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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주스티니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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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는 15세기 비잔티움 제국 말기에 콘스탄티노플 방어를 지휘한 이탈리아 출신 용병이다. 강력한 도리아 가문 출신으로, 용병으로 활동하며 콘스탄티노플의 위기를 맞아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프로토스트라토르로 임명되어 도시 방어를 총괄하며, 훈련, 요새 강화, 전투 준비를 지휘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오스만 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퇴각하면서 방어군에 혼란을 야기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 주스티니아니는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역사적 기록과 묘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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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주스티니아니
기본 정보
이름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론고
원어 이름 (그리스어)Ιωάννης Λόγγος Ιουστινιάνης (이오안니스 롱고스 이우스티니아니스)
원어 이름 (라틴어)Ioannes Iustinianus Longus (이오안네스 유스티니아누스 롱구스)
출생1418년
사망1453년 6월 1일
사망 장소키오스 섬
직함프로토스트라토르
주스티니아니 가문의 문장
롱고의 문장, 그의 가문의 문장
군사 경력
참전 전투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2. 가문과 초기 생애

주스티니아니는 도리아 가문[1]의 일원으로, 아마도 히오스섬 출신이었을 것이다.[2]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용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 가문의 상속을 받지 못해 용병 생활을 선택한 귀족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1. 가문 배경

주스티니아니는 도리아 가문의 일원이었으며,[1] 아마도 히오스섬 출신이었을 것이다.[2]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용병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그가 가문의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용병 생활을 선택한 귀족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2. 2. 용병 생활

주스티니아니는 강력한 도리아 가문[1]의 일원이었으며, 아마도 히오스섬 (Chios) 출신이었을 것이다.[2]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용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그가 가문의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용병 생활을 선택한 귀족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주스티니아니는 전적으로 사비를 들여 용병 부대를 조직하여 동로마 제국에 들어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육상 방어를 맡았다. 그는 방위군을 통솔하고, 그리스인과 제노바인과 베네치아인의 반목을 억누르고, 오스만 군의 포격을 받은 성벽의 수리를 맡아 방어측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이 최후의 포위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개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컸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의 최후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던 주스티니아니는 포격 또는 석궁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부상 부위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팔, 다리, 허리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어쨌든 그는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가 잠긴 성문을 열고 시내로 후퇴했기 때문에, 공포에 질린 일부 수비병들이 이 문을 통해 탈출하려고 시도하여 방어군에 동요가 일어났다.

주스티니아니가 부상하고 수비병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본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재차 공세를 걸도록 명령했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다. 주스티니아니의 신하들은 주인을 데리고 간신히 도시를 탈출했지만, 주스티니아니는 부상으로 인해 6월 1일에 사망했다.

3. 1400년대 비잔티움 제국의 상황

동로마 제국으로도 알려진 비잔티움 제국은 330년부터 15세기까지 존속했다. 초기에는 동지중해의 주요 강국이었지만, 15세기 중반에는 여러 갈등으로 인해 국경이 점차 후퇴하면서 영향력과 영토가 크게 감소했다. 특히 1204년 유럽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일시적 붕괴를 가져온 사건은 제국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수복되고 황제의 권위가 회복되었지만, 주요 군사 강국으로서의 지위는 확실히 끝났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제한적인 지역적 영향력만 유지했고,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오스만 제국과 같은 신흥 강국과 경쟁해야 했다.[3]

3. 1. 제국의 쇠퇴

비잔티움 제국은 15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영향력과 영토가 크게 감소했다. 1204년 유럽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일시적 붕괴를 가져온 사건은 제국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3] 비잔티움은 주요 군사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제한적인 지역적 영향력만 유지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같은 신흥 강국과의 경쟁에 직면해야 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포위 공격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단 하나의 도시로 축소된 상태였다. 도시는 이미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정복된 경험이 있었으며,[3]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외에 다른 영토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재정복의 기반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제국은 재정 위기에 처해 있었고, 베네치아 거주민들의 위협으로 경제는 더욱 악화될 위기에 놓였다.[4] 또한, 도시 내에서는 종교적, 민족적 갈등과 파벌주의가 심화되어 방어 능력을 약화시켰다.[4]

