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빌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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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빌라니는 피렌체의 상인 중산층 출신으로, 14세기 초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플랑드르 등지를 여행하며 상업 및 정치 활동을 했다. 그는 피렌체의 연대기인 《누오바 크로니카》를 저술했으며, 도시의 역사와 경제, 사회상을 기록했다. 빌라니는 부오나코르시 회사의 파산으로 투옥되었고,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저술은 피렌체와 동시대 인물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성에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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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빌라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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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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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반니 빌라니 |
출생 | 1276년 또는 1280년 경 |
출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사망 | 1348년 |
사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직업 | 은행가, 공직자, 외교관, 연대기 작가 |
발음 |
2. 생애와 경력
조반니 빌라니는 피렌체 상인 가문 출신으로, 1300년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 유적을 보고 피렌체의 통사인 ''크로니카(Cronica)''를 집필하기로 결심했다.[4] 14세기 초, 페루치 은행의 대리인으로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플랑드르 등지를 여행하며 상업 및 정치 경험을 쌓았다.[9][10][11] 1322년 부오나코르시(Buonaccorsi) 회사로 옮겨[9] 1324년 공동 이사가 되었다.[9]
빌라니는 피렌체 시의 수도원장(1316년, 1317년, 1321년), 조폐국 책임자(1316년), 도시 성벽 재건 감독관(1324년) 등 여러 공직을 역임했다.[13] 알토파스치오 전투(Battle of Altopascio)에 참전했고,[47] 기근 시기에는 식량 공급 관리관(1329-1330년)을 맡아 시칠리아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등 식량 문제 해결에 힘썼다.[14] 볼로냐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으며(1329년),[9]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의 세례당 청동문 제작(1330-1331년)과 바디아의 ''종탑(campanile)'' 건설을 감독했다.[13][9][15]
1331년, 빌라니는 바라트리(barratry)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9] 이후 칼라브리아 공작 샤를(Charles, Duke of Calabria)이 부오나코르시에게 세금 징수권을 부여하면서 시민들의 평판이 나빠졌다.[9] 1342년 부오나코르시 회사가 파산하고, 발터 6세 드 브리엔느(Walter VI of Brienne)가 시뇨르로 추대되면서 빌라니를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에 대한 법적 조치가 중단되었다.[26]
발터 6세 드 브리엔느(Walter VI of Brienne) 축출 이후 소송이 재개되었고,[26] 빌라니는 1346년 ''스틴체 감옥(Carceri delle Stinche)''에 수감되었다.[27] 그는 자신의 재정적 어려움, 실각, 피렌체의 실패, 자연재해, 흑사병 등을 겪으며 종말과 최후 심판이 가까워졌다고 믿었다.[81] 1348년,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상업 활동
조반니 빌라니는 피렌체의 상인 중산층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빌라노 디 스톨디 디 벨린초네는 오래되고 존경받는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8][29] 1300년, 빌라니는 칼리말라 예술 조합(Arte di Calimala)(모직 마무리 공) 길드 회원이자 8인의 ''메르칸치아(mercanzia)'' 평의회에서 활동했다.[9]같은 해,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 유적과 저명한 역사적 인물들을 접한 후, 피렌체의 통사인 ''크로니카(Cronica)''를 집필하기로 결심했다.[4]
14세기 초, 페루치 은행을 위해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플랑드르 등지를 여행하며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1300년부터 1308년까지 이 은행의 주주였으며,[9][10] 회사의 대리인으로 해외를 여행하면서 지분 이익 외에 정기적인 급여도 받았다.[11] 1306년 5월 15일, 브뤼헤를 언급한 최초의 환전 계약 중 하나는 페루치 회사를 대표하는 조반니 빌라니와 시에나의 갈레라니 회사를 대표하는 토마소 피니 사이의 계약으로, 빌라니는 피니에게 대출을 제공했다.[12]
1322년까지 빌라니와 그의 형제 마테오는 경제 활동의 대부분을 부오나코르시(Buonaccorsi) 회사로 이전했다. 1324년, 조반니 빌라니는 부오나코르시의 공동 이사였다.[9] 부오나코르시는 은행 및 상품 무역 활동을 담당했으며,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 영국 및 지중해 여러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9]
1307년 피렌체로 돌아와 결혼 후 도시 정치 생활에 정착했다. 1316년과 1317년에 피렌체의 수도원장 중 한 명이 되었고, 피사와 루카와의 평화를 가져온 외교 전술에 참여했다.[13] 1316년부터 조폐국 책임자가 되어 이전 기록을 수집하고 피렌체에서 주조된 모든 동전의 등록부를 만들었다.[13]
1321년 다시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324년에는 도시 성벽 재건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다.[13] 루카의 영주인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Castruccio Castracani)와 싸우기 위해 피렌체 군대와 함께 갔고, 피렌체의 패배가 있었던 알토파스치오(Altopascio)에 있었다.
