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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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교 전쟁은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찰스 1세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 하자, 스코틀랜드 교회는 반발하여 국민 언약을 맺고 저항했다. 1639년 제1차 주교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패배하고, 1640년 제2차 주교 전쟁에서 스코틀랜드가 승리하면서,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고, 결국 잉글랜드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자유를 지키는 동시에 잉글랜드의 정치적 격변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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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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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분쟁 | 주교 전쟁 |
일부 | 세 왕국 전쟁 |
날짜 | 1639년 3월 21일 – 1640년 9월 |
장소 |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부 |
원인 | 카베난터와 찰스 1세 간의 갈등 |
결과 | 카베난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잉글랜드 |
교전 세력 2 | 스코틀랜드 카베난터 |
지휘관 | |
지휘관 1 | 찰스 1세 해밀턴 후작 제임스 해밀턴 아보인 자작 제임스 고든 헌틀리 후작 조지 고든 콘웨이 자작 에드워드 콘웨이 스트래퍼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 |
지휘관 2 | 알렉산더 레슬리 아가일 후작 아치볼드 캠벨 몬트로즈 후작 제임스 그레이엄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 | 20,000–25,000명 |
병력 규모 2 | 20,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300–400명 |
사상자 2 | 300–600명 |
기타 정보 | |
일본어 명칭 | 主教戦争 |
2. 배경
16세기 종교 개혁은 브리튼 섬에도 영향을 주어, 잉글랜드는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감독제)를, 스코틀랜드는 장로회(장로제)를 채택했다. 찰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통일을 추구하여 스코틀랜드인들의 반발을 샀다.
1630년대 유럽에서는 가톨릭 세력 확산으로 종교적 긴장이 높아졌고, 이는 스코틀랜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는 30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편에 섰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였으며,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프랑스 위그노 대학에서 교육받았다.(1620년대 루이 13세에 의해 억압됨) 프로테스탄트 유럽이 공격받는다는 인식은 교회 관행 변화에 대한 민감성을 높였다.
찰스 1세는 1633년 대관식에서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 도입을 명확히 했다. 1637년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권고로 국교회 형식의 기도서를 시행하자, 장로교와 청교도들은 자유 기도를 강조하며 반발했다. 국교회는 국왕을 정점으로 대주교와 주교가 이어지는 계층으로 통제되었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선교 장로(목사)와 치리 장로(신도 대표)로 구성된 장로를 대표로 하여 교회 전체에서 의결했다.[3]
2. 1.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과 장로회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은 칼뱅주의 교리를 따르며, 구조적으로는 장로파인 스코틀랜드 교회(커크)를 탄생시켰다. 17세기 당시 장로파와 감독파는 모두 개신교 신앙을 공유했지만, 감독파 교회는 국왕이 임명하는 주교에 의해 통치되었고, 장로파는 목사와 장로들이 선출한 장로들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차이가 있었다.[3] 이러한 차이는 주교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종교적 관행뿐만 아니라 정치와 왕권의 범위에 관한 것임을 의미했다.
스코틀랜드인 대다수는 코버넌터이든 왕당파이든, "잘 정돈된" 군주제가 신성하게 명령받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 정돈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성직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왕당파는 일반적으로 군주를 교회와 국가의 수장으로 보았지만, 코버넌터들은 이것이 속세 문제에만 적용되고 "그리스도 예수…는 커크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6세와 1세가 1603년에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는 통합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교회를 중앙 집권화된 국가를 만드는 첫 단계로 보았다. 이 정책은 찰스 1세에 의해 채택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찰스의 개혁을 가톨릭으로 간주했다.
1636년, 새로운 교회법전이 존 녹스의 ''교회 규율서''를 대체했고, 교회 문제에서 왕의 최고 권위를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든 파문했다. 1637년에 새로운 ''공동기도서''가 뒤따르자,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예배 중에 제니 게데스가 의자를 던진 것으로 알려진 분노와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났다. 마크 키슬란스키와 같은 역사가들은 그녀의 행동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기도서에 대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반대의 일련의 행동 중 하나였으며, 그 기원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대는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전역의 대표들이 예배 "혁신"에 대한 저항을 서약하는 국가 조약에 동의했을 때 정점에 달했다.
