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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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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893년에 태어나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사망했다. 정인보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 활동을 펼쳤다. 또한, 《동아일보》 등에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그는 '얼' 사상을 주창하며 민족 정체성을 강조했고, 역사관에서는 주체성과 고유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사 연구》, 《양명학연론》 등이 있으며, 광복 후에는 국경일 노래를 작사하고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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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인보
본명정인보
출생일1893년 5월 6일
사망일1950년경
출생지서울
사망지북한
묘소국립서울현충원
국적대한민국
다른 이름담원, 위당
로마자 표기Jeong In-bo
직업
직업학자
독립운동가
역사가
작가
정치인
주요 저서
주요 저서『양명학연론』 (Yangmyeonghak Yeonron)
『여유당전서』 (Yeoyudang Jeonseo)
『조선사연구』 (Joseonsa Yeongu)

2. 생애

1893년 서울 명동에서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건방에게 배웠고,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하였다.

귀국 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저술 활동을 하였다. 이씨조선 후기 실학자, 양명학자, 기타 학파의 저술을 해제하고 그 학통을 밝히는 한편, 그 출판물을 교열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성호와 다산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0년대에는 일본 관학자들에 의한 국사 왜곡을 바로잡고자 본격적인 역사 연구에 착수, 『조선 5천년의 정신』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1946년 『조선사 연구』를 출판하였다. 단재 사학의 영향을 받아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 강요에 저항하여 산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국학대학교 초빙 학장을 역임하고 광복절 노래를 작사하였다.[39]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석하고,[40]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하여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41]

1946년 『조선사 연구』(서울신문사)를 저술하였다. 한국민주당 결성 대회에 여운형, 함대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한민당 의원직을 거부하였다.[42]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골을 경성역(서울역)에서 영접하고 태고사 빈소에 참례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의 삼고초려로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39] 임영신 뇌물 사건에서 엄벌을 요구하여 이승만과 불화를 겪고 사임하였다.

1949년, 민족진영강화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신경완 증언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반동세력으로 분류되어 국군 북진 중 덕유령 산맥에서 방치된 후 병원으로 이송되어 11월경 사망했다고 한다. 북한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이나, 황해도 폭격으로 인한 사망은 납북자 사망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기 위한 조작으로 보인다.

2. 1. 초기 생애와 수학 (1893년 ~ 1910년)

1893년 음력 5월 초엿새 서울 북단재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은조(鄭誾朝)이고, 어머니는 참판을 지낸 성건호의 딸 달성 서씨(達城 徐氏)이다.[49] 정인보는 명문가의 외아들로,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의 손자였다. 조부와 집안 어른 정인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양명학 강화학파의 이건방, 이건승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50]

1904년, 11세 때 서울을 떠나 양근, 진천 등지를 전전하다 2년여 후 서울로 돌아와 13세에 창령 성씨 동갑내기 규숙과 결혼하였다. 1913년 9월, 규숙은 쌍둥이 딸을 낳고 9일 만에 사망했고, 쌍둥이 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51] 이후 1914년, 정인보는 재혼하였다.

1908년, 16세 때 이민웅을 따라 상하이로 가서 2년여 체류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는데, 1910년 18세에 상하이에 다녀왔고, 1911년 홍명희와 생모 서씨와 함께, 1912년 겨울에는 생모를 모시고 안동현을 다녀왔다. 1913년에 다시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갔다가 6-7개월간 머무르던 중 부인 서씨의 부고를 듣고 귀국하여 이후 조선에 머물렀다.[52] 1912년 상하이에서 동제사 설립에 참여하였고,[53] 중국에서 배울만한 학자로 장빙린을 꼽았다.[54]

2. 2. 중국 유학과 독립운동 (1910년 ~ 1913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정인보는 중국 상하이와 한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5] 상하이에서 신채호, 박은식 등과 교류하며 동제사 설립에 참여하였다.[5],[53]