1328년 토스카나 전역에 기근이 발생하자, 1329년부터 1330년까지 피렌체를 기근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코뮌의 식량 공급 관리관을 맡았다. 시칠리아를 통해 탈라모네(Talamone)에서 곡물을 수입했고, 피렌체 코뮌은 구호 활동에 도시 금고에서 자금을 사용했으며, 도시의 모든 제빵사들은 정부에 의해 오븐을 징발당해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빵을 판매했다.[14]
1329년 볼로냐에서 베르트랑 드 푸제(Bertrand de Pouget) 추기경을 만나는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9] 1330년부터 1331년까지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의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감독했다.[13][9] 칼리말라 예술 조합(Arte di Calimala) 길드의 집정관으로 바디아의 ''종탑(campanile)'' 건설을 감독했다.[15] 1341년에는 피렌체가 빚을 갚도록 인질로 페라라로 파견되어 몇 달 동안 그곳에 거주했다.[16]
빌라니는 자신의 재정적 어려움, 중단된 경력, 국제적 문제에서 피렌체의 실패, 여러 자연 재해와 유럽에 흑사병이 시작되는 것을 목격한 후, 종말과 최후 심판이 가까워졌다고 확신하게 되었다.[81]
아버지인 빌라노 디 스토르도 빌라니는 피렌체의 유력 상인으로, 1300년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와 함께 시 행정위원(프리오네, Priore)을 역임했다. 같은 해, 조반니는 페루치 은행에 입행하여 상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의 딸”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는 연대기 편찬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인, 은행가로서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는 집필할 시간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부오나콜르시 은행으로 옮겨 1325년 공동 경영자가 되었다. 1316년, 1317년, 1321년에는 행정위원을 역임했고, 여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행정 및 재정 문서를 열람할 기회를 얻었다. 1331년, 시 방벽 건축 위원을 맡던 조반니는 공금 횡령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무혐의로 판명되었고, 이 시기부터 연대기 집필이 본격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2. 정치 참여와 외교 활동
빌라니는 1307년 피렌체로 돌아와 결혼하여 도시 정치 생활에 정착했다. 1316년과 1317년에 피렌체의 수도원장 중 한 명이 되었다. 동시에 피사와 루카와의 평화를 가져온 외교 전술에 참여했다.[13] 1316년부터 조폐국 책임자가 된 그는 이전 기록을 수집하고 피렌체에서 주조된 모든 동전의 등록부를 만들었다.[13] 1321년에 다시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324년에는 도시 성벽 재건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다.[13] 그는 루카의 영주인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Castruccio Castracani)와 싸우기 위해 피렌체 군대와 함께 갔고, 알토파스치오 전투에서 피렌체가 패배할 때 그곳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크로니카''에서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 사후 피렌체가 루카를 획득하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47]1328년 토스카나 전역에 기근이 퍼졌다. 1329년부터 1330년까지 빌라니는 피렌체를 기근의 최악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코뮌이 임명한 식량 공급 관리관이었다. 기아를 완화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시칠리아를 통해 탈라모네(Talamone)에서 곡물을 신속하게 수입했고, 피렌체 코뮌은 구호 활동에 도시 금고에서 많은 돈을 사용했다. 도시의 모든 제빵사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빵을 판매할 수 있도록 정부에 의해 오븐을 징발당했다.[14]
빌라니는 1329년에 볼로냐에서 베르트랑 드 푸제(Bertrand de Pouget) 추기경을 만나는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9] 1330년부터 1331년까지 그는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의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감독했다.[13][9] 동시에 ''칼리말라 예술 조합(Arte di Calimala)'' 길드의 집정관으로 활동했고 바디아의 ''종탑(campanile)'' 건설을 감독했다.[15] 그는 또한 피렌체가 빚을 갚도록 하기 위해 인질로 페라라로 파견되어 1341년 몇 달 동안 그곳에 거주했다.[16]
빌라니와 부오나코르시는 1331년 빌라니가 피렌체 주변의 새로운 3번째 성벽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바라트리(barratry) 혐의로 기소(무죄)된 이후로 좋지 않은 평판을 얻었다.[9] 칼라브리아 공작 샤를(Charles, Duke of Calabria)은 부오나코르시에게 피렌체 6개 지역 중 3개 지역에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부여했는데, 이는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빌라니의 명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9] 1342년 6월 초, 부오나코르시의 파트너와 대리인들은 채권자들의 파산 절차가 시작되자 갑자기 피렌체, 아비뇽, 나폴리에서 도망쳤다. 거의 모든 채권자들이 부오나코르시 은행에 예금을 가지고 있었다.[26]
2. 3. 부오나코르시 회사 파산과 투옥
조반니 빌라니는 1322년까지 부오나코르시(Buonaccorsi) 회사로 대부분의 경제 활동을 이전했고, 1324년에는 이 회사의 공동 이사가 되었다.[9] 부오나코르시는 은행 및 상품 무역 활동을 했으며,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 영국 및 지중해 여러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9]1328년 토스카나 전역에 기근이 발생하자, 1329년부터 1330년까지 빌라니는 피렌체를 기근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코뮌이 임명한 식량 공급 관리관이었다. 그는 시칠리아를 통해 탈라모네(Talamone)에서 곡물을 수입했고, 피렌체 코뮌은 구호 활동에 도시 금고에서 을 사용했다. 또한 도시의 모든 제빵사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빵을 판매할 수 있도록 정부에 의해 오븐을 징발당했다.[14]
빌라니는 글에서 종종 낙관적인 관점을 표현했지만, 발터 6세 드 브리엔느(Walter VI of Brienne)의 단명한 정권으로 인해 이러한 관점이 바뀌었다.[17] 그는 여러 가지 자연 재해와 유럽에 흑사병이 시작되는 것을 목격한 후, 종말과 최후 심판이 가까워졌다고 확신하게 되었다.[81] 1346년 부오나코르시 회사의 파산으로 빌라니는 주요 파트너였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18][19] 바르디 상회(Compagnia dei Bardi)(1346년) 등 다른 은행들도 파산했다. 빌라니는 이 손실을 회사의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Edward III of England)에 대한 대규모 금전 대출(상환되지 않음)로 돌렸지만, 역사가 에드윈 S. 헌트(Edwin S. Hunt)는 회사가 그러한 대출을 할 자원이 없었고, 회사 실패의 주요 원인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1]
