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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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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이범석에 의해 결성된 청년 단체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급성장했다.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민족주의, 반공주의를 내세웠으며,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여 청년 간부 훈련을 실시했다. 1948년 이승만의 지시로 다른 청년단체와 통합되어 대한청년단이 되었으나, 이후에도 족청 출신들은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여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면서 1954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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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청년단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국민족청년단 휘장
이름한국민족청년단
원어 이름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약칭족청(族靑)
창립일1946년 10월 9일
해산일1949년 1월 (사실상), 1954년 1월 (공식)
후계 정당자유당
본부서울, 대한민국
상징색하늘색
한국민족청년단 깃발
지도부
단장이범석
부단장안호상
기타 지도자이준식 (1900년)
이념 및 정치 성향
이념신파시즘
극단적 민족주의
일민주의
제3의 위치
반공주의
반자본주의
분파:
반제국주의
좌익 민족주의
정치적 위치극우
분파:
좌익
관련 조직
선행 조직대한청년단
의회 의석 (1948년)
의석 수6석/200석

2. 역사

이범석은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을 새 나라 건설의 주역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17] 이에 1946년 10월 민족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했다.[17] 족청은 "단지삼칙(團旨三則)"이라는 강령을 내걸고, 민족정신을 일깨워 민족과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는 청년의 사명을 강조했다.[16][2]

수원에 위치한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인종주의, 최고 민족주의"라는 슬로건이 적힌 탑을 배경으로 지프차를 탄 다섯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46년 11월, 족청은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청년 훈련을 시작했다.[2] 훈련은 정신, 신체, 이론, 생활, 실기 등 5개 분야로 진행되었으며, 이범석은 조국의 현실과 청년 운동의 방향에 대해 직접 강연했다.[5] 훈련을 마친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조직을 결성하고 확장해 나갔다.[6] 그러나 족청은 광복군의 연장선이나 독재적인 단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7]

1951년 12월, 족청은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1952년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에서 족청 계열 후보들이 낙선하면서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8] 1953년 5월 대전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족청계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나, 이는 족청의 자멸로 이어졌다.[10] 이승만은 족청 세력을 숙청하기로 결정하고, 1954년 1월 족청은 해체되었다.[16]

2. 1. 창설 배경

이범석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 속에서 청년들을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하고 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17] 그는 민족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했다.[17]

미군정 역시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성을 느껴 1946년 중반 비밀리에 500만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미군 대령을 훈련 고문으로 파견하는 등 족청 결성을 지원했다.[17] 자금 지원은 군정청이 아닌 일본 도쿄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이루어졌으며, 맥아더 사령부는 차량부터 제복까지 모든 것을 지원했다.[18][19][20][21]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으나, 이는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2]

이러한 미군정의 지원은 한국의 반공 정책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2. 2. 초기 활동 (1946~1948)

이범석이 1946년 10월 민족정신의 전통을 계승할 청년운동의 모체로서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결성하였다.[16] 단장 이범석, 부단장 안호상을 비롯하여 전국위원, 이사, 상무이사 등으로 구성되었다.[16]

족청의 강령은 "단지삼칙(團旨三則)"이라고 불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6][2]

  • 민족정신을 환기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하에 청년의 사명을 다할 것을 기한다.
  • 종파를 초월하여 대내자립·대외공존의 정신으로 민족의 역량을 집결할 것을 기한다.
  • 현실을 직시하며 원대한 곳을 바라보고(着眼遠大), 비근한 것부터 착수하여(着手卑近) 건국도상의 청년다운 순감(純感)을 바칠 것을 기한다.


1946년 11월, 족청은 미 군정의 지원을 받아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청년들을 위한 한 달간의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2] 2만 명의 신청자 중 200명이 선발되어 1946년 12월 첫 훈련생이 발표되었다.[5] 훈련은 정신, 신체, 이론, 생활, 실기 등 5개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이범석은 조국의 현실 인식, 새로운 청년 운동의 방향 등에 대해 직접 강연했다.[5]

훈련을 마친 훈련생들은 각자의 고향과 산하 조직으로 돌아가 지청 지부를 결성하고 강화하여 강력한 전국 조직을 형성했다.[6] 그러나 조직이 확장되면서, 정계와 사회 일각에서는 광복군의 연장선, 독재적 운동 단체, 심지어 용병 조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7]

한편, 족청은 대동청년단과 경쟁 및 갈등 관계에 있었다.