1633년 대관식에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를 도입할 것을 명확히 했으며, 1637년에는 측근인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권고로 국교회 형식의 기도서를 시행했다. 국교회와 장로교의 교회 정치의 차이는, 국왕을 정점으로 대주교·주교가 이어지는 계층에 의해 통제된 국교회와는 달리,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선교 장로(목사)와 치리 장로(신도의 대표)로 구성된 장로를 대표로 하여 전체 교회에서 의결을 한다는 점에 있었다.[3]
2. 2. 찰스 1세의 종교 정책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커크)는 장로파 구조와 칼뱅주의 교리를 따랐다. 17세기에는 감독파와 장로파의 차이가 구조와 교리보다는 왕이 임명한 감독과 선출된 장로 중 누가 통치하는가의 문제였다. 이는 종교적 관행뿐만 아니라 왕권의 범위에 대한 논쟁을 의미했다.[3]대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군주제가 신성하게 명령받은 것이라고 믿었지만, "잘 정돈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성직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왕당파는 군주를 교회와 국가의 수장으로 보았지만, 코버넌터들은 그리스도만이 커크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후, 그는 통합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교회를 중앙 집권화된 국가를 만드는 첫 단계로 보았다. 이 정책은 찰스 1세에 의해 채택되었지만, 찰스 1세의 개혁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톨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630년대에는 가톨릭 부활에 대한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고, 프로테스탄트 유럽이 공격받고 있다는 인식은 교회 관행의 변화에 대한 민감성을 증가시켰다. 1636년, 새로운 교회법전은 왕의 최고 권위를 부인하는 사람을 파문했고, 1637년 새로운 ''공동기도서''가 도입되자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대는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전역의 대표들이 예배 "혁신"에 대한 저항을 서약하는 국가 조약에 동의했을 때 정점에 달했다. 아가일 후작과 스코틀랜드 비밀 의회의 다른 회원들이 조약을 지지했다. 찰스 1세는 새로운 교회법전에 대한 논의를 연기했지만, 양보할 의향은 없다고 말했다. 12월 글래스고 총회는 변화를 거부하고, 커크에서 주교들을 축출했으며, 매년 회의를 열 권리를 확인했다. 찰스 1세의 고문인 해밀턴 후작은 전쟁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조언했다.
1633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를 도입할 것을 명확히 했으며, 1637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권고로 국교회 형식의 기도서를 시행했다. 이에 장로교와 청교도들은 자유 기도를 강조하며 반발했다. 국교회는 국왕을 정점으로 대주교와 주교가 이어지는 계층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선교 장로(목사)와 치리 장로(신도 대표)로 구성된 장로를 대표로 하여 의결했다.[3]
2. 3. 정치적, 사회적 배경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으로 칼뱅주의 교리를 따르는 스코틀랜드 교회(커크)가 세워졌다. 당시 장로파와 감독파는 모두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공유했지만, 교회 운영 방식에서 차이를 보였다. 감독파는 국왕이 임명한 감독이 교회를 다스렸지만, 장로파는 목사와 장로들이 선출한 장로들이 교회를 이끌었다. 이는 감독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종교적 관행뿐만 아니라 왕권의 범위에 관한 정치적인 문제였음을 의미한다.대다수 스코틀랜드인들은 군주제를 지지했지만, '잘 정돈된' 군주제의 의미와 성직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왕당파는 국왕을 교회와 국가의 수장으로 보았지만, 코버넌터들은 "그리스도 예수…는 커크의 왕"이라고 주장하며 국왕의 권한이 속세 문제에만 적용된다고 믿었다. 몬트로즈처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후, 통합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교회를 중앙 집권화된 국가를 만드는 첫 단계로 보았다. 찰스 1세는 이 정책을 이어받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개혁을 가톨릭적이라고 여겼다.
1630년대에는 가톨릭이 일부 귀족과 고지대에서만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부활에 대한 두려움이 널리 퍼졌다. 스코틀랜드는 삼십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편에서 싸웠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프랑스 위그노 대학에서 교육받은 스코틀랜드인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636년, 새로운 교회법전이 교회 규율서를 대체하고 왕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1637년 새로운 ''공동기도서''가 도입되자,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제니 게데스가 의자를 던진 사건을 시작으로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났다. 이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반대였다.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대표들은 국가 조약에 서명하며 예배 혁신에 저항했다.
