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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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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윤온은 고려 공양왕 1년(1390년)에 태어나 조선 초 문신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세종 때 함흥부 소윤, 승정원 우승지 등을 역임했다. 세종 사후 문종, 단종 대에 전농시 판전농시사를 지냈으나, 계유정난으로 인해 해남으로 낙향했다. 호남에 성리학을 처음 전파했다는 설이 있으며, 김종서와 친분이 있었으나, 그의 권력 남용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윤온의 생애와 관련된 기록은 부실하게 남아 있으며, 가문은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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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윤온
원어명崔閏溫
출생일1390년
출생지고려 경상도 창원
거주지조선 한성부
조선 전라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사망일?
별명자는 여온(汝溫),호는 근재(謹齋).
직업문신, 정치가
국적조선
배우자죽산 박씨 부인
자녀슬하 3남(그 중 장남 최교)
부모최운해(부), 안동 권씨 부인(모)
친인척박원형(처남)
정당무소속
관직 정보
직책조선국 형조좌랑(朝鮮國 刑曹佐郞)
임기1421년 3월 1일 ~ 1425년 11월 30일
군주조선 세종대왕 이도
섭정상왕 이방원(前)
영의정 유정현(前)
학력
경력

2. 생애

최윤온은 문종 때 판전농시사를 지냈으며,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친구인 김종서 부자와 훈구대신들이 대거 살해되자, 서울을 떠나 문경을 거쳐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 낙향하였다.[4]

세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권하였으나, 단종의 죽음 이후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고 전해진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고려 공양왕 1년(1390년)에 참판승추부사 양장공 최운해의 셋째 아들로 창원 사로곡에서 태어났다. 큰형 최윤덕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대마도를 정벌하고 여진족의 이만주를 정벌하여 4군을 설치하였다. 어릴 때 학문은 조선 초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외종조 권근에게서 배웠다. 연흥부원군 죽산 박고의 딸과 혼인하였다.

조선 태종 때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419년(세종 1년) 친구 김종서 등과 함께 행대감찰이 되어 전라도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과 관리들의 근무 태만을 감찰하였다.

1421년(세종 3년) 형조좌랑,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431년(세종 13년) 함흥부 소윤[1]으로 재임하면서 임금을 뵙고 굶주린 백성의 구휼을 당부받았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인 승정원의 우승지에 올랐다. 1440년(세종 22년) 어머니 안동 권씨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442년(세종 24년) 복직하여 성천도호부사[2]로 재임하면서 임금을 뵙고 민생에 힘쓸 것을 당부받았다.

1445년(세종 27년) 큰형 최윤덕이 사망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행호군[3]으로 성천도호부사 재임 경험을 바탕으로 성천부 산성 축성에 대해 임금께 아뢰었다.

이후 충청도 병마절제사(병마절도사로 개칭)를 역임하였다.

2. 2. 세종 대 활동

1419년(세종 1년) 친구인 김종서 등과 행대감찰이 되어 전라도를 맡아 기민구제 사업과 관리들의 근무 태만을 감찰하였다.[1]

1421년(세종 3년)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431년(세종 13년) 함흥부 소윤으로 재임하면서 임금을 사조하여 기민의 구휼을 당부받았다.[1]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인 승정원의 우승지에 올랐다. 1440년(세종 22년) 어머니 안동 권씨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442년(세종 24년) 복직하여 성천도호부사로 재임하면서 임금을 사조하여 민생에 힘쓸 것을 당부받았다.[2]

1445년(세종 27년) 장형인 최윤덕이 사망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행호군(行護軍)으로 성천도호부사에 재임한 경험으로 성천부의 산성 축성에 대해 임금께 아뢰었다.[3]

이후 충청도 병마절제사(병마절도사로 개칭)를 역임하였다.

