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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나 루치지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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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자나 루치지코바는 체코의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1927년 플젠에서 태어났다. 1956년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사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2019년에는 자서전 "백 개의 기적"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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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나 루치지코바 - [인물]에 관한 문서

2. 초기 생애와 교육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 섹션은 비워둠)

2. 1. 플젠에서의 유년 시절

루지치코바는 1927년 플젠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백화점을 소유했으며, 아버지는 1920년대 시카고에서 4년간 긴스버그 백화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미국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고, 루지치코바는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웠다. 루지치코바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매우 달콤했다"고 회상하며 부모님이 "서로 매우 사랑했다"고 말했다.[5] 가족은 역사적으로 유대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정통 유대교 신자였으나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 루지치코바 자신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았다고 밝혔다.[5]

아홉 살 때 폐렴을 앓고 회복한 후, 루지치코바는 보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피아노 선생님인 마리 프로바즈니코바는 그녀에게 바흐의 음악을 소개하고 쳄발로 연주를 권유했다. 루지치코바의 재능에 감탄한 프로바즈니코바는 프랑스계 폴란드인 음악가 완다 란도프스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루지치코바가 15세에 의무 교육을 마치면 파리 교외 생-뢰-라-포레에 있는 란도프스카의 École de Musique Ancienne|에콜 드 뮈지크 앙시엔fra에서 제자로 받아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24] 그러나 1938년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뉘른베르크 법 시행으로 인해 루지치코바는 결국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

2. 2. 음악과의 만남

루지치코바는 1927년 플젠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백화점을 소유했으며, 아버지는 1920년대 시카고에서 4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미국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고, 루지치코바는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매우 달콤했다"고 회상했으며, 부모님은 "서로 매우 사랑했다"고 말했다.[5] 그녀의 가족은 역사적으로 유대인이었으나, 어머니는 정통 유대교 신자였던 반면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 루지치코바 자신은 종교적이지 않다고 밝혔다.[5]

루지치코바는 아홉 살 때 폐렴을 앓고 회복한 후, 보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아노 스승인 마리 프로바즈니코바는 그녀에게 바흐의 음악을 소개하고 쳄발로 연주를 권유했다. 루지치코바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은 프로바즈니코바는 프랑스계 폴란드인 하프시코드 연주자 완다 란도프스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루지치코바가 15세에 의무 교육을 마치면, 파리 근교 생-뢰-라-포레에 있는 란도프스카의 École de Musique Ancienne|에콜 드 뮈지크 앙시엔프랑스어에서 제자로 받아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24] 하지만 1938년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뉘른베르크 법 시행으로 인해 루지치코바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2. 3. 나치의 점령과 좌절

루지치코바는 아홉 살 때 폐렴을 앓고 회복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마리 프로바즈니코바는 루지치코바에게 바흐의 음악을 가르쳐 주었고, 쳄발로 연주를 권유하며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이끌어냈다. 프로바즈니코바는 루지치코바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폴란드 출신 유명 음악가 완다 란도프스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루지치코바가 15세에 의무 교육을 마친 후, 파리 근교 생-뢰-라-포레에 위치한 란도프스카의 École de Musique Anciennefra에서 제자로 받아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24]

그러나 이러한 유학 계획은 1938년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루지치코바의 가족은 역사적으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어머니는 정통 유대교 신자였고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5]), 유대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뉘른베르크 법이 시행되면서 그녀는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고 란도프스카에게 배울 기회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3.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의 시련

1941년,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는 루치지코바가 살던 플젠의 유대인들을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1942년 1월, 13세의 루치지코바는 가족과 함께 테레지엔슈타트로 강제 이송되어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곳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었다.[10]

1943년 12월, 루치지코바는 어머니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10][2] 이후 함부르크로 이송되어 연합군의 폭격 속에서 송유관 수리 등 위험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고,[10] 1945년 초에는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다시 옮겨졌다.[9][10]

베르겐-벨젠의 참혹한 환경 속에서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루치지코바는 1945년 4월 15일, 영국군과 캐나다군에 의해 마침내 해방되었다.[5][10][11]

3. 1.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

1941년, 게슈타포플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테레진으로 이송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건설 사령부'Aufbaukommando|아우프바우코만도de라 불린 첫 수감자들이 동원되어, 요새와 주변 마을을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개조하는 작업을 맡았다.

당시 13세였던 루치지코바는 플젠에서 게슈타포의 지시로 다른 유대인 어린이들과 함께 마을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수용소 추방 날짜가 적힌 "초대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이 경험을 "인생 최악의 모습"을 본 것이자 "악몽"이었다고 회상했다. 1942년 1월, 통보를 받은 지 3주 후, 루치지코바와 그녀의 가족은 기차에 실려 플젠에서 테레지엔슈타트로 강제 이송되었다. 도착 후 루치지코바는 25세의 독일계 유대인 프레디 히르쉬를 만났다. 히르쉬는 수용소 내 아이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아, 이들을 위한 활동과 운동을 조직하고 '어린이 집'으로 불리는 병영 두 곳을 확보했다.

