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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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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리 브라운은 193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미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캘리포니아 주무장관, 오클랜드 시장을 역임했으며, 1976년과 1980년,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브라운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법원 판사의 법률 사무관으로 일했으며, 1970년 캘리포니아 주무장관으로 선출된 후, 1975년부터 1983년까지,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다. 그는 재정 보수주의와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사형제도와 동성 결혼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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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브라운
기본 정보
공식 초상화, 2006년
이름에드먼드 제럴드 "제리" 브라운 주니어
원어 이름Edmund Gerald "Jerry" Brown, Jr.
출생일1938년 4월 7일
출생지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주, 미국
거주지콜루사 카운티, 캘리포니아주, 미국
배우자앤 거스트 (2005년 결혼)
친척캐슬린 브라운 (여동생)
서명Signature of California Edmund G. (Jerry) Brown.png
웹사이트제리 브라운
학력
대학교산타클라라 대학교
학사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BA)
법학 학사예일 대학교 (LLB)
정치 경력
정당민주당
직책캘리포니아주지사 (34대, 39대)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 (31대)
오클랜드 시장 (47대)
캘리포니아주 국무장관 (23대)
캘리포니아 민주당 의장 (6대)
주지사 임기 (1차)1975년 1월 6일 ~ 1983년 1월 3일
부지사 (1차)머빈 다이멀리
마이크 커브
주지사 임기 (2차)2011년 1월 3일 ~ 2019년 1월 7일
부지사 (2차)개빈 뉴섬
법무장관 임기2007년 1월 8일 ~ 2011년 1월 3일
오클랜드 시장 임기1999년 1월 4일 ~ 2007년 1월 8일
국무장관 임기1971년 1월 4일 ~ 1975년 1월 6일
민주당 의장 임기1989년 2월 11일 ~ 1991년 3월 3일
이전 주지사 (1차)로널드 레이건
다음 주지사 (1차)조지 듀크메지언
이전 주지사 (2차)아놀드 슈워제네거
다음 주지사 (2차)개빈 뉴섬
이전 법무장관빌 록커
다음 법무장관카멀라 해리스
이전 오클랜드 시장엘리휴 해리스
다음 오클랜드 시장론 델럼스
이전 국무장관프랭크 M. 조던
다음 국무장관마치 퐁 유
이전 민주당 의장피터 D. 켈리 3세
다음 민주당 의장필 앤젤리디스
가족
아버지팻 브라운
어머니버니스 레인 브라운

2. 초기 생애 및 교육

제리 브라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2] 그는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이자 후일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에드먼드 제럴드 "팻" 브라운 1세와 그의 아내 버니스 레인 사이에서 태어난 네 자녀 중 외아들이었다.[2] 브라운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혼혈이었다.[3] 그의 증조부인 아우구스트 슈크만은 독일 이민자로, 1852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당시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4]

브라운은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고등학교에서 캘리포니아 학생 사관학교 회원이었으며, 1955년 졸업했다.[5][6] 1955년, 브라운은 산타클라라 대학교에 1년간 다니다가 성심 수련원(캘리포니아주 로스 가토스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으로 옮겨 가톨릭 사제가 되려고 했다.[8][7] 브라운은 1956년 8월부터 1960년 1월까지 수련원에 머물렀고, 그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입학하여 1961년 고전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8][9] 루이 루리 재단의 장학금[10](1963년 675달러 장학금 포함)[11]으로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하여 1964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2] 로스쿨 졸업 후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대법원 판사 매슈 토브라이너의 법률 사무관으로 일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브라운은 주 변호사 시험을 두 번째 시도에서 통과했다.[12] 그 후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여 튜틀 & 테일러 로펌에 합류했다. 1969년 브라운은 도시의 전문대학을 관할하는 새로 설립된 로스앤젤레스 지역대학 이사회에 출마하여 124명의 후보 중 1위를 차지하고 1971년까지 재직했다.[23]

2. 1. 초기 생애

제리 브라운은 1938년 4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이자 후일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에드먼드 제럴드 "팻" 브라운 1세와 그의 아내 버니스 레인 사이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혼혈이었으며,[3] 증조부 아우구스트 슈크만은 독일 이민자로, 1852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당시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4]

브라운은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고등학교에서 캘리포니아 학생 사관학교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55년 졸업했다.[5][6] 1955년 산타클라라 대학교에 1년간 다니다가 성심 수련원(로스 가토스 소재 예수회 수련원)으로 옮겨 가톨릭 사제가 되려고 했다.[8][7] 1956년 8월부터 1960년 1월까지 수련원에 머물렀고,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입학하여 1961년 고전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8][9] 루이 루리 재단의 장학금[10][11]으로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하여 1964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2] 졸업 후 캘리포니아 대법원 판사 매슈 토브라이너의 법률 사무관으로 일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브라운은 주 변호사 시험을 두 번째 시도에서 통과했다.[12]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여 튜틀 & 테일러 로펌에 합류했다. 1969년 로스앤젤레스 지역대학 이사회에 출마하여 124명의 후보 중 1위를 차지하고 1971년까지 재직했다.[23]

2. 2. 학력

제리 브라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2]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고등학교에서 캘리포니아 학생 사관학교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55년 졸업했다.[5][6] 1955년, 산타클라라 대학교에 1년간 다니다가 성심 수련원(로스 가토스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으로 옮겨 가톨릭 사제가 되려고 했다.[8][7] 1956년 8월부터 1960년 1월까지 수련원에 머물렀고, 그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입학하여 1961년 고전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8][9] 루이 루리 재단의 장학금[10][11]으로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하여 1964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2]

3. 정치 경력

카멀라 해리스와 (2017년 3월 21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신으로, 아버지 팻 브라운/Pat Brown영어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1959년-1967년)를 역임했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70년 주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975년에 주지사로 첫 당선되었다.[152]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경쟁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52]

1970년,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주무장관으로 선출되었다.[23] 그는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 캘리포니아 표준유(Standard Oil of California), 국제전화전신(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 걸프석유(Gulf Oil), 모빌(Mobil)을 상대로 선거법 위반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23] 또한, 입법자들에게 선거자금 공개법을 준수하도록 강제했다. 브라운은 1974년 캘리포니아 정치 개혁법(Proposition 9)을 초안하고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법안은 1974년 6월 캘리포니아 유권자의 70%의 지지로 통과되었다.[23] 이 법안에는 캘리포니아 공정 정치 관행 위원회 설립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197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제리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장 밥 모레티(Bob Moretti),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셉 L. 알리오토(Joseph L. Alioto), 하원의원 제롬 R. 월디(Jerome R. Waldie) 등과의 경선에서 승리했다. 아버지 팻 브라운(Pat Brown)의 인지도와 진보적인 행정에 대한 높은 평가 덕분이었다.[13] 본선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감사원장 휴스턴 I. 플러노이(Houston I. Flournoy)를 누르고 당선되었는데, 공화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반공화당 정서 때문에 패배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사임 90일 만의 일이었다. 브라운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은퇴한 공화당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뒤를 이었다.

1974년 지지자들과 함께하는 브라운


제리 브라운은 주정부 차량 수영장에서 1974년형 플리머스 새틀라이트 두 대를 선정하여 북부 캘리포니아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사용했다. 이 사진은 캘리포니아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된 차량 중 하나이다.


취임 후, 브라운은 재정 보수주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14] ''아메리칸 컨서버티브(The American Conservative)''는 그가 레이건 주지사보다 훨씬 더 재정 보수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15] 그의 긴축 정책은 주 역사상 최대 규모인 약 50억 달러의 예산 흑자를 기록했다.[16] 그는 새로 지어진 2만 평방피트 규모의 주지사 관저(카마이클)를 사용하지 않고, 새크라멘토 시내 캐피톨 공원 인근 N 스트리트 1228번지에 있는 월세 275달러짜리 아파트를 임대했다.[17][18] 이전 주지사들이 전용 리무진을 이용한 것과 달리, 브라운은 걸어서 출근했고 플리머스 새틀라이트 세단을 운전했다.[19][20][21] 브라운의 비서실장이었던 그레이 데이비스(Gray Davis)가 주지사 집무실의 카펫 구멍을 수리하자고 제안하자, 브라운은 "이 구멍은 주에 최소 5억 달러를 절약해 줄 겁니다. 의원들이 내 책상을 두드리며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답했다.[22]

브라운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J. 볼드윈(J. Baldwin)을 캘리포니아 적절 기술 사무소에, 심 반 더 라인(Sim Van der Ryn)을 주 건축가로,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를 특별 고문으로, 존 브라이슨(John Bryson)을 캘리포니아 주 수자원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캘리포니아 예술위원회 예산을 1300% 증액하고 예술가들을 위원회에 임명했으며,[23] 이전 어떤 주지사보다 많은 여성과 소수 민족을 공직에 임명했다.[23] 1977년에는 "최초의 지붕 태양광에 대한 세금 인센티브"를 후원했다.[24] 1975년에는 주의 석유 산업에 대한 세금 감면인 "고갈 공제"를 폐지했다.[25]

1975년, 브라운은 캘리포니아에 대한 베트남 이민에 반대하며, "실업 상태인 100만 명(캘리포니아 주민)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50만 명을 더 들여오자'고 하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고 말했다.[26][27]

브라운은 사형제도에 반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1977년 의회는 이를 번복했다.[28] 그는 사형에 반대하는 판사들을 임명했다. 로즈 버드(Rose Bird) 캘리포니아 대법원 수석 대법관은 "노동 친화적"이고 "언론 자유 친화적" 판결에 불만을 품은 기업의 선거 운동으로 1987년에 해임되었는데, 사형은 그녀에 대항하는 "날조된 핑계"였다.[29] 버드 대법원은 사형의 합헌성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30] 1960년 그는 아버지에게 캐릴 체스먼(Caryl Chessman)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여 60일간의 집행 유예를 얻어냈다.[31][32]