빌라니와 부오나코르시는 1331년 빌라니가 피렌체 주변의 새로운 3번째 성벽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바라트리(barratry) 혐의로 기소(무죄)된 이후로 좋지 않은 평판을 얻었다.[9] 1342년 6월 초, 부오나코르시의 파트너와 대리인들은 채권자들의 파산 절차가 시작되자 갑자기 피렌체, 아비뇽, 나폴리에서 도망쳤다. 당시 거의 모든 채권자들이 부오나코르시 은행에 예금을 가지고 있었다.[26] 발터 6세 드 브리엔느(Walter VI of Brienne)는 거의 1년 동안 부오나코르시 및 기타 회사 파트너에 대한 모든 법적 조치를 중단했다.[26]
발터 6세 드 브리엔느(Walter VI of Brienne)의 축출 후, 1343년 10월에 회사에 대한 소송이 재개되었다.[26] 1346년 경제 위기 중에 빌라니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징역형을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스틴체 감옥(Carceri delle Stinche)''에 수감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상인이자 은행가로서의 길을 걸어온 빌라니에게는 집필할 시간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관례에 따라 대표자의 사망으로 페르치 은행이 일시 청산되자, 그는 재건된 페르치 은행이 아닌 친척이 경영하는 부오나코르시 은행으로 옮겨 1325년에 공동 경영자가 되었다. 동시에 피렌체 시의 여러 직책을 역임했는데, 1316년, 1317년, 1321년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행정위원에 취임했고, 여러 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면서 많은 행정 및 재정 문서를 열람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1331년, 시 방벽 건축 위원을 맡고 있던 조반니는 갑자기 공금 횡령 혐의로 고발당한다. 이는 곧 무혐의로 판명되었지만, 큰 정치적 좌절을 경험한 조반니의 연대기 집필은 이 시기부터 본격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반니의 은퇴 후, 피렌체의 정세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지며 신용 문제까지 발생했고, 백년전쟁(百年戰爭)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까지 겹쳐 1340년대에 들어서면서 피렌체는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결과, 그 지역의 주요 은행과 상사 대부분이 연이어 파산에 몰렸고, 1342년 부오나코르시 은행이 결국 파산하자 조반니는 채권자들과의 협상에 열중했다. 그러나 페르치 은행, 발디 은행 등 다른 회사들이 잇달아 도산하는 영향으로 혼란은 수습되지 않았고, 결국 1346년 2월에는 조반니 자신이 채권자들의 요구에 따라 일시 투옥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2. 4. 『신 연대기(Nuova Cronica)』 저술과 흑사병
1328년 토스카나 전역에 기근이 퍼졌다. 1329년부터 1330년까지 빌라니는 피렌체를 기근의 최악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코뮌이 임명한 식량 공급 관리관이었다. 증가하는 기아 수준을 완화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시칠리아를 통해 탈라모네(Talamone)에서 곡물을 신속하게 수입했고, 피렌체 코뮌은 구호 활동에 도시 금고에서 상당한 자금을 사용했다. 도시의 모든 제빵사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빵을 판매할 수 있도록 정부에 의해 오븐을 징발당했다.[14]빌라니는 글에서 종종 낙관적인 관점을 표현했지만, 피렌체에 초청되어 ''시뇨리아(signoria)''를 받은 폭군 발터 6세 드 브리엔느(Walter VI of Brienne)의 단명한 정권으로 인해 이것이 바뀌었다.[17] 그는 자신의 재정적 어려움, 중단된 경력, 국제적 문제에서 피렌체의 실패를 경험하고, 여러 가지 자연 재해와 유럽에 흑사병이 시작되는 것을 목격한 후, 종말과 최후 심판이 가까워졌다고 확신하게 되었다.[81] 부오나코르시 회사의 파산으로 빌라니는 주요 파트너였기 때문에 1346년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18][19] 페루치(1343년)와 바르디 상회(Compagnia dei Bardi)(1346년)와 같이 다른 은행들도 파산했다 (그들은 1336년 합작 투자로 동맹을 맺었다).[20]
빌라니와 부오나코르시는 1331년 빌라니가 피렌체 주변의 새로운 3번째 성벽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바라트리(barratry) 혐의로 기소(무죄)된 이후로 좋지 않은 평판을 얻었다.[9] 칼라브리아 공작 샤를(Charles, Duke of Calabria)은 부오나코르시에게 피렌체 6개 지역 중 3개 지역에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부여했는데, 이는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빌라니의 명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9] 1342년 6월 초, 부오나코르시의 파트너와 대리인들은 채권자들의 파산 절차가 시작되자 갑자기 피렌체, 아비뇽, 나폴리에서 도망쳤고, 거의 모든 채권자들이 부오나코르시 은행에 예금을 가지고 있었다.[26]
발터 6세 드 브리엔느(Walter VI of Brienne)의 폭력적인 축출 후, 1343년 10월에 회사에 대한 소송이 재개되었다.[26] 1346년 경제 위기 중에 빌라니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징역형을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스틴체 감옥(Carceri delle Stinche)''에 수감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피렌체의 정세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졌고, 신용 문제까지 발생했다. 백년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까지 겹쳐 1340년대에 들어서면서 피렌체는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결과, 그 지역의 주요 은행과 상사 대부분이 연이어 파산에 몰렸고, 1342년 부오나콜르시 은행이 결국 파산하자 조반니는 채권자들과의 협상에 열중했다. 그러나 페루치 은행, 발디 은행 등 주요 다른 회사들이 잇달아 도산하는 영향으로 혼란은 수습되지 않았고, 결국 1346년 2월에는 조반니 자신이 채권자들의 요구에 따라 일시 투옥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그리고 1348년 피렌체를 덮친 흑사병은 조반니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3. 『신 연대기(Nuova Cronica)』
빌라니는 1300년 로마의 희년(jubilee) 기간에[1]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여 큰 특사면을 내린 후, '크로니카(Cronica)'를 집필하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4] 그는 피렌체를 "로마의 딸이자 창조물"로 여기면서도, 로마의 쇠퇴와 피렌체의 부상을 강조하며 도시의 상세한 역사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37] 피렌체 역사의 제국적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샤를마뉴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프랑스와의 동맹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38]