테레지엔슈타트는 나치에 의해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출신의 교육받은 중산층 유대인들을 위한 "모델 공동체"로 선전되었다.[7] 루치지코바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농업 노동에 동원되어 밭에 거름을 뿌리고 채소밭에서 일했으며, 이 덕분에 정원에서 몰래 음식을 가져와 가족에게 줄 수 있었다. 낮에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지만, 루치지코바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교육을 계속 받을 기회를 가졌다. 퇴근 후에는 수감자들이 주최하는 콘서트와 강연에 참석할 수 있었다.[10] 그녀는 오페라 가수 카렐 베르만의 공연을 관람하고, 전직 대학교수에게 라틴어 수업을 들었으며, 피아니스트 기데온 클라인에게 화성학을 배우고 어린이 합창단에도 참여했다.[2]

수용소 생활 중 루치지코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버지는 1943년 봄에 세상을 떠났으나, 루치지코바는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1943년 12월, 수용소에서 약 2년을 보낸 후 두 사람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루치지코바는 테레지엔슈타트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10]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전, 그녀는 바흐의 곡을 종이에 옮겨 적어 수용소로 가져갔다.[2]

3. 2.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수송된 지 3일 만에 루치지코바와 그녀의 어머니는 밤에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수송된 사람들은 즉시 막사에 수용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배고픔과 탈수 증세로 고통받았다. 다음 날, 그녀와 다른 수감자들은 다른 막사로 옮겨져 옷을 빼앗기고 몸에 문신을 새겨야 했다. 이후 테레지엔슈타트에서 반독일 활동으로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았다는 내용의 서류에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10]

아우슈비츠 도착 직후, 루치지코바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알았던 프레디 히르쉬와 다시 만났다. 히르쉬는 그녀에게 실제 나이인 15세가 아닌 16세라고 말하라고 조언했다. 루치지코바는 훗날 히르쉬의 조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는데, 만약 나이를 속이지 않았다면 가스실에서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히르쉬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처럼 어린이 막사를 조직했고, 루치지코바는 그곳에서 교육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일 덕분에 그녀는 더 위험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용소에 만연했던 여러 질병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녀는 나치 인종 이론의 끔찍한 현실을 목격해야 했다. 수용소의 '수석 선택자'이자 루치지코바가 테레지엔슈타트에서도 만났던 요제프 멩겔레의 동료인 프리츠 클라인을 포함한 독일 의사들이 어린이 막사를 방문하여 아이들의 신체 치수를 재거나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아이들을 골라냈다.

1944년 5월, 루치지코바와 그녀와 함께 테레진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다른 수감자들은 가스실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다.[2] 그러나 그들의 처형은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예정되었다. 또 다른 선발 과정을 거친 후, 루치지코바와 그녀의 어머니는 대신 독일로 보내졌다.[8]

3. 3. 함부르크에서의 강제 노동

루치지코바는 함부르크로 보내졌는데, 당시 함부르크는 영국과 미국의 정기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노이엔감메 강제 수용소 산하의 하위 수용소에 배정되어 함부르크 주변 지역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루치지코바는 매일 폭격 대상이 되는 송유관을 보호하고 수리하며 가스 탱크를 유지하는 위험한 작업을 해야 했다.[10] 또한 함부르크의 조선소에서도 일했다.

수용소 생활 중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는 있었지만, 굶주림과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다른 수감자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약간의 음식을 더 얻기도 했다.[10]

1945년 1월, 루치지코바는 티프슈타크 하위 수용소로 이송되어 시멘트 공장에서 일했다.[9] 연합군이 진격해오자 수감자들은 탱크를 막기 위한 부비트랩을 파는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10]

3. 4.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

2월 말, 루치지코바와 다른 노동자들은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은 지옥의 가장 낮은 곳이었다. 이곳은 말살 수용소였으며, 우리는 이곳에서 죽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5] 당시 베르겐-벨젠은 혼란스럽고 사람이 넘쳐났으며 질병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루치지코바는 살아남기 위해 수용소 밖으로 몰래 나가 순무를 구해와야 했다.[10]

1945년 4월, 루치지코바와 아직 걸을 수 있는 다른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약 3.22km 떨어진 기차역까지 행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수용소로 돌아왔고, 다음 날 아침 독일군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비병들은 수용소를 버리고 떠났으며 식량은 남겨두지 않았고 물 공급도 끊어 놓았다. 소수의 독일군과 헝가리군만이 수용소 밖에 남아 때때로 병영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기도 했다. 1945년 4월 15일, 영국군과 캐나다 군인들이 베르겐-벨젠에 도착하여 수용소를 해방시켰다.[11]