2. 3. 대한청년단 통합과 해체 (1949~1954)

1946년 11월, 조선민족청년단은 미 군정의 지원을 받아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청년들을 위한 한 달간의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2] 훈련 신청자는 2만 명에 달했으며, 이 중 200명이 선발되어 1946년 12월 첫 훈련생이 발표되었다. 7기부터는 여성 훈련생도 입소했으며, 훈련은 정신, 신체, 이론, 생활, 실기 등 5개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론 부문에서는 정인보, 안호상|安浩相한국어, 배성룡|裵成龍한국어, 설린 등 20명 이상이 강의를 맡았고, 이범석 자신이 조국의 현실 인식, 새로운 청년 운동의 방향, 혁명적 인생관, 혁명적 민족관, 구국 운동 등에 대해 직접 강연했다.[5]

조선청년단은 젊은이들의 활력, 열정, 탐구심, 자의식, 경험, 순수함과 같은 특성을 청년 운동과 투쟁의 생산력으로 전환시켰다. 이범석의 지도 아래, 훈련생들은 각자의 고향과 산하 조직으로 돌아가 지청 지부를 결성하고 강화하여 강력한 전국 조직을 형성했다.[6] 조직이 확장되면서, 정계와 사회 일각에서는 광복군의 연장선, 독재적 운동 단체, 심지어 용병 조직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었다.[7]

1951년 12월 조선민족청년단이 신당으로 발족하면서 부산의 동아극장에서 창당 대회를 열고 강령과 당헌을 채택하여, 동명의 두 개의 반공 정당이 창설되었다. 이른바 자유당이다. 야당 성향의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대표가 패배하고, 부통령 후보 이범석이 낙선하며, 1952년 5월 무소속 함태영이 당선되었다.[8]

자유당의 전국 대회는 정부 선거 후 40일 이내에 소집되어야 했지만, 선거 결과에 따라 당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족청 계열은 전례 없는 정치적 갈등에 휩싸였다.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비판하는 한편, 당 외부에서 공격을 가했다. 당시 그는 장택상 국무총리와 김태선 내무부 장관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정치 투쟁을 선언하기도 했다.[6]

김태선은 해임된 후 서울특별시장으로 물러났고, 장택상은 "고시사건"이라는 정치적 책략에 휘말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9] 정치적, 비정부적 선거 이후 숙청을 위한 족청계 주도의 전당대회가 1953년 5월 대전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자유당 내 종교적 갈등의 절정이었으며, 이는 당시 조선민족청년단의 자멸로 이어졌다고 한다.[10]

이승만은 같은 해 9월 족청파 제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특별 분부"라고 불리는 성명에서 이승만은 전례 없는 강경한 결정을 내렸다. "자유당 안에는 구민족청년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부식자들이 있어서, 내 의도에 대립하여 당내의 통일을 해치며 전 국민의 통일정신을 위험하게 하여 분열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단지(斷指)의 아픔’을 당하더라도 숙청되어야 한다."[6]

이를 고비로 이범석은 대한청년단|대한청년단한국어으로 통합하는 원칙을 결정하고 자유당에서 5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이듬해인 1954년 1월, 족청은 "우리 청년운동의 공과에 대하여는 우리 민족이 부흥하였을 때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성명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16]

3. 이념과 성격

족청은 민족주의적이고 극도로 전체주의적인 이념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았다.[13] 이범석은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된 신생 국가의 청년들을 반군으로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했다.[12] 미군은 1946년에 청년 단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족청 지역 형성을 지원했고,[13]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 병원 건물에 족청 지부의 중앙 본부를 설치했다.[15]

3. 1.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조선민족청년단의 강령은 단지삼칙(團旨三則)이라고 불렸는데, "우리는 민족정신을 환기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하에 청년의 사명을 다할 것을 기한다. 우리는 종파를 초월하여 대내자립·대외공존의 정신으로 민족의 역량을 집결할 것을 기한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며 원대한 곳을 바라보고(着眼遠大), 비근한 것부터 착수하여(着手卑近) 건국도상의 청년다운 순감(純感)을 바칠 것을 기한다."라고 선포했다.[16]

