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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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태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소론에 속했으며, 1711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최석정의 제자였으며, 170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1721년 신임사화로 노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며, 경종 사후 영조 즉위 후에는 노론의 탄핵으로 벼슬을 잃기도 했으나, 이인좌의 난 진압에 기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저서로는 《겸재집》 등이 있으며, 1728년 사망 후 문충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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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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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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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 |
좌의정 | 임기 시작: 1727년 8월 17일 임기 종료: 1728년 7월 7일 이전: 홍치중 이후: 홍치중 |
우의정 | 임기 시작: 1724년 11월 18일 임기 종료: 1725년 3월 이전: 유봉휘 이후: 정호 |
좌의정 | 임기 시작: 1725년 3월 13일 임기 종료: 1725년 4월 8일 이전: 유봉휘 이후: 정호 |
개인 정보 | |
출생 | 1675년 |
사망 | 1728년 11월 5일 |
국가 | 조선 |
이름 | |
한글 | 조태억 |
한자 | 趙泰億 |
로마자 표기 | Jo Tae-eok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o T'aeŏk |
2. 생애
조태억의 집안은 5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서인 가문이었으나,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에 속했다. 그는 최석정의 제자로, 갑술환국 이후에도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소론 온건파였다.[1]
1693년(숙종 19년) 진사가 되었고, 1697년(숙종 23년) 숙종이 낸 제술에서 1등을 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직부전시 자격을 얻었다.[1] 1699년 상중(喪中)으로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못하고,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1] 1702년 예조의 건의로 다시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1]
1702년 통덕랑으로 재직 중 식년문과에 을과 4등으로 급제, 예문관 검열, 사관(史官), 예문관대교(待敎), 예문관봉교 등을 역임했다. 1703년 이조의 추천으로 예문관 대교가 되었고, 1704년 병조좌랑, 문학, 사헌부 지평, 1705년 정언, 부사과, 사과를 역임했다. 1705년 7월 29일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했다가, 1706년 4월 내직으로 돌아와 부교리, 사서 등을 지냈다. 1707년 수찬, 부교리, 문과 중시에 병과 3등으로 급제, 사간원 헌납, 겸문학, 겸교서관 교리를 겸직했다.
1708년 사서, 교리, 수찬, 부수찬, 부교리, 이조정랑, 우부승지를 지냈다. 1709년 동부승지, 철원부사, 1709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710년 다시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호조 참의, 부호군을 역임했다.
1711년 조선통신사 정사로서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에도 막부 관료화가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현재 일본에 전해진다. 귀국 후 이조 참의, 호조 참의를 역임했다.
1715년 공조참의, 예조참의, 1716년 양주목사, 1717년 여주목사, 1719년 사과에 임명됐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장례원판결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721년(경종 1년) 호조참판, 성균관대사성,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을 역임했다. 경종 즉위 후 김일경 등과 함께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1]
1721년 노론에서 경종에게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연잉군 (훗날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건의했을 때,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 등과 함께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형조판서, 1722년 대제학이 되었다. 소론 내부에서 왕세제 연잉군을 반대하고 종친 중에서 경종의 양자를 입양하여 후사를 이으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광좌, 이태좌 등 소론 온건파와 함께 연잉군의 지지를 선언하였다.[1] 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1]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국상도감 제조(國葬都監 提調)로서 상을 집행하였다.[10] 영조 즉위 후 즉위 교서를 지었고, 병조판서, 우의정, 호위대장(扈衛大將),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우의정에서 물러났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좌의정이 되었으나 판중추부사로 전임됐다가 왕세자 가례도감의 정사를 맡았다. 한달 만에 다시 좌의정으로 복직했고, 금위영 도제조를 겸직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벌어지자 영조와 조선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영돈령부사로 전임되고, 영돈령부사로 있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1776년 영조 때 소론 5대신이라 하여 관작을 추탈당하였다.