빌라니는 피렌체 공화국이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귀족파(Guelphs)가 기벨린파(Ghibellines)에게 패배하면서 큰 좌절을 겪었다고 보았다.[41] 그는 1300년 또는 그 직후부터 '크로니카' 작업을 시작하여 1346년까지 연대기 순으로 저술하였다. 바벨탑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등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통일된 주제나 관점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47] 그는 교육받은 엘리트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vernacular)로 '크로니카'를 썼다.[82]
빌라니는 귀족파였지만,[9] 군주제보다 공화주의[9]를 선호했다. 철학자 브루네토 라티니를 "피렌체 사람들을 세련되게 만들고, ... 정치학에 따라 우리 공화국을 인도하고 통치하는 방법을 알도록 만든 스승"이라고 칭찬했다.[53][54] 그러나 그는 공화주의가 단 한 계급만을 대표하게 되면 폭정이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9] 그는 피렌체 대성당 건설과 새로운 종탑의 설계자로서 조토를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불렀다.[55] 또한,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를 오만하고, 경멸적이며, 내성적이라고 묘사하며 그의 최초 전기를 제공했다.[57]
역사가 루이스 그린은 '크로니카'가 도덕성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인 가정, 즉 과도함은 재앙을 초래하고, 역사는 옳고 그름의 투쟁에 의해 지배되며, 자연과 초자연적 사건은 신의 의지와 관련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분석한다.[58] 빌라니는 필립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반항하고 템플 기사단의 부를 압류한 것을 그의 불행과 연결시키며, 죄와 도덕성이 운명과 행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61] 그는 점성술과 하늘의 변화를 정치적 변화와 자연 재해의 징후로 믿었지만,[64] 하늘의 움직임이 사람들의 행동을 항상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신의 계획을 능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3. 1. 구성과 내용
빌라니의 저작은 도시가 부유하고 강력한 위치로 부상했을 때 피렌체 정치 세력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탈리아어 연대기이다. 그의 저작 이전에는 부족하고 부분적으로 전설적인 기록만 존재했으며, 1115년 투스카니 백작 부인 마틸다 사망 이전의 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3] 20세기 중반 역사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빌라니가 피렌체 역사에 대한 "성숙한 표현"을 제공했다고 말한다.[36]빌라니는 1300년 로마의 희년(jubilee) 동안[1]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여 큰 특사면을 내린 후 '크로니카(Cronica)'를 집필하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4] 빌라니는 피렌체를 "로마의 딸이자 창조물"로 여기지만, 로마의 쇠퇴와 피렌체의 부상을 강조하며 도시의 상세한 역사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37]
빌라니는 피렌체 공화국이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귀족파(Guelphs)가 기벨린파(Ghibellines)에게 패배하면서 영광으로 가는 길에 큰 좌절을 경험했다고 확신했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니는 1293년까지 도시의 탁월한 번영과 평온함은 더 이상 밤에 성문이 잠기지 않았고, 게이트 요금(전쟁 시대에 흔함)과 같은 간접세가 부과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말한다.[42]
1300년 또는 그 직후 빌라니는 12권으로 나뉜 '크로니카'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6권은 바벨탑 이야기부터 1264년까지 전통적으로 성경적인 시대부터 시작하는 피렌체의 대체로 전설적인 역사를 다룬다.[45][46] 두 번째 단계인 6권은 1264년부터 그의 시대까지, 1346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45] 그는 '크로니카'의 사건들을 연도별로 개괄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통일된 주제나 관점이 부족한 에피소드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다는 비판을 받아왔다.[47] 그는 교육받은 엘리트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vernacular)로 '크로니카'를 썼다.[82]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빌라니는 광범위한 여행과 공식 및 개인 문서에 대한 접근 덕분에 많은 주제에 대한 내부자의 지식을 종종 보여주었다.[9] 예를 들어, 그는 백년 전쟁 중 크레시 전투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 중 하나를 썼다.[49]
빌라니는 아마도 그가 보존한 통계 데이터의 가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50] 예를 들어, 그는 피렌체에 은행 80개, 제빵소 146개, 도시 판사 협회 회원 80명(서기 600명), 의사와 외과 의사 60명, 향신료 가게와 상인 100명 등 상세한 경제 통계를 기록했다.[51][52]
빌라니는 귀족파였지만,[9] 군주제보다 공화주의[9]를 선호하며, 철학자 브루네토 라티니를 칭찬했다.[53][54] 그러나 빌라니는 공화주의가 당파적 분쟁을 낳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9]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13][56]에 대한 최초의 전기를 제공한다.[57]
역사가 루이스 그린은 '크로니카'가 도덕성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인 가정[58]으로 쓰여졌다고 쓴다.[58] 이러한 일반적인 가정은 과도함이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 역사는 옳고 그름 사이의 투쟁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 그리고 자연 세계의 사건과 이러한 사건에 개입하는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58]
빌라니는 신의 섭리 외에도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다른 사건들을 인정했다. 그는 성인들이 나중에 사실로 판명된 예언적 진술을 제공한 많은 사례에 대해 썼다.[63] 그는 또한 점성술과 하늘의 변화를 정치적 변화, 통치자와 교황의 죽음, 자연 재해의 징후로 믿었다.[64]
『신년대기』(Nuova Cronica)는 총 12권으로 구성되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 6권은 바벨탑부터 프리드리히 2세까지를 다룬다. 후반 6권은 1266년 샤를 당주의 시칠리아 왕 계승부터 시작하여, 1346년에 끝맺는다.