브라운은 균형 예산 수정안을 지지하고 제13호 발의안에 반대했다. 제13호 발의안은 재산세를 인하하고 도시와 군의 세수를 줄이는 것이었다.[33] 1978년 6월 제13호 발의안이 통과되자 주 정부 지출을 삭감했고, 의회와 함께 50억 달러 흑자의 상당 부분을 발의안 요건 충족과 도시, 군, 학교의 세수 감소분을 상쇄하는 데 사용하여 주 정부 의존도를 높였다.[16][33] 제13호 발의안 제안자인 하워드 자비스(Howard Jarvis)는 브라운의 대응을 칭찬하며 1978년 재선 운동 직전에 그를 위한 광고를 제작했다.[33] 이 발의안은 세수를 즉시 감소시켰고 세금 인상에는 3분의 2의 과반수가 필요했다.[34]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정부 연구소(Institute of Governmental Studies)의 맥스 나이만(Max Neiman) 교수는 브라운이 "지방 정부와 학군을 구제했다"고 평가했지만, "제13호 발의안이 해롭지 않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해롭다고 생각했다.[24] 브라운은 2014년 인터뷰에서 제13호 발의안의 대안을 위한 선거 운동에 "선거 자금"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5]

1976년 뉴욕주 뉴욕시에서 열린 19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제리 브라운


19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리 브라운을 지지하는 세사르 차베스


브라운은 1976년 3월 16일 대통령 후보 경선을 위한 민주당 후보 경선 첫 번째 선거 운동을 시작했는데,[36] 이는 경선 시즌 후반이었고 일부 후보들이 선거 운동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후였다. 브라운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 나라는 부유하지만, 우리가 믿도록 유도된 것만큼 부유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한계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37][38]

브라운의 이름은 5월에 경선 투표용지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는 메릴랜드주, 네바다주, 그리고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주에서 승리했다.[39] 그는 오리건주 마감일을 놓쳤지만, 기입 후보로 출마하여 지미 카터와 아이다호주의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브라운은 종종 뉴저지주와 로드아일랜드주 경선에서 승리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브라운이 주장한 해당 주의 무소속 대의원들이 1위를 차지했다. 루이지애나주 주지사 에드윈 에드워즈의 지지로 브라운은 루이지애나 대의원 선출 대회에서 대의원 과반수를 확보했고, 따라서 루이지애나주는 남부 출신인 카터 또는 알라바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를 지지하지 않은 유일한 남부 주였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터의 추진력을 막을 수 없었고, 그의 라이벌은 19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차 투표에서 지명되었다. 브라운은 약 300표의 대의원 표를 얻어 3위를 차지했는데, 하원의원 모리스 우달과 카터에 근소하게 뒤처졌다.

1978년 재선 유세에서 연설하는 브라운


브라운은 1978년 공화당 소속 주 검찰총장 에벨 J. 영거(Evelle J. Younger)를 상대로 재선에 성공했다. 1979년 스티븐 락스(Stephen Lachs)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고등법원(Los Angeles County Superior Court) 판사로 임명하면서 미국 최초의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인 판사를 임명했다.[40] 1981년에는 메리 C. 모건(Mary C. Morgan)을 샌프란시스코 시 법원 판사로 임명하여 미국 최초의 공개적으로 레즈비언인 판사를 임명하기도 했다.[41] 브라운은 두 번째 임기를 마치면서 랜드 슈레이더(Rand Schrader)와 제롤드 크라이거(Jerold Krieger)를 포함해 총 5명의 동성애자 판사를 임명했다.[42][43] 그는 첫 번째 주지사 임기 동안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람을 어떤 직책에도 임명하지 않았지만, 캘리포니아 공립학교에서 동성애자의 근무를 금지하려는 1978년 브리그스 이니셔티브(Briggs Initiative) 실패를 언급하며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가 증가했다고 밝혔다.[40] 주지사는 또한 성인 간의 동성애 행위를 비범죄화하는 성인 동의 성관계 법(Consenting Adult Sex Act)인 AB 489에 서명하여 이러한 평판에 더했다. 그러나 그는 1977년 동성애 커플이 민사 결혼 허가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AB 607에 서명하기도 했다.

1978년 브라운


브라운은 새크라멘토 인근에서 새크라멘토-샌호아킨 강 삼각주(Sacramento–San Joaquin River Delta)를 돌아 중앙계곡 프로젝트로 물을 운반하고 남부 캘리포니아로 수출하는 주변 운하(Peripheral Canal) 프로젝트를 지지했다. 이 프로젝트는 1982년 투표 제안으로 유권자들에게 승인을 받았지만 부결되었다.[44]

강력한 환경 운동가로 명성을 쌓은 브라운은 1981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San Francisco Bay Area)에서 심각한 지중해 과실파리(medfly) 침입에 직면했다. 주 농업 산업과 미국 농무부 동식물 검역소( APHIS )는 그에게 항공 살포를 승인할 것을 권고했다. 그는 처음에 환경 보호 입장에 따라 지상 살포만 승인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지중해 과실파리의 번식 주기가 살포 속도보다 빨라 침입이 확산되었다. 한 달 이상이 지나자 수백만 달러 상당의 농작물이 파괴되었고 수십억 달러의 추가 피해가 위협받았다. 브라운 주지사는 침입에 대한 대규모 대응을 승인했다. 헬리콥터들이 밤에 말라티온(malathion)을 살포했고, 캘리포니아 주방위군(California National Guard)은 고속도로 검문소를 설치하고 많은 양의 지역 과일을 수거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해충학자들이 수백만 마리의 불임 수컷 지중해 과실파리를 방출하여 곤충의 번식 주기를 방해하려고 시도했다.

결국 침입은 근절되었지만, 주지사의 지연과 조치의 규모는 그 이후로도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부 사람들은 말라티온이 곤충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유독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브라운의 비서실장 B. T. 콜린스(B. T. Collins)는 기자 회견을 열고 공개적으로 말라티온이 든 잔을 마셨다. 많은 사람들은 말라티온이 사람에게 유독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말라티온이 포함된 에어로졸 스프레이는 자동차 페인트에 부식성이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다.[45][46]

브라운은 주 우주 아카데미 설립과 주의 비상 통신을 제공하기 위해 궤도에 발사될 위성(satellite) 구매를 제안했는데, 이는 실제로 채택된 제안과 유사하다. 1979년, ''시카고 선 타임즈(Chicago Sun-Times)''의 주외 칼럼니스트 마이크 로이코(Mike Royko)는 브라운의 당시 여자 친구(girlfriend)인 린다 론스태트(Linda Ronstadt)가 1978년 ''롤링 스톤(Rolling Stone)'' 잡지 인터뷰에서 그를 "문빔(Moonbeam)"이라고 농담으로 부른 것을 언급하며 그 별명을 사용했다.[47][48] 1년 후 로이코는 별명을 공개한 것을 후회했고,[49] 1991년에는 브라운이 다른 어떤 정치인만큼 진지하다고 선언하며 완전히 부인했다.[50][51]

몇몇 저명한 인물들은 자문이나 개인적인 역할로 그에게 우선적으로 서신 접근 권한을 받았다. 여기에는 미국 농장 노동자 연합(United Farm Workers of America) 창립자 세사르 차베스(Cesar Chavez), 휴렛 패커드(Hewlett-Packard) 공동 창립자 데이비드 패커드(David Packard), 노동 지도자 잭 헤닝(Jack Henning), 그리고 당시 캘리포니아 주 민주당 위원장 찰스 매넛(Charles Manatt)이 포함되었다. 우편물은 VIP로 라우팅되어 주지사에게 직접 배달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52]

1978년 샌프란시스코 펑크 밴드(punk band)인 데드 케네디스(Dead Kennedys)의 첫 번째 싱글 "캘리포니아 우버 알레스(California über alles)"가 ''썩은 채소를 위한 신선한 과일(Fresh Fruit for Rotting Vegetables)'' 앨범에서 발매되었다. 이 노래는 당시 주지사였던 브라운의 관점에서 당시 그가 파시스트적인 방식으로 자유주의적 사상을 강요한다고 여긴 것을 풍자하며, 작사가 젤로 비아프라(Jello Biafra)가 권력의 부식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논평하는 히피-파시스트 국가의 모습을 그렸다. 가상의 브라운은 비밀 경찰과 가스실을 관할하는 브라운 대통령이 되었다. 비아프라는 나중에 ''나드와르(Nardwuar)''와의 인터뷰에서 브라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브라운은 비아프라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았고, 이후 다른 정치인들에 대해 더 나쁘다고 여겨지는 노래들이 작곡되었다.[53]

브라운은 1982년 세 번째 임기에 출마하지 않고 1982년 캘리포니아 주 상원 의원 선거(1982 United States Senate election in California)에 출마했지만 샌디에이고 시장(Mayor of San Diego) 피트 윌슨(Pete Wilson)에게 패했다. 그는 1983년 1월 3일 당시 주 검찰총장이었던 조지 드크메지안(George Deukmejian)에게 주지사직을 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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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브라운은 지미 카터에게 재지명에 도전했다. 언론은 그가 1978년 공화당의 에벨 영거(Evelle Younger)를 130만 표 차이,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대 득표 차이로 누르고 주지사에 재선된 이후부터 그의 출마를 예상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대선 후보 지명을 위한 자금 모금과 여론 조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라는 더 유명한 후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널리 여겨졌다. 브라운의 1980년 플랫폼은 버크민스터 풀러의 미래 비전과 E. F. 슈마허의 "불교 경제학" 이론을 결합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선언했으며, 1976년보다 훨씬 확장되었다. 그의 "한계의 시대" 슬로건은 그의 말대로 "지구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섬기고, 우주를 탐험하라"는 약속으로 대체되었다.

