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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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록은 고려 공민왕 때 활약한 무관으로, 통천 최씨이며, 초명은 치연이다. 그는 1354년 원나라에 파병되어 장사성 토벌에 기여하여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최록은 최운해의 아버지이자 최윤덕의 할아버지이며, 최종 벼슬은 중서성문하평장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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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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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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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325년 |
국적 | 고려 |
거주지 | 창원 |
직업 | 군인 |
배우자 | 평창 이씨 |
자녀 | 최운해 |
2. 생애
최록은 통천(通川)을 본관으로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치연(致淵)이다. 고려 시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좌우위 중랑장을 거쳐 충숙왕 때는 호군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때 장군을 호군으로 고쳐 불렀는데, 통천 최씨 족보에는 상호군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후대의 벼슬인 상호군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1]
1354년(공민왕 2년) 원나라가 중국 산동 지역의 장사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유탁, 염제신, 최영 등과 함께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1355년(공민왕 3년) 원나라에서 귀국한 후, 고우 전투에서 장사성을 토벌한 공으로 공민왕에게 “국가의 공록이 헛되지 않았다.”라는 칭찬과 함께 '''록(祿)'''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고려가 여러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통천 최씨 족보에는 상호군, 태원병마절도사, 중서성문하평장사를 역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외의 기록에서도 대장군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1]
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해 왔을 때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1] 1359년 1차 홍건적 침입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으로 대의공신의 호를 받았다.[1] 1361년 2차 홍건적 침입 시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참전 중에 부상으로 사망하였다.[1]
통천 최씨 구 족보에는 81세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왕에게 이름까지 하사받은 군인의 행적이 이후 기록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족보의 기록과는 다르게 홍건적의 2차 침입 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아들 최운해가 음서로 등용된 시기가 홍건적이 침입한 지 5년 만인데, 아버지인 “최록”의 전공을 기려 등용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기리다.”는 용어가 사망자에게 쓰이는 용어이다. 게다가 아들의 배위인 창원 이씨가 1382년 산병으로 사망할 때 군무 때문에 아들인 최윤덕을 돌보지 못하고 천민 양수척에게 의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 족보 기록에 따른다면, 당연히 조부인 최록이 등장했을 텐데 이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1]
사후에 통천 벽계의 창열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1]
2. 1. 출생과 가계
통천(通川) 최록은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치연(致淵)이다. 아들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왜적 토벌에 명성을 떨친 명장 최운해이고, 손자로는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4군을 개척한 후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이 있다.[1]최록은 고려 시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좌우위 중랑장을 거쳐 충숙왕 때 호군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때 장군을 호군으로 고쳐 불렀는데, 통천 최씨 족보에는 상호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후대의 벼슬인 상호군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1]
2. 2. 초기 관직 생활
통천(通川)를 본관으로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에 태어났다. 초명은 치연(致淵)이다. 고려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좌우위 중랑장을 거쳐 충숙왕 때는 호군이었다. 공민왕 때 장군을 호군으로 고쳐 불렀는데, 통천 최씨 족보에는 상호군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후대의 벼슬인 상호군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1]1354년(공민왕 2년) 원나라가 중국 산동 지역의 장사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조정군(助征軍)을 요청해오자 유탁, 염제신, 최영 등과 병력 2천 명으로 원나라에 출병하였다. 1355년(공민왕 3년) 원나라에서 돌아온 후 고우의 전투에서 장사성을 토벌한 전공으로 공민왕에게 “국가의 공록이 헛되지 않았다.”하여 '''록(祿)'''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1] 이후 고려가 여러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통천 최씨 족보에는 상호군, 태원병마절도사, 중서성문하평장사를 역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외의 기록에서도 대장군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1]
2. 3. 원나라 파병과 장사성 토벌
1354년 (공민왕 2년) 원나라가 중국 산동 지역의 장사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유탁, 염제신, 최영 등과 함께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1355년(공민왕 3년) 원나라에서 귀국한 후, 고우 전투에서 장사성을 토벌한 공으로 공민왕에게 “국가의 공록이 헛되지 않았다.”라는 칭찬과 함께 '''록(祿)'''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2. 4. 홍건적 격퇴와 최후
1354년(공민왕 2년) 원나라가 중국 산동 지역의 장사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조정군(助征軍)을 요청해 오자 유탁, 염제신, 최영 등과 병력 2천 명으로 원나라에 출병하였다. 1355년(공민왕 3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고우의 전투에서 장사성을 토벌한 전공으로 공민왕에게 “국가의 공록이 헛되지 않았다.”하여 '''록(祿)'''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1] 이후 고려가 여러 번의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통천 최씨 족보에는 벼슬은 상호군, 태원병마절도사, 중서성문하평장사를 역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 그 이외의 기록에서도 대장군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1]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해 왔을 때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1] 1359년 1차 홍건적 침입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으로 대의공신의 호를 받았다.[1] 이어 1361년 2차 홍건적 침입 시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참전 중에 부상으로 사망하였다.[1]