4. 조직과 활동

1946년 10월, 이범석은 청년들을 훈련시켜 나라의 역군으로 삼고자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결성했다. 족청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 육군병원 건물에 중앙본부와 훈련소를 설치하고 청년들을 훈련시켰다.[16] 훈련은 정신, 신체, 이론, 생활, 실기 등 5개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정인보, 안호상, 배성룡 등 20명 이상이 이론 강의를 맡았다. 이범석은 조국의 현실 인식, 새로운 청년 운동의 방향 등에 대해 직접 강연했다.[5]

미군정은 족청 결성을 비밀리에 지원했는데, 약 500만달러와 미군 장비를 제공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을 파견했다.[17] 자금은 도쿄맥아더 사령부에서 지원했으며, 차량과 제복까지 제공했다.[18][19][20][21]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나,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22]

훈련을 마친 훈련생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족청의 지부, 지청을 결성하고 강화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었다.[6] 그러나 조직 확장과 함께 광복군 활동의 연장, 독재운동단체, 용공단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6]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족청은 16명의 후보를 냈으나 6명만이 당선되었다.[16]

1951년 12월, 이기붕 중심의 자유당이 결성될 때, 족청계는 부산 동아극장에서 별도로 발기인대회를 갖고 '원외자유당'을 창당했다.[16]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족청계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낙선하고 무소속 함태영이 당선되었다.[16]

선거 후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이던 장택상 국무총리와 김태선 내무부 장관을 고발하는 등 정치 투쟁을 전개했다.[16] 그 결과 김태선은 서울특별시장으로 물러났고, 장택상은 '고시사건'에 휘말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9] 1953년 5월 대전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족청계가 당권을 장악한 절정기였으나, 동시에 족청계 자멸의 시작이었다.[10]

이승만은 1953년 9월 족청파 제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며, “자유당 안에 구민족청년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부식자들이 있어서, 내 의도에 대립하여 당내의 통일을 해치며 전 국민의 통일정신을 위험하게 하여 분열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단지(斷指)의 아픔’을 당하더라도 숙청되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6]

이를 계기로 이범석은 이기붕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1954년 1월 대한청년단과의 통합을 명분으로 해체되었다. 족청의 해체 성명은 “우리 청년운동의 공과에 대하여는 우리 민족이 부흥하였을 때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11]

4. 1. 조직 구성

1946년 10월, 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결성했다. 족청의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16]

직책이름
단장이범석
부단장안호상
전국위원김관식, 김활란, 이철원, 현상윤, 이용설 외 32명
이사백낙준, 최규동 외 10명
상무이사김형원, 노태준, 박주병, 설린, 김웅권



족청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 육군병원 건물에 중앙본부와 훈련소를 설치했다.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나,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22]

미군정은 족청 결성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약 500만달러와 미군 장비를 제공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을 파견했다.[17] 자금은 도쿄맥아더 사령부에서 지원했으며, 차량과 제복까지 제공했다.[18][19][20][21]

수원 훈련소에서는 소련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약 7만 명이 비밀리에 훈련을 받았다. 교육 목적은 장래 군대 편성이었으며, 실제로 이들 중 상당수가 국군에 편입되었다.[18][21]

4. 2. 청년 훈련

이범석은 청년들을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하고 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창설했다. 미군정 역시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성을 느껴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을 파견하는 등 족청 결성을 지원하였다.[17] 자금은 군정청이 아닌 일본 도쿄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나왔으며, 차량 지원부터 제복까지 모든 것을 지원받았다.[18][19][20][21]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는데, 이에 대해 국수적이고 심하게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22]

족청은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육군병원 건물에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훈련소를 마련하였다. 소련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수원 훈련소에서 약 7만 명이 훈련을 받았으며, 이들의 교육 목적은 장래에 군인이 되는 것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국군에 편입되었다.[18][21]

1946년 12월, 훈련소에서는 2만 명의 훈련 신청자 중 200명을 선발하여 첫 훈련을 시작했다. 7학년부터 여성 훈련생도 입학했으며, 훈련은 정신, 신체, 이론, 생활, 실기 등 5개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론 부문에서는 정인보, 안호상|안호상한국어, 배성룡|배성룡한국어, 설린 등 20명 이상이 일주일에 12시간 강의를 진행했으며, 이범석은 조국의 현실 인식, 새로운 청년 운동의 방향, 혁명적 인생관, 혁명적 민족관, 구국 운동 등에 대해 직접 강연했다.[5]