[10]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조태억의 집안은 증조부 조존성, 할아버지 조계원, 아버지 조가석, 조태억 본인과 아들 조병빈, 조지빈 등 5대에 걸쳐서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1] 그의 집안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될 때 그는 소론에 속했다.[1] 최석정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였으며,[1] 스승인 최석정은 갑술환국 이후에도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소론 온건파 인사였다.[1]1693년(숙종 19년) 진사가 되고,[1] 1697년(숙종 23년) 숙종이 낸 제술(製述)에 1등을 받고 숙종의 특명으로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을 받았다.[1] 1699년 과거 시험 전시(殿試)에 응시하려 하였으나 상중(喪中)이라 응시하지 못했다.[1]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1] 1702년 예조의 건의로 다시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1]
2. 2. 관직 생활과 통신사 파견
1693년(숙종 19년) 진사가 되고, 1697년(숙종 23년) 숙종이 낸 제술(製述)에 1등을 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을 얻었다. 1699년 전시(殿試)에 응시하려 하였으나 상중(喪中)이라 응시하지 못하고,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1702년 예조의 건의로 다시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그해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이후 여러 번 다시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한림의 추천을 받았으나 취재(取才) 시험에 불참하여 춘추관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받고 체포, 투옥됐다가 9월 숙종의 특명으로 풀려났다.1702년 통덕랑으로 재직 중, 식년문과에 을과 4등으로 급제하였다. 그해 예문관 검열이 되고 바로 사관(史官)을 겸직했다. 곧 예문관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봉교로 임명되었으나 패초에 응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1703년 이조의 추천으로 예문관 대교가 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 1704년 병조좌랑, 문학,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쳐 1705년 정언, 부사과, 사과를 역임했다. 사과로 재직 중, 문신 삭시사(文臣 朔試射)에 병을 이유로 불참하여 파직되었다. 그해 겸춘추, 부사과를 거쳐 1705년 7월 29일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4월 내직으로 돌아와 부교리, 사서, 다시 부교리 등을 지냈다. 1707년 수찬으로 패초에 불응하여 파직됐다가 곧 복직했다. 1707년 부교리로 재직 중, 문과 중시에 병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해 말 사간원 헌납이 되고 겸문학, 겸교서관 교리를 겸직했다.
1708년 사서, 교리, 수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지냈다. 그해 이조정랑을 거쳐 우부승지를 지내고, 1709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인 철원부사로 나갔다. 1709년에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710년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이조 참의·호조 참의가 되었다가 호조 참의에서 사직을 청하고 부호군으로 전직했다.
1711년 조선통신사 정사로서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 1711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 중, 에도 막부가 고용한 관료화가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 그린 조태억의 초상화가 현재 일본에 전해진다. 귀국 후 이조 참의가 됐다가 호조 참의를 역임했다.
이듬해 에도 막부의 국서(國書)가 격식에 어긋났다는 이유로[9] 그에게 책임을 물어,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713년 석방되고, 1714년 다시 서용되었다. 1711년, 조선 숙종은 에도의 도쿠가와 이에노부 쇼군에게 사절단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3] 이 외교 사절단은 무역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발전시키는 채널로서 일본과 한국 양측에 이점으로 작용했다.[4]
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확히 "통신사"로 규정되었다. 이 사절단의 파견은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5] 사절단은 당시 사용되던 일본 연호에 따라 ''쇼토쿠'' 원년에 도착했다.[6] 조태억은 이 외교 사절단의 수석 사절이었다.[3]
2. 3. 소론 온건파의 지도자
1715년 공조참의, 예조참의를 역임하고 그해 12월 다시 공조참의가 되었다. 1716년 양주목사로 임명됐다가 유신의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정장을 올려 면직되었다. 1717년 8월 27일 여주목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1719년 2월 사과에 임명됐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장례원판결사에 재임명 되고, 그 해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경상감사에 임명되자 병이 있고 자질 부족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경종이 이를 거절하였다. 곧 경상감사로 부임했다가 6개월 만에 승지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돌아왔다. 1721년(경종 1년) 호조참판을 거친 뒤 성균관대사성을 거친 뒤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이 되었다. 경종 즉위 후 노론계열의 연잉군 추대에 반발하여 김일경 등과 함께 1721년에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1]1721년 호조참판으로 재직 중, 노론에서 경종에게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연잉군 (훗날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그는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 등과 함께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노론에서는 연잉군을 세제로 임명된 뒤 대리청정을 건의한다.[1]