정인보는 중국에 머물던 시절 중국에서 배울만한 학자로 장병린을 꼽았다.[54] 1908년 16세 때 이민웅을 따라 상해로 가서 2년여 체류하였다. 1910년 18세에 상해에 다녀오고 1911년 홍명희와 생모 서씨와 동행, 1912년 겨울에 생모를 모시고 안동현을 다녀왔고 1913년에 다시 만주를 거쳐 상해로 갔다. 이때 6-7개월간 머무르다 부인 서씨의 부고를 듣고 귀국하여 이후로 계속 조선에 머물렀다.[52]

2. 3. 귀국과 교육, 언론 활동 (1913년 ~ 1937년)

정인보는 중국에서 돌아온 뒤 상복으로 검은 양복과 검은 모자 차림으로 일관하며 망국민의 표상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경찰에 불려 다니기도 했다.[55] 1913년 11월 24일, 18세의 조경희와 재혼했는데, 이는 어린 딸을 위한 부모의 뜻이었다고 셋째 딸 정양완이 증언했다.[55]

1914년, 정인보는 가족과 함께 충청도 진천으로 내려갔다. 서울 생활에서 의미를 찾기 어려웠고 생활비 문제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충남 목천으로 이사했는데, 이 역시 생활 방편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6]

1922년 4월, 정인보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정확한 초빙 경로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57] 당시 30세였던 정인보를 교수로 발탁한 것은 학교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한문과 조선문학을 강의했고, 여러 학년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58] 연희전문학교에서의 명강의로 유명해져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도 국학과 동양사를 강의했다.[59] 1924년에는 《시대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정인보의 글은 매섭고 거침없기로 정평이 났으며, 30대 초중반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사로 알려져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집필 의뢰를 받았다.[60]

40대에 들어서면서 정인보는 국학(본국학(계몽기)-조선학(일제하)-한국학(해방후))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다. 〈국학인물론〉에서 송강 정철, 다산 정약용, 단재 신채호에 대한 논저를 남겼고, 특히 〈다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은 질과 양 모두 괄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필생의 역작인 《양명학연론》도 이 시기에 집필되었다.[61] 또한 《조선사연구》를 비롯한 역사 관련 저술도 남겼다.[62] 시조 작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1926년 12월 《계명》에 발표한 〈가신 어머님〉을 시작으로 수백 편의 시조를 지었다. 1948년 12월 을유문화사에서 총 292수의 시조를 수록한 《담원시조집》을 간행했다.[63] 이 외에도 금강산 지역을 여행하고 쓴 《관동해산록》, 남도 지방 기행문인 《남유기신》 등 훌륭한 기행문도 남겼다.[64]

1930년대에 정인보는 동아일보에 「조선고전해제」(1931)[8], 「양명학연론」(1933), 「오천 년간 조선의 얼」(1935~36) 등을 기고했다. 「조선고전해제」에서는 조선 시대의 다양한 고전을 소개했고, 「양명학연론」에서는 조선 시대 양명학의 역사를 다루었다.[9] 「오천 년간 조선의 얼」에서는 조선 역사 속에서 "한국성"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10] 이러한 연재와 저술들을 통해 일제 강점기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한국성"을 재발견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1] 이는 안재홍이 이끈 조선학운동으로 이어졌고, 실학의 역사를 통해 한국 역사와 문화의 독립성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12] 정인보와 안재홍은 실학의 중요 인물로 여겨지는 조선 후기 철학자 정약용의 모든 저술을 담은 「여유당전서」(1938)를 재출판하는 데 참여했다.[13]

1937년 봄, 정인보는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피해 연희전문대학을 퇴임하였다.[65]

2. 4. 은둔과 광복 (1937년 ~ 1945년)