한편 통천최씨 구 족보에는 81세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1] 그러나 고려 후기의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에서 왕에게 이름까지 하사받은 군인의 행적이 이후의 기록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족보의 기록과는 다르게 홍건적의 2차 침입 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 《고려사》에 아들 최운해가 음서로 등용된 시기가 홍건적이 침입한 지 5년 만인데, 아버지인 “최록”의 전공을 기려 등용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기리다.”는 용어가 사망자에게 쓰이는 용어인데다,[1] 아들의 배위인 창원 이씨가 1382년 산병으로 사망할 때 군무 때문에 아들인 최윤덕을 돌보지 못하고 천민 양수척에 의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1] 구 족보기록에 따른다면, 당연히 조부인 최록이 등장했을 텐데 이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1]
2. 5. 사후
1359년 1차 홍건적의 침입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으로 대의공신의 호를 받았다. 1361년 2차 홍건적 침입시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참전 중에 부상으로 사망하였다.[1]통천 최씨 구 족보에는 81세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왕에게 이름까지 하사받은 군인의 행적이 이후 기록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족보의 기록과는 다르게 홍건적의 2차 침입 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아들 최운해가 음서로 등용된 시기가 홍건적이 침입한 지 5년 만인데, 아버지인 “최록”의 전공을 기려 등용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기리다.”는 용어가 사망자에게 쓰이는 용어이다. 게다가 아들의 배위인 창원 이씨가 1382년 산병으로 사망할 때 군무 때문에 아들인 최윤덕을 돌보지 못하고 천민 양수척에 의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 족보기록에 따른다면, 당연히 조부인 최록이 등장했을 텐데 이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1]
사후에 통천 벽계의 창열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1]
3. 최종 벼슬에 대한 기록
최록의 벼슬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 기록들은 최종 직급보다는 주요 사건 당시의 벼슬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최종 벼슬과 품계를 단정하기 어렵다. 또한, 잦은 직제 개편도 정확한 기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러 기록과 정황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최록은 고우 전투 참전 후 대장군에 올랐고, 홍건적의 1차 침입 격퇴 후 태원병마절도사로 승진, 2차 침입 때 상호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사후 중서문하평장사로 추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1.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기록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최운해 열전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 최운해 장군 졸기에는 공민왕이 아들 최운해를 아버지인 호군 최록의 전공을 기억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1][2] 호군은 고려시대의 장군을 조선시대에 고쳐 부른 것으로 정4품 벼슬이다.3. 2. 《대동운부군옥》, 조식의 비문 기록
권문해가 지은 백과사전 형식의 《대동운부군옥》에는 통천 최씨를 “고려 말 대장군을 지낸 최록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3] 조식이 쓴 통천 최씨 외조모 비문에도 정렬공 최윤덕의 상대를 최록으로 기록하고, 벼슬을 대장군으로 기록하고 있다.[4] 고려시대의 대장군은 조선 시대 대호군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으며, 종3품으로 야전사령관 최고 직책인 정3품 상장군 다음이다.3. 3. 통천 최씨 족보 기록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최운해 열전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에 있는 최운해 장군의 졸기에는 공민왕이 아들 최운해를 아버지인 호군 최록의 전공을 기억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1][2] 호군은 고려시대의 장군을 조선시대에 고쳐 부른 것으로 정4품 벼슬이다.임진왜란 이전 이황의 문인인 권문해가 지은 백과사전 형식의 대동운부군옥에는 통천 최씨를 “고려 말 대장군을 지낸 최록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3] 또한 조금 앞선 시기에 생존했던 조식이 쓴 통천 최씨 외조모 비문에도, 정렬공 최윤덕의 상대를 최록으로 벼슬을 대장군으로 기록하고 있다.[4] 고려시대의 대장군은 조선시대 대호군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으며, 종3품으로 야전사령관 최고 직책인 정3품 상장군 다음이다.
통천 최씨 족보에는 충숙왕 때 상호군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민왕이 아들인 최운해를 등용한 기록에서 장사성 출병 당시에 호군이었다. 후대에 기록하면서 이후 벼슬인 상호군을 오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상장군 역시 조선시대에는 상호군으로 고쳐 불렀다.
3. 4. 최종 벼슬 유추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최운해 열전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 최운해 장군 졸기에는 공민왕이 아들 최운해를 아버지인 호군 최록의 전공을 기억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1][2] 호군은 고려 시대의 장군을 조선 시대에 고쳐 부른 것으로 정4품 벼슬이다.임진왜란 이전 이황의 문인인 권문해가 지은 백과사전 형식의 대동운부군옥에는 통천 최씨를 “고려 말 대장군을 지낸 최록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3] 또한 조금 앞선 시기에 생존했던 조식이 쓴 통천 최씨 외조모 비문에도, 정렬공 최윤덕의 상대를 최록으로 벼슬을 대장군으로 기록하고 있다.[4] 고려 시대의 대장군은 조선 시대 대호군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으며, 종3품으로 야전사령관 최고 직책인 정3품 상장군 다음이다.
통천 최씨 족보에는 충숙왕 때 상호군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민왕이 아들인 최운해를 등용한 기록에서 장사성 출병 당시에 호군이었다. 후대에 기록하면서 이후 벼슬인 상호군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시대의 상장군 역시 조선 시대에는 상호군으로 고쳐 불렀다.
기록들을 바탕으로 최종 벼슬을 유추해 본다면, 고우의 전투에 참가한 후 전공으로 대장군의 위치에 올랐고, 이후 홍건적의 1차 침입에서 외적을 격퇴하여 벼슬이 태원병마절도사로 진급하였고, 2차 침입 시 상호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하면서 이후 전공을 기려 벼슬이 추증되어 중서성문하평장사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4. 가계
참조
[1]
서적
고려사
1451
[2]
서적
태종실록
1404-07-09
[3]
서적
대동운부군옥
민속원
2007
[4]
서적
남명집
한길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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