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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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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진암은 고조선 시대부터 제정일치 관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추정되며, 1779년 전후 폐찰된 후 이벽을 중심으로 한 젊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강학회가 열린 곳이다. 천진암은 유교, 불교, 천주교 사상이 합류한 곳이자 한국 천주교 발상지로 평가받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들의 활동을 기리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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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지도
기본 정보
천진암 전경
천진암 전경
위치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21-23
종파천주교
역사
창립1779년
창립자권철신, 정약전, 정약종, 이벽
중요 사건조선 천주교회 창립지
건축
건축 양식한옥
건물성모 경당, 강학당, 기념관, 십자고상, 12사도상, 성 정하상 기념 경당 등
기타 정보
문화재 지정경기도 기념물 제140호
관련 웹사이트천진암 성지 공식 웹사이트

2. 역사

천진암(天眞菴)고조선 시대부터 단군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작은 당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토속신앙의 현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779년을 전후하여 폐사지 상태였으며, 정약용은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했다. 1797년 홍경모는 천진암이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1779년 경, 이벽, 정약용 등 젊은 실학자들은 폐허가 된 천진암에서 모여 천주교를 연구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1836년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이벽1783년 북경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1784년 2월에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조선 순교자 시복식 강론에서 이벽이승훈의 활동을 언급하며 조선 천주교회가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졌음을 강조했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이 전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일임을 강조했다. 특히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평신도들이 진리 탐구를 위해 북경 천주교회와 접촉하고,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신앙을 키워나갔다고 설명했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에 친필 서명과 함께 교황 강복문을 작성하여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사목 시책을 밝혔다.

2. 1. 천진암의 유래와 초기 형태

고조선 시대부터 제정일치 관습에 따라 단군 영정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또는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선사시대 석조 흔적으로 추정되는 현상도 발견되어, 삼국시대 이전부터 토속신앙의 현장이었을 가능성도 제시된다.

2. 2. 조선 후기 천진암

1779년을 전후하여 천진암은 폐사지 상태였다. 정약용은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요사채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라고 기록했다. 1797년 홍경모는 저서 《남한지》에서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하여,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았다. 1850년다블뤼 주교는 "이벽 성조께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수도와 강학을 하던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거처(폐가옥)이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천진암은 더 이상 사찰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2. 3. 천주교 강학회와 천진암

1779년 전후, 이벽, 정약용 등 젊은 실학자들은 천진암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 강학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정약용은 천진암이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다고 기록했고, 다블뤼 주교는 이곳이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였다고 하였다.

이벽은 25세, 정약용은 17세 등 주로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이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고 토론하였다. 이들은 유교 서당이나 일반 가정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폐허가 된 천진암에서 모여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였다. 정약용1779년 천진암 강학 때 이벽이 밤에 와서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했다고 기록했다.

정학술의 이벽전에는 1778년~1779년 이벽이 천진암에 은거하며 정씨, 이씨들과 학문에 열중했고,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공동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27년 정약용은 천진암에서 중용, 대학 등을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 마시는 훈련을 했고,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했다고 회고했다.

1836년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1838년 보고서에서 이벽1783년 북경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1784년 2월에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강학회는 정약용에 의해 총림, 소림, 강학 등으로 표현되었고, 다블뤼 주교는 강학회, 모방 신부는 개종자들의 단체라고 하였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평신도들이 진리 탐구를 위해 북경 천주교회와 접촉을 시도하고,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신앙을 키웠다고 강조했다.

2. 4. 초기 천주교 공동체와 천진암

1779년 이벽은 25세, 정약용은 17세, 정약종은 19세, 정약전은 21세, 이승훈은 22세, 이총억은 14세, 권철신은 44세였다. 이들은 주로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로, 당시 생소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일반 유교 서당, 사찰, 가정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웠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폐허가 된 천진암은 이들이 모여 방해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장소였다. 천진암은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곳으로, 유·불·천이 사람, 장소, 사상을 합류한 곳이자 조선천주교회가 태동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벽 성조는 천진암을 근거지로 활동하였으며, 이는 정약용의 글에도 나타난다. 정학술의 이벽전에는 "무술년(1778) 기해년(1779)에 이벽 광암 선생이 광주 원앙산사(천진암)에 은거하며 정씨, 이씨들과 어진 벗들과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그 당시 도우가 중도를 이루어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공동체가 되었다(其門下如叢林). 이벽은 저들에게 성교요지를 하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천진암을 본거지로 하는 젊은 선비들 중심의 [천학 총림]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1836년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聖 모방(Maubant) 신부는 1838년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벽은 천주교에 푹 빠져 몇몇 개종자들과 힘을 합쳐(de concert avec quelques proselites), 1783년 북경으로 '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공동체 대표로 파견하여(il envoya un autre delegue) 이듬해(1784년) 2월에 영세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승훈 성현을 파견하던 이벽 광암공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단체가 있던 본거지가 바로 천진암이며, 이 작은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출발이 된 총림이었다.

이 강학회는 정약용에 의해 [총림], [소림], [강학] 등으로 표현되었고, 영국의 Longford 교수는 1800년대 말 연구서에서 젊은 양반 선비들의 연구모임인 [동호인회]라고 하였다. Daveluy 주교는 [강학회], 김대건 신학생은 [철학자들의 모임], 성 피에르 모방(聖 Pierre Maubant) 신부는 새로운 [개종자들의 단체]라고 표현하였다.

3. 천주교 발상지로서의 의미와 평가

천진암은 고조선 시대부터 제정일치의 관습에 따라 단군 영정 천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선사시대 석조 흔적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토속신앙의 현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779년경 폐사찰이 된 천진암에서 이벽, 정약용 등 젊은 지식인들은 천주교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된 천진암을 근거지로 삼았다.

정약용은 천진암을 '강학(講學)', '총림(叢林)' 등으로 표현하며, 이곳에서 젊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기록했다. 1836년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는 이벽 중심의 천진암 공동체가 1783년 북경에 대표자를 파견, 1784년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돌아오게 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 초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천진암은 조선 후기 천주교가 한국 천주교로 발상하는 과정에서,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 공동체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데 기여한 장소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3. 1. 교황들의 언급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79위 조선순교자 시복식 강론 첫머리에서 이벽의 업적과 이승훈의 활동을 언급하며, 조선천주교회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성직자 없이 조선 평신도들이 세웠음을 격찬하였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도 한국순교자 24위 시복식 강론 첫머리에서 같은 내용으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을 말하며, 전 세계 교회사에 없는 기묘한 위업을 밝히며 한국교회를 높이 평가하였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시성을 계기로 하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인 강론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신비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자발적인 교회 창립 활동을 강론 첫머리에서 강조하였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에 친히 작성하고 서명한 교황 강복문에서 좀 더 명확히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한반도 평화통일 사목 시책을 밝혔다.


3. 2. 역사적, 사회적 의의

천진암은 단순한 종교적 장소를 넘어, 조선 후기 사회 변혁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779년을 전후하여 폐사찰이 된 천진암에서 이벽, 정약용을 비롯한 젊은 지식인들은 당시 생소했던 천주교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된 천진암을 근거지로 삼았다.

정약용은 천진암을 '강학(講學)', '총림(叢林)' 등으로 표현하며, 이곳에서 젊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대학, 중용, 주역 등의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토론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

1836년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는 이벽을 중심으로 한 천진암 공동체가 1783년 북경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1784년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돌아오게 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천진암은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 공동체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의의는 여러 교황들의 강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조선 순교자 시복식 강론에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천진암을 중심으로 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 형성을 강조했다. 특히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에 친필 서명한 교황 강복문에서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며 한반도 평화 통일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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