1937년,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자 정인보는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다.[39] 이후 경기도 양주군과 전라북도 익산군 등지에서 은거하며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 창씨개명 등의 강요에 저항하며 산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2. 5. 광복 후 활동과 납북 (1945년 ~ 1950년)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정인보는 순국선열추념문을 발표하여 순국지사와 생존지사를 추모했고,[68]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영하는 본영사를 지었다.[69] 1946년 11월에는 국학전문학교에 초빙되어 교육 활동에 힘썼다.[70]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인보는 감찰위원장(현 감사원장)에 임명되었다. 이시영 부통령의 추천이었다고 한다. 정인보는 공직 기강 확립을 위해 노력하며, 1949년 2월 2일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비리를 국무회의에서 보고했다. 그러나 임영신은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이었기에 이승만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국 정인보는 1949년 7월 23일 감찰위원장직을 사임했다.[71]

감찰위원장 사임 후 정인보는 글을 쓰고 비문을 지으며 생활했다.[72] 광복 후 정인보는 3·1절 노래, 광복절 노래, 제헌절가, 개천절가 등 4대 국경절 노래를 작사했다. 그 외에도 국학대학가, 고려대학교가, 동국대학교가, 덕성여자중학교가, 성신여자중학교가, 국립도서관제, 대한부인회가, 학도특별훈련소가, 공무원의 노래 등을 작사했다.[73]

1950년 한국전쟁 중 정인보는 서울에서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이후 사망 시기와 경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정권에 의해 '반동'으로 분류되어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 방치되었다가 병원으로 후송되어 11월에 사망했다고 하나, 북한에서는 공식 사망일을 9월 7일로 기록하고 황해도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납북자 사망 책임을 미국에 돌리기 위한 조작으로 보인다.

정인보의 납북과 죽음에는 당시 북한 부수상이던 홍명희의 차남이자 정인보의 둘째 사위인 홍기무가 관련되었다는 증언이 있다.[74][75][76] 정인보의 아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에 따르면, 홍기무는 남파 간첩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이 점령되자 정인보에게 인민정부에 협력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정인보는 보안서원에게 연행되었다.[75][76]

3. 사상

정인보는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으로, 조선 후기 소론 학자 관료계 가문의 학풍을 이어받았다.[79] 그는 소론계 학풍의 영향으로 청대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고, 단옥재, 주준성, 장병린 등의 음운문자학을 연구하며 조선학 연구와 글쓰기에 대한 시사점을 얻었다.[79]

양명학은 정인보 학문과 사상의 근간이었다. 그는 양명학을 통해 학문의 뿌리를 찾고, 과거 학문의 병폐를 극복하며, 주체적인 태도로 근대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79]

정인보는 역사를 평가할 때 주체성과 고유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비주체성과 사대주의를 조선사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조선시대가 사대주의로 인해 주체성과 고유성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고대에는 민족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남아있다고 보아 고대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79]

3. 1. '얼' 사상

정인보 사상의 핵심은 '얼'로, 이는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80] 정인보는 《양명학연론》, 《오천년간 조선의 얼》 등에서 '얼' 사상을 구체화했다.[80][9][10]

정인보는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양명학연론》에서 '얼'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외적인 것에 치중하고 내적 원인을 소홀히 하는 당시 조선인의 인식을 비판하며, 이러한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을 주창했다.[80] 정인보는 양명학의 '양지(良知)'를 '본심'으로, 순우리말로는 '본밑마음'으로 표현했다. 본밑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타고난 본성으로, 스스로에게 진실된 마음이다. 이러한 본밑마음은 주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고, 주체적 실천을 동반한다. 여기서 주체적 실천의 동력은 '감통(感通)'이다. 본밑마음은 천지만물과 감통하는 주체이자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주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밑마음은 민족의식, 즉 민족의 정체성인 '얼'로 발전한다.[80]