3. 2. 특징과 관점
빌라니의 저작은 도시가 부유하고 강력한 위치로 부상했을 때 피렌체 정치 세력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탈리아어 연대기이다. 그의 저작 이전에는 부족하고 부분적으로 전설적인 기록만 존재했다.[3] 20세기 중반 역사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colai Rubinstein)은 빌라니가 피렌체 역사에 대한 "성숙한 표현"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36]빌라니는 자신의 글에서 피렌체를 "로마의 딸이자 창조물"로 여겼지만, 로마의 쇠퇴와 피렌체의 부상을 강조하며 도시의 상세한 역사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했다.[37] 역사가 J. K. 하이드(Kenneth Hyde)는 피렌체가 로마의 딸이라는 생각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운명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았다.[39] 빌라니는 로마 쇠퇴의 원인으로 교회의 분열과 교황 제도에 대한 반란을 지목했다.[40]
빌라니는 1293년까지 도시의 탁월한 번영과 평온함은 더 이상 밤에 성문이 잠기지 않았고, 게이트 요금(전쟁 시대에 흔함)과 같은 간접세가 부과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고 주장했다.[42] 그러나 역사가 펠리시티 라테(Felicity Ratté)는 도시 성문 잠금 책임자의 고용을 지정한 1290년 피렌체 법령을 고려할 때 이러한 논평의 타당성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42]
빌라니는 교육받은 엘리트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vernacular)로 '크로니카'를 썼다.[82] 그의 연대기에는 그가 들은 대로 보고된 역사적 에피소드가 끼어 있고, 때로는 해석이 거의 없었다.[3]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역사적 부정확성이 발생했다.[50]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빌라니는 광범위한 여행과 공식 및 개인 문서에 대한 접근 덕분에 많은 주제에 대한 내부자의 지식을 종종 보여주었다.[9] 예를 들어, 그는 백년 전쟁 중 크레시 전투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 중 하나를 썼다.[49]
빌라니는 그가 보존한 통계 데이터의 가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50] 예를 들어, 그는 피렌체에 은행 80개, 제빵소 146개가 있다고 기록했다.[51]
빌라니는 귀족파(Guelph)였지만,[9] 그의 책은 당파적 고려 사항보다는 유용하고 진실된 것에 대한 탐구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귀족파 정치와는 달리 그는 군주제보다 공화주의[9]를 선호하며, 철학자 브루네토 라티니를 칭찬했다.[53][54] 그러나 빌라니는 자신의 글에서 공화주의가 당파적 분쟁을 낳는다고 인정했다.[9] 조토 디 본도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빌라니는 그를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불렀다.[55]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또한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한 최초의 전기를 제공한다.[57]
역사가 루이스 그린(Louis Green)은 '크로니카'가 도덕성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인 가정[58]으로 쓰여졌으며, 이는 작품의 구성을 형성하여 "사건을 반복되는 의미 패턴으로 전환"했다고 썼다.[58] 이러한 일반적인 가정은 과도함이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 역사는 옳고 그름 사이의 투쟁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 그리고 자연 세계의 사건과 이러한 사건에 개입하는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58]
빌라니에게 죄와 도덕성은 운명과 행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 이론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궁극적인 운명에 잘 맞았다.[61] 그러나 그린은 빌라니의 글에서 부도덕이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이 이론에서 면제되거나 면역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중요한 지상의 권력, 즉 피렌체와 교황청이 있다고 지적한다.[62]
신의 섭리 외에도 빌라니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다른 사건들을 인정했다. 그는 타글리아코초 전투의 결과에 대한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예언과 같은 성인들이 나중에 사실로 판명된 예언적 진술을 제공한 많은 사례에 대해 썼다.[63] 그는 또한 점성술과 하늘의 변화를 정치적 변화, 통치자와 교황의 죽음, 자연 재해의 징후로 믿었다.[64]
마릴린 아론베르그 라빈(Marilyn Aronberg Lavin)은 빌라니가 1290년 성체(성찬식)을 파괴하려고 했던 프랑스 유대인의 이야기를 듣고 플랑드르(Flanders)에서 페루치(Peruzzi) 대표로 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한다.[65]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이 전설이 이탈리아 문학에 처음 등장한 것을 표시한다.[66]
3. 3. 통계 자료와 경제적 통찰
빌라니는 그가 보존한 통계 데이터의 가치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50] 그는 피렌체의 경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했다.- 은행: 80개
- 제빵소: 146개
- 도시 판사 협회 회원: 80명 (서기 600명)
- 의사 및 외과 의사: 60명
- 향신료 가게와 상인: 100명
-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 8,000~10,000명
- 4개의 서양학(Scholastic) 지식 학교에 다니는 학생: 550~600명
- 도시가 매주 소비하는 곡물: 13,200 부셸(bushel)
-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의 작업장에서 매년 생산되는 직물: 7만~8만 개 (총 가치는 ) [51][52]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신년대기』(Nuova Cronica) 제11권에 있는 1338년경 피렌체의 풍경과 경제 상황에 대한 빌라니의 정밀한 묘사에 주목했다. 빌라니는 경제, 특히 상업 관련 묘사에서 합리적인 서술을 펼치고 있다.