3. 2. 오스만 제국의 부상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15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여러 갈등으로 인해 영향력과 영토가 크게 감소했다. 특히 1204년 유럽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일시적 붕괴를 일으킨 사건은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3]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수복되었지만, 주요 군사 강국으로서의 지위는 잃게 되었고,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오스만 제국과 싸워야 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포위 공격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단 한 도시로 축소된 상태였다. 도시는 이미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정복된 적이 있었으며, 내부 반란으로 인해 약화된 상태였다.[3]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도시를 잃더라도 탈환할 자원이나 발판이 없었다. 제국은 재정 위기에 처해 세금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고, 이는 경제를 마비시켰다.[4] 또한, 도시에 조성된 혹독한 상황은 종교적, 민족적 긴장 등 파벌주의를 만들어냈다. 포위 공격 당시에는 친비잔티움, 친오스만, 중립 파벌이 모두 같은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4]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황을 결정짓는 요인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의 죽음이었다. 그는 생애 말년 비잔티움 제국과 대체로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했지만, 그의 아들 메흐메트 2세가 그 뒤를 이으면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새로운 오스만 외교 정책이 등장했다.[4]

3. 3.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기

비잔티움 제국은 15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영향력과 영토가 크게 줄었습니다. 1204년 유럽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과 일시적 붕괴는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3] 비잔티움은 주요 군사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제한적인 지역적 영향력만 유지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싸워야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포위 공격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단 한 도시로 축소되었습니다. 도시는 이미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정복된 적이 있었습니다.[3]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고, 도시를 탈환할 자원이나 발판도 없었습니다. 제국은 재정 위기에 처해 있었고, 베네치아 거주민들은 세금 문제로 철수를 위협했습니다.[4] 도시 내에는 파벌주의가 만연했고, 종교적, 민족적 긴장과 충성파 및 분리주의 파벌이 존재했습니다. 포위 공격 당시에는 친비잔티움, 친오스만, 중립 파벌이 모두 같은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4]

주스티니아니는 사비를 들여 용병 부대를 조직하여 동로마 제국에 들어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육상 방어를 맡았습니다. 그는 방위군을 통솔하고, 그리스인과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의 반목을 억누르고, 성벽 수리를 맡아 방어측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개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컸습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의 총공격 때 주스티니아니는 포격 또는 석궁에 의해 부상을 입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잠긴 성문을 열고 후퇴하자, 일부 수비병들이 탈출을 시도하여 방어군에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주스티니아니가 부상하고 수비병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본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공세를 강화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습니다. 주스티니아니는 부상으로 인해 6월 1일에 사망했습니다.

4. 용병 수요와 동기

이탈리아 도시 국가 출신 용병들에게는 돈과 종교(그리스도교) 때문에 비잔티움이 고용처로서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베네치아제노바 민간인 거주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출신 용병들은 콘스탄티노플과 사전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4] 따라서 직업적 필요성 외에도 아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참여했을 수 있다. 또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용병 귀족들이 속죄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요새 방어에 파견된 선례도 있었다.[4]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복무하기로 선택한 이유에 대한 증언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다른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설명 중 하나 또는 여러 가지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는 승리할 경우 레스보스 섬의 영주권을 약속했다고 한다.