그의 플랫폼의 세 가지 주요 내용은 균형 예산 수정안을 비준하기 위한 헌법 수정 협약 요구, "이 행성에 태양열 에너지를 제공하는 우주 기반 태양광 발전 위성"을 향한 첫걸음으로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자금 증액 약속,[54] 그리고 1979년 쓰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 반대였다. 1979년 1979년 에너지 위기 문제에 대해 브라운은 카터가 석유 산업과 맺었다고 주장하는 "악마와의 거래"를 비난했고, 연방 정부의 태양열 발전 연구 자금을 크게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국가 청년을 위한 의무적인 비군사적 국가 봉사의 아이디어를 지지했다. 그는 미국 국방부가 지원군을 줄이고 전투군 수를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브라운은 케네디의 보편적 건강 관리 요구와 카터의 고용주가 재난성 사적 건강 보험을 제공하도록 하는 의무화 요구를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55] 대안으로 그는 흡연이나 건강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금 공제 프로그램을 제안하며,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세금으로 우리를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55] 브라운은 또한 침술과 조산의 사용 확대를 촉구했다.[55]

브라운의 선거 운동이 제인 폰다, 톰 헤이든, 제시 잭슨과 같은 활동가를 포함하여 일부 보수적인 해설가들이 "극단주의자"라고 묘사한 사람들의 지지를 더 많이 얻기 시작하면서 그의 여론 조사 수치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브라운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10%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곧 위스콘신 프라이머리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야만 경주에 남을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발표해야 했다. 그는 예비 선거 기간 내내 위스콘신에서 좋은 여론 조사 결과를 얻었지만, 주도인 매디슨에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제작 및 연출한 특수 효과가 가득한 30분짜리 광고로 생방송 연설을 촬영하려던 시도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56]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브라운은 3선에 도전하지 않고 공화당 상원의원 S. I. 하야카와의 퇴임으로 공석이 된 미국 상원 의석에 출마했지만, 공화당 소속 샌디에이고 시장 피트 윌슨에게 패배했다.[57] 상원 선거 패배 후, 브라운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정치 경력이 끝났다고 여겼다.[57]

이후 브라운은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를 공부하며, 휴고 에노미야-라살에게서 야마다 코운-로시 밑에서 수행했다.[69][58] 그는 정치와는 다른 관점을 얻고자 인도 캘커타를 방문, 테레사 수녀의 호스피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69][59]

1988년 귀국한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민주당 위원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당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60] 그러나 TV 광고 부족 등으로 인해 일부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있었다. 1991년 초, 브라운은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상원 의석 출마를 선언했으나, 대선 출마를 위해 이를 중단했다.

제리 브라운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맞서 대통령 출마 의사를 밝히자, 언론과 민주당 내 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선 운동이 큰 지지를 얻기 힘들다고 예상했다.[61] 그러나 브라운은 "미국을 부패, 직업주의, 그리고 워싱턴의 선거운동 컨설팅 연합으로부터 되찾기" 위한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다.[61] 필라델피아의 독립 기념관 계단에서 출마를 선언하며, 개인에게서만 선거 자금을 받고 100달러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52] 그는 의회 의원 임기 제한을 요구하고, 하원 금융 스캔들과 1990년 의회 급여 인상 등 의회 내 스캔들을 언급하며, 의회가 "돈 많은 특수 이익을 위한 편의점"이 되는 것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브라운은 선거 자금 개혁 정책 외에도 생활 임금 법안 지지, NAFTA와 같은 자유 무역 협정 반대 등 자신의 강령을 확장했다. 아서 래퍼가 만든 세금 정책을 중심으로 누진소득세를 고정 13% 세율의 평면세와 부가가치세로 대체하는 계획을 제시했고, 이는 ''뉴욕 타임스'', ''뉴 리퍼블릭'', ''포브스'' 등에서 지지를 받았다.[62] 제시 워커는 ''아메리칸 컨서버티브''에서 브라운이 "가장 좌익적이고 우익적인 사람처럼 보였다...임기 제한, 평면세, 사회 보장 제도 개혁, 그리고 교육부 폐지를 요구했다"고 평가했다.[62]

제한된 예산으로 브라운은 대안 미디어와 무료 전화 번호를 이용한 자금 조달 기법을 활용했다.[66] 그는 케이블 텔레비전과 토크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의 도덕적인 언어는 그를 "정치적 텔레번젤리스트"라고 불리게 했다.[63]

아이오와 코커스(1.6%)와 뉴햄프셔 경선(8%)에서는 부진했지만, 메인주, 콜로라도주, 네바다주, 버몬트주에서 승리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슈퍼 화요일 이후 폴 츠옹가스가 사퇴하고, 코네티컷주 경선에서 승리하며 빌 클린턴의 주요 경쟁자로 떠올랐다.

뉴욕주위스콘신주 경선을 앞두고 브라운은 제시 잭슨을 러닝메이트로 고려한다고 발표했는데,[64] 잭슨은 과거 반유대주의적 발언으로 유대인 사회의 불신을 받고 있었다.[64] 결국 브라운은 위스콘신주에서 클린턴에게 근소하게 패배하고(37%–34%), 뉴욕주에서는 크게 패배했다(41%–26%).

이후 브라운은 더 이상 경선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7개 주에서 이변을 일으키며 "획득한 득표수 대 모금액 비율"에서 높은 성과를 냈다.[65] 민주당 전당 대회 1차 투표에서 596명의 대의원 표를 얻어 클린턴을 제외한 다른 후보보다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클린턴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브라운은 화이트워터 스캔들에 대해 클린턴을 비판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66]

제리 브라운은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 이후 샌프란시스코 패시픽 하이츠에서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잭 런던 지구로 이사했다.[67][68] 그는 그곳에서 전국적인 토크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67] 1995년에는 그의 정치적 입지가 낮아져 영화 제이드에서 캘리포니아의 가상 주지사가 제리 브라운만큼의 미래를 원하지 않으면 사건을 취하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였다.[70]

오클랜드에서 브라운은 지역 정치 문제에 활동가로 참여했으며, 1996년 오클랜드 시장 엘리후 해리스(Elihu Harris)에게 오클랜드 항만위원회 위원직 임명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67] 이후 해리스가 재선을 포기하자,[67] 브라운은 "심각하게 부패한" 양당제를 비난하며 민주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시장 선거에 출마, 5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68]

제리 브라운 시장(왼쪽)과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중앙), 개빈 뉴섬 샌프란시스코 시장(오른쪽) (2007년)


취임 전, 브라운은 오클랜드의 약한 시장 체제를 강한 시장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선거운동을 벌였고, 1998년 11월 오클랜드 유권자들은 X 조치를 지지하여 6년간 강력한 시장 모델로 시 정부를 전환했다.[68][71][72] 이 조치는 2004년에 영구화되었다.[72]

진보 진영은 브라운에게 진보적인 정치를 기대했지만, 그는 "진보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며, 정치 이념보다는 도심 재개발과 경제 성장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다.[73] 그는 미 해병대가 도시 전사 작전의 일환으로 오클랜드 항구 부지를 모의 군사 훈련에 사용하도록 허용하기도 했다.[74]

브라운은 경기 침체를 완화하고 폭스 극장, 오클랜드 항, 잭 런던 광장 등 1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여 도시 부흥을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68] 그는 오클랜드 도심에 1만 명의 주민을 추가로 유치한다는 "1만 명 계획"을 추진하여 잭 런던 지구와 메릿 호수 근처의 레이크사이드 아파트 지구 등에서 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68][75][76] 브라운은 시 기록에 따르면 1만 명의 주민 유치라는 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며, 이전 시장 행정부보다 더 많은 저렴한 주택을 건설했다.[75]


3. 1. 초기 정치 경력 (1969-1975)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신으로, 아버지 팻 브라운/Pat Brown영어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1959년-1967년)를 역임했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70년 주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975년 주지사로 첫 당선되었다.[152]

3. 2. 캘리포니아 주무장관 (1971-1975)

1970년,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주무장관으로 선출되었다.[23] 그는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 캘리포니아 표준유(Standard Oil of California), 국제전화전신(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 걸프석유(Gulf Oil), 모빌(Mobil)을 상대로 선거법 위반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23] 또한, 입법자들에게 선거자금 공개법을 준수하도록 강제했다. 브라운은 1974년 캘리포니아 정치 개혁법(Proposition 9)을 초안하고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법안은 1974년 6월 캘리포니아 유권자의 70%의 지지로 통과되었다.[23] 이 법안에는 캘리포니아 공정 정치 관행 위원회 설립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3. 3. 캘리포니아 주지사 (1975-1983)

197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제리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장 밥 모레티(Bob Moretti),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셉 L. 알리오토(Joseph L. Alioto), 하원의원 제롬 R. 월디(Jerome R. Waldie) 등과의 경선에서 승리했다. 아버지 팻 브라운(Pat Brown)의 인지도와 진보적인 행정에 대한 높은 평가 덕분이었다.[13] 본선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감사원장 휴스턴 I. 플러노이(Houston I. Flournoy)를 누르고 당선되었는데, 공화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반공화당 정서 때문에 패배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사임 90일 만의 일이었다. 브라운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은퇴한 공화당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뒤를 이었다.

취임 후, 브라운은 재정 보수주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14] ''아메리칸 컨서버티브(The American Conservative)''는 그가 레이건 주지사보다 훨씬 더 재정 보수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15] 그의 긴축 정책은 주 역사상 최대 규모인 약 50억 달러의 예산 흑자를 기록했다.[16] 그는 새로 지어진 2만 평방피트 규모의 주지사 관저(카마이클)를 사용하지 않고, 새크라멘토 시내 캐피톨 공원 인근 N 스트리트 1228번지에 있는 월세 275달러짜리 아파트를 임대했다.[17][18] 이전 주지사들이 전용 리무진을 이용한 것과 달리, 브라운은 걸어서 출근했고 플리머스 새틀라이트 세단을 운전했다.[19][20][21] 브라운의 비서실장이었던 그레이 데이비스(Gray Davis)가 주지사 집무실의 카펫 구멍을 수리하자고 제안하자, 브라운은 "이 구멍은 주에 최소 5억 달러를 절약해 줄 겁니다. 의원들이 내 책상을 두드리며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답했다.[22]

브라운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J. 볼드윈(J. Baldwin)을 캘리포니아 적절 기술 사무소에, 심 반 더 라인(Sim Van der Ryn)을 주 건축가로,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를 특별 고문으로, 존 브라이슨(John Bryson)을 캘리포니아 주 수자원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캘리포니아 예술위원회 예산을 1300% 증액하고 예술가들을 위원회에 임명했으며,[23] 이전 어떤 주지사보다 많은 여성과 소수 민족을 공직에 임명했다.[23] 1977년에는 "최초의 지붕 태양광에 대한 세금 인센티브"를 후원했다.[24] 1975년에는 주의 석유 산업에 대한 세금 감면인 "고갈 공제"를 폐지했다.[25]

1975년, 브라운은 캘리포니아에 대한 베트남 이민에 반대하며, "실업 상태인 100만 명(캘리포니아 주민)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50만 명을 더 들여오자'고 하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고 말했다.[26][27]