아가일 후작과 스코틀랜드 비밀 의회의 다른 6명의 회원들이 조약을 지지했다. 찰스 1세는 교회 총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지만,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양보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12월 글래스고에서 열린 총회는 변화를 거부하고 주교들을 축출했으며, 매년 회의를 열 권리를 확인했다. 해밀턴 후작은 찰스 1세에게 전쟁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조언했다.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브리튼 섬에서는 잉글랜드는 감독제 성공회,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가 유력했다. 찰스 1세는 양국의 종교 통일을 시도했고, 1633년 대관식에서 잉글랜드 국교회 도입을 명확히 했다. 1637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권고로 국교회 형식의 기도서를 시행했다. 장로교와 청교도들은 자유 기도를 강조하며 반발했다. 국교회는 국왕을 정점으로 대주교와 주교가 이어지는 계층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선교 장로(목사)와 치리 장로(신도 대표)로 구성된 장로를 대표로 하여 교회 전체에서 의결했다.[3]
2. 4. 종교적 배경: 유럽의 상황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으로 칼뱅주의 교리를 따르는 장로파 스코틀랜드 교회가 성립되었다. 17세기 당시 장로파와 감독파는 모두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공유했지만, 감독파 교회는 군주가 임명한 감독이 통치했고 장로파는 목사와 장로가 선출한 장로가 통치했다. 이는 감독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종교적 관행뿐 아니라 정치, 왕권의 범위와도 관련되었음을 의미한다.[3]대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군주제가 신성하게 명령받은 것이라고 믿었지만, '잘 정돈된' 군주제의 의미와 성직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왕당파는 군주를 교회와 국가의 수장으로 보았지만, 코버넌터들은 그리스도만이 커크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커크에 대한 민족주의적 충성심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으며, 개인의 동기도 다양했다. 몬트로즈는 1639년과 1640년에 코버넌터였다가 왕당파로 전향하는 등, 이 시기에는 편을 바꾸는 일이 흔했다.
제임스 6세와 1세는 1603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통합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교회를 중앙 집권화된 연합 국가를 만드는 첫 단계로 보았다. 이 정책은 찰스 1세에게 계승되었으나, 찰스의 개혁은 많은 이들에게 가톨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630년대 유럽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확산되면서 종교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스코틀랜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부활에 대한 두려움은 1630년대 가톨릭이 일부 귀족과 고지대에서만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30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편에 섰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프랑스 위그노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들 대학은 1620년대에 루이 13세에 의해 억압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유럽이 공격받고 있다는 인식은 교회 관행 변화에 대한 민감성을 높였다. 1636년, 존 녹스의 ''교회 규율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교회법전이 제정되었고, 교회 문제에서 왕의 최고 권위를 부인하는 자는 파문되었다. 1637년 새로운 ''공동기도서''가 도입되자,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제니 게데스가 의자를 던진 사건을 계기로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났다.
마크 키슬란스키 등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기원을 가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반대 행동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전역의 대표들은 예배 "혁신"에 대한 저항을 서약하는 국가 조약에 서명하며 반대는 정점에 달했다.
3. 제1차 주교 전쟁 (1639년)
1638년,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 언약이 체결되었고, 이는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이어졌다. 언약파(코버넌터)는 예배서 시행에 강하게 반발하며, 에든버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언약파는 알렉산더 레슬리, 아치볼드 캠벨 (제1대 아가일 후작)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종교 정책에는 반대했지만, 국왕에 대한 충성은 유지하는 입장이었다.[4][5]
제1차 주교 전쟁의 주요 지역은 다음과 같다.
3. 1. 찰스 1세의 군사적 대응과 실패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대신, 자신의 재정 자원을 사용하여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2만 명의 잉글랜드 군이 남쪽에서 에든버러로 진격하고, 해밀턴 후작 지휘 하에 5,000명의 상륙 부대가 동부 해안에 상륙하여 헌틀리 후작이 이끄는 왕당파 군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앤트림 백작이 이끄는 아일랜드 군대는 캐릭퍼거스에서 서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맥도널드 가문 등과 합류할 계획이었다.[4]하지만 이 계획은 지나치게 복잡했고 곧 실패했다. 1639년 3월 21일, 성약자들은 에든버러 성을 점령하고, 덤바턴 성을 확보하여 아일랜드 군의 상륙 가능성을 차단했다. 해밀턴의 상륙 부대도 포스 강 어귀가 강력하게 방어되어 상륙하지 못했다.[5]
애버딘셔와 밴프셔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는 왕당파의 세력이 강했다. 성약 정부는 몬트로즈 지휘 하에 8,000명의 병력을 애버딘에 주둔시켰고, 3월 30일 애버딘은 무혈 입성했다. 5월 13일, 왕당파는 투리프의 전투에서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어보인 자작 지휘 하의 왕당파는 6월 19일 디 강의 다리 전투에서 몬트로즈에게 패했다. 이것이 제1차 주교 전쟁의 유일한 주요 교전이었다.[6]
제1차 주교 전쟁은 잉글랜드에서 인기가 없었고, "찰스 왕의 북부 어리석은 짓"으로 불렸다. 찰스는 강제 대출, 징집, 민간인에게 군대 숙소 제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전쟁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이는 군대 내 반전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성약자들의 선전으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고, 많은 잉글랜드 정치인들이 전쟁에 반대했다.[2]
5월에 약 1만 5천 명의 잉글랜드 군이 버윅어폰트위드에 집결했지만, 대부분 훈련받지 않은 징집병이었고, 활과 화살만으로 무장한 경우도 많았다. 찰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외국 용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이는 외국 가톨릭 신자들을 사용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양측 모두 유럽 전쟁에서 복무한 정규군을 포함했지만, 잉글랜드군의 고위 지휘관들은 경험이 부족한 찰스의 총애를 받는 인물들이었다. 장교들 간의 파벌 분쟁도 심했고, 에식스 백작(Robert Devereux, 3rd Earl of Essex)과 같은 일부 장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불분명하게 여겼다.
