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소 (삼국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소는 조조가 거병할 때 사망한 인물로,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망 경위와 조진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위략》과 《위서》에 따라 상이하여 논란이 있다. 《위서》에 따르면, 조소는 조조의 일족으로 황완에게 살해당했으며, 조진은 조조의 조카로 조소가 죽은 후 조조가 거두어 길렀다. 그러나 조진의 아버지가 진백남이라는 이설도 있어, 조소의 실존 여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조와 주변 인물 - 관우
    관우는 후한 말기 ~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자 정치인으로,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의형제로서 유비를 보좌하며 뛰어난 무예와 충절로 이름을 알렸으나, 손권의 계략으로 최후를 맞이한 후 동아시아에서 신으로 숭배받고 대중문화에서 영웅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강직함과 자만심이 정치적 판단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다.
  • 조조와 주변 인물 - 문소황후
    문소황후는 후한 말기 조위의 인물로 조비의 황후이자 조예의 생모이며, 원희와 혼인했으나 조비의 아내가 되어 총애를 받았지만 소외되어 자결했고, 사후 조예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으며, 뛰어난 미모와 덕행, 조식과의 로맨스 설화로도 유명하다.
  • 살해된 사람 - 정인보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시기에 활동한 사학자, 시조 작가, 교육자로, 민족주의 역사관과 ‘얼’ 사상을 형성하고, 연세대학교 강사, 동아일보 논설위원, 국학대학교 학장,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사 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살해된 사람 - 정기원 (1559년)
    정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85년 문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배향, 시호는 충의이며 저서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조소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망일189년 ~ 195년
사망원인타살
국적후한
자녀조진
친척조조(같은 항렬)

2. 사망 경위

조조가 거병할 때 무리를 모으다가 주군(州郡)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2]위략》과 《위서》에 구체적인 사망 경위가 기록되어 있으나, 서로 내용이 다르다. 《위서》의 기술이 본전과 더 비슷하다. 배송지는 주석에서 《위서》를 인용하여 조진이 조조의 종자(조카)라고 기록했다(《삼국지》 「조진전」).

초평 원년(190년), 조소는 조조가 거병했을 때 일족으로서 호응했으나, 예주자사 황완에게 살해당했다.[3] 다만, 조진의 아버지는 진백남이라는 다른 이야기도 있으며, 이 설이 맞다면 '''조소'''는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 된다.[4]

조조는 조진이 어리고 아버지를 잃은 것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 다른 아들들과 같이 길렀고, 동년배였던 조비와 함께 생활하게 했다고 한다(《삼국지》 「조진전」).

2. 1. 《위략》의 기록

조소는 본래 진(秦)씨였으며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 흥평 말, 조조가 원술과 함께 도적을 치다가 추격당해 진씨에게 도망갔다. 진백남은 문을 열고 조조를 숨겨주었다. 도적이 조조의 행방을 묻자 자신이 조조라고 답하고 대신 죽었다. 조조는 그 공을 기려 조소에게 조씨 성을 하사하였다.[5]

조진의 아버지가 진백남이라는 이설도 있는데, 이 설이 맞다면 조소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4]

2. 2. 《위서》의 기록

조소는 충성심이 두텁고 재주와 지혜가 있어 조조가 매우 신임하였다. 초평 연간에 조조가 거병하려 하자 무리를 모아 따라다녔다. 예주자사 황완이 조조를 죽이려 했지만 조조는 놓치고 조소만 죽였다.[6] 그런데 황완은 189년(중평 6년) 9월(음력)에 예주 주목에서 사도로 올라 중앙으로 불려갔고,[7] 조조가 동탁을 피해 동쪽으로 간 시기도 이때이므로,[8] 초평은 중평의 오기일 가능성이 제기된다.[9]

3. 조진과의 관계

배송지의 주석에 인용된 《위서》에는 조진조조의 종자(從子, 조카)라고 기록되어 있다(《삼국지》 「조진전」).[2] 조조는 조진이 어리고 아버지를 잃은 것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 다른 아들들과 같이 길렀으며, 조비와 함께 생활하게 했다(《삼국지》 「조진전」).[4]

다만, 조진의 아버지는 진백남이라는 인물이었다는 이설도 있으며, 이 설이 맞을 경우 '''조소'''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4. 의문점 및 논란

위략》과 《위서》의 기록이 서로 달라 조소의 사망 경위와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위서》에 따르면 조소는 충성심이 두텁고 재주와 지혜가 있어 조조가 매우 신임하였다. 초평 연간에 조조가 거병하려 하자 무리를 모아 따라다녔으나, 예주자사 황완이 조조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조소만 죽였다고 한다.[6] 그러나 황완은 189년(중평 6년) 9월(음력)에 예주목에서 사도로 올라 중앙으로 불려갔고,[7] 조조가 동탁을 피해 동쪽으로 간 시기도 이때이므로,[8] 초평은 중평의 오기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9]

배송지가 주석에 인용한 《위서》에는 조진이 조조의 종자(조카)라고 기록되어 있다(《삼국지》 「조진전」). 초평 원년(190년),[2] 조소는 조조가 거병했을 때 일족으로서 호응했지만, 예주자사였던 황완에게 살해당했다.[3] 다만, 조진의 아버지는 진백남이라는 인물이었다는 이설도 있으며, 이쪽이 맞다면 조소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4]

참조

[1] 서적 隷釈・隷続 中華書局
[2] 서적 삼국지
[3] 문서
[4] 서적 위략
[5] 서적 위략
[6] 서적 위서
[7] 서적 후한서
[8] 서적 삼국지
[9] 서적 삼국지집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