4. 1. 이탈리아 용병의 해외 진출

주스티니아니의 방어전 참여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간의 경쟁과 이것이 이탈리아 용병들을 해외로 몰아낸 방식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현대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지역 내 도시 국가 간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용병 고용은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병사를 모집하는 가장 선호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내부의 갈등이 다소 수그러들고 지역 정부가 상비군으로 전환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용병에 대한 필요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대규모 용병 회사를 계속 운영하기 위해 이탈리아 출신 용병들은 싸움이 벌어지고 그들을 고용할 의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해외 분쟁에 참여해야 했다.[5] 게다가 이탈리아 도시 국가 출신 용병들에게는 돈과 공유하는 종교 때문에 그리스도교 비잔티움 제국이 고용처로서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4. 2. 비잔티움 제국의 용병 의존

비잔티움 제국은 13세기부터 군사력을 용병에 크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는 토착 출신 군 장교들의 잦은 내부 반란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란 추세와 더불어 지휘관들의 무능력은 황제와 군 장교들 사이에 불신을 초래했다.[6]

용병들의 반란도 종종 있었지만, 토착 출신들의 반란보다는 빈도가 훨씬 적었다.[6] 비잔티움 제국은 2세기에 걸쳐 용병 장교들에 대한 신뢰를 쌓아왔고,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토착 장교 대신 용병을 방어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13세기는 용병 회사의 군사적 전문성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단순한 용병 무리를 넘어 현대 군사 기술에 대한 최신 이해를 갖춘 전문 군인 집단으로 변모했다.[6] 따라서 황제는 신뢰 문제뿐만 아니라, 방어를 제대로 조직하는 데 필수적인 군사 기술을 이해할 가능성이 더 높은 전문 용병을 방어 지휘관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사건 이후 묘사)

5.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주스티니아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사비를 들여 조직한 700명의 용병 부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로부터 육상 방어를 맡았다.

주스티니아니는 방위군을 통솔하고, 그리스인, 제노바인, 베네치아인 사이의 반목을 억누르며, 오스만 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성벽을 수리하는 등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개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컸다고 평가받는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의 최후 총공격 때 주스티니아니는 성벽 위에서 싸우던 중 포격 또는 석궁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부상 부위는 문헌에 따라 팔, 다리, 허리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는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잠긴 성문을 열고 후퇴하면서 방어군에 동요가 일어났고, 일부 수비병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주스티니아니의 부상과 수비병 사기 저하를 본 메흐메트 2세는 공세를 강화했고,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다. 주스티니아니는 부하들에 의해 도시를 탈출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6월 1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키오스 섬으로 운반되어 산 도메니코 교회에 매장되었으나, 묘소는 1881년 지진으로 소실되었다.[20]

5. 1. 참전과 프로토스트라토르 임명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기 소식을 듣고, 주스티니아니는 키오스와 제노바 출신 병사 700명을 이끌고 도시 방어를 위해 항해하여 1월 말에 도착, 포위 공격에 대비했다.[7]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 부대를 자신의 위치 오른쪽에 배치하고 주스티니아니에게 프로토스트라토르 지위를 부여했다.[7] 이로써 그는 도시 방어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주스티니아니가 프로토스트라토르로 선택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방어자들 중 상당수가 베네치아인이었고, 콘스탄티누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베네치아 민간인 인구도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과 관련 있을 수 있다.[4] 1204년, 베네치아인들을 포함한 유럽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적이 있기 때문에,[3] 콘스탄티누스는 베네치아인을 방어 지휘관으로 선정하는 것을 주저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스티니아니는 베네치아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노바 공화국 출신이었다.[8] 콘스탄티누스는 베네치아인들이 쿠데타를 시도할 경우 지원하지 않을 프로토스트라토르를 확보하고, 베네치아 용병과 민간인보다 제노바 용병과 민간인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잠재적인 쿠데타 지원자 수를 줄일 수 있었다.

프로토스트라토르로서, 그는 병사 훈련, 요새 강화, 임박한 공격에 대한 전반적인 준비를 담당했다. 1422년 공방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키오스의 대주교 레오나르도의 제안에 따라 내벽보다는 외벽 방어에 노력을 집중했다.[7]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할 사람은 8,000~9,000명에 불과했지만, 인력 부족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장신구와 은식기를 사용하여 병사들에게 지불할 동전을 주조했다. 주스티니아니는 성 로마누스와 카리시우스 사이의 가장 전략적이고 지대가 낮은 성벽 오른쪽에 배치되었다.[7] 그는 즉시 군대를 재편성하고, 도시의 신병들에게 현대 무기를 훈련시켰으며,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도망친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에 투입했다. 또한 700명의 제노바 용병들을 이용하여 성벽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을 강화했다.[9]