브라운은 사형제도에 반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1977년 의회는 이를 번복했다.[28] 그는 사형에 반대하는 판사들을 임명했다. 로즈 버드(Rose Bird) 캘리포니아 대법원 수석 대법관은 "노동 친화적"이고 "언론 자유 친화적" 판결에 불만을 품은 기업의 선거 운동으로 1987년에 해임되었는데, 사형은 그녀에 대항하는 "날조된 핑계"였다.[29] 버드 대법원은 사형의 합헌성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30] 1960년 그는 아버지에게 캐릴 체스먼(Caryl Chessman)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여 60일간의 집행 유예를 얻어냈다.[31][32]

브라운은 균형 예산 수정안을 지지하고 제13호 발의안에 반대했다. 제13호 발의안은 재산세를 인하하고 도시와 군의 세수를 줄이는 것이었다.[33] 1978년 6월 제13호 발의안이 통과되자 주 정부 지출을 삭감했고, 의회와 함께 50억 달러 흑자의 상당 부분을 발의안 요건 충족과 도시, 군, 학교의 세수 감소분을 상쇄하는 데 사용하여 주 정부 의존도를 높였다.[16][33] 제13호 발의안 제안자인 하워드 자비스(Howard Jarvis)는 브라운의 대응을 칭찬하며 1978년 재선 운동 직전에 그를 위한 광고를 제작했다.[33] 이 발의안은 세수를 즉시 감소시켰고 세금 인상에는 3분의 2의 과반수가 필요했다.[34]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정부 연구소(Institute of Governmental Studies)의 맥스 나이만(Max Neiman) 교수는 브라운이 "지방 정부와 학군을 구제했다"고 평가했지만, "제13호 발의안이 해롭지 않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해롭다고 생각했다.[24] 브라운은 2014년 인터뷰에서 제13호 발의안의 대안을 위한 선거 운동에 "선거 자금"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5]

3. 3. 1. 제1기 (1975-1979)

197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제리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장 밥 모레티(Bob Moretti),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셉 L. 알리오토(Joseph L. Alioto), 하원의원 제롬 R. 월디(Jerome R. Waldie) 등과의 경선에서 승리했다. 아버지 팻 브라운(Pat Brown)의 인지도와 진보적인 행정에 대한 높은 평가 덕분이었다.[13] 본선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감사원장 휴스턴 I. 플러노이(Houston I. Flournoy)를 누르고 당선되었는데, 공화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반공화당 정서 때문에 패배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사임 90일 만의 일이었다. 브라운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은퇴한 공화당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뒤를 이었다.

취임 후, 브라운은 재정 보수주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14] ''아메리칸 컨서버티브(The American Conservative)''는 그가 레이건 주지사보다 훨씬 더 재정 보수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15] 그의 긴축 정책은 주 역사상 최대 규모인 약 50억 달러의 예산 흑자를 기록했다.[16] 그는 새로 지어진 2만 평방피트 규모의 주지사 관저(카마이클)를 사용하지 않고, 새크라멘토 시내 캐피톨 공원 인근 N 스트리트 1228번지에 있는 월세 275달러짜리 아파트를 임대했다.[17][18] 이전 주지사들이 전용 리무진을 이용한 것과 달리, 브라운은 걸어서 출근했고 플리머스 새틀라이트 세단을 운전했다.[19][20][21] 브라운의 비서실장이었던 그레이 데이비스(Gray Davis)가 주지사 집무실의 카펫 구멍을 수리하자고 제안하자, 브라운은 "이 구멍은 주에 최소 5억 달러를 절약해 줄 겁니다. 의원들이 내 책상을 두드리며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답했다.[22]

브라운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J. 볼드윈(J. Baldwin)을 캘리포니아 적절 기술 사무소에, 심 반 더 라인(Sim Van der Ryn)을 주 건축가로,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를 특별 고문으로, 존 브라이슨(John Bryson)을 캘리포니아 주 수자원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캘리포니아 예술위원회 예산을 1300% 증액하고 예술가들을 위원회에 임명했으며,[23] 이전 어떤 주지사보다 많은 여성과 소수 민족을 공직에 임명했다.[23] 1977년에는 "최초의 지붕 태양광에 대한 세금 인센티브"를 후원했다.[24] 1975년에는 주의 석유 산업에 대한 세금 감면인 "고갈 공제"를 폐지했다.[25]

1975년, 브라운은 캘리포니아에 대한 베트남 이민에 반대하며, "실업 상태인 100만 명(캘리포니아 주민)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50만 명을 더 들여오자'고 하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고 말했다.[26][27]

브라운은 사형제도에 반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1977년 의회는 이를 번복했다.[28] 그는 사형에 반대하는 판사들을 임명했다. 로즈 버드(Rose Bird) 캘리포니아 대법원 수석 대법관은 "노동 친화적"이고 "언론 자유 친화적" 판결에 불만을 품은 기업의 선거 운동으로 1987년에 해임되었는데, 사형은 그녀에 대항하는 "날조된 핑계"였다.[29] 버드 대법원은 사형의 합헌성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30] 1960년 그는 아버지에게 캐릴 체스먼(Caryl Chessman)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여 60일간의 집행 유예를 얻어냈다.[31][32]

브라운은 균형 예산 수정안을 지지하고 제13호 발의안에 반대했다. 제13호 발의안은 재산세를 인하하고 도시와 군의 세수를 줄이는 것이었다.[33] 1978년 6월 제13호 발의안이 통과되자 주 정부 지출을 삭감했고, 의회와 함께 50억 달러 흑자의 상당 부분을 발의안 요건 충족과 도시, 군, 학교의 세수 감소분을 상쇄하는 데 사용하여 주 정부 의존도를 높였다.[16][33] 제13호 발의안 제안자인 하워드 자비스(Howard Jarvis)는 브라운의 대응을 칭찬하며 1978년 재선 운동 직전에 그를 위한 광고를 제작했다.[33] 이 발의안은 세수를 즉시 감소시켰고 세금 인상에는 3분의 2의 과반수가 필요했다.[34]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정부 연구소(Institute of Governmental Studies)의 맥스 나이만(Max Neiman) 교수는 브라운이 "지방 정부와 학군을 구제했다"고 평가했지만, "제13호 발의안이 해롭지 않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해롭다고 생각했다.[24] 브라운은 2014년 인터뷰에서 제13호 발의안의 대안을 위한 선거 운동에 "선거 자금"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5]

3. 3. 2. 1976년 대통령 선거



브라운은 1976년 3월 16일 대통령 후보 경선을 위한 민주당 후보 경선 첫 번째 선거 운동을 시작했는데,[36] 이는 경선 시즌 후반이었고 일부 후보들이 선거 운동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후였다. 브라운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 나라는 부유하지만, 우리가 믿도록 유도된 것만큼 부유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한계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37][38]

브라운의 이름은 5월에 경선 투표용지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는 메릴랜드주, 네바다주, 그리고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주에서 승리했다.[39] 그는 오리건주 마감일을 놓쳤지만, 기입 후보로 출마하여 지미 카터와 아이다호주의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브라운은 종종 뉴저지주와 로드아일랜드주 경선에서 승리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브라운이 주장한 해당 주의 무소속 대의원들이 1위를 차지했다. 루이지애나주 주지사 에드윈 에드워즈의 지지로 브라운은 루이지애나 대의원 선출 대회에서 대의원 과반수를 확보했고, 따라서 루이지애나주는 남부 출신인 카터 또는 알라바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를 지지하지 않은 유일한 남부 주였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터의 추진력을 막을 수 없었고, 그의 라이벌은 19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차 투표에서 지명되었다. 브라운은 약 300표의 대의원 표를 얻어 3위를 차지했는데, 하원의원 모리스 우달과 카터에 근소하게 뒤처졌다.

3. 3. 3. 제2기 (1979-1983)



브라운은 1978년 공화당 소속 주 검찰총장 에벨 J. 영거(Evelle J. Younger)를 상대로 재선에 성공했다. 1979년 스티븐 락스(Stephen Lachs)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고등법원(Los Angeles County Superior Court) 판사로 임명하면서 미국 최초의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인 판사를 임명했다.[40] 1981년에는 메리 C. 모건(Mary C. Morgan)을 샌프란시스코 시 법원 판사로 임명하여 미국 최초의 공개적으로 레즈비언인 판사를 임명하기도 했다.[41] 브라운은 두 번째 임기를 마치면서 랜드 슈레이더(Rand Schrader)와 제롤드 크라이거(Jerold Krieger)를 포함해 총 5명의 동성애자 판사를 임명했다.[42][43] 그는 첫 번째 주지사 임기 동안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람을 어떤 직책에도 임명하지 않았지만, 캘리포니아 공립학교에서 동성애자의 근무를 금지하려는 1978년 브리그스 이니셔티브(Briggs Initiative) 실패를 언급하며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가 증가했다고 밝혔다.[40] 주지사는 또한 성인 간의 동성애 행위를 비범죄화하는 성인 동의 성관계 법(Consenting Adult Sex Act)인 AB 489에 서명하여 이러한 평판에 더했다. 그러나 그는 1977년 동성애 커플이 민사 결혼 허가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AB 607에 서명하기도 했다.

브라운은 새크라멘토 인근에서 새크라멘토-샌호아킨 강 삼각주(Sacramento–San Joaquin River Delta)를 돌아 중앙계곡 프로젝트로 물을 운반하고 남부 캘리포니아로 수출하는 주변 운하(Peripheral Canal) 프로젝트를 지지했다. 이 프로젝트는 1982년 투표 제안으로 유권자들에게 승인을 받았지만 부결되었다.[44]

강력한 환경 운동가로 명성을 쌓은 브라운은 1981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San Francisco Bay Area)에서 심각한 지중해 과실파리(medfly) 침입에 직면했다. 주 농업 산업과 미국 농무부 동식물 검역소( APHIS )는 그에게 항공 살포를 승인할 것을 권고했다. 그는 처음에 환경 보호 입장에 따라 지상 살포만 승인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지중해 과실파리의 번식 주기가 살포 속도보다 빨라 침입이 확산되었다. 한 달 이상이 지나자 수백만 달러 상당의 농작물이 파괴되었고 수십억 달러의 추가 피해가 위협받았다. 브라운 주지사는 침입에 대한 대규모 대응을 승인했다. 헬리콥터들이 밤에 말라티온(malathion)을 살포했고, 캘리포니아 주방위군(California National Guard)은 고속도로 검문소를 설치하고 많은 양의 지역 과일을 수거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해충학자들이 수백만 마리의 불임 수컷 지중해 과실파리를 방출하여 곤충의 번식 주기를 방해하려고 시도했다.