4. 전후 활동과 음악적 성취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루치지코바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의 극심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심각한 건강 상태에 놓였다. 해방 당시 몸무게는 32kg에 불과했으며, 병원에서 궤양, 장티푸스, 영양실조 치료를 받았다.[10] 1945년 7월 어머니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으나,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점거되었고 재산은 도난당한 상태였다.[5] 수용소 생활의 후유증은 그녀의 손에도 남아, 옛 피아노 스승은 그녀의 손 상태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5][12]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루치지코바는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프라하 공연 예술 아카데미에 진학하여 하프시코드를 전공했다.[13] 1948년 공산 쿠데타 이후 들어선 공산 정권 하에서는 정치적인 압박을 받기도 했으나,[14] 1951년 첫 하프시코드 독주회를 열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의 우승은[3][2] 그녀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럽 전역에서 연주 초청이 이어졌지만, 공산 정권은 그녀의 유대인 혈통과 비당원이라는 이유로 활동에 제약을 가했다. 체코 필하모닉과의 협연 기회가 제한되었고, 해외 연주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의 상당 부분은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3]

스탈린 사후 정치적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면서 루치지코바는 더욱 활발하게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14] 특히 바흐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이는 서유럽의 바로크 음악 부흥 흐름과 맞물려 더욱 주목받았다. 그녀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1965년부터 10년에 걸쳐 프랑스 음반사 에라토 레코드와 함께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한 것이다. 이는 세계 최초의 시도로, 1975년에 마침내 완성되었다.[16][17] 이 시기 그녀는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과 프라하 챔버 솔로이스트를 공동 창단(1962)하고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와 성공적인 듀오(1963)를 결성하는 등 실내악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체제 선전의 일환으로 루치지코바에게 여러 국가 포상을 수여했다.[18] 그녀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체코 필하모닉의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꾸준히 연주 활동을 이어갔다.[18]

4. 1. 프라하 공연 예술 아카데미 수학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보낸 4년은 루치지코바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음악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공백을 만들었다. 음악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그녀는 여러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으며, 몇 달 간격으로 실력을 향상시켜 3학년 수준에서 요구되는 8학년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루치지코바는 플젠에서 보흐단 쇠르호퍼(Bohdan Šofer)에게 다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24]

1947년, 루치지코바는 프라하 공연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피아니스트 알빈 시마(Albin Šíma), 프란티셰크 라우흐, 하프시코드 연주자 올드르지흐 크레드바(Oldřich Kredba)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빠른 실력 향상에도 불구하고 한 교수는 그녀가 전문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지만, 루치지코바는 하프시코드와 초기 음악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그녀는 문학사 학위를 마치고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13]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이 1948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후, 루치지코바는 공산주의 청년 운동 가입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프라하에서 학생 신분이던 시절, 금서로 지정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책을 읽다가 발각되어 위원회에 소환되기도 했다. 1950년, 루치지코바는 아카데미에서 작곡 전공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다. 이때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이 미래의 남편이 될 체코 작곡가 빅토르 칼라비스였다. 루치지코바는 1951년에 첫 하프시코드 독주회를 열었다. 공연 예술 아카데미의 교직원으로서 그녀는 연주 실력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심사를 거쳤다.[14]

유대인이었던 루치지코바는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도 여전히 박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1952년 슬란스키 재판과 같이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반유대주의적 정치 사건들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치지코바는 빅토르 칼라비스에게 자신과 결혼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1952년 12월에 결혼했다.[15]

4. 2. 공산 정권 하에서의 활동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의 1948년 쿠데타 이후, 루치지코바는 공산주의 청년 운동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프라하에서 학생 신분이었던 그녀는 금지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위원회에 소환되기도 했다. 1950년, 루치지코바는 아카데미에서 작곡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다. 이때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이 훗날 남편이 되는 체코 작곡가 빅토르 칼라비스였다. 1951년에는 첫 하프시코드 독주회를 열었다. 공연 예술 아카데미의 교직원으로서 루치지코바는 전문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평가받는 공연 심사를 받아야 했다.[14]

유대인이었던 루치지코바는 공산주의 정부 하에서도 여전히 박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1952년 슬란스키 재판과 같은 반유대주의적 정치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 루치지코바는 빅토르 칼라비스에게 자신과 결혼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두 사람은 결국 1952년 12월에 결혼했다.[15]

1956년, 루치지코바는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3][2]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이었던 마르그리트 로젠-챔피언은 그녀에게 파리에서 하프시코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제안했다. 칼라비스 역시 파리 유학 초청을 받았지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망명을 우려하여 부부가 함께 해외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칼라비스만 파리로 떠나고 루치지코바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남아야 했다. 비록 파리 유학은 좌절되었지만, 콩쿠르 우승 덕분에 유럽 전역에서 연주 초청이 쇄도했다. 정부는 그녀가 벌어들일 외화 수입을 기대하며 해외 연주 여행을 허락했지만, 수입의 대부분을 국고로 환수했다.[3]

루치지코바는 라이프치히, 슈투트가르트, 하이델베르크, 안스바흐, 프랑크푸르트, 샤프하우젠, 그리고 바스 등 유럽 여러 도시에서 열린 바흐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녀의 성공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루치지코바는 여전히 정부의 의심을 받았고, 체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체코 필하모닉과의 협연 기회도 제한받았다.