4월 6일, 메흐메드가 도착하자 주스티니아니는 오스만군의 위치를 역습하기 위한 돌격을 지휘했다.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오스만군, 포위 공격 장비, 포병의 파괴로 이어졌으나, 높은 사망률 때문에 점차 중단되었다.[10] 그는 성벽을 부드러운 표면으로 덮어 포격의 충격을 완화한 다음, 대포알이 만든 틈을 파편으로 메우는 방식으로 성벽을 수리했다.[10] 이 전술은 제한된 자원을 감안할 때 효과적이었고, 오스만군의 포병 사거리와 양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한 첫 사례였다. 조반니는 수십 개의 대형 대포와 500개의 소형 포병을 지원하는 6미터 길이의 대포와 싸워야 했다. 이는 당시 역사상 가장 큰 포격 중 하나였다.[11]

4월 18일, 예니체리와 궁수들이 성벽 중간 부분의 균열을 향해 파견되면서 첫 번째 공격이 발생했다.[10] 주스티니아니와 그의 부하들은 좁은 전선 때문에 4시간 후 이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5월 말, 고갈되는 보급품과 인력,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할 구원군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고,[10] 주스티니아니와 노타라스 (비잔티움의 수상)는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주스티니아니는 사비를 들여 용병 부대를 조직하여 동로마 제국에 들어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육상 방어를 맡았다. 그는 방위군을 통솔하고, 그리스인,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의 반목을 억누르고, 오스만 군의 포격을 받은 성벽 수리를 맡아 방어측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개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컸다.

5. 2. 방어 전략과 전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기 소식을 듣고, 주스티니아니는 키오스와 제노바 출신 병사 700명을 이끌고 도시 방어를 위해 항해하여 1월 말에 도착, 포위 공격에 대비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략적으로 이 부대를 자신의 위치 오른쪽에 배치하고 주스티니아니에게 프로토스트라토르 지위를 부여하여[7] 도시 방어 지휘관으로 삼았다. 콘스탄티누스가 베네치아인을 방어 지휘관으로 선정하는 것을 주저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주스티니아니는 베네치아인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제노바 공화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8]

프로토스트라토르로 선출된 후, 주스티니아니는 병사 훈련, 요새 강화, 그리고 임박한 공격에 대한 전반적인 준비를 담당했다. 1422년 공방전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키오스의 대주교 레오나르도의 제안에 따라 외벽 방어에 노력을 집중했다.[7] 그는 성 로마누스와 카리시우스 사이의 가장 전략적이고 지대가 낮은 성벽 오른쪽에 배치되었다.[7] 그는 즉시 군대를 재편성하고, 도시의 신병들에게 현대 무기를 훈련시켰고,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도망친 병사들을 제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에 투입했다. 또한 자신의 700명의 제노바 용병들을 이용하여 성벽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을 강화했다.[9]

4월 6일 술탄 메흐메드가 도착하자, 주스티니아니는 오스만군의 위치를 역습하기 위한 돌격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오스만군, 포위 공격 장비, 그리고 포병의 파괴로 이어졌으나 높은 사망률 때문에 점차 중단되었다.[10] 성벽 수리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 또한 오스만군에게 방해가 되었다. 그의 전략은 성벽을 부드러운 표면으로 덮어 포격의 충격을 완화한 다음, 대포알이 만든 틈을 파편으로 메우는 것이었다.[10] 조반니는 수십 개의 대형 대포와 500개의 소형 포병을 지원하는 거대한 6미터 길이의 대포와 싸워야 했다.[11] 포위 공격 내내 주스티니아니와 그의 부하들은 피해를 입은 성벽을 수리하고, 필요할 때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병사들로 틈을 메웠다. 그는 또한 포도탄을 포함한 소형 포병, 발사체, 그리고 성벽을 타고 오르려는 공격자들에게 떨어뜨릴 물건을 사용했다.