결국 침입은 근절되었지만, 주지사의 지연과 조치의 규모는 그 이후로도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부 사람들은 말라티온이 곤충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유독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브라운의 비서실장 B. T. 콜린스(B. T. Collins)는 기자 회견을 열고 공개적으로 말라티온이 든 잔을 마셨다. 많은 사람들은 말라티온이 사람에게 유독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말라티온이 포함된 에어로졸 스프레이는 자동차 페인트에 부식성이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다.[45][46]

브라운은 주 우주 아카데미 설립과 주의 비상 통신을 제공하기 위해 궤도에 발사될 위성(satellite) 구매를 제안했는데, 이는 실제로 채택된 제안과 유사하다. 1979년, ''시카고 선 타임즈(Chicago Sun-Times)''의 주외 칼럼니스트 마이크 로이코(Mike Royko)는 브라운의 당시 여자 친구(girlfriend)인 린다 론스태트(Linda Ronstadt)가 1978년 ''롤링 스톤(Rolling Stone)'' 잡지 인터뷰에서 그를 "문빔(Moonbeam)"이라고 농담으로 부른 것을 언급하며 그 별명을 사용했다.[47][48] 1년 후 로이코는 별명을 공개한 것을 후회했고,[49] 1991년에는 브라운이 다른 어떤 정치인만큼 진지하다고 선언하며 완전히 부인했다.[50][51]

몇몇 저명한 인물들은 자문이나 개인적인 역할로 그에게 우선적으로 서신 접근 권한을 받았다. 여기에는 미국 농장 노동자 연합(United Farm Workers of America) 창립자 세사르 차베스(Cesar Chavez), 휴렛 패커드(Hewlett-Packard) 공동 창립자 데이비드 패커드(David Packard), 노동 지도자 잭 헤닝(Jack Henning), 그리고 당시 캘리포니아 주 민주당 위원장 찰스 매넛(Charles Manatt)이 포함되었다. 우편물은 VIP로 라우팅되어 주지사에게 직접 배달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52]

1978년 샌프란시스코 펑크 밴드(punk band)인 데드 케네디스(Dead Kennedys)의 첫 번째 싱글 "캘리포니아 우버 알레스(California über alles)"가 ''썩은 채소를 위한 신선한 과일(Fresh Fruit for Rotting Vegetables)'' 앨범에서 발매되었다. 이 노래는 당시 주지사였던 브라운의 관점에서 당시 그가 파시스트적인 방식으로 자유주의적 사상을 강요한다고 여긴 것을 풍자하며, 작사가 젤로 비아프라(Jello Biafra)가 권력의 부식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논평하는 히피-파시스트 국가의 모습을 그렸다. 가상의 브라운은 비밀 경찰과 가스실을 관할하는 브라운 대통령이 되었다. 비아프라는 나중에 ''나드와르(Nardwuar)''와의 인터뷰에서 브라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브라운은 비아프라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았고, 이후 다른 정치인들에 대해 더 나쁘다고 여겨지는 노래들이 작곡되었다.[53]

브라운은 1982년 세 번째 임기에 출마하지 않고 1982년 캘리포니아 주 상원 의원 선거(1982 United States Senate election in California)에 출마했지만 샌디에이고 시장(Mayor of San Diego) 피트 윌슨(Pete Wilson)에게 패했다. 그는 1983년 1월 3일 당시 주 검찰총장이었던 조지 드크메지안(George Deukmejian)에게 주지사직을 이임했다.

3. 3. 4. 1980년 대통령 선거



1980년, 브라운은 지미 카터에게 재지명에 도전했다. 언론은 그가 1978년 공화당의 에벨 영거(Evelle Younger)를 130만 표 차이,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대 득표 차이로 누르고 주지사에 재선된 이후부터 그의 출마를 예상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대선 후보 지명을 위한 자금 모금과 여론 조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라는 더 유명한 후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널리 여겨졌다. 브라운의 1980년 플랫폼은 버크민스터 풀러의 미래 비전과 E. F. 슈마허의 "불교 경제학" 이론을 결합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선언했으며, 1976년보다 훨씬 확장되었다. 그의 "한계의 시대" 슬로건은 그의 말대로 "지구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섬기고, 우주를 탐험하라"는 약속으로 대체되었다.

그의 플랫폼의 세 가지 주요 내용은 균형 예산 수정안을 비준하기 위한 헌법 수정 협약 요구, "이 행성에 태양열 에너지를 제공하는 우주 기반 태양광 발전 위성"을 향한 첫걸음으로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자금 증액 약속,[54] 그리고 1979년 쓰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 반대였다. 1979년 1979년 에너지 위기 문제에 대해 브라운은 카터가 석유 산업과 맺었다고 주장하는 "악마와의 거래"를 비난했고, 연방 정부의 태양열 발전 연구 자금을 크게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국가 청년을 위한 의무적인 비군사적 국가 봉사의 아이디어를 지지했다. 그는 미국 국방부가 지원군을 줄이고 전투군 수를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브라운은 케네디의 보편적 건강 관리 요구와 카터의 고용주가 재난성 사적 건강 보험을 제공하도록 하는 의무화 요구를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55] 대안으로 그는 흡연이나 건강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금 공제 프로그램을 제안하며,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세금으로 우리를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55] 브라운은 또한 침술과 조산의 사용 확대를 촉구했다.[55]

브라운의 선거 운동이 제인 폰다, 톰 헤이든, 제시 잭슨과 같은 활동가를 포함하여 일부 보수적인 해설가들이 "극단주의자"라고 묘사한 사람들의 지지를 더 많이 얻기 시작하면서 그의 여론 조사 수치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브라운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10%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곧 위스콘신 프라이머리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야만 경주에 남을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발표해야 했다. 그는 예비 선거 기간 내내 위스콘신에서 좋은 여론 조사 결과를 얻었지만, 주도인 매디슨에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제작 및 연출한 특수 효과가 가득한 30분짜리 광고로 생방송 연설을 촬영하려던 시도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56]

3. 4. 1982년 상원의원 선거 및 공백기 (1983-1988)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브라운은 3선에 도전하지 않고 공화당 상원의원 S. I. 하야카와의 퇴임으로 공석이 된 미국 상원 의석에 출마했지만, 공화당 소속 샌디에이고 시장 피트 윌슨에게 패배했다.[57] 상원 선거 패배 후, 브라운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정치 경력이 끝났다고 여겼다.[57]

이후 브라운은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를 공부하며, 휴고 에노미야-라살에게서 야마다 코운-로시 밑에서 수행했다.[69][58] 그는 정치와는 다른 관점을 얻고자 인도 캘커타를 방문, 테레사 수녀의 호스피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69][59]

1988년 귀국한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민주당 위원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당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60] 그러나 TV 광고 부족 등으로 인해 일부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있었다. 1991년 초, 브라운은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상원 의석 출마를 선언했으나, 대선 출마를 위해 이를 중단했다.

3. 5. 캘리포니아 민주당 위원장 (1989-1991)

제리 브라운은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152] 1970년 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152] 1975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첫 당선되었다.[152]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경쟁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52]

3. 6. 1992년 대통령 선거

제리 브라운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맞서 대통령 출마 의사를 밝히자, 언론과 민주당 내 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선 운동이 큰 지지를 얻기 힘들다고 예상했다.[61] 그러나 브라운은 "미국을 부패, 직업주의, 그리고 워싱턴의 선거운동 컨설팅 연합으로부터 되찾기" 위한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다.[61] 필라델피아의 독립 기념관 계단에서 출마를 선언하며, 개인에게서만 선거 자금을 받고 100달러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52] 그는 의회 의원 임기 제한을 요구하고, 하원 금융 스캔들과 1990년 의회 급여 인상 등 의회 내 스캔들을 언급하며, 의회가 "돈 많은 특수 이익을 위한 편의점"이 되는 것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브라운은 선거 자금 개혁 정책 외에도 생활 임금 법안 지지, NAFTA와 같은 자유 무역 협정 반대 등 자신의 강령을 확장했다. 아서 래퍼가 만든 세금 정책을 중심으로 누진소득세를 고정 13% 세율의 평면세와 부가가치세로 대체하는 계획을 제시했고, 이는 ''뉴욕 타임스'', ''뉴 리퍼블릭'', ''포브스'' 등에서 지지를 받았다.[62] 제시 워커는 ''아메리칸 컨서버티브''에서 브라운이 "가장 좌익적이고 우익적인 사람처럼 보였다...임기 제한, 평면세, 사회 보장 제도 개혁, 그리고 교육부 폐지를 요구했다"고 평가했다.[62]

제한된 예산으로 브라운은 대안 미디어와 무료 전화 번호를 이용한 자금 조달 기법을 활용했다.[66] 그는 케이블 텔레비전과 토크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의 도덕적인 언어는 그를 "정치적 텔레번젤리스트"라고 불리게 했다.[63]

아이오와 코커스(1.6%)와 뉴햄프셔 경선(8%)에서는 부진했지만, 메인주, 콜로라도주, 네바다주, 버몬트주에서 승리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슈퍼 화요일 이후 폴 츠옹가스가 사퇴하고, 코네티컷주 경선에서 승리하며 빌 클린턴의 주요 경쟁자로 떠올랐다.

뉴욕주위스콘신주 경선을 앞두고 브라운은 제시 잭슨을 러닝메이트로 고려한다고 발표했는데,[64] 잭슨은 과거 반유대주의적 발언으로 유대인 사회의 불신을 받고 있었다.[64] 결국 브라운은 위스콘신주에서 클린턴에게 근소하게 패배하고(37%–34%), 뉴욕주에서는 크게 패배했다(41%–26%).