요제프 스탈린 사후 정치적 긴장이 다소 완화되면서 루치지코바에 대한 압박도 줄어들었다. 이전보다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때로는 남편과 동행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루치지코바와 칼라비스 모두 체코슬로바키아에 가족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망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부터 루치지코바는 국제 배급을 위한 음반 녹음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는 그녀의 명성을 더욱 높이고 바흐 음악의 권위자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서유럽에서 바로크 음악이 다시 부흥하던 시기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냈다.[14]

1962년, 그녀는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과 함께 프라하 챔버 솔로이스트를 공동 창단했으며, 1963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와 성공적인 듀오를 결성했다. 이외에도 첼리스트 야노스 스타커, 피에르 푸르니에, 플루티스트 장 피에르 랑팔, 오렐 니콜레, 막상스 라리외 등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과 실내악 파트너로 활동했다. 또한 세르주 보도, 파울 자허,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리보르 페셰크, 네빌 마리너, 헬무트 릴링 등 저명한 지휘자들과 협연했다. 그녀의 녹음 레퍼토리는 영국 버지널리스트 음악부터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프랑시스 풀랑크, 마누엘 데 파야, 프랭크 마틴과 같은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범위를 자랑했다.

그러나 바흐의 음악은 항상 그녀의 음악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1965년, 루치지코바는 프랑스 음반사 에라토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하는 대장정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1975년에 완료되었으며,[16] 이로써 그녀는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한 최초의 연주자가 되었다.[17]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경직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국제 사회에 안정적이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루치지코바는 체제 선전의 일환으로 여러 국가 포상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상들을 거부할 수 없었고, 종종 성대한 기념식과 함께 수여받아야 했다. 그녀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체코 필하모닉의 솔리스트로 활동했다.[18]

4. 3. 국제적인 명성

1951년 첫 하프시코드 독주회를 열었으며, 1956년에는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3][2]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마르그리트 로젠-챔피언은 그녀에게 파리에서 하프시코드 공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장학금을 제안했다. 남편인 작곡가 빅토르 칼라비스 역시 파리 유학 초청을 받았으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은 부부의 동반 출국이 망명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칼라비스만 파리로 떠나고 루치지코바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남게 되었다.[3]

파리 유학은 좌절되었지만, 콩쿠르 우승 덕분에 유럽 전역에서 연주 초청이 쇄도했다. 그녀는 라이프치히, 슈투트가르트, 하이델베르크, 안스바흐, 프랑크푸르트, 샤프하우젠, 바스 등 여러 도시의 바흐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명성을 쌓았다. 정부는 그녀의 해외 공연 수입이 외화벌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여행을 허가했지만, 수입의 상당 부분을 국고로 귀속시켰다.[3] 그러나 공산당 비당원이었던 루치지코바는 여전히 정부의 의심을 받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코 필하모닉 활동이 제한되거나 체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요제프 스탈린 사망 이후 정치적 압박이 다소 완화되면서, 루치지코바는 이전보다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때로는 남편과 동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 남은 가족들 때문에 망명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부터 루치지코바는 국제 시장을 대상으로 한 음반 녹음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는 서유럽의 바로크 음악 부흥기와 맞물려 그녀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14]

1962년에는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과 함께 프라하 챔버 솔로이스츠를 공동 창단했으며, 1963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와 성공적인 듀오를 결성했다. 이 외에도 첼리스트 야노스 스타커, 피에르 푸르니에, 플루티스트 장 피에르 랑팔, 오렐 니콜레, 막상스 라리외 등 저명한 연주자들과 실내악 파트너로 활동했다. 또한 세르주 보도, 파울 자허,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리보르 페셰크, 네빌 마리너, 헬무트 릴링 등의 지휘자들과 협연하며 폭넓은 음악 활동을 펼쳤다. 그녀의 레퍼토리는 영국 버지널리스트 음악부터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프랑시스 풀랑크, 마누엘 데 파야, 프랭크 마틴과 같은 현대 작곡가의 작품까지 아우르는 방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음악 경력에서 바흐의 음악은 항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65년, 프랑스 음반사 에라토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 녹음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10년 만인 1975년에 완료되었으며,[16] 루치지코바는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한 최초의 연주자가 되었다.[17]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체제의 안정성과 진보성을 선전하기 위해 루치지코바에게 여러 국가 포상을 수여했다. 그녀는 이러한 상을 거부할 수 없었으며, 종종 공식적인 행사를 통해 받아야 했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는 체코 필하모닉의 솔리스트로 활동했다.[18]

4. 4. 바흐 건반 음악 전곡 녹음

바흐의 음악은 루치지코바의 음악 경력에서 항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녀의 녹음 레퍼토리는 영국 버지널리스트부터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프랑시스 풀랑크, 마누엘 데 파야, 프랭크 마틴과 같은 현대 작곡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었지만, 바흐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특별했다.