4월 18일에 첫 번째 공격이 발생했으며, 예니체리와 궁수들이 성벽 중간 부분의 균열을 향해 파견되었다.[10] 주스티니아니와 그의 부하들은 좁은 전선 때문에 4시간 후 이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5월 말, 고갈되는 보급품과 인력,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할 구원군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고,[10] 이 와중에 주스티니아니와 노타라스 (비잔티움의 수상)는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스티니아니는 전적으로 사비를 들여 용병 부대를 조직하여 동로마 제국에 들어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육상 방어를 맡았다. 그는 방위군을 통솔하고, 그리스인,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의 반목을 억누르고, 오스만 군의 포격을 받은 성벽의 수리를 맡아 방어측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의 최후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던 주스티니아니는 포격 또는 석궁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부상 부위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팔, 다리, 허리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어쨌든 그는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가 잠긴 성문을 열고 시내로 후퇴했기 때문에, 공포에 질린 일부 수비병들이 이 문을 통해 탈출하려고 시도하여 방어군에 동요가 일어났다.

주스티니아니가 부상하고 수비병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본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재차 공세를 걸도록 명령했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다. 주스티니아니의 신하들은 주인을 데리고 간신히 도시를 탈출했지만, 주스티니아니는 부상으로 인해 6월 1일에 사망했다.

5. 3. 부상과 최후

1453년 5월 29일 새벽,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최후의 총공격을 명령했다. 공격은 세 파도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파도는 메흐메트 2세의 봉신들이 제공한 기독교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나 주스티니아니 부하들이 설치한 임시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두 번째 파도는 성 로마누스 문 근처의 틈을 노렸지만, 이 역시 새벽녘에 격퇴되었다. 마지막 파도는 엘리트 예니체리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을 상대하는 비잔티움 제국군은 3,000명이 채 되지 않는 지친 병력이었다.[12][13][14]

이 전투에서 주스티니아니는 대포 또는 석궁 발사체에 팔, 가슴, 다리 등에 심한 부상을 입고 후퇴했다. 그가 전장을 이탈하자 수비군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고,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스티니아니는 치료를 위해 자신의 배로 옮겨졌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부하들과 함께 도시를 탈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니콜로 바르바로(Nicolò Barbaro) 등 제노바에 적대적인 자료는 주스티니아니가 가벼운 부상을 입었거나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공포에 압도되어 상처를 가장하고 전장을 이탈하여 도시의 함락을 결정지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겁함과 반역죄에 대한 비난이 널리 퍼져 제노바 공화국은 잉글랜드, 프랑스, 부르고뉴 공국 등의 참사관들에게 외교 서한을 보내 이를 부인해야 했다.[15]

주스티니아니는 1453년 6월 1일 부상으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키오스 섬으로 옮겨졌다. 그는 키오스 섬 피르기(Pyrgi)의 산 도메니코 교회(Church of San Domenico)에 안치되었으나, 그의 무덤은 1881년 키오스 지진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여러 묘사가 남아 있다.[16][20]

6. 평가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 대한 평가는 여러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스티니아니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로부터 육상 방어를 위임받았다. 그는 방위군을 지휘하고, 그리스인과 베네치아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포격으로 파괴된 성벽을 복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개월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컸다고 평가된다.[20]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의 최종 공격 당시 주스티니아니는 포격이나 석궁에 부상을 입고 후퇴했다. 이로 인해 방어군의 사기가 저하되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다.[20] 주스티니아니는 부상으로 인해 6월 1일에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키오스 섬의 산 도메니코 교회에 묻혔다.[20]

한편, 주스티니아니가 경미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이탈하여 도시 함락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베네치아 출신 역사가 니콜로 바르바로는 주스티니아니가 겁에 질려 부상을 가장하고 도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노바 공화국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공식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15]