이범석의 지도 아래 훈련생들은 각자의 고향과 산하 조직으로 돌아가 지청, 지부를 결성하고 강화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하였다.[6]

4. 3. 정치 활동

1946년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청년간부훈련을 시작한 조선민족청년단은 2만여 명의 지원자 중 200명을 선발하여 1기 훈련생으로 입소시켰다. 훈련은 이론, 실천, 기술 등 5개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정인보, 안호상, 배성룡, 설린 등 20여 명이 강론을 맡았다. 이범석은 조국의 현실, 청년운동, 혁명적 인생관 등에 대한 강론을 직접 맡았다.[16]

훈련을 마친 수료생들은 이범석의 지휘 아래 각 지역에서 족청의 하부조직을 결성하고 강화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직 확장과 함께 광복군 활동의 연장, 독재운동단체, 용공단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6]

1948년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족청년단은 16명의 후보를 냈으나 6명만이 당선되었다.

실시년도선거국회정원당선자 현황
(지역구 당선/후보)
득표득표율
1948년1대 총선2006 / 16144,7912.13%



1951년 12월, 이기붕 중심의 자유당이 결성될 때, 족청계는 부산 동아극장에서 별도로 발기인대회를 갖고 '원외자유당'을 창당했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족청계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낙선하고 무소속 함태영이 당선되었다.[16]

선거 후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이던 인사들을 규탄하고, 국무총리 장택상과 내무부장관 김태선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등 공세를 펼쳤다. 김태선은 서울특별시장으로 물러났고, 장택상은 '고시사건'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953년 5월, 족청계 주도의 자유당 전당대회가 대전에서 열렸고, 이는 족청계가 당권을 장악한 최고 절정기였다.[16]

이승만은 같은 해 9월 족청파 제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며, "자유당 안에 구민족청년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부식자들이 있어서... 숙청되어야 한다"는 강경한 결단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이범석은 이기붕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대한청년단과의 통합을 결의했다. 1954년 1월, 조선민족청년단은 "우리 청년운동의 공과에 대하여는 우리 민족이 부흥하였을 때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성명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16]

4. 4. 자유당 창당과 활동

1946년 11월, 조선민족청년단은 미 군정의 지원을 받아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청년들을 위한 한 달간의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51년 12월, 이기붕 중심의 자유당이 결성될 때, 조선민족청년단은 부산 동아극장에서 별도로 발기인대회를 갖고 강령·당헌 등을 채택함으로써, 같은 이름의 두 자유당이 탄생하였다. 이른바 ‘원외자유당(院外自由黨)’이다.[16] 족청계의 원외자유당은 1952년 5월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을 대통령후보로, 이범석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낙선하고 무소속 함태영이 당선되었다.[16]

자유당 전당대회는 정부통령 선거 후 40일 내에 소집하게 되어 있었는데, 선거 결과에 따른 논공이 예상되어 족청계열은 유례 없는 정치적 격분에 휩싸였다.[16]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이던 인사들을 규탄하는 한편, 당외로도 공세를 폈다.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과 내무부장관 김태선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선언하기까지 하였다.[16]

김태선은 실각하여 서울특별시장으로 물러앉고, 장택상은 ‘고시사건(古市事件)’이라는 정략에 휘말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6] 정·부통령선거 후 숙청을 위한 족청계 주도의 전당대회가 1953년 5월에 대전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자유당 안에서 그 종파적 투쟁으로 족청계가 당권을 전단(專斷)한 최고절정기였으며, 이것을 당시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의 자멸을 초래한 발악적인 횡포기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16]

이승만은 같은 해 9월 족청파 제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특별분부라 불리는 이 담화를 통하여 “자유당 안에 구민족청년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부식자들이 있어서, 내 의도에 대립하여 당내의 통일을 해치며 전 국민의 통일정신을 위험하게 하여 분열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단지(斷指)의 아픔’을 당하더라도 숙청되어야 한다.”는 전례 없는 강경한 결단을 보였다.[16]

