이후 결성된 노스 데본 자유민주당 협회의 명예 회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귀족원에서 종신 귀족을 통해 의회로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이 로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정당의 지도부는 그를 추천하는 것을 거부했다.[43] 당내에서는 그에 대한 감정이 따뜻해졌고, 1997년 연례 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는 기립 박수를 받았다.
1999년 소프는 자신의 공적 생활에서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인 ''In My Own Time''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스콧과의 성적 관계를 부인했고, 증언을 제공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재판을 연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5년 총선에서 소프는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보수당과 노동당을 모두 비판했다. 3년 후인 2008년, 그는 ''가디언''과 ''자유주의 역사 저널''에 인터뷰를 했다. 소프는 "내 파이프에 아직 증기가 남아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검토하고 노동당 총리 고든 브라운을 "침울하고 인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보수당 지도자 데이비드 캐머런을 "가짜 ...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려는 대처리스트"라고 불렀다. 소프의 친유럽주의는 수년에 걸쳐 약화되었고, 말년에는 유럽 연합이 너무 강력해졌고 책임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2. 평가
제러미 소프에 대한 평가는 그의 정치적 업적보다는 "영국 정치 역사상 전례 없는 몰락"으로 묘사되는 그의 몰락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소프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자유당의 부활을 이끈 인물로 기억되기를 바랐지만, 재판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소프가 사망한 후, 여러 논평가들은 그의 국제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를 강조했다.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과의 오랜 관계, 독재자에 대한 비난, 사형 반대, 인종 차별 거부 등이 언급되었다. 그는 설득력 있고, 재치 있으며, 따뜻하고, 뛰어난 정치 운동가였다는 데 널리 의견이 일치한다. 마이클 블로흐는 소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으로, 재판 당시 전 친구이자 미술 전문가인 데이비드 캐리트가 제시한 "자기 중심적... ''약간'' 재미있고, 약간 섬뜩하다. 재치 있다고 하지만... 흉내를 싫어한다면, 그는 정말 약간 지루하다"라는 평가를 인용했다.
닉 클레그는 소프가 당 대표로 재임한 10년을 "조 그리몬드 아래에서 시작된 자유당 부활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했다. 스펙테이터에 기고한 더글러스 머레이는 승리 가능한 의석을 식별하고 집중하는 그의 전략을 1997년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의 주요 돌파구의 기반으로 인정했다. 반면 더튼은 소프의 대담한 스타일과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당은 확신과 근본적인 목적 의식 없이 표류했고... 전술이 아이디어보다 지배했다"며 다소 제한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정치 저널리스트 앤드루 론슬리는 소프를 "멋쟁이, 과시형, 훌륭한 쇼맨, 얕은 사상가, 재치 있고 모방가, 교활한 기회주의자, 섬뜩한 음모가, 이상주의적 국제주의자, 은밀한 동성애 생활을 하는 남자"로 묘사했다.
13. 대중 매체에서
루퍼트 에버렛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러미 소프의 생애를 다룬 텔레비전용 전기 영화를 제작하려던 BBC의 계획은 소프의 법적 위협으로 무산되었다.[105] 존 프레스턴이 소프와 스콧의 사건을 다룬 논픽션 소설인 《A Very English Scandal》은 2016년 5월 5일 바이킹 프레스를 통해 출판되었는데,[106] 이 책은 "긴박한 대화, 잘 꾸며진 장면, 고조된 긴장감, 특히 재판이 시작되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정치 스릴러"라는 평가를 받았다.[107]
2018년 5월 BBC는 프레스턴의 소설을 원작으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3부작 드라마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을 방영하였으며, 소프 역은 휴 그랜트가, 노먼 스콧 역은 벤 위쇼가 맡았다.[108] 이 드라마는 소프 사건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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