6. 1.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의 핵심 인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게 육상 방어를 맡겼다. 그는 방위군을 통솔하고, 그리스인과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의 반목을 억누르고, 오스만 군의 포격을 받은 성벽의 수리를 맡아 방어측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개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컸다.[20]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의 최후의 총공격 때, 주스티니아니는 포격 또는 석궁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부상 부위는 팔, 다리, 허리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는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잠긴 성문을 열고 시내로 후퇴했기 때문에, 공포에 질린 일부 수비병들이 이 문을 통해 탈출하려고 시도하여 방어군에 동요가 일어났다.[20]

6. 2. 비극적 영웅

주스티니아니는 사비를 들여 용병 부대를 조직하여 동로마 제국에 들어갔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그에게 육상 방어를 맡겼다. 그는 방위군을 통솔하고, 그리스인과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의 반목을 억누르며, 오스만 군의 포격을 받은 성벽을 수리하는 등 방어측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개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컸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의 마지막 총공격 때, 주스티니아니는 성벽 위에서 싸우던 중 포격 또는 석궁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부상 부위는 문헌에 따라 팔, 다리, 허리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는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잠긴 성문을 열고 시내로 후퇴했기 때문에, 공포에 질린 일부 수비병들이 이 문을 통해 탈출하려고 시도하여 방어군에 동요가 일어났다.

주스티니아니가 부상당하고 수비병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본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다시 공세를 펼치도록 명령했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다. 주스티니아니의 신하들은 주인을 데리고 간신히 도시를 탈출했지만, 주스티니아니는 부상으로 인해 6월 1일에 사망했다.

유해는 키오스 섬으로 운반되어 산 도메니코 교회에 매장되었다. 묘소는 아마도 1881년 지진으로 소실되었지만, 몇몇 비문은 현존하고 있다.[20]

6. 3. 논란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공격 중에 대포 또는 석궁 발사체에 팔, 가슴,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어 전투에서 후퇴하게 된 것은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12][13][14] 주스티니아니가 전장에서 이탈하자 수비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스티니아니는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 자신의 배로 옮겨졌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부하들과 함께 도망쳤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니콜로 바르바로(Nicolò Barbaro)와 같이 제노바에 적대적인 자료에서는 주스티니아니가 가벼운 부상만 입었거나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공포에 압도되어 상처를 가장하고 전장을 떠나 도시 함락을 결정지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겁함과 반역죄에 대한 비난이 널리 퍼져 제노바 공화국잉글랜드, 프랑스, 부르고뉴 공국 등의 참사관들에게 외교 서한을 보내 이를 부인해야 했다.[15]

7. 1차 사료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 대한 1차 사료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니콜로 바르바로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다. 바르바로는 이 책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을 기록했다. 주스티니아니는 "주안 주스티냐(Zuan Zustignan)"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자신의 임무를 버리고 도망친 겁쟁이로 묘사되며, 오스만 군의 침입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려 공황을 조장했다고 묘사된다.[8] 바르바로의 기록은 다른 역사가들에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세부 사항을 누락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고, 주스티니아니가 대규모 공황을 야기했다는 주장은 그가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4] 그러나 바르바로의 자료가 1차 자료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정확하며, 주스티니아니에 대해 기록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7. 1. 니콜로 바르바로의 기록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1차 자료는 니콜로 바르바로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The Siege of Constantinople in 1453)이다. 이 책에서 바르바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을 기록했다. 이 책은 공방전 자체와 그 직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바르바로의 편향된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스티니아니는 이 책에서 "주안 주스티냐(Zuan Zustignan)"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자신의 임무를 버리고 도망친 겁쟁이로 묘사되며, 오스만 군의 침입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려 공황을 조장했다고 묘사된다.[8] 바르바로가 쓴 주스티니아니의 성벽 방어에 대한 기록은 다른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세부 사항을 빠뜨려 오해를 일으킬 수 있고, 주스티니아니가 대규모 공황을 일으켰다는 바르바로의 주장은 그가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4] 그러나 바르바로의 자료가 1차 자료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대한 그의 묘사가 상당히 정확하며, 그가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 대해 기록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점 때문에, 주스티니아니가 언급될 때 그의 자료는 종종 논의 대상이 된다.