이후 브라운은 더 이상 경선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7개 주에서 이변을 일으키며 "획득한 득표수 대 모금액 비율"에서 높은 성과를 냈다.[65] 민주당 전당 대회 1차 투표에서 596명의 대의원 표를 얻어 클린턴을 제외한 다른 후보보다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클린턴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브라운은 화이트워터 스캔들에 대해 클린턴을 비판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66]

3. 7. 오클랜드 시장 (1999-2007)

제리 브라운은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 이후 샌프란시스코 패시픽 하이츠에서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잭 런던 지구로 이사했다.[67][68] 그는 그곳에서 전국적인 토크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67] 1995년에는 그의 정치적 입지가 낮아져 영화 제이드에서 캘리포니아의 가상 주지사가 제리 브라운만큼의 미래를 원하지 않으면 사건을 취하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였다.[70]

오클랜드에서 브라운은 지역 정치 문제에 활동가로 참여했으며, 1996년 오클랜드 시장 엘리후 해리스(Elihu Harris)에게 오클랜드 항만위원회 위원직 임명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67] 이후 해리스가 재선을 포기하자,[67] 브라운은 "심각하게 부패한" 양당제를 비난하며 민주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시장 선거에 출마, 5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68]

취임 전, 브라운은 오클랜드의 약한 시장 체제를 강한 시장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선거운동을 벌였고, 1998년 11월 오클랜드 유권자들은 X 조치를 지지하여 6년간 강력한 시장 모델로 시 정부를 전환했다.[68][71][72] 이 조치는 2004년에 영구화되었다.[72]

진보 진영은 브라운에게 진보적인 정치를 기대했지만, 그는 "진보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며, 정치 이념보다는 도심 재개발과 경제 성장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다.[73] 그는 미 해병대가 도시 전사 작전의 일환으로 오클랜드 항구 부지를 모의 군사 훈련에 사용하도록 허용하기도 했다.[74]

브라운은 경기 침체를 완화하고 폭스 극장, 오클랜드 항, 잭 런던 광장 등 1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여 도시 부흥을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68] 그는 오클랜드 도심에 1만 명의 주민을 추가로 유치한다는 "1만 명 계획"을 추진하여 잭 런던 지구와 메릿 호수 근처의 레이크사이드 아파트 지구 등에서 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68][75][76] 브라운은 시 기록에 따르면 1만 명의 주민 유치라는 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며, 이전 시장 행정부보다 더 많은 저렴한 주택을 건설했다.[75]

브라운은 오클랜드 학교 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관료적 싸움"으로 인해 그의 노력은 저해되었다.[68] 그는 대신 차터 스쿨인 오클랜드 예술학교와 오클랜드 군사 학교를 설립하는 데 집중했다.[68]

범죄율 감소를 위해 20개에 가까운 범죄 방지 계획을 후원했으나,[78] 범죄율은 전반적으로 13% 감소했지만, 임기 마지막 해에 살인 사건이 57% 증가하여 총 148건에 달했다.[68]

오클랜드 시장으로서 브라운의 첫 번째 임기는 KQED 다큐멘터리 "유명인과 도시"(2001)에 담겨 있다.[79] 브라운은 2002년 시장으로 재선되었다.

3. 8.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 (2007-2011)

2004년 브라운은 2006년 선거에서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 민주당 후보가 되는 데 관심을 표명했고, 2004년 5월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했다.[80] 그는 민주당 예선에서 로스앤젤레스 시 법무관 로키 델가딜로를 63% 대 37%로 물리쳤다. 본선에서 브라운은 공화당 상원의원 찰스 푸치지안을 56.3% 대 38.2%로 제압하며 캘리포니아주 전역 선거에서 가장 큰 승리 차이 중 하나를 기록했다.[80]

2009년 브라운


선거일 직전 몇 주 동안 브라운의 법무장관 출마 자격이 문제가 되었는데, 브라운은 이를 "공화당 출마자의 정치적 쇼"라고 불렀다(콘트라 코스타 군 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자 공화당 부위원장 후보인 톰 델 베카로).[80] 원고들은 브라운이 캘리포니아 정부법 제12503조("법무장관직에 출마하려면 그 직에 선출되거나 임명되기 직전 5년 동안 주 최고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에 따른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법률 전문가들은 브라운이 1965년 6월 14일 캘리포니아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그 이후로 계속 자격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 소송은 사소한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 1월 1일부터 2003년 5월 1일까지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협회의 자발적 휴면 상태였기 때문에 변호사로서 활동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사 자격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결국 소송은 기각되었다.[81][82]

검찰총장으로서 브라운은 사형 집행에 대한 항소에서 주를 대표하여 싸웠고, 사형제도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과 상관없이 법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을 위한 치사량 주사는 새로운 시설과 절차가 마련될 때까지 연방 판사 제레미 D. 포겔(Jeremy D. Fogel)에 의해 캘리포니아에서 중단되었다.[83] 캘리포니아 법원의 주 전역 모라토리엄 해제 후, 브라운은 2010년 앨버트 그린우드 브라운(Albert Greenwood Brown)의 사형 집행으로 사형제도를 재개하려 했다.[84] "캘리포니아의 법률을 집행하겠다"고 공약한 브라운의 민주당 선거 운동은 이 사건과 주지사 선거 간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했다. 공화당 후보 맥 휘트먼(Meg Whitman)을 지지했던 검사 로드 파체코(Rod Pacheco)는 그들이 이 사건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브라운이 정치적 이득을 위해 사형 집행을 이용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불공평할 것이라고 말했다.[85]

2008년 6월, 브라운은 주택담보대출업체인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Countrywide Financial)이 주택 소유주들이 자신의 상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위험한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하도록 "불공정하고 기만적인"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며 사기 소송을 제기했다.[86][87] 브라운은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이 허위 광고 및 불공정 거래 관행에 관한 주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이 소송은 또한 피고가 조정형 주택담보대출, 이자만 상환하는 주택담보대출, 서류 간소화 주택담보대출, 주택자산담보대출과 같은 특정 주택담보대출의 작동 방식에 대해 소비자들을 잘못 정보를 제공하여 오도하고, 대출 금리가 조정되기 전에 대출을 재융자할 수 있다고 차용자들에게 말했다고 주장했다.[88] 이 소송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가 컨트리와이드를 인수한 후인 2008년 10월에 합의되었다. 이 합의에는 최대 84억 달러에 달하는 문제가 있는 '착취적 대출'의 수정이 포함되었다.[89]

2008년 캘리포니아 주 헌법 개정안 8호(Proposition 8, 캘리포니아 주 제8호 발의안)는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논란이 많은 유권자 승인 개정안으로, 2009년 5월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에서 지지되었다.[90][91] 2010년 8월, 캘리포니아주 북부 연방 지방 법원(United States District Court for the Northern District of California)은 제8호 발의안이 미국 헌법 제14조 수정안의 적법 절차 조항(Due Process Clause)과 평등 보호 조항(Equal Protection Clause)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92] 당시 주지사였던 제리 브라운과 공화당 소속의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 전 주지사는 모두 이 판결에 대한 항소를 거부했다.[93] 주 항소 법원은 주지사나 검찰총장 제리 브라운에게 제8호 발의안을 변호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거부했다.[94]

3. 9. 캘리포니아 주지사 (20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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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공화당의 맥 위트먼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152] 이로써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두 번째로 취임하게 되었다. 2019년 1월 7일에 퇴임했다.

  • 2013년 6월 미국 연방 대법원이 캘리포니아주에서의 동성 결혼 금지를 헌법 위반으로 판결함에 따라 동성 결혼을 승인했다.
  • 불법 이민자에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는 법안에 찬성을 표명하고 서명했다. 2015년 1월부터 시행되었다.
  • 워싱턴주와 뉴욕주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파리협정 탈퇴 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파리협정 목표에 取り組む 미국 기후 동맹 결성을 주도하고, 직후 방문한 중국에서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여 기후변동 대책의 리더십을 장악했다고 하여 중국 정부와의 협력을 표명[153][154][155]하고 "캘리포니아-중국 청정 기술 파트너십"을 체결했다.[156] 시진핑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는 일대일로에 캘리포니아주의 참여를 제안하여 환영받았다.[157][158][159]


== 제3기 (2011-2015) ==

2010년 선거 이틀 전 새크라멘토(Sacramento)에서 열린 유세 현장의 브라운


브라운은 2010년 3월 2일 주지사 출마를 선언했다.[95] 2008년 초 관심을 표명한 브라운은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의 임기 만료 후 2010년 주지사 3선을 위한 탐색 위원회를 구성했다.[96][97]

이 선거에서 브라운의 공화당 상대 후보는 이베이(eBay) 전 사장 맥 위트먼이었다. 브라운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98] 새크라멘토 비,[99]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100] 샌호세 머큐리 뉴스,[101] 그리고 서비스 엠플로이즈 인터내셔널 유니온의 지지를 받았다.[102]

휘트먼과 브라운 모두 선거 기간 중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비판을 받았다.[103] 선거 일주일 전 2010년 여성 컨퍼런스(Women's Conference)에서 열린 마지막 토론에서 사회자 매트 로어는 두 후보에게 남은 선거 기간 동안 공격 광고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청중으로부터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103] 브라운은 이에 동의하여 자신과 휘트먼의 광고 중 각각 하나씩, 휘트먼이 동의한다면 유일하게 방영되어야 할 광고를 골랐지만, 앞서 주의 첫 여성 주지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큰 환호를 받았던 휘트먼은 "브라운 주지사의 입장이 드러나는 광고"를 계속 유지하겠다고 말하며 야유를 받았다.[104]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주지사 선거에 거의 2억 5천만 달러가 지출되었다고 보도했다.[105] 선거 운동 기간 중 최소 두 건의 지출 기록이 경신되었다. 휘트먼은 선거 운동에 자신의 돈 1억 4천만 달러를 사용하여 개인 지출 기록을 경신했고,[106] 독립 지출은 3천 170만 달러를 초과했으며, 그중 거의 2천 5백만 달러가 브라운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107] 휘트먼보다 훨씬 적은 자금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은 주지사 선거에서 53.8% 대 40.9%로 승리했다.