1965년, 루치지코바는 프랑스의 음반사 에라토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하는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10년에 걸쳐 진행되어 1975년에 마침내 완성되었다.[16] 이로써 루치지코바는 역사상 처음으로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한 연주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17]

5. 벨벳 혁명 이후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면서 루치지코바의 활동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 정치적인 이유로 받지 못했던 정식 교수 칭호를 프라하 공연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받게 되었고,[20][21] 국제 음악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19]

이후 루치지코바는 국내외에서 활발한 교육 활동을 이어갔으며,[24] 2004년 남편 빅토르 칼라비스의 건강 문제로 공개 연주 활동은 중단했다. 2006년 남편 사후에는 초기 음악의 해석과 보존, 젊은 음악가 발굴을 위한 다양한 음악 단체 및 위원회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4] 특히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는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24][22][23]

5. 1. 후학 양성과 사회 활동

1989년 11월 17일 벨벳 혁명 이후, 루치지코바는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19] 프라하 공연 예술 아카데미와 체코 필하모닉에서의 파업을 주도했다. 같은 해 12월 공산 정권이 무너지자, 그녀는 1951년부터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받지 못했던 정식 "교수" 칭호를 받았으며,[20][21] 다양한 음악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객원 교수로 있었던 브라티슬라바 음악 아카데미에 하프시코드 강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루치지코바는 국제적으로도 활발한 교육 활동을 펼쳤다. 특히 취리히에서는 25년 동안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으며, 그 외 여러 도시에서도 강좌를 개설했다.[24]

마스터 클래스 및 강좌 개설 도시[24]
도시국가활동 내용
취리히Zürich|취리히deu25년간 마스터 클래스 개최
슈투트가르트Stuttgart|슈투트가르트deu강좌 개설
크라쿠프Kraków|크라쿠프pol강좌 개설
부다페스트Budapest|부다페스트hun강좌 개설
리가Rīga|리가lav강좌 개설
도쿄東京|도쿄jpn강좌 개설



2004년, 남편인 작곡가 빅토르 칼라비스가 병을 앓게 되면서 루치지코바는 공개 연주 활동을 중단했다. 2006년 칼라비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초기 음악의 해석과 보존, 젊은 음악가 발굴을 위한 다양한 음악 단체와 위원회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요 사회 활동 및 참여 단체
단체명직책/활동 내용
빅토르 칼라비스 & 주자나 루치지코바 재단회장[24]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위원회부회장[24]
체코 실내악 협회자문 위원[24]
콘체르티노 프라하 국제 콩쿠르자문 위원[24]
한스 크라사 이니셔티브지지 (홀로코스트 희생 작곡가 한스 크라사 관련)[24]
테레진 이니셔티브활동 (프레디 히르쉬 기념비 후원 등)[22][23]



특히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작곡가이자 테레지엔슈타트 수감자였던 한스 크라사의 삶과 음악을 기리는 한스 크라사 이니셔티브를 지지했으며,[24] 프레디 히르쉬를 위한 기념비 건립을 후원한 테레진 이니셔티브에서도 활동했다.[22][23]

6. 수상 및 서훈


  • 1968년: 체코 공로 예술가
  • 1989년: 체코 국민 예술가
  • 1990년: 프라하 음악 아카데미 교수 (체코)
  • 1993년: 함부르크 예술 과학 훈장
  • 1997년: 수프라폰 "골든 펀드" 공로 훈장
  • 2001년: 하모니 뮤지컬 리뷰 훈장
  • 2001년: 체코 및 세계 음악 기여상
  • 2004년: 체코 대통령 문화 예술 공로 훈장 2등급
  • 2004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기사(Chevalier)[18]
  • 2011년: 아헨 카를 4세 문화상
  • 2013년: 보헤미안 헤리티지 기금 재단 그레나데 스타[32]
  • 그랑프리 크로스 (J.A. 벤다, J.S. 바흐)
  • 디아파종 도르 (헨리 퍼셀)
  • 골든 디스크 수프라폰 (음반 30만 장 판매)

7. 유산과 영향

주자나 루치지코바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겪은 극심한 고통과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의 억압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세계적인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우뚝 섰다. 해방 당시 극심한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렸던[10] 그녀는 강제 수용소 생활로 인해 손상된 연주 기술을 회복하고 음악 교육을 다시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5][12][24]

프라하 공연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걸었지만,[13] 1948년 공산당 쿠데타 이후 정치적 압박과 반유대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6년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 우승은 그녀의 국제적인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3][2] 이후 유럽 전역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며 하프시코드 음악의 부활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세계 최초로 녹음(1965-1975)한 것은[16][17] 그녀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유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루치지코바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마한 에스파하니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낸 영향력 있는 교육자였으며, 남편인 작곡가 빅토르 칼라비스를 비롯한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새로운 하프시코드 작품들이 탄생하는 데 기여했다.[24][25] 그녀의 삶과 음악은 2017년 다큐멘터리 영화 ''주자나: 음악은 삶이다''로 제작되었으며,[28][29] 2019년에는 웬디 홀든과 함께 집필한 사후 자서전 ''백 개의 기적''이 출간되어[31] 그녀의 삶과 예술은 후대에 계속해서 조명받고 있다.