1935년부터 19개월 동안 《동아일보》에 연재된 《오천년간 조선의 얼》에서 정인보는 '얼'을 중심으로 조선 역사를 기술했다. 정인보는 얼이 인간의 존재 가치를 좌우하며, 옳고 그름을 자기 의지대로 판단하는 사람을 얼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얼이 꽉 찬 사람은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뜨거운 열정으로 기운을 낸다. 반면 얼이 빠진 사람은 멍하고 껍데기만 가지고 있다. 정인보는 이러한 인간의 얼을 국가의 얼, 즉 조선의 얼로 확장했다. 조선의 얼은 국난에 처했을 때 희미해지고, 이를 극복했을 때 다시 뚜렷해진다. 얼은 인간의 정신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하며 선조의 얼은 그들 자손의 얼로 계승된다. 또한 얼은 핏줄에도 통하며, 우리가 역사서를 읽다가 문득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핏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80]

정인보는 역사를 평가할 때 주체성과 고유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비주체성과 사대주의적 태도를 조선사의 폐해이자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았으며, 조선시대는 사대주의적 태도로 주체성과 고유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반면 고대는 민족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79]

3. 2. 한문과 국문, 그리고 시조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한문은 지위가 하락하고 한글이 공식적인 국문으로서 지위를 획득했다. 정인보는 1932년 《영인본 훈민정음》 서문에서 민족과 음성을 결부하며 음성언어를 중시하는 언어관을 보였다. 그는 음성언어가 민족을 구별하는 요소이며, 한글은 조선 민족의 음성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참된 문자라고 보았다.[81]

하지만 정인보는 한자와 한글이라는 문자 자체보다는 '조선의 분향(芬香)'을 담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선인의 사상과 감정을 담고 있다면 한문이든 한글 문학이든 상관없다고 보았다.[81]

1926년 가갸날 제정을 계기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정인보도 이에 참여하여 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시조를 국고(國故), 즉 나라의 고유한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고, 한문학 전통과 대비되는 조선 고유의 시가 양식으로서 의미를 부여했다.[82] 정인보는 시조의 내용에 깊이를 더하여 위상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였다.[82] 그의 시조는 어머니 또는 님에 대한 정, 기행과 자연, 교육자의 면모 등을 제재로 삼았으며, 민족정신 고취라는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다.[82]

3. 3. 역사관

정인보는 역사를 평가할 때 주체성과 고유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비주체성과 사대주의적 태도를 조선 역사의 문제점으로 보았으며, 이 때문에 조선시대는 사대주의로 인해 주체성과 고유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반면 고대에는 민족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여 고대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79]

정인보는 신채호의 역사관을 계승, 발전시켜 한국 고대사 연구에 기여했다. 특히, 일본 관학자들의 역사 왜곡에 맞서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그는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4][45] 또한 고조선이 지금의 중국 베이징 동쪽과 내몽골 자치구 남쪽의 요서 지역까지 뻗어 있었다고 보았으며, 낙랑군은 요하 서쪽에 있었고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주장은 식민사학의 잔재라고 주장하는 대한민국 재야 역사학계를 신채호 등과 함께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44][45]

4. 조선학 운동

정인보는 1930년대 안재홍과 함께 조선학 운동을 이끈 민족주의 역사학자 그룹의 중심 인물이다. 조선학 운동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한국성'을 재발견하고 민족 문화의 독립성을 강조하려는 움직임이었다.[19]

정인보는 동아일보에 「조선고전해제」(1931)[8], 「양명학연론」(1933)[9], 「오천 년간 조선의 얼」(1935~36)[10] 등을 기고하며 조선 역사 속에서의 "한국성"을 탐구했다. 그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을 한두 페이지만 읽어도 그들의 교활한 왜곡에 분노를 참을 수 없다"며 한국의 정신을 찾고자 노력했다.[20]

조선학 운동은 실학 연구를 통해 한국 사상사를 탐구하고, 외래 사상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실학의 성격을 강조했다. 정인보는 정약용의 저술을 모은 『여유당전서』(1938) 재출판에 참여하여 실학 연구에 힘을 실었다.[13][31]