3. 4. 주요 사건과 인물 묘사
빌라니의 저작은 도시가 부유하고 강력한 위치로 부상했을 때 피렌체 정치 세력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탈리아어 연대기이다. 그의 저작 이전에는 부족하고 부분적으로 전설적인 기록만 존재했으며, 1115년 투스카니 백작 부인 마틸다 사망 이전의 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3] 20세기 중반 역사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이 초기 연대기의 전설적인 설명에 대해 "그 시대의 표준보다 학식과 비판적 능력이 훨씬 낮은 편집자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36] 반대로 루빈스타인은 빌라니가 피렌체 역사에 대한 "성숙한 표현"을 제공했다고 말한다.[36]빌라니는 자신의 글에서 피렌체를 "로마의 딸이자 창조물"로 여기지만, 로마의 쇠퇴와 피렌체의 부상을 강조하며 도시의 상세한 역사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37] 피렌체 역사의 제국적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빌라니는 샤를마뉴에 의해 재건되었을 때 도시가 두 번째 건설을 받았다고 주장한다.[38] 역사가 J. K. 하이드는 피렌체가 로마의 딸이라는 생각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운명감을 주었을 것이며, 샤를마뉴에 의한 두 번째 건설은 프랑스와의 동맹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했다고 쓴다.[39]
빌라니는 로마의 쇠퇴에 대한 이유로 교회의 분열과 교황 제도에 대한 반란을 들었고, 오토 1세의 등장은 피렌체가 피렌체가 정복한 피에솔레와 같은 교황 권위의 적들에 맞서 일어설 수 있는 조건을 허용했다.[40] 빌라니는 피렌체 공화국이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귀족파가 기벨린파에게 패배하면서 영광으로 가는 길에 큰 좌절을 경험했다고 확신했다.[41]
빌라니는 귀족파였지만,[9] 군주제보다 공화주의를 선호하며,[9] 철학자 브루네토 라티니를 "피렌체 사람들을 세련되게 만들고, 그들에게 좋은 말을 하고, 정치학에 따라 우리 공화국을 인도하고 통치하는 방법을 알도록 만든 스승이자 개척자"라고 칭찬했다.[53][54] 그러나 빌라니는 공화주의는 단 한 계급만을 대표하게 되면 폭정이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9]
피렌체 대성당 건설과 새로운 종탑의 설계자로서의 화가 조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빌라니는 그를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불렀다.[55]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또한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한 최초의 전기를 제공하는데, 빌라니는 그를 오만하고, 경멸적이며, 내성적이라고 묘사했다.[57] 1322년 개정된 '크로니카'에서 빌라니는 단테의 전기와 '신곡'에서 발췌한 인용구의 양을 줄였다.[46]

역사가 루이스 그린은 '크로니카'가 도덕성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인 가정[58]으로 쓰여졌으며, 이는 작품의 구성을 형성하여 "사건을 반복되는 의미 패턴으로 전환"했다고 쓴다.[58] 이러한 일반적인 가정은 과도함이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 역사는 옳고 그름 사이의 투쟁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 그리고 자연 세계의 사건과 이러한 사건에 개입하는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58]

빌라니에게 죄와 도덕성이 운명과 행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 이론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궁극적인 운명에 잘 맞았다.[61] 카페 왕가는 한때 교회의 챔피언이자 교황청의 동맹이었다.[61] 그러나 빌라니는 필립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반항하고 템플 기사단의 부를 압류한 것을 필립의 사냥 사고로 인한 죽음, 세 아들의 아내들의 간음, 상속인의 죽음, 심지어 백년 전쟁 초기에 프랑스의 패배와 같은 후기 카페 왕조의 불행과 연관시켰다.[61]
신의 섭리 외에도 빌라니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다른 사건들을 인정했다. 그는 클레멘트 4세의 예언과 같은 성인들이 나중에 사실로 판명된 예언적 진술을 제공한 많은 사례에 대해 썼다.[63] 그는 또한 점성술과 하늘의 변화를 정치적 변화, 통치자와 교황의 죽음, 자연 재해의 징후로 믿었다.[64] 그러나 그는 하늘의 움직임이 항상 사람들의 행동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을 능가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64]

마릴린 아론베르그 라빈은 빌라니가 1290년 성체(거룩한 친교)를 파괴하려고 했지만, 빵이 찔렀을 때 심하게 출혈하고 끓는 물에 넣었을 때 살로 변했기 때문에 실패한 프랑스 유대인의 이야기를 듣고 플랑드르에서 페루치 대표로 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한다.[65]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이 전설이 이탈리아 문학에 처음 등장한 것을 표시하며, "빌라니의 보고서는 전통의 독립적인 이탈리아 분기를 확립하는 세부 사항을 포함한다"라고 라빈은 말한다.[66]
4. 유산과 비판
조반니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그가 직접 겪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 덕분에 현대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75] 특히 브리엔의 발터 6세의 폭정에 대한 후대 기록들은 빌라니의 저술에 크게 의존한다.[34]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한 빌라니의 기록은 단테 연구에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76]
그러나 빌라니의 저술에는 비판과 한계점도 존재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먼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는 부정확한 전설이나 풍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75] J.K. 하이드는 빌라니의 『누오바 크로니카』가 피렌체의 토착어 전통을 대표하며 읽기 쉬운 이야기로 대중에게 어필했지만, 피렌체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후대 연대기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39][74]