7. 1. 하프시코드 음악의 대중화

1956년 루치지코바는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3][2] 이 우승으로 심사위원 마르그리트 로젠-챔피언으로부터 파리 유학 장학금을 제안받았으나,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남편 빅토르 칼라비스와 함께 출국할 수 없어 파리 유학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칼라비스만 파리로 갔고 루치지코바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남았다.[3]

파리 유학은 좌절되었지만, 국제 콩쿠르 우승 덕분에 유럽 전역에서 연주 초청이 늘어났다. 라이프치히, 슈투트가르트, 하이델베르크, 안스바흐, 프랑크푸르트, 샤프하우젠, 바스 등 여러 유럽 도시의 바흐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하프시코드 음악을 알렸다. 그녀의 성공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공산당 비당원이었던 루치지코바는 여전히 정부의 의심을 받았고, 체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나 체코 필하모닉에서의 활동이 제한되기도 했다.

요제프 스탈린 사후 정치적 압박이 다소 완화되면서 루치지코바는 이전보다 자유롭게 해외 연주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때로는 남편과 동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국제적인 배급을 위한 음반 녹음이 가능해졌는데, 이는 그녀의 명성을 더욱 높이고 바흐 음악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서유럽에서의 바로크 음악 부흥 흐름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냈다.[14]

1962년에는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과 함께 프라하 챔버 솔로이스트를 공동 창단했으며, 1963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와 성공적인 듀오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이 외에도 야노스 스타커, 피에르 푸르니에, 장 피에르 랑팔, 오렐 니콜레, 막상스 라리외 등 저명한 연주자들과 실내악 파트너로 협연했으며, 세르주 보도, 파울 자허,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리보르 페셰크, 네빌 마리너, 헬무트 릴링 등 유명 지휘자들과도 함께 작업했다. 그녀의 녹음 레퍼토리는 영국 버지널리스트 음악부터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프랑시스 풀랑크, 마누엘 데 파야, 프랭크 마틴과 같은 현대 작곡가의 작품까지 아우르며 하프시코드의 가능성을 넓혔다.

특히 바흐의 음악은 그녀 경력의 핵심이었다. 1965년 프랑스 레이블 에라토 레코드와 계약하여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 녹음에 착수했고, 1975년에 이를 완수했다.[16] 이는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17]

루치지코바는 남편 빅토르 칼라비스에게 영감을 주어 그가 하프시코드를 위한 중요한 작품들을 작곡하게 만들었다.[24] 또한 얀 리흐리크, 에밀 흐로빌, 한스-게오르크 굘너, 엘리자베스 매콘키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했다.[25] 그녀는 영향력 있는 교육자이기도 했으며, 그녀의 제자 중에는 영국의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지휘자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이란계 미국인 하프시코드 연주자 마한 에스파하니 등이 있다.

영국의 하프시코드 연주자 파멜라 내시는 2013년 잡지 ''Sounding Board''에 루치지코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하프시코드의 여왕'으로 칭송받고 란도프스카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그녀는 반세기에 걸친 경력과 100개가 넘는 녹음을 통해 하프시코드 세계에 큰 유산을 남겼다... (중략) ... 루치지코바는 20세기 하프시코드 음악을 알리는 데 귀중한 역할을 했으며, 이 악기를 독주 및 앙상블 악기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 하프시코드의 위상은 그녀의 선구적인 노력 덕분이다... (중략) ... 그녀는 바로크 건반 음악을 원래 악기인 하프시코드로 연주하는 데 전념했으며, 그녀 자신의 말처럼 '하프시코드를 박물관적 성격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악기로 만들었다.'" [26]


2016년에는 그녀가 연주한 바흐 건반 작품 전곡 리마스터링 버전이 워너 레코드/에라토에서 발매되었고, Supraphon 역시 그녀의 초기 녹음들을 재발매하며 그녀의 음악적 유산을 기렸다.[27]

7. 2.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의 증언

루치지코바는 해방 후, 기아에 시달리던 다른 수감자들처럼 군인들이 제공한 식량을 먹고 심하게 앓았다. 당시 그녀의 몸무게는 약 31.75kg(약 32kg)에 불과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그녀는 궤양, 장티푸스, 영양실조 치료를 받았으며, 말라리아 진단까지 받았다. 루치지코바는 영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회복하는 동안 의료진의 통역을 돕기도 했다.[10]