5. 교류

박은식, 신채호를 비롯하여 김성수, 송진우, 백낙준, 백남운 등 당대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78] 특히 박은식에게서는 양명학 방면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신채호에게서는 역사 연구에 대한 관점을 배웠다. 박한영에게는 국토 답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78]

6. 평가

황원구는 정인보의 문장에 대해 "전형적인 선비다운 독특한 필체로 많은 문고를 집필했다. 더러는 벽자를 골라서 쓰기도 했고, 까다로운 문체를 구사하기도 했지만, 문장은 대체로 전통적인 팔가문의 세계를 터득한 것이었다. 아울러 한국의 옛 말을 골라서 유창한 글과 아름다운 시조를 짓는 데도 일품이었고, 한시의 경지도 탈속하면서 현실적인 경세의 호소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60] 다만 정인보의 글은 어렵다는 평을 받았으며, 국문학자 천태산인 김태준은 "정인보의 글이 어려워 필자와 신문사 교정자와 총독부 검열자 세 사람만이 읽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김태준은 또한 "문헌학적 공헌은 크다"고 인정하면서도 "논리의 비약은 그 공헌보다 더 크다."고 비판했다.[83] 백낙준은 《담원시조집》의 〈서언〉에서 "위당은 시조 작가로 자처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한 그러한 일컬음을 받기도 원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위당은 시조를 짓고 또한 훌륭히 짓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했다.[63]

7. 사후

1983년 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 유고 등을 모아 《담원 정인보 전집》 전6권을 묶어냈다.[84]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4]

2001년 연세대학교는 민족사관 정립과 국학 진흥에 헌신한 정인보를 기리기 위해 제2인문관을 위당관(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으로 지정하였다.[4]

2005년 태학사에서 정인보의 딸 정양완의 번역과 주석으로 《담원문록》 상·중·하 3권이 발행되었다.[84]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할 때,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 중 교육·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85]

8. 가족

관계이름
증조부정원용
조부정기년(鄭基年)[86]
생부정은조(鄭誾朝)[87]
생모대구 서씨(大丘 徐氏) 부인[87]
양부정묵조(鄭黙朝)[88]
양모경주 이씨 부인[88]
초배 부인성계숙(成癸淑)
계배 부인조경희 (趙慶姬)
장녀정정완(鄭貞婉)[89]
차녀정경완(鄭庚婉)[90] : 홍명희의 아들 홍기무와 결혼[91][92]
장남정연모(鄭淵謨)
차남정상모(鄭尙謨)
삼녀정양완 : 강신항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의 부인
삼남정흥모(鄭興謨) : 한국 전쟁 당시 제5사단 소속으로 철원지구에서 전사
사남정양모
사녀정평완(鄭平婉) : 문국진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의 부인


참조

[1] 서적 Imperatives of Culture: Selected Essays on Korean History, Literature, and Society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서적 Imperatives of Culture: Selected Essays on Korean History, Literature, and Society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University of Hawai’i Press
[3] 서적 Imperatives of Culture: Selected Essays on Korean History, Literature, and Society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University of Hawai’i Press
[4] 웹사이트 History of the Campus Buildings https://www.yonsei.a[...]
[5] 서적 Imperatives of Culture: Selected Essays on Korean History, Literature, and Society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University of Hawai’i Press
[6] 서적 Imperatives of Culture: Selected Essays on Korean History, Literature, and Society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University of Hawai’i Press
[7] 서적 Collection of Damwon’s Writings Tahksa
[8] 뉴스 Reading of Classics of Joseon (ep.17) ‘Wongyojib’ by Riwongyogwangsa https://www.donga.co[...] Dong-A Digital Archive 1931-04-27
[9] 뉴스 Expositions of Yangmingism https://www.donga.co[...] Dong-A Digital Archive 193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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