빌라니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지만, 정확한 세부 사항에는 약점을 보였다.[75] 피에솔레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전설에 의존했고,[79] 1315-1317년 대기근 당시 앤트워프 인구 사망률 추정치는 신뢰하기 어렵다.[80] 루이 그린은 빌라니가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하여 역사가의 관점을 결여했고, 피렌체 중심적 사고로 인해 객관성을 잃었다고 지적한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중세 피렌체 상인 계층의 관점을 보여주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82]
4. 1. 역사적 의의
빌라니는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병자들을 간호하던 사제들과 사람들이 쉽게 감염되어 희생자들이 버려졌다고 기록했다. 그는 역병이 끝나는 시점을 기록하려 했으나, 같은 역병으로 사망하여 빈칸을 채우지 못했다.[68][69][70] 그는 피렌체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에 매장되었다.[9]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당시 중요한 저술로 여겨졌으며, 그의 형제와 조카가 이를 이어갔다.[9][45] 그의 형제인 마테오는 1363년에 역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크로니카』 작업을 계속했다.[4] 마테오의 아들인 필립포 빌라니는 1364년에 『크로니카』를 완성했다.[4] 필립포의 연대기에는 조토와 프란체스코 란디니를 포함한 많은 피렌체 예술가와 음악가들의 삶에 대한 세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피렌체의 총리인 콜루치오 살루타티의 승인을 받았다.[71] 15세기 피렌체 역사가인 도메니코 디 레오나르도 부오닌세니도 그의 『피렌체 역사』의 처음 두 장에서 빌라니의 『크로니카』 요약을 실었다.[72]16세기까지는 인쇄된 형태의 『크로니카』가 여러 판본으로 출판되었다.[73] 1537년과 1554년에 제작된 것을 포함하여 많은 필사본 삽화 사본도 있었다.[73]
역사가 J.K. 하이드는 빌라니의 ''누오바 크로니카''가 피렌체의 강력한 토착어 전통을 대표하며, 당시 사람들에게 "읽기 쉽고, 인간적인 흥미로 가득 차 있으며, 때때로 노벨라 스타일의 일화로 양념이 된" 이야기로 어필했다고 말한다.[39] 또한 빌라니의 피렌체 공동체 정치에 대한 비판이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 사이에서 공식적인 순응을 거부하는 개인적 표현의 경향을 촉진했다고 지적한다.[74] ''크로니카''는 엄청나게 풍부한 역사 기록이며, 현대 역사가들에게 가장 큰 가치는 빌라니가 생애 동안 경험한 사람들, 데이터 및 사건에 대한 묘사이다.[75] 역사가 마크 필립스는 브리엔의 발터 6세의 폭정에 대한 후속 피렌체 기록들이 모두 빌라니의 ''크로니카''라는 1차 자료에 기반을 두었다고 말한다.[34] 빌라니가 단테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쓴 저술은 단테의 작품, 추론 및 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76] 20세기 초 빌라니 작품의 새로운 판본이 재인쇄되면서 단테 연구의 부흥에 필요한 자료가 제공되었다.[77] 그러나 빌라니가 수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묘사는 부정확한 전통적인 기록, 대중적인 전설 및 풍문으로 가득 차 있다.[75]
빌라니는 자신의 시대와 관련하여 피렌체의 사회 및 생활 습관에 대한 귀중한 세부 정보를 현대 역사가들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부유한 피렌체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큰 시골집을 짓는 추세가 커지고 있었다.[78] 그러나 20세기 초의 역사가 필립 윅스티드는 빌라니에 대해 "자신의 시대와 피렌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을 다룰 때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이지만, 정확한 세부 사항은 결코 그의 강점이 아니며, 먼 시대와 장소를 다룰 때는 희망 없이 신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75]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빌라니의 연대기가 이전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발전되었지만, 피에솔레와 같은 도시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설과 풍문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79] 빌라니가 앤트워프 인구의 3분의 1이 1315-1317년 대기근 동안 사망했다고 추정한 것에 대해 20세기 초 역사가 헨리 S. 루카스는 "추측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그러한 통계에는 별로 신뢰할 수 없다"라고 썼다.[80] 루이 그린은 연대기 작가이지 완전한 역사가가 아닌 빌라니의 한계를 지적했다.[81]
루이 그린은 조반니의 ''크로니카''가 당시 피렌체 상인 공동체의 전망을 표현했지만, "그 전망이 전형적인 중세적 태도에서 초기 현대적 태도로 어떻게 수정되었는지"에 대한 귀중한 지표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82] 또한 빌라니의 ''크로니카''가 14세기에 발견되는 세 가지 유형의 연대기 중 하나이며, 주로 세계사인 유형이라고 썼다.[82] 다른 유형으로는 디노 콤파니의 백색 길파와 흑색 길파에 대한 기록과 같이 특정 역사적 사건의 연대기 또는 도나토 벨루티나 조반니 모렐리가 쓴 것처럼 한 가족의 운명과 사건에 초점을 맞춘 더 가정적인 연대기가 있을 것이다.[83]
4. 2. 비판과 한계