1945년 7월, 루치지코바는 여전히 병중에 있던 어머니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으나, 그들의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점거되었고 재산은 도난당한 상태였다.[5] 플젠으로 돌아온 후 처음 만난 사람 중 한 명은 그녀의 옛 피아노 스승인 마리 프로바즈니코바였다. 루치지코바는 훗날 프로바즈니코바가 4년간의 강제 수용소 생활로 망가진 자신의 손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5][12]

강제 수용소에서의 4년은 루치지코바에게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음악가로서의 성장에도 큰 공백을 만들었다. 음악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여러 시험을 거쳐야 했고, 기초부터 다시 다지기 위해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몇 달 간격으로 실력을 끌어올려, 입학 당시 3학년 수준에서 시작하여 8학년 수준까지 도달했다. 플젠에서는 보흐단 쇠르호퍼에게 다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24]

후일 루치지코바는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녀는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작곡가이자 테레지엔슈타트 수감자였던 한스 크라사의 삶과 음악을 기리는 '한스 크라사 이니셔티브'를 지지했으며,[24] 프레디 히르쉬의 기념비 건립을 도운 '테레진 이니셔티브'에서도 활동했다.[22][23] 2019년에는 그녀의 경험을 담은 사후 자서전 ''백 개의 기적''이 웬디 홀든과의 공저로 출간되어 1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31]

7. 3. 여성 음악가로서의 귀감

프라하 공연 예술 아카데미 재학 시절, 교수 중 한 명은 그녀가 전문 음악가가 되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지만, 루치지코바는 하프시코드와 초기 음악을 전공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13] 1948년 공산당 쿠데타 이후에는 공산주의 청년 운동 가입을 거부하고, 금지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는 등 정치적 압박 속에서도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14] 유대인이라는 배경 때문에 1952년 슬란스키 재판과 같은 반유대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5]

1956년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 우승은 그녀의 국제적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3][2] 이를 계기로 유럽 전역에서 연주 초청이 늘어났지만, 공산주의 정부는 그녀의 해외 활동을 제한하고 공연 수입의 상당 부분을 몰수했다.[3] 비당원이라는 점과 유대인 혈통 때문에 체코 내에서의 활동에도 제약이 따랐으며, 체코 필하모닉과의 협연이나 체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한동안 금지되기도 했다.

요제프 스탈린 사후 정치적 압박이 다소 완화되면서 루치지코바는 국제적인 음반 녹음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는 서유럽의 바로크 음악 부흥과 맞물려 그녀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14] 1962년에는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과 프라하 챔버 솔로이스트를 공동 창단했으며, 1963년부터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와 성공적인 듀오 활동을 펼쳤다. 이 외에도 야노스 스타커, 피에르 푸르니에, 장 피에르 랑팔, 오렐 니콜레, 막상스 라리외 등 저명한 연주자들 및 세르주 보도, 파울 자허,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리보르 페셰크, 네빌 마리너, 헬무트 릴링 등 유명 지휘자들과 협연하며 폭넓은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바흐의 음악은 그녀 경력의 핵심이었는데, 1965년 프랑스 레이블 에라토 레코드와 계약하여 바흐의 건반 작품 전곡 녹음에 착수했고, 1975년에 이를 완성하며 세계 최초로 바흐 건반 작품 전곡을 녹음한 연주자가 되었다.[16][17]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체제의 안정성을 과시하기 위해 루치지코바에게 여러 국가 포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으며, 1979년부터 1990년까지는 체코 필하모닉의 솔리스트로 활동했다.[18]

루치지코바는 남편인 작곡가 빅토르 칼라비스에게 영감을 주어 여러 하프시코드 작품이 탄생하도록 했으며[24], 얀 리흐리크[25], 에밀 흐로빌, 한스-게오르크 굘너, 엘리자베스 매콘키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했다. 또한 영국 하프시코드 연주자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이란계 미국인 하프시코드 연주자 마한 에스파하니 등을 제자로 두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영국의 하프시코드 연주자 파멜라 내시는 2013년 잡지 ''Sounding Board''에 루치지코바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하프시코드의 여왕'으로 칭송받고, 많은 이들에게 란도프스카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그녀의 경력은 반세기에 걸쳐 100개 이상의 녹음으로 기록된 하프시코드 세계에 유산을 남겼다... 이 시기적절한 기념은 20세기 하프시코드를 홍보하는 데 있어 루치지코바의 귀중한 역할을 적절하게 상기시켜준다. 그녀는 이 악기를 독주 및 앙상블 연주 악기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오늘날 하프시코드의 위상은 그녀의 선구적인 노력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초기 하프시코드 레퍼토리가 거의 인정받지 못하거나 피아노로 전락했을 때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바로크 키보드 음악을 그것이 쓰여진 악기에 다시 연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프시코드를 박물관적 성격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악기로 만들겠다.'" [26]