그 뒤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1722년 대제학이 되었다. 이때 소론 내부에서 왕세제 연잉군을 반대하고 종친 중에서 경종의 양자를 입양하여 후사를 이으려는 계획을 세우자 그는 여기에도 반대하여, 이광좌, 이태좌 등 소론 온건파와 함께 연잉군의 지지를 선언하였다.[1]
소론에서는 연잉군을 폐하고 양자 입양을 당론으로 밀었지만 그는 이태좌, 이광좌 등 소수의 소론인사들과 함께 당론을 거부하고 연잉군을 지지한다. 그 뒤 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1]
2. 4. 영조 즉위와 죽음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승하하자 조태억은 국상도감 제조(國葬都監 提調)로서 상을 집행하였다.[10]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조태억은 즉위 교서를 지었다. 그해 한때 비변사의 추천으로 금위대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영조와 노론의 정치보복 아래, 경종의 측신이었던 영의정 조태구의 종제이자 소론이었던 조태억 역시 위태로웠으나, 노론과 소론이 혼합된 가문의 특성상 조정에 남게 되었다. 특별히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병판 출사(出仕) 8일 만에 복상(卜相)이 있어 이조판서 이조(李肇)의 추천으로 우의정으로 특별 승진하였다. 같은 날 호위대장(扈衛大將)을 제수받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우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노론의 민진원 등의 탄핵으로 벼슬을 잃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좌의정이 되었으나 그해 8월 판중추부사로 전임됐다가 왕세자 가례도감의 정사를 맡았다. 한달 만에 다시 좌의정으로 복직했고, 금위영 도제조를 겸직했다. 이듬해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1725년(영조 1) 사간 이봉익(李鳳翼), 지평 유복명(柳復明) 등의 청에 의하여 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이어 파면되었다.[10]
1728년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벌어지자 영조는 조선의 임금이며 소론 역시 조선의 정당이니 영조에게 충성을 바쳐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728년(영조 5년)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영돈령부사로 전임되고, 영돈령부사로 있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1776년 영조 때 소론 5대신이라 하여 관작을 추탈당하였다.[10]
2. 5. 사후
1728년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고, 영돈령부사로 있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초서(草書)·예서를 잘 썼으며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사망 직후 바로 시호가 내려졌으며, 문경(文敬)과 문민(文敏)으로 천거되었으나 여러번 재검토 끝에 1729년(영조 6년) 5월 17일 문충(文忠)으로 정해졌다.1755년 나주 벽서괘서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다시 복권되었으나, 1776년 소론 5대신이라 하여 관작을 다시 추탈당했고, 1806년 또 다시 추탈되었다.
1907년(융희 1년) 이후 이완용의 여러번의 복권 상소로 1908년 4월 복권되었다. [10] 1908년(융희 2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다.[11] 저서로는 《겸재집》이 있다.
3. 저서
- 《겸재집》
- 《좌간필어》: 1711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일본 사절단과 주고받은 대담 모음집이다.
- 1711년 - 《동사록》[8]
- 1712년 - 《강관필담》(《강남필담》)[1]
4. 가족 관계
그의 집안은 서인이었으나 노론,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에 속했다.[1] 삼촌 조사석은 서인이었으나 희빈 장씨의 생모 윤씨와의 관계로 김만중 등 같은 서인 당원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1]
5. 기타
- 1995년 NHK에서 방영한 《8대 쇼군 요시무네》에서는 김수진이 연기했다.[1]
참조
[1]
서적
Korean Travel Literature
https://books.google[...]
2006
[2]
서적
Korea in the middle: Korean studies and area studies; Essays in Honour of Boudewijn Walraven
2007
[3]
서적
[4]
논문
Foreign Affairs and Frontiers in Early Modern Japan: A Historiographical Essay
2002-Fall
[5]
서적
Frontier contact between Chosŏn Korea and Tokugawa Japan
https://books.google[...]
2003
[6]
서적
https://books.google[...]
[7]
웹사이트
Accidental acquisitions: The nineteenth-century Korean collections in the National Museum of Ethnology, Part 1
http://www.rmv.nl/pu[...]
2012-06-22
[8]
웹사이트
Korea-Japan relations
http://english.histo[...]
Northeast Asia History Foundation
2009-10-28
[9]
문서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이에노부]](家宣) 때의 [[조토쿠의 치]](正徳の治)라 불리는 개혁을 주도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통신사 대접을 간략화하고자 했고, 「대군」이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嫡子)를 의미하는 칭호로 조선 국왕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일본국대군」이 아닌 「일본국왕」으로 바꿀 것을 제의하였다.
[10]
간행물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1908-04-30
[11]
간행물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19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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