잉글랜드 군은 삼십년 전쟁에서 스웨덴군에서 복무한 베테랑 알렉산더 레슬리가 이끄는 1만 6,500명의 스코틀랜드 군대와 맞섰다. 6월 3일, 소규모 잉글랜드 기병대가 스코틀랜드 군대와 조우했으나, 수적으로 열세라고 생각하고 총 한 발 쏘지 않고 후퇴했다. 잉글랜드 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스코틀랜드 군은 6월 5일 던스까지 진격했다.
양측 모두 싸우기를 주저했고, 6월 11일 협상을 시작하여 6월 19일 베릭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모든 분쟁 문제를 총회 또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회부하는 것이었지만, 양측 모두 이를 일시적인 휴전으로 간주하고 군사적 대결을 준비했다.
3. 2. 스코틀랜드 내부의 갈등
애버딘셔와 밴프셔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북동부 지역에서는 성약파에 대한 지지가 약했다. 이를 파악한 성약파 정부는 몬트로즈에게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애버딘으로 가도록 명령했고, 애버딘은 3월 30일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2]5월 13일, 왕당파는 투리프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어보인 자작이 이끄는 왕당파 군대는 6월 19일 디 강의 다리 전투에서 몬트로즈에게 패배했는데, 이 전투는 제1차 주교 전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교전이었다.[2]
4. 제2차 주교 전쟁 (1640년)
1639년에 체결된 베릭 조약은 일시적인 휴전이었을 뿐,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코버넌터는 여전히 대립했다. 찰스 1세는 주교제에 대해 양보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 코버넌터 역시 왕을 불신했다. 결국 찰스 1세는 무력 행사를 결심하고 측근인 스트래포드 백작의 건의로 군사비를 요구하며 1640년 4월,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다.
1640년 6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에든버러에서 개최되어 아가일에게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왕당파 지역에 대한 '화염과 검'의 권한을 부여했다. 5,000명의 병력이 이 작전을 매우 잔혹하게 수행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동맹군은 덤바턴 성을 점령하여 스트라포드의 아일랜드 군대가 스코틀랜드에 상륙하는 것을 막고 영국 침공의 위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알렉산더 레슬리의 지휘 하에 약 20,000명의 잘 무장한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대방에 비해 훨씬 우수한 포병을 보유했다. 반면 영국군은 주로 영국 남부의 민병대로 구성되었으며, 장비가 부족하고 봉급을 받지 못했으며 전쟁에 대한 열의가 부족했다.
영국 북부 사령관 콘웨이 경은 버윅어폰트위드의 방어에 집중했다. 8월 17일, 몬트로즈의 기병대가 트위드 강을 건너 레슬리 군의 나머지 병력이 뒤따랐다. 스코틀랜드군은 도시를 우회하여 런던과의 석탄 무역의 중심지인 뉴캐슬어폰타인으로 향했다.
8월 28일, 스코틀랜드군은 뉴번 전투에서 타인 강을 강제로 건넜다. 8월 30일 뉴캐슬에 도착했을 때 콘웨이는 더럼으로 철수했다. 이 전쟁의 다른 중요한 작전은 왕당파 사령관 패트릭 루드번이 지키고 있던 에든버러 성 공성전이었다. 에든버러 성은 기근으로 인해 9월에 항복했다.