2016년에는 그녀가 연주한 바흐 건반 작품 전곡 리마스터링 버전이 워너 레코드/에라토에서 발매되었고, Supraphon 레이블에서도 그녀의 초기 녹음들을 재발매했다.[27] 2017년에는 그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자나: 음악은 삶이다''가 제작되었으며,[28][29] 2019년에는 웬디 홀든과 함께 집필한 사후 자서전 ''백 개의 기적''이 출판되어 10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31] 그녀의 음악과 삶은 후대에도 계속해서 조명받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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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The miraculous life of Zuzana Ruzickova https://www.bbc.com/[...] BBC News 2016-12-19
[3] 웹사이트 Where Fascism, Communism And Bach Meet http://www.huffingto[...] HuffPost 2017-09-28
[4] 뉴스 Zuzana Růžičková remembered https://www.gramopho[...] 2017-09-28
[5] 문서 Interview with Zuzana Ruzickova, 27 March-1 April 1991.
[6] 웹사이트 The Aufbaukommando {{!}} Holocaust http://www.holocaust[...] 2017-10-26
[7] 뉴스 HG Adler and the Coerced Community of Theresienstadt http://www.tabletmag[...] 2017-10-27
[8] 뉴스 Zuzana Růžičková obituary https://www.theguard[...] 2017-10-26
[9] 뉴스 Zuzana Ruzickova, Leading Harpsichordist and War Survivor, Dies at 90 https://www.nytimes.[...] 2017-10-27
[10] 웹사이트 USHMM – Transcripts of taped interviews with Zuzana Ruzickova, March 27 – Apri1, 1991 https://collections.[...]
[11] 뉴스 1945: British troops liberate Bergen-Belsen http://news.bbc.co.u[...] 2017-10-26
[12] 뉴스 A survivor's life in music https://www.washingt[...] 2017-09-28
[13] 웹사이트 Jewish harpsichordist and survivor of Auschwitz and Bergen Belsen dies aged 90 https://www.thejc.co[...] 2017-10-01
[14] 웹사이트 Zuzana Růžičková remembered https://www.gramopho[...] 2017-09-29
[15] 뉴스 Zuzana Ružičková survived disease, concentration camps, Communism, and antisemitism https://www.thejc.co[...] 2017-09-27
[16] 웹사이트 ZUZANA RUZICKOVA – Bach Edition http://jsebestyen.or[...] 2017-09-27
[17] 웹사이트 Zuzana Ruzickova: Harpsichordist and Holocaust survivor dies at 90 https://www.bbc.co.u[...] BBC 2017-09-29
[18] 뉴스 Harpsichordist Zuzana Ruzickova, who survived three Nazi camps, dies at 90 https://www.theguard[...] 2017-09-28
[19] 뉴스 Zuzana Ruzickova https://www.thetimes[...] 2017-11-01
[20] 뉴스 Zuzana Ruzickova: Harpsichord virtuoso renowned for her love of Bach https://www.independ[...] 2017-11-01
[21] 웹사이트 Zuzana Růžičková, Doyenne of the Harpsichord – And Mrs Viktor Kalabis https://toccataclass[...] Toccata Press 2017-11-01
[22] 웹사이트 About The Terezin Initiative http://www.holocaust[...]
[23] 웹사이트 Alfred (Fredy) Hirsch – Holocaust http://www.holocaust[...] 2017-09-27
[24] 웹사이트 ZUZANA RUZICKOVA – Harpsichordist http://www.jsebestye[...] 2017-09-27
[25] 웹사이트 Jan Rychlík (1916–1964) – Hommagi clavicembalistici – Muziekweb https://www.muziekwe[...]
[26] 문서 Pamela Nash, "Celebrating the 85th Birthday of Zuzana Ruzickova", Sounding Board, June 2013.
[27] 웹사이트 Johann Sebastian Bach: The Complete Keyboard Works http://www.warnercla[...] 2017-09-27
[28] 웹사이트 ZUZANA: MUSIC IS LIFE https://aspenfilm.or[...] Aspen Film 2017-09-27
[29] 웹사이트 About http://www.zuzanathe[...] 2017-09-27
[30] Youtube Obituary https://www.bbc.com/[...]
[31] 웹사이트 One Hundred Miracles https://www.bloomsbu[...]
[32] 뉴스 Zuzana Růžičková první nositelkou Granátové hvězdy http://www.casopisha[...] 2017-01-12
[33] 문서 RVC株式会社、1982年LP「バッハ チェロ・ソナタ集」ピエール・フルニエ、ズザナ・ルージチコヴァー ライナーノーツ
[34] 뉴스 チェコのチェンバロ奏者、ズザナ・ルージチコヴァー氏死去 https://web.archive.[...] 時事通信 201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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