8. 역사적 묘사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 관한 기록은 윌리엄 카페로의 2006년 저서 "존 호크우드: 14세기 이탈리아의 영국 용병"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주스티니아니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1400년대 이탈리아에서 용병 회사가 쇠퇴하고 소규모 용병 부대를 이끄는 개별 지휘관들이 부상했다는 점을 언급하며[5], 이는 주스티니아니가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4]

2009년 사바스 키리아키디스의 저서 "약 1290년~1305년 비잔티움에서 대규모 용병 고용: 자료를 통해 본 관점"은 비잔티움 제국이 용병에 크게 의존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비잔티움 지도부가 무능력과 반란의 위협 때문에 토착 군 지휘관들을 불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 이는 콘스탄티노플 방어 당시 토착 장교들보다 용병인 주스티니아니가 지휘권을 맡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2011년 마리오스 필리피데스와 월터 하낙의 저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포위와 함락: 역사서술, 지형 및 군사 연구"는 주스티니아니를 여러 번 언급하며,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을 제공한다. 이 책은 주스티니아니가 포위 공격 이전에 해적 행위를 했을 가능성과 황제의 초대를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4] 또한 주스티니아니가 부상 없이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는 바르바로의 주장을 반박하며, 그가 부상당했다는 여러 다른 출처들을 제시한다.[4] 그러나 주스티니아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이 책 이후로는 줄어들고,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대한 맥락에서 간략하게 언급되는 정도에 그친다.[17]

참조

[1] 서적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5
[2] 웹사이트 History of Giustiniani From Genova (Italy) http://www.giustinia[...] 2022-06-29
[3] 서적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The Empire of Constantinople Brill
[4] 서적 ˜The Siege and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Historiography, Topography, and Military Studies Routledge 2011
[5] 서적 John Hawkwood an English Mercenary in Fourteenth-Century Italy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6] 학술지 THE EMPLOYMENT OF LARGE GROUPS OF MERCENARIES IN BYZANTIUM IN THE PERIOD ca. 1290-1305 AS VIEWED BY THE SOURCES 2009
[7] 웹사이트 THE FINAL SIEGE AND FALL OF CONSTANTINOPLE (1453) {{!}} History of Istanbul https://istanbultari[...] 2022-06-29
[8] 웹사이트 The Siege of Constantinople in 1453, According to Nicolo Barbaro https://deremilitari[...] 2016-08-23
[9] 웹사이트 Σαν σήμερα ''έπεσε'' η Κωσταντινούπολη https://www.newsit.g[...] 2023-01-10
[10] Youtube Byzantium Defiant: The (Staggering) Siege of Constantinople 1453 https://www.youtube.[...] 2023-01-10
[11] 서적 The Gunpowder Age: China,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in World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2] 서적 La Caduta di Costantinopoli, I: Le testimonianze dei contemporanei. Scrittori greci e latini Fondazione Lorenzo Valla
[13] 편지 Epistola reverendissimi patris domini Isidori cardinalis Ruteni scripta ad reverendissimum dominum Bisarionem episcopum Tusculanum ac cardinalem Nicenum Bononiaeque legatum 1453-07-06
[14] 편지 Letter to Pope Nicholas V 1453-08-16
[15] 학술지 Atti della Società Ligure di Storia Patria 1874
[16] 서적 The Siege and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17] 학술지 A Standard Obliteration-Reaction Model for Constantinople’s Fall: Parameters of a Siege 2020-11-11
[18] 서적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https://books.google[...]
[19] 서적 The fall of Constantinople: the Ottoman conquest of Byzantium https://books.google[...]
[20] 서적 The Siege and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21] 서적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http://books.google.[...]
[22] 서적 The fall of Constantinople: the Ottoman conquest of Byzantium. http://books.google.[...]
[23] 서적 The Siege and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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