브라운은 임기가 만료된 공화당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뒤를 이어 2011년 1월 3일 세 번째 임기 주지사로 취임했다. 브라운은 많은 정부 프로그램을 주 정부에서 지방 정부로 이전하는 예산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처음 주지사를 역임했을 때의 추세와 반대되는 것이었다.[108]

2012년 6월 28일, 브라운은 캘리포니아의 157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11월 유권자들이 80억 달러의 세금 인상을 승인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사회복지 서비스에 대한 대규모 감축을 포함한 예산에 서명했다.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예산 삭감이 필요합니다. 장기간에 걸쳐 경제 성장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건설업계에서 60만 개의 일자리를 잃게 한 모기지 시장 붕괴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 우리는 전국적인 경기 침체에서 천천히 회복되고 있습니다. 경기 침체 이후 3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늘었]습니다. 100만 개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버락 오바마와 의회, 연준뿐만 아니라 앙겔라 메르켈(독일 총리), 중국, 유럽 연합, 그리고 세계 경제의 자기 조직적 특성에도 달려 있습니다."[109]

2012년 9월,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테드 리우가 제안한 법안에 서명했는데, 이 법안은 장례식 300피트 이내에서 시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벌금과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웨스트보로 침례교회의 시위에 대한 대응이었다.[110]

2014년 농부들과 캘리포니아 가뭄에 대해 논의하는 브라운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2012년 11월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주민 발의안 30 형태로 브라운이 제안한 세금 인상을 승인했다. 주민 발의안 30은 연소득 25만 달러가 넘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주 개인 소득세를 7년 동안 인상하고, 주 판매세를 4년 동안 0.25% 인상했다. 이를 통해 주는 공교육 예산 삭감을 거의 60억 달러 피할 수 있었다.[111]

2013년, 브라운은 250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샌프란시스코 베이 델타 보존 계획[112] (이후 캘리포니아 워터 픽스 앤드 에코 리스토어 프로젝트로 이름이 바뀜)을 제안했는데, 이 계획은 새크라멘토 강에서 신선한 물을 새크라멘토-샌조아킨 델타 아래로 주 수자원 프로젝트와 중앙 밸리 프로젝트의 취수장까지 운반하기 위해 높이 4층, 길이 48km의 대형 터널 두 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113] 이전의 주변 운하 프로젝트와 달리, 이 두 개의 터널은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는 기관과 사용자들이 자금을 조달하고 유권자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114]

2014년 7월, 브라운은 멕시코를 방문하여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과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과 진행 중인 아동 이민 위기에 대해 회담을 가졌다.[115]

2014년 9월 16일, 브라운 주지사는 지하수 관련 역사적인 법률 패키지에 서명했다. 이 계획은 지방 기관을 규제하고 20년 이내에 수자원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한 관리 계획을 시행할 것이다.[116]

== 제4기 (2015-2019) ==

2017년 4월 브라운 주지사와 미국 내무장관 라이언 징케의 만남


브라운은 2014년 2월 27일 차기 주지사 선거 출마를 발표했다. 6월 3일 치러진 예비 선거에서 150만 표 이상의 득표 차로 1위를 차지, 득표율 54.3%를 기록하며 공화당의 닐 카쉬카리(19.38% 득표)를 제치고 본선에 진출했다.

주지사 후보 토론은 단 한 차례만 열렸다. 2014년 9월 4일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토론에서 카쉬카리는 테슬라 공장 투자가 네바다에 유치된 것을 예로 들며 캘리포니아의 경제 환경 개선에 실패했다고 브라운을 비난했다.[118] 브라운은 투자에 필요한 초기 현금 지급이 캘리포니아 납세자들에게 불공평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118] 최근 식료품점에서의 비닐봉투 사용 금지 법안 등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되었다.[119]

브라운은 4선에 성공할 경우 교육과 형사 사법 정책 등에서 지방 정부에 권한을 이양하는 것을 지속하고, 민주당원들의 "새로운 프로그램과 지출에 대한 골드러시"에 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35]

본선에서 브라운은 60.0%의 득표율로 카쉬카리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 2015년 1월 5일(월요일)에 4선 선서를 했다. 전례 없는 4선에서 그의 목표는 캘리포니아 고속철도 건설, 주 수자원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터널 건설,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이었다. 의회가 그의 계획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발의안을 추진할 자금으로 2천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120]

2015년 10월, 브라운은 엄격한 기준을 충족하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의학적 조력 자살을 통해 죽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캘리포니아 생애 마감 선택법에 서명했다. 서명 당시 그는 관련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은 개인적인 메시지를 덧붙이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선택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121][122]

2015년 12월 18일, 브라운은 주지사 관저 주립 사적 공원의 일부인 역사적인 주지사 관저로 이사했다.

2016년, 브라운은 여성용 생리대를 주 판매세에서 면제하는 법안을 거부했다. 그는 기저귀 면세를 포함한 다른 법안들도 함께 거부하며, 이러한 면세 조치들이 연간 3억 달러의 주 수입 감소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작년에 말했듯이, 세금 감면은 새로운 지출과 마찬가지로 일반 재정에 비용을 초래한다"고 밝혔다.[123]

2018년 1월 10일 브라운이 발표한 2018-2019년 예산 계획에는 2019년 가을까지 캘리포니아 최초의 완전 온라인 커뮤니티 칼리지를 설립하는 데 1억 2천만 달러를 투입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124]

브라운의 마지막 임기 중 입법적 성과로는 경찰이 불법 이민자의 추방을 위해 미국 이민세관집행국(ICE)의 대부분 요청에 응하는 것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 주 보호법, 1990년 수준 대비 40%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2030년까지 달성하도록 규정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의 배출권 거래 제도를 연장하는 캘리포니아 상원 법안 32, 도로 보수 및 책임 법 통과 등이 있다. 브라운은 도로 보수 및 책임 법을 폐지하려는 발의안 6에 반대했으며,[125] 결국 그의 후임으로 개빈 뉴섬을 지지했다.[126]

브라운은 특히 셈프라 에너지로부터의 기부금과 그의 가족과의 유대관계 때문에 석유 및 가스 업계와의 유착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27]

2018년 9월까지 브라운은 2011년 취임 이후 1,100건이 넘는 사면을 집행했는데, 이는 최근 캘리포니아 주지사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128][129] 브라운은 82건 이상의 형량 감면을 집행했는데, 이는 적어도 1940년대 이후 최고치이다.[129]

3. 9. 1. 제3기 (2011-2015)



브라운은 2010년 3월 2일 주지사 출마를 선언했다.[95] 2008년 초 관심을 표명한 브라운은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 주지사의 임기 만료 후 2010년 주지사 3선을 위한 탐색 위원회를 구성했다.[96][97]

이 선거에서 브라운의 공화당 상대 후보는 이베이(eBay) 전 사장 메그 휘트먼(Meg Whitman)이었다. 브라운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98] 새크라멘토 비(The Sacramento Bee),[99]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100] 샌호세 머큐리 뉴스(San Jose Mercury News),[101] 그리고 서비스 엠플로이즈 인터내셔널 유니온(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의 지지를 받았다.[102]

휘트먼과 브라운 모두 선거 기간 중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비판을 받았다.[103] 선거 일주일 전 2010년 여성 컨퍼런스(Women's Conference)에서 열린 마지막 토론에서 사회자 매트 로어(Matt Lauer)는 두 후보에게 남은 선거 기간 동안 공격 광고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청중으로부터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103] 브라운은 이에 동의하여 자신과 휘트먼의 광고 중 각각 하나씩, 휘트먼이 동의한다면 유일하게 방영되어야 할 광고를 골랐지만, 앞서 주의 첫 여성 주지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큰 환호를 받았던 휘트먼은 "브라운 주지사의 입장이 드러나는 광고"를 계속 유지하겠다고 말하며 야유를 받았다.[104]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는 주지사 선거에 거의 2억 5천만 달러가 지출되었다고 보도했다.[105] 선거 운동 기간 중 최소 두 건의 지출 기록이 경신되었다. 휘트먼은 선거 운동에 자신의 돈 1억 4천만 달러를 사용하여 개인 지출 기록을 경신했고,[106] 독립 지출은 3천 170만 달러를 초과했으며, 그중 거의 2천 5백만 달러가 브라운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107] 휘트먼보다 훨씬 적은 자금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은 주지사 선거에서 53.8% 대 40.9%로 승리했다.

브라운은 임기가 만료된 공화당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의 뒤를 이어 2011년 1월 3일 세 번째 임기 주지사로 취임했다. 브라운은 많은 정부 프로그램을 주 정부에서 지방 정부로 이전하는 예산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처음 주지사를 역임했을 때의 추세와 반대되는 것이었다.[108]

2012년 6월 28일, 브라운은 캘리포니아의 157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11월 유권자들이 80억 달러의 세금 인상을 승인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사회복지 서비스에 대한 대규모 감축을 포함한 예산에 서명했다.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예산 삭감이 필요합니다. 장기간에 걸쳐 경제 성장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건설업계에서 60만 개의 일자리를 잃게 한 모기지 시장 붕괴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 우리는 전국적인 경기 침체에서 천천히 회복되고 있습니다. 경기 침체 이후 3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늘었]습니다. 100만 개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락 오바마(Barack Obama)와 의회, 연준뿐만 아니라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Merkel), 중국, 유럽연합, 그리고 세계 경제의 자기 조직적 특성에도 달려 있습니다."[109]

2012년 9월,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테드 리우(Ted Lieu)가 제안한 법안에 서명했는데, 이 법안은 장례식 300피트 이내에서 시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벌금과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웨스트보로 침례교회(Westboro Baptist Church)의 시위에 대한 대응이었다.[110]

2012년 11월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주민 발의안 30 형태로 브라운이 제안한 세금 인상을 승인했다. 주민 발의안 30은 연소득 25만 달러가 넘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주 개인 소득세를 7년 동안 인상하고, 주 판매세를 4년 동안 0.25% 인상했다. 이를 통해 주는 공교육 예산 삭감을 거의 60억 달러 피할 수 있었다.[111]

2013년, 브라운은 250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샌프란시스코 베이 델타 보존 계획[112] (이후 캘리포니아 워터 픽스 앤드 에코 리스토어 프로젝트로 이름이 바뀜)을 제안했는데, 이 계획은 새크라멘토 강(Sacramento River)에서 신선한 물을 새크라멘토-샌조아킨 델타(Sacramento-San Joaquin Delta) 아래로 주 수자원 프로젝트(State Water Project)와 중앙 밸리 프로젝트(Central Valley Project)의 취수장까지 운반하기 위해 높이 4층, 길이 48km의 대형 터널 두 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113] 이전의 주변 운하 프로젝트와 달리, 이 두 개의 터널은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는 기관과 사용자들이 자금을 조달하고 유권자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114]

2014년 7월, 브라운은 멕시코를 방문하여 멕시코 대통령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와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과 진행 중인 아동 이민 위기에 대해 회담을 가졌다.[115]

2014년 9월 16일, 브라운 주지사는 지하수 관련 역사적인 법률 패키지에 서명했다. 이 계획은 지방 기관을 규제하고 20년 이내에 수자원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한 관리 계획을 시행할 것이다.[116]

3. 9. 2. 제4기 (2015-2019)



브라운은 2014년 2월 27일 차기 주지사 선거 출마를 발표했다. 6월 3일 치러진 예비 선거에서 150만 표 이상의 득표 차로 1위를 차지, 득표율 54.3%를 기록하며 공화당의 닐 카쉬카리(Neel Kashkari)(19.38% 득표)를 제치고 본선에 진출했다.