2. 3. 계유정난과 낙향

고려 공양왕 1년(1390년)에 태어나 조선 태종대에 벼슬길에 올랐다. 세종대에 사헌부, 형조 등에서 관직을 역임했고, 승정원 우승지에 이르렀다. 1440년(세종 22년) 어머니 안동 권씨가 사망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1442년(세종 24년) 성천도호부사[2]로 복직했다. 1445년(세종 27년)에는 큰형인 최윤덕이 사망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행호군(行護軍)[3]으로 성천부의 산성 축성에 대해 건의하였다. 이후 충청도 병마절제사를 역임하였다.

문종 대에는 판전농시사에 재임하였다. 단종 즉위 후 계유정난으로 친구인 김종서 부자와 훈구대신들이 대거 살해되자, 서울을 떠나 문경을 거쳐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 낙향하였다.[4]

3. 기록 부실과 김종서와의 관계

세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육신 사건과 연루된 통천 최씨 가문의 기록이 삭제되거나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 세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록을 수정했을 가능성과 유사하다.[5] 최윤온은 김종서와 절친한 사이였으나, 김종서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염증을 느껴 해남으로 낙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김종서의 후손과는 혼인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고도 한다.[9]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최윤온을 포함한 통천 최씨 가문 전체가 계유정난단종 복위 운동 등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해남으로 낙향한 것으로 추정된다.[10]

3. 1. 기록의 부실함

세종을 거쳐 문종과 단종이 모두 짧은 재위기간을 이어갔고, 《세종실록》의 양이 방대하여 1452년(문종 2년) 60여 명이 6방으로 각 방마다 6~7년의 기사를 분담하고 편찬이 시작되어 1454년(단종 2년) 이르러 필사본 실록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편수했던 인물들 중 황보인과 감종서는 1453년 계유정난에 피살되었고, 필사본 최종 감수는 정인지가 했다. 이후 편수관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이로 인해 단종 복위에 가담한 인물들이 맡았던 실록 부분에 다시 첨삭이 가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사육신 사건의 이개와 연루되면서 사실상 역적의 가문이 된 통천 최씨들의 많은 기록이 삭제되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5]

선조실록》이 있었음에도 인조반정 이후 《선조수정실록》을 다시 편찬하여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전혀 상반되게 해석하는 등 반정 세력이 정당성을 확보한 경우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김종서와 그의 아들들이 살해되고, 다음날 수양대군 세력이 김종서와 같이 함부로 권력을 휘둘렀다고 지목하여 작성한 〈살생부〉에 올라있던 대신들은 아침에 조정으로 등청하다 입구에서 살해되었고, 당시 외부에 있었던 대신들도 불러들이거나 잡아들여 죽였다. 이 시기에 최윤온은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거나 다행이 이 살생부에 오르지는 않았던 듯 하다(최윤온은 당시 수양대군의 세력의 눈에는 세종대에 부왕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던 훈구대신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세종대 사헌부감찰, 전라도 행대감찰, 형조좌랑, 함흥소윤, 사헌부집의, 우승지, 성천도호부사, 충청도 병마절도사, 문종조에는 판전농시사로 제임하는 등 중요직을 두루 거쳤고, 조정의 권력자였던 좌의정 김종서의 친구였다.).

그럼에도 실록에서 공의 기록은 부실하고 해남으로 낙남한 이유는 통천 최씨 가문 전체가 계유정란과 단종애사에 연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 첫째 형님인 정렬공 최윤덕의 네 조카와 손자들이 대부분 단종애사에서 멸문에 가까운 정도의 참화를 입었고, 둘째 형님인 최윤복의 손자인 최로가 계유정란에 교수형에 처해지는 등 통천 최씨 가문 전체가 참화를 입었다.

계유정난이 발생하자 해남으로 피신하였으며, 말년에 스스로 기록을 남지지 않았다고 한다.[6][7]

당시 세조의 등극과정에서 참변을 당한 친족들을 보면 장형 정렬공 최윤덕의 아들 4형제 모두가 이 혼란에서 연루되어 묘가 실전되었다. 이들 4형제 중 족보상으로 2명은 대가 끊겼고, 정렬공의 손자들도 현재는 5명 만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손자들중 그나마 2명만이 묘가 확인되고 있다.