이를 고비로 하여 이범석은 자유당 안에서 이기붕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 대한청년단으로의 통합원칙을 결의하고 통합교섭을 위한 5명의 대표자를 뽑았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954년 1월 “우리 청년운동의 공과에 대하여는 우리 민족이 부흥하였을 때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성명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16]

4. 5. 몰락과 유산

1951년 12월, 이기붕 중심의 자유당이 결성될 때, 족청계는 부산 동아극장에서 별도로 발기인대회를 갖고 '원외자유당'을 결성하였다. 1952년 5월 정·부통령 선거에서 족청계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낙선하고 무소속 함태영이 당선되었다.[8]

선거 후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이던 장택상 국무총리와 김태선 내무부 장관을 고발하는 등 정치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김태선은 서울특별시장으로 물러났고, 장택상은 '고시사건'에 휘말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9] 1953년 5월 대전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족청계가 당권을 장악한 절정기였으나, 동시에 족청계 자멸의 시작이었다.[10]

이승만은 1953년 9월 족청파 제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며, “자유당 안에 구민족청년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부식자들이 있어서, 내 의도에 대립하여 당내의 통일을 해치며 전 국민의 통일정신을 위험하게 하여 분열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단지(斷指)의 아픔’을 당하더라도 숙청되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6]

이를 계기로 이범석은 이기붕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1954년 1월 대한청년단과의 통합을 명분으로 해체되었다. 족청의 해체 성명은 “우리 청년운동의 공과에 대하여는 우리 민족이 부흥하였을 때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11]

5. 평가와 논란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청년 조직으로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그리고 여러 논란을 동시에 안고 있다. 긍정적 평가는 주로 족청이 신생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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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긍정적 평가

족청은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청년들을 조직화하고 훈련시켜 신생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범석은 미 군정의 지원을 받아 청년들을 훈련시켰으며, 1946년에는 미군으로부터 500만달러 상당의 장비와 훈련 지원을 받았다.[12][13]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여 약 7만 명의 청년들을 비밀리에 훈련시켰으며, 이들은 장차 군인이 될 목적으로 교육을 받았다.[15]

족청은 1946년 창설 이후 회원 수가 급증하여 1948년에는 120만 명에 달했다.[13]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6명의 당선자를 배출하여 원내 교섭 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성장했다.[10]

족청의 민족주의적 이념은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지만,[13] 족청은 해방 직후 국가 건설의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6. 관련 인물

(관련 인물 섹션은 원본 소스에 정보가 없으므로 내용을 작성하지 않습니다.)

6. 1. 이범석

이범석이 1946년 10월 민족정신의 전통을 계승할 청년운동의 모체로서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다. 약칭은 ‘족청(族靑)’이다.[16] 이승만 집권 후 실시된 청년단체 통합에 따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해체되었다.[16] 족청의 초기 단장은 이범석, 부단장은 안호상이었다. 전국위원은 김관식(金觀植)·김활란·이철원(李哲源)·현상윤·이용설(李容卨) 외 32명, 이사는 백낙준·최규동 외 10명, 상무이사는 김형원(金炯元)·노태준(盧泰俊)·박주병(朴柱秉)·설린(薛麟)·김웅권(金雄權) 등이었다.[16]

참조

[1] 뉴스 http://www.ohmynews.[...] 2021-09-19
[2]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2019-05-13
[3] 뉴스 http://encykorea.aks[...] 2021-12-11
[4] 웹사이트 mensore https://blog.naver.c[...] 2019-05-13
[5] 웹사이트 https://muchkorea.ti[...] 2019-05-13
[6] 웹사이트 http://www.ohmynews.[...] 2019-05-13
[7]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2019-05-13
[8] 웹사이트 http://blog.naver.co[...] 2019-05-13
[9] 웹사이트 「고시진 사건」의 비화 https://news.joins.c[...] 2019-05-13
[10] 웹사이트 http://news.kmib.co.[...] 2019-05-13
[11] 간행물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2019-05-17
[13] 웹사이트 http://www.pressian.[...] 2019-05-23
[14]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2019-05-17
[15] 논문 Abstracts, pp 198–224 2000
[16] 간행물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1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8]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9] 서적 해방전후사 인식 4 한길사 1989
[20] 뉴스 안호상 박사 회고록: 족청 해산 문화일보 1995-03-23
[21] 서적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아카데미 2000
[2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23]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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