4. 1. 찰스 1세의 재정 위기와 의회 소집
찰스 1세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640년 4월, 11년 만에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했다. 이를 단기 의회라고 부른다.[7] 그러나 의회는 존 핌의 주도로 왕의 함선세와 같은 정책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보조금 승인을 거부했다. 왕은 3주간의 교착 상태 끝에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7]한편, 왕의 가장 유능한 조언자이자 아일랜드 총독이었던 토마스 웬트워스, 스트래퍼드 백작 1세는 아일랜드 의회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여, 1640년 3월 성약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9,000명의 군대를 승인받았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찰스 1세는 영국 동인도 회사로부터 후추를 구입하여 판매하거나, 아일랜드 의회의 지원으로 군대를 내보냈지만, 스트래퍼드 백작을 사령관으로 하는 왕실군은 병력과 사기가 모두 저하되어 있었다.[7]
4. 2. 스코틀랜드의 승리와 리폰 조약
스코틀랜드군은 뉴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뉴캐슬을 점령하여 잉글랜드에 압력을 가했다.[8] 찰스 1세는 스스로 평화를 요청했고, 10월 26일에 리폰 조약이 체결되었다.[8] 이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는 노섬벌랜드와 더럼 두 주의 점령을 허용하고, 스코틀랜드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2개월간 하루 850GBP의 주둔군 유지비를 지불해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에 놓였다.[8]5. 결과와 영향
1640년 리폰 조약과 1641년 런던 조약을 통해 코버넌터(장로파)는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들은 이 성공을 바탕으로 잉글랜드와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성과를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1643년 엄숙한 동맹과 계약은 잉글랜드 의회가 패배할 경우 스코틀랜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코버넌터는 찰스 1세처럼 통합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교회를 원했지만, 그 교회는 감독교가 아닌 장로교여야 했다.[10]
하지만 주교 전쟁에서의 성공은 스코틀랜드가 자신의 군사력과 목표 달성 능력을 과대평가했음을 의미했다.[10] 올리버 크롬웰은 그러한 결과에 동의하기보다는 싸울 것이라고 주장했다.[9] 1648년 잉글랜드 제2차 내전에서 찰스 1세가 패배하고 처형되자, 그의 아들을 복위시키려는 잉글랜드 침공이 실패하면서 영국-스코틀랜드 전쟁 (1650-1652) 이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조건으로 연방에 편입되었다.[9]
5. 1. 잉글랜드 내전 발발
휴전 조약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하루에 850GBP를 지급받고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노섬벌랜드와 더럼주를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점령 비용을 지불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은 의회만 가지고 있었다. 1640년 11월에 소집된 장기 의회는 1641년 5월 스트라포드를 처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립했다. 1641년 8월까지 런던 조약이 체결되었고 스코틀랜드군은 마침내 잉글랜드 북부에서 철수했다.
찰스 1세가 해산할 수 없는 의회를 소집해야 했던 패배에도 불구하고,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은 1642년 8월 전쟁으로 이어진 투쟁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찰스 1세와 의회 모두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고,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의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다. 이러한 긴장이 직접적인 잉글랜드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9]
존 핌 등 의원들은 이 의회에서도 무의회 정치에 대한 비난을 계속했고, 책임자로 탄핵된 스트라포드 백작과 로드는 투옥되어 이후 처형되었다. 의회는 국왕 대권의 제한에도 착수했고,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승인할 수밖에 없었지만, 의회 내부가 왕당파와 의회파로 분열되었다. 1641년 10월 아일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 학살 사건(Irish Rebellion of 1641|label=아일랜드 반란영어)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널리 알려지면서 잉글랜드 여론은 들끓었다. 진압을 둘러싸고 파병군의 지휘권, 더 나아가 군 통수권을 국왕과 의회 중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11월에 핌과 존 햄든 등 급진파(독립파)가 제안한 「의회의 대간주」(대항의문)가 의회를 통과했지만, 찰스 1세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왕과 의회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고, 이듬해 1642년 8월 잉글랜드 내전(First English Civil War|label=제1차 잉글랜드 내전영어)이 발발하여 청교도 혁명이 시작되었다.[9]
5. 2. 스코틀랜드 내부의 분열과 삼국 전쟁
종교적 승리를 거둔 스코틀랜드는 내부적으로 왕당파와 코버넌터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643년 코버넌터는 잉글랜드 의회파와 엄숙 동맹과 언약을 체결하고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했지만, 이는 스코틀랜드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10] 몬트로즈 백작은 왕당파에 가담하여 1644년 거병했고, 아가일 후작 등 계약파와 스코틀랜드에서 전투를 벌였다.[10]주교 전쟁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삼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의 승리와 올리버 크롬웰의 집권은 종교적, 정치적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고, 이는 스코틀랜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와 달리 장로교도들은 영국 교회 내에서 소수였고, 종교적 독립파들은 국가 교회에 반대했다. 레벨러로 알려진 많은 정치 급진주의자들과 신모델군이 독립파 교회에 속해 있었다. 1646년까지 스코틀랜드와 그들의 잉글랜드 동맹국들은 그들을 찰스 1세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겼다.[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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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林、P96 - P100、P104 - P113、今井、P192 - P197、清水、P35 - P40、P45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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