주지사 후보 토론은 단 한 차례만 열렸다. 2014년 9월 4일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토론에서 카쉬카리는 테슬라(Tesla Motors) 공장 투자가 네바다에 유치된 것을 예로 들며 캘리포니아의 경제 환경 개선에 실패했다고 브라운을 비난했다.[118] 브라운은 투자에 필요한 초기 현금 지급이 캘리포니아 납세자들에게 불공평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118] 최근 식료품점에서의 비닐봉투 사용 금지 법안 등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되었다.[119]

브라운은 4선에 성공할 경우 교육과 형사 사법 정책 등에서 지방 정부에 권한을 이양하는 것을 지속하고, 민주당원들의 "새로운 프로그램과 지출에 대한 골드러시"에 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35]

본선에서 브라운은 60.0%의 득표율로 카쉬카리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 2015년 1월 5일(월요일)에 4선 선서를 했다. 전례 없는 4선에서 그의 목표는 캘리포니아 고속철도 건설, 주 수자원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터널 건설,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이었다. 의회가 그의 계획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발의안을 추진할 자금으로 2천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120]

2015년 10월, 브라운은 엄격한 기준을 충족하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의학적 조력 자살을 통해 죽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캘리포니아 생애 마감 선택법(California End of Life Option Act)에 서명했다. 서명 당시 그는 관련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은 개인적인 메시지를 덧붙이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선택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121][122]

2015년 12월 18일, 브라운은 주지사 관저 주립 사적 공원(Governor's Mansion State Historic Park)의 일부인 역사적인 주지사 관저로 이사했다.

2016년, 브라운은 여성용 생리대를 주 판매세에서 면제하는 법안을 거부했다. 그는 기저귀 면세를 포함한 다른 법안들도 함께 거부하며, 이러한 면세 조치들이 연간 3억 달러의 주 수입 감소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작년에 말했듯이, 세금 감면은 새로운 지출과 마찬가지로 일반 재정에 비용을 초래한다"고 밝혔다.[123]

2018년 1월 10일 브라운이 발표한 2018-2019년 예산 계획에는 2019년 가을까지 캘리포니아 최초의 완전 온라인 커뮤니티 칼리지를 설립하는 데 1억 2천만 달러를 투입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124]

브라운의 마지막 임기 중 입법적 성과로는 경찰이 불법 이민자의 추방을 위해 미국 이민세관집행국(U.S. 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ICE)의 대부분 요청에 응하는 것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 주 보호법(California Sanctuary Law SB 54), 1990년 수준 대비 40%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2030년까지 달성하도록 규정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의 배출권 거래 제도를 연장하는 캘리포니아 상원 법안 32(California Senate Bill 32), 도로 보수 및 책임 법(Road Repair and Accountability Act) 통과 등이 있다. 브라운은 도로 보수 및 책임 법을 폐지하려는 발의안 6(Proposition 6)에 반대했으며,[125] 결국 그의 후임으로 개빈 뉴섬(Gavin Newsom)을 지지했다.[126]

브라운은 특히 셈프라 에너지(Sempra Energy)로부터의 기부금과 그의 가족과의 유대관계 때문에 석유 및 가스 업계와의 유착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27]

2018년 9월까지 브라운은 2011년 취임 이후 1,100건이 넘는 사면을 집행했는데, 이는 최근 캘리포니아 주지사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128][129] 브라운은 82건 이상의 형량 감면을 집행했는데, 이는 적어도 1940년대 이후 최고치이다.[129]

4. 퇴임 이후

공직 생활을 마친 후 제리 브라운은 미국 비정부 기관(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와 블룸버그 재단 포함)과 중국 간의 기후 협력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고 있다.[130] 브라운은 또한 전 중국 기후 담당 장관인 셰전화/谢振华중국어와 함께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 캘리포니아-중국 기후 협력을 위한 새로운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130]

브라운은 캘리포니아의 산간 목장에 살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토종 식물 학회(California Native Plant Society)를 포함한 연구원들이 회의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2023년, 그의 목장에서 발견된 딱정벌레속 ''Bembidium''에 속하는 새로운 딱정벌레 종이 브라운과 그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B. brownorum''으로 명명되었다.[131]

5. 가족

2013년 브라운과 부인 앤 구스트


초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및 오클랜드 시장 재임 기간 동안 독신이었던 브라운은 유명 여성들과의 데이트로 주목을 받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가수 린다 론스태트였다.[132][133][134][135][136] 2005년 3월, 브라운은 1990년부터 교제해 온 여자 친구 앤 구스트(Gap(의류 소매업체)|Gap)의 전 최고 행정 책임자와의 약혼을 발표했다.[137] 두 사람은 2005년 6월 18일 오클랜드 시내 로툰다 빌딩에서 상원의원 다이앤 파인스타인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날 오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브라운의 부모가 결혼했던 곳에서 두 번째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브라운과 구스트는 180만 달러에 매입한 오클랜드 언덕의 집에 거주했다.[138] 2019년 현재, 그들은 콜루사군의 농장에 거주하고 있다.[139]

브라운은 1970년대 초에 만나 급여 명단에 올린 자신의 보좌관 자크 바르자기와 오랜 우정을 나눴다. 바르자기는 브라운이 시장으로 선출된 후 오클랜드 시 정부에 들어가 처음에는 시장의 무장 경호원으로 활동했다. 바르자기는 경찰이 그의 거주지에 가정 폭력 관련 신고를 받은 지 6일 후인 2004년 7월 브라운의 직원직을 그만두고 나중에 모로코와 노르망디로 이주했다. 바르자기는 2021년에 사망했다.[141][142]

2011년 4월, 브라운은 코 오른쪽에서 기저세포암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143] 2012년 12월, 언론 매체는 브라운이 초기 단계(정확한 단계와 등급은 명시되지 않음)의 국소 전립선암 치료를 받고 있으며 예후가 매우 좋다고 보도했다.[144]

2011년, 제리와 앤 구스트 브라운은 캘리포니아의 "퍼스트 독"이라고 불리는 펨브로크 웰시 코기 서터 브라운을 입양했다.[145] 서터는 종종 주지사와 함께 정치 행사에 참석하여 주지사의 지적인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146][147] 2015년, 두 사람은 두 번째 개인 펨브로크 웰시 코기/보더 콜리 믹스인 콜루사 "루시" 브라운을 입양했다.[148] 서터는 2016년 10월 암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 응급 수술을 받았다. 서터는 13세의 나이로 2016년 12월 암으로 사망했다.[149]

6.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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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70년 선거캘리포니아 주무장관23대민주당50.41%3,234,788표1위
캘리포니아주 주무장관 당선
1974년 선거캘리포니아 주지사34대민주당50.11%3,131,648표1위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1978년 선거캘리포니아 주지사34대민주당56.05%3,878,812표1위25px
1982년 선거상원의원 (캘리포니아 제1부)98대민주당44.78%3,494,968표2위낙선
1998년 선거오클랜드 시장47대무소속58.93%48,129표1위
오클랜드 시장 당선
2002년 선거오클랜드 시장47대무소속63.54%42,892표1위25px
2006년 선거캘리포니아 법무장관31대민주당56.29%4,756,184표1위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 당선
2010년 선거캘리포니아 주지사39대민주당53.77%5,428,458표1위25px
2014년 선거캘리포니아 주지사39대민주당59.97%4,388,368표1위25px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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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California after Arnold Algora Publishing 2009-09-14
[3] 논문 Rarick 2006
[4] 뉴스 The people's will http://www.economist[...] 2015-12-28
[5] 웹사이트 Cadets attend Governor's Inauguration Riverside Preparatory School https://web.archive.[...] 2015-12-28
[6] 웹사이트 Jerry Brown: Latin Scholar and One-Time Almost Priest https://www.theatlan[...]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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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Edmund G. Brown Jr. http://ag.ca.gov/ag/[...] California Office of the Attorney General
[24] 뉴스 Jerry Brown's Environmental Record Runs Deep https://www.nytimes.[...] 2010-10-08
[25] 뉴스 For Joe Shell, character trumped ideology in California politics http://www.sacbee.co[...] 2008-04-08
[26] 뉴스 When Jerry Brown Tried to Keep Immigrants Out of California https://www.wsj.com/[...] 2018-03-09
[27] 웹사이트 Williams: Why Dems changed course on illegal immigration https://www.bostonhe[...] 2019-01-17
[28] 논문 Schell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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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뉴스 Jerry Brown and the Rose Bird factor http://www.sfbg.com/[...] 2010-03-02
[31] 뉴스 Brown's rivals question commitment to death penalty http://www.sfchronic[...] 2006-06-02
[32] 뉴스 He Was Their Last Resort https://www.nytimes.[...] 1989-08-20
[33] 뉴스 The parable of 'Jerry Jarvis' https://www.latimes.[...] 2010-03-04
[34] 뉴스 A Candidate Finds Much Changed, and Little https://www.nytimes.[...] 2010-03-13
[35] 웹사이트 An experienced Jerry Brown vows to build on what he's already done https://www.latimes.[...] 2014-10-19
[36] 논문 (제목 없음)
[37] 뉴스 California rides the wave http://www.sfchronic[...] San Francisco Chronicle 1999-05-30
[38] 뉴스 THE 1992 CAMPAIGN: Candidate's Record; Brown Firm on What He Believes, But What He Believes Often Shift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92-03-30
[39] 웹사이트 Jerry Brown Presidential Campaign in Union Square - Bay Area Television Archive http://diva.sfsu.edu[...] 2016-11-08
[40] 서적 Out for Good: The Struggle to Build a Gay Rights Movement in America https://archive.org/[...] Simon & Schuster
[41] 간행물 Twenty-five years of courtroom trauma The Advocate 199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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