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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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산회는 목요연구회를 모체로 하여 결성된 일본 자유민주당 내 파벌이다. 사토 에이사쿠가 이끌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등이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의 부상과 함께 칠일회가 분리되었고, 주산회는 호리 시게루를 중심으로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하는 그룹으로 남았다. 이후 주산 클럽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존속하다가 세이와 정책 연구회에 합류하며 소멸했다. 사토 에이사쿠의 정치적 기반은 다나카 파벌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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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회 | |
---|---|
주산회 | |
창립 | 1960년 |
해산 | 1972년 |
지도자 | 사토 에이사쿠 |
후신 | 사토파 |
개요 | |
특징 | 사토 에이사쿠를 맹주로 하는 자유민주당의 파벌 |
활동 기간 | 1960년부터 1972년까지 존속 |
역사 | |
배경 | 기시 노부스케의 퇴진 이후, 사토 에이사쿠를 옹립하기 위해 결성 미즈타니 초사부로, 하시모토 토미사부로, 후나다 나카 등 주류 파벌의 중진들이 참여 |
전개 | 사토의 총재 당선 및 장기 집권에 기여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등 비주류 파벌의 도전을 받음 |
해체 | 사토의 총리 사임 후 해체, 사토파로 재편 |
주요 인물 | |
회장 | 사토 에이사쿠 |
간부 | 미즈타니 초사부로 하시모토 토미사부로 후나다 나카 마쓰노 쓰루헤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토다 마사하루 야스이 겐 마쓰다 고우지 기무라 도시오 호리 시게루 |
관련 단체 | |
후신 파벌 | 사토파 |
2. 역사
모체는 '''목요연구회'''이며, 이후 주산회로 개명했다. 사토는 구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 파벌을 이케다 하야토의 이케다 파벌(굉지회)과 나누는 형태로 파벌을 형성했으며, 사토 아래에는 사토 파벌 오봉행이라고 불린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아이치 키이치, 마쓰노 라이조 외에 기무라 다케오, 니카이도 스스무 등의 인재가 결집했다.
총리였던 사토는 후계 총재 직에 후쿠다 다케오를 희망했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의 퇴진 직전에 파벌 내 파벌을 결성하여, 7일회(후의 목요클럽)로 독립했다. 호리 시게루가 중심이 되어 사토 파벌 내 후쿠다 지지 그룹을 통합한 주산회는 주산 클럽으로 이름을 바꾸어 소수 파벌인 호리 그룹이 되었다.
총재 선거 후 호리 그룹은 8일회에 합류하여 파벌은 소멸했다. 사토 파벌의 대파벌로서의 기반은 다나카 파벌로 계승되었다.
2. 1. 결성과 초기 활동 (1950년대~1960년대)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 파벌에서 이케다 하야토의 이케다 파벌(굉지회)과 함께 분리되어 결성되었다. 모체는 '''목요연구회'''이며, 이후 주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토 아래에는 사토 파벌 오봉행이라고 불린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아이치 키이치, 마쓰노 라이조 외에 기무라 다케오, 니카이도 스스무 등의 인재가 결집했다.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는 후계 총재 직에 후쿠다 다케오를 희망했지만, 이를 눈치챈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의 퇴진 직전에 파벌 내 파벌을 결성, 사토 파벌 102명 중 81명이 참가하여 후에 7일회(후의 목요클럽)로 독립했다.
2. 2. 다나카 가쿠에이의 부상과 칠일회 분리 (1970년대)
사토 에이사쿠는 총재 퇴진 후 후계 총리로 후쿠다 다케오를 희망했지만, 이를 눈치챈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의 퇴진 직전에 파벌 내 파벌을 결성했다. 사토 파벌 102명 중 81명이 이에 참가하여, 후에 칠일회(이후의 목요클럽)로 독립했다. 호리 시게루가 중심이 되어 사토 파벌 내 후쿠다 지지 그룹을 통합했고, 남은 주산회는 주산 클럽으로 이름을 바꾸어 소수 파벌인 호리 그룹이 되었다.총재 선거 후 호리 그룹은 8일회에 합류하여 파벌은 소멸했다. 사토 파벌의 대파벌로서의 기반은 다나카 파벌로 계승되었다.
2. 3. 소멸과 유산 (1970년대 후반)
사토는 후계 총리 총재 직에 후쿠다 다케오를 희망했지만, 이를 눈치챈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의 퇴진 직전에 파벌 내 파벌을 결성, 사토 파벌 102명 중 81명이 참가하여 후에 7일회(후의 목요클럽)로 독립했다. 남은 주산회는 주산 클럽으로 이름을 바꾸어 소수 파벌인 호리 그룹이 되었다.총재 선거 후 호리 그룹은 8일회에 합류하여 파벌은 소멸했다. 사토 파벌의 대파벌로서의 기반은 다나카 파벌로 계승되었다.
3. 역대 소속 의원
- '''호리 시게루'''
- 오노 이치로
- 오하시 다케오
- 키타자와 나오키치
- 키무라 토시오
- 사토 에이사쿠
- 세토야마 미츠오
- 나카마 타츠이
- 츠카하라 토시로
- 나카노 시로
- 나카무라 요이치로
- 니시무라 나오미
- 호소다 키치조
- 마츠노 라이조
- 미이케 신
'''칠일회 참가자를 제외한다.'''
- 이토 류지
- 가미바야시 에이키치
- 사카타 에이이치
- 사토 요노스케
- 와타나베 요시오
4. 자민당 내 파벌 변천사와의 관계
목요연구회가 모체이다. 이후 주산회로 개명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구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 파벌을 이케다 하야토의 이케다 파벌(굉지회)과 나누는 형태로 파벌을 형성했으며, 사토 아래에는 사토 파벌 오봉행이라고 불린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아이치 키이치, 마쓰노 라이조 외에 기무라 다케오, 니카이도 스스무 등의 인재가 결집했다.
총리인 사토는 후계 총리 총재 직에 후쿠다 파벌의 후쿠다 다케오를 희망했지만, 이를 눈치챈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의 퇴진 직전에 파벌 내 파벌을 결성, 사토 파벌 102명 중 81명이 참가하여, 후에 칠일회(후의 목요클럽)로 독립했다. 주산회는 호리 시게루가 중심이 되어 사토 파벌 내 후쿠다 지지 그룹을 통합했다. 남은 주산회는 주산 클럽으로 이름을 바꾸어 소수 파벌인 호리 그룹이 되었다.
총재 선거 후 호리 그룹은 8일회에 합류하여 파벌은 소멸했다. 사토 파벌의 대파벌로서의 기반은 다나카 파벌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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