계유정난에는 둘째 형님 최윤복의 자손인 최로(단종충신단에 누이와 함께 배향)가 연루되어 교수형을 당하였고, 금성대군 사건으로 정렬공 최윤덕의 4남인 최영손(단종충신단 배향)이 단지 무용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충군되었다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육신 사건에서 이개와 연루되어 최윤덕의 장자인 최숙손과 장손인 최맹한, 3남 최광손의 아들 최계한이 유리안치 되었고, 숙손은 국문의 후유증으로 얼마 후 사망하였다.

동생인 최윤례는 진사였다는 기록 이외에 벼슬을 했다거나 누구와 혼인을 했다는 어떤 기록조차 없다.

3. 2. 김종서와의 관계

최윤온은 김종서와 절친한 친구였으나, 김종서가 황보인 등과 함께 조정에서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는 것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해남으로 은거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김종서의 후손과는 혼인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고도 한다.[9]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최윤온을 포함한 통천 최씨 가문 전체가 계유정난단종 복위 운동 등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해남으로 낙향한 것이 실제 이유로 추정되기 때문이다.[10]

당시 계유정난 이후 해남으로 은거한 성씨는 원주 이씨, 순천 김씨, 통천 최씨 등이 있는데, 모두 계유정난에 연루된 인물들과 관련이 있다.[10] 최윤온은 김종서의 절친한 친구였고, 함께 낙향한 순천 김씨는 김종서의 본관이다. 계유정난으로 이미 역적의 가문이 된 순천 김씨와 사육신 사건으로 역적의 가문이 된 통천 최씨 두 집안 모두 흠 잡히지 않도록 혼사에 신중하라는 유훈을 남긴 것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최윤온의 형인 최윤덕의 업적이 축소되고 벼슬만 나열되어 김종서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8]

4. 가계

관계이름비고
6대조최탁호부상서, 상장군 (인종)
조부최록대의공신 (고려)
부친최운해충근좌명공신 (고려), 개국원종공신 (조선)
모친안동 권씨
본인최윤온
배우자죽산 박씨처남: 박원형 (세조조 영의정)
형제최윤덕, 최윤복, 최윤례
자녀최교, 최영, 최언
현손최산정


참조

[1] 문서 소윤은 조선시대에 상서사·종부시·한성부·개성부 등에 둔 정4품 벼슬. 상서사·종부시는 첨정으로 고쳤다.조선 초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는 그 전략상 중요성 때문에 높은 품계의 관리가 낮은 품계의 관직을 제수받는 경우가 많았다.
[2] 문서 성천도호부는 평안도 성천진관의 으뜸 관아로 5개의 군과 5개의 현을 거느렸다. 도호부사는 종 3품으로 병마첨절제사의 지휘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평안도, 함경도 지방의 독진과 그 진관은 전략상 중요성 때문에 절도사 다음의 품계로 지방수령이 겸임하지 않는 전문적인 무관이 맡는 직책이었다.
[3] 문서 벼슬에서 행자는 높은 품계에 있으면서 낮은 품계의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 벼슬 앞에 행자를 붙였다. 예) 정1품이면서 정2품의 이조판서에 제수되면 ‘행이조판서’라고 했다.
[4] 웹사이트 땅끝해남소식 http://news.haenam.i[...] 2006-04-06
[5] 서적 조선왕조실록》문종, 단종실록
[6] 뉴스 해남신문 http://www.hnews.co.[...]
[7] 서적 《통천최씨추원록》 1994
[8] 사료 단종실록 1453년(단종1년) 9월 24일 3번째 기사
[9] 서적 《통천최씨추원록》 1994
[10] 뉴스 해남신문 http://hnews.co.k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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