역사가 J.K. 하이드는 빌라니의 ''누오바 크로니카(Nuova Cronica)''가 피렌체의 강력한 토착어 전통을 대표하며, 당시 사람들에게 "읽기 쉽고, 인간적인 흥미로 가득 차 있으며, 때때로 노벨라(novella) 스타일의 일화로 양념이 된" 이야기로 어필했다고 평가했다.[39] 또한 빌라니의 피렌체 공동체 정치 비판은 후대 연대기 작가들 사이에서 공식적인 순응을 거부하는 개인적 표현 경향을 촉진했다고 지적했다.[74] ''크로니카(Cronica)''는 풍부한 역사 기록이며, 현대 역사가들에게 가장 큰 가치는 빌라니가 생애 동안 경험한 사람들, 데이터 및 사건에 대한 묘사이다.[75] 역사가 마크 필립스는 브리엔의 발터 6세의 폭정 정권에 대한 후속 피렌체 기록들(예: 레오나르도 브루니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기록)이 모두 빌라니의 ''크로니카(Cronica)''라는 1차 자료에 기반을 두었다고 말한다.[34]빌라니가 단테 알리기에리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쓴 저술은 단테의 작품, 추론 및 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으며,[76] 20세기 초 빌라니 작품의 새로운 판본이 재인쇄되면서 단테 연구 부흥에 필요한 자료가 제공되었다.[77] 그러나 빌라니가 수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묘사는 부정확한 전통적인 기록, 대중적인 전설 및 풍문으로 가득 차 있다.[75]
빌라니는 자신의 시대와 관련하여 피렌체의 사회 및 생활 습관에 대한 귀중한 세부 정보를 현대 역사가들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부유한 피렌체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큰 시골집을 짓는 추세와 열풍이 커지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78] 그러나 20세기 초의 역사가 필립 윅스티드는 빌라니에 대해 "자신의 시대와 피렌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을 다룰 때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이지만, 정확한 세부 사항은 결코 그의 강점이 아니며, 먼 시대와 장소를 다룰 때는 희망 없이 신뢰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75]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빌라니의 연대기가 이전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발전되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빌라니는 여전히 피에솔레와 같은 도시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설과 풍문에 의존했다.[79] 빌라니가 앤트워프 인구의 3분의 1이 1315-1317년 대기근 동안 사망했다고 추정한 것에 대해, 20세기 초 역사가 헨리 S. 루카스는 "추측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그러한 통계에는 별로 신뢰할 수 없다"라고 썼다.[80]
루이 그린은 연대기 작가이지 완전한 역사가가 아닌 빌라니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그는 역사가의 어떤 주제적 구성도 없이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변화하는 현재의 교훈을 재해석된 과거에 되돌릴 수 없었다. 또한 그의 피렌체 정당화와 미화에 대한 헌신은 그의 도시의 변화된 운명을 그가 자신의 시대의 위대한 왕조의 역사에서 보여준 쇠퇴 패턴의 반복으로 보게 하지 않았다.[81]
루이 그린은 조반니의 ''크로니카(Cronica)''가 당시 피렌체 상인 공동체의 전망을 표현했지만, "그 전망이 전형적인 중세적 태도에서 초기 현대적 태도로 어떻게 수정되었는지"에 대한 귀중한 지표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82] 그린은 빌라니의 ''크로니카(Cronica)''가 14세기에 발견되는 세 가지 유형의 연대기 중 하나이며, 주로 세계사인 유형이라고 썼다.[82] 다른 유형으로는 디노 콤파니의 백색 길파와 흑색 길파에 대한 기록과 같이 특정 역사적 사건의 연대기 또는 도나토 벨루티나 조반니 모렐리가 쓴 것처럼 한 가족의 운명과 사건에 초점을 맞춘 더 가정적인 연대기가 있다.[83]
4. 3. 현대적 의의
빌라니는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병자들을 간호하던 사제들과 사람들이 쉽게 감염되어 버려졌으며, 많은 도시들이 황폐해졌다고 기록했다.[68][69] 그는 흑사병으로 사망하여 역병이 끝나는 시점을 기록하지 못했다.[69][70] 빌라니의 『크로니카』는 그의 형제와 조카가 이어서 완성할 만큼 중요한 저술로 여겨졌다.[9][45] 필립포 빌라니의 연대기는 콜루치오 살루타티의 승인을 받았고, 15세기에는 도메니코 디 레오나르도 부오닌세니가 『피렌체 역사』에 빌라니의 『크로니카』 요약을 싣기도 했다.[72] 16세기에는 『크로니카』가 여러 판본으로 출판되었다.[73]역사가 J.K. 하이드는 빌라니의 ''누오바 크로니카''가 피렌체의 강력한 토착어 전통을 대표하며, 당시 사람들에게 읽기 쉽고 인간적인 흥미로 가득 찬 이야기로 어필했다고 평가한다.[39] ''크로니카''는 또한 풍부한 역사 기록이며, 현대 역사가들에게 가장 큰 가치는 빌라니가 생애 동안 경험한 사람들, 데이터 및 사건에 대한 묘사이다.[75] 예를 들어, 브리엔의 발터 6세의 폭정에 대한 후속 기록들은 모두 빌라니의 ''크로니카''에 기반을 두고 있다.[34] 빌라니가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해 쓴 저술은 단테 연구에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했으며,[76] 20세기 초 빌라니 작품의 새로운 판본이 재인쇄되면서 단테 연구가 부흥하기도 했다.[77]
그러나 빌라니가 수세기 전의 사건을 묘사할 때는 부정확한 전통, 전설, 풍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75] 자신의 시대와 관련해서는 피렌체의 사회 및 생활 습관에 대한 귀중한 세부 정보를 제공하지만,[78] 먼 시대와 장소를 다룰 때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75] 예를 들어, 빌라니는 피에솔레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설에 의존했으며,[79] 1315-1317년 대기근 당시 앤트워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는 추정은 신뢰하기 어렵다.[80]
루이 그린은 빌라니가 역사가의 주제적 구성 없이 사건을 발생 순서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변화하는 현재의 교훈을 과거에 투영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81] 또한, 피렌체 미화에 대한 헌신 때문에 도시의 변화된 운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은 빌라니의 ''크로니카''가 당시 피렌체 상인 공동체의 전망을 표현하고, 중세적 태도에서 초기 현대적 태